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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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대십국시대 후한(後漢)의 건국자. 묘호는 고조.
2. 생애
후진(後晉)의 창건자인 석경당(石敬瑭:고조)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우고, 금군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하동 절도사를 겸했다. 거란이 후진을 침공하자 사령관으로서 출병을 거부하였고, 석경당의 조카 출제(석중귀)가 거란에게 연행되자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름을 고(暠)로 바꾼 후 나라 이름은 한(漢)으로 정했는데, 그 이유가 동한의 시조 광무제의 8남 유병의 후손임을 자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족인 광무제와 달리 이 자는 석경당처럼 투르크계 이민족이었다. 결론은 사기.
어쨌든 여기까진 좋았다. 여기까진.
제위에 오른 뒤 '''10개월''' 만에 죽고, 그 후 '''3년'''(총 4년) 만에 후한은 멸망해 중국(어쩌면 세계) 최고의 조루 왕조로 기록되었다. 안습.[1] 그의 아들 은제 유승우는 명장 곽위를 의심하여 일족을 학살하고 곽위까지 없애려다가 역관광당해서 죽고, 곽위는 후주를 세운다. 이후 유지원의 동생인 유숭이 북한(北漢)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되지만 불과 3대 만에 북송의 태종 조광의에게 멸망하게 된다.
유지원을 소재로 한 희곡 《백토기(白兎記)》[2] 가 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의 맏딸 영녕공주(永寧公主) 유씨는 송태조 조광윤의 장모였다.[3]
3. 둘러보기
[1] 물론 정통 왕조로 인정된 왕조들 중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냥 듣보잡 비정통 정권으로 이보다 짧은 정권은 수도 없이 많다.[2] 정식으로는 《유지원 백토기(劉智遠白兎記)》라고 한다. 작자 미상. 5대 후한(後漢)의 고조(高祖) 유지원은 본래 유랑하던 고아였다. 그가 아직 미천했을 때 지주의 딸 이삼랑(李三娘)과 결혼했으나, 큰 뜻을 품고 태원(太原)으로 떠났으며, 뒤에 남겨진 이삼랑은 맏동서의 학대를 견디면서 아들 교제(咬臍)를 낳는다. 그러나 교제도 안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웃 사람의 도움으로 지원에게 보내어 거기에서 성장한다.[3] 태조 조광윤의 3번째 황후였던 효장황후 송씨가 영녕공주 유씨의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