유지원

 



'''후한 초대 황제'''
'''高祖 | 고조'''
[image]
'''묘호'''
'''고조(高祖)'''
'''시호'''
예문성무소숙효황제(睿文聖武昭肅孝皇帝)
'''연호'''
천복(天福, 947년 2월 ~ 947년 12월)
건우(乾祐, 948년)
''''''
유(劉)
''''''
지원(知遠) → 고(暠)
'''부황'''
현조(顯祖)
'''모후'''
장의황후(章懿皇后) 안씨(安氏)
'''생몰 기간'''
895년 3월 4일 ~ 948년 3월 10일 (53세)
'''재위 기간'''
947년 3월 10일 ~ 948년 3월 10일 (1년)
1. 개요
2. 생애
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오대십국시대 후한(後漢)의 건국자. 묘호는 고조.

2. 생애


후진(後晉)의 창건자인 석경당(石敬瑭:고조)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우고, 금군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하동 절도사를 겸했다. 거란이 후진을 침공하자 사령관으로서 출병을 거부하였고, 석경당의 조카 출제(석중귀)가 거란에게 연행되자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름을 고(暠)로 바꾼 후 나라 이름은 한(漢)으로 정했는데, 그 이유가 동한의 시조 광무제의 8남 유병의 후손임을 자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족인 광무제와 달리 이 자는 석경당처럼 투르크계 이민족이었다. 결론은 사기.
어쨌든 여기까진 좋았다. 여기까진.
제위에 오른 뒤 '''10개월''' 만에 죽고, 그 후 '''3년'''(총 4년) 만에 후한은 멸망해 중국(어쩌면 세계) 최고의 조루 왕조로 기록되었다. 안습.[1] 그의 아들 은제 유승우는 명장 곽위를 의심하여 일족을 학살하고 곽위까지 없애려다가 역관광당해서 죽고, 곽위는 후주를 세운다. 이후 유지원의 동생인 유숭북한(北漢)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되지만 불과 3대 만에 북송의 태종 조광의에게 멸망하게 된다.
유지원을 소재로 한 희곡 《백토기(白兎記)》[2]가 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의 맏딸 영녕공주(永寧公主) 유씨는 송태조 조광윤의 장모였다.[3]

3. 둘러보기





'''후한의 역대 황제'''
후진#s-2 2대 출제 석중귀

'''초대 고조 유지원'''

2대 은황제 유승우

[1] 물론 정통 왕조로 인정된 왕조들 중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냥 듣보잡 비정통 정권으로 이보다 짧은 정권은 수도 없이 많다.[2] 정식으로는 《유지원 백토기(劉智遠白兎記)》라고 한다. 작자 미상. 5대 후한(後漢)의 고조(高祖) 유지원은 본래 유랑하던 고아였다. 그가 아직 미천했을 때 지주의 딸 이삼랑(李三娘)과 결혼했으나, 큰 뜻을 품고 태원(太原)으로 떠났으며, 뒤에 남겨진 이삼랑은 맏동서의 학대를 견디면서 아들 교제(咬臍)를 낳는다. 그러나 교제도 안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웃 사람의 도움으로 지원에게 보내어 거기에서 성장한다.[3] 태조 조광윤의 3번째 황후였던 효장황후 송씨가 영녕공주 유씨의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