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존욱

 



'''후당 초대 황제'''
'''莊宗 | 장종'''
[image]
'''묘호'''
'''장종(莊宗)'''
'''시호'''
광성신민효황제(光聖神閔孝皇帝)
''''''
이(李)
''''''
존욱(存勖)
'''연호'''
동광(同光, 923년 4월 ~ 926년 4월)
'''부황'''
태조(太祖)
'''모후'''
정간황후(貞簡皇后)
'''생몰 기간'''
885년 12월 2일 ~ 926년 5월 15일 (41세)
'''재위 기간'''
923년 5월 13일 ~ 926년 5월 15일 (3년)
1. 개요
2. 생애
2.1. 아버지의 원수
2.2. 후계자의 등극
2.2.1. 이극녕의 반란을 진압하고 권위를 세우다
2.3. 말 위에서 얻은 천하
2.3.1. 협채의 전투, 노주 구원전
2.3.2. 백향 전투의 대승
2.3.3. 연나라를 평정하다(911년 - 914년)
2.3.4. 거란야율아보기를 물리치다
2.3.5. 위박 번진을 멸망시키다
2.3.6. 왕언장과의 대결과 후량을 멸하고 후당의 건국
2.4. 천하는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없다
2.4.1. 연극배우 코스프레
2.4.2. 악질 탐관오리, 공겸[1]
2.4.3. 막장 부인 유 황후 및 비참한 최후
3. 평가
4.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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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대십국시대 후당(後唐)의 건국자이자, 첫 번째 황제. 묘호는 장종(莊宗)이며[2] 시호는 광성신민효황제(光聖神閔孝皇帝)이다.
돌궐족의 분파인 사타족 출신으로, 후량을 멸망시키고 천하의 반을 평정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즉위 후에 실책을 반복하며 끝내 신임을 잃었고 결국 근위병들이 일으킨 반란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 생애



2.1. 아버지의 원수


이극용(李克用)은 주전충(朱全忠)과의 대립에서 패배해 실의에 빠져서 908년 사망하는데, 죽기 전에 화살 세 개를 가져오더니 아들 이존욱을 불러서 그 손에 화살을 하나 쥐어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유인공(劉仁恭) 부자의 몫이다. 이들은 나를 배신했다."

그리고 다시 다른 화살을 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몫이다. 그는 나와의 맹약을 무시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화살을 넘겨주면서 이극용은 말하였다.

"주량(주전충)은 나에게는 원수와도 같은 존재이다. 내가 너에게 주는 3개의 화살 중 첫 번째는 유인공에게, 두 번째는 거란에게, 세 번째는 주전충을 멸망시킬 때 각각 사용하거라.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소원이다."


2.2. 후계자의 등극


908년, 이극용이 죽었을 때 이극용의 나이는 53세였고, 이존욱은 24세였다. 애시당초 이극용의 세력이 만들어진 것은 이극용 본인의 카리스마와 능력 덕분이었던 만큼, 이극용의 사망은 큰 위기임과 동시에 후계자가 되는 이존욱에게는 몹시 부담이었다. 거기다 후량의 대군은 여전히 노주를 포위하고 있었다. 당시 군부 내에서는 이존욱의 나이가 어린 탓에 모략을 꾸미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 가장 위협이 가는 것은 이극녕(李克寧)이었다. 이극녕은 이극용의 동생으로 오랜 시간 형과 함께 싸우며 병권을 손에 쥐고 있었고, 본래 이민족의 풍습으로는 동생이 형의 자리를 대신하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이에 이존욱은 두려워하며 이극녕에게 자리를 넘겨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극녕은 거절하며 말했다.

"너는 총사(冢嗣)다. 거기다 돌아가신 왕이자 형님의 명령을 누가 감히 어기겠느냐?"

그 후 이존욱은 슬퍼하며 곡을 하기만 하면서 나오려고 하지를 않았다. 이에 장승업이 이존욱을 부축하면서 억지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최대의 효도는 기업을 실추시키지 않는 것인데, 더 울어 무엇한단 말입니까?"

그리하여 이존욱은 지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이존욱의 지위는 하동 절도사 겸 진왕(晋王)이었다.

2.2.1. 이극녕의 반란을 진압하고 권위를 세우다


908년, 이극용은 본래 능력있고 뜻있는 사람들을 마치 자기 친아들처럼 대하였는데, 이 양아들들은 이존욱의 나이가 어려 업신여겼고, 불만을 품었으며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고 심지어 만나고도 절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목한 사람은 이극용의 동생 이극녕이었다. 특히 양자 중에 한 명인 이존호(李存顥)는 계속해서 이극녕을 부채질했다.

"본래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는 것은 옛날부터 있던 법입니다. 숙부가 되어 조카에게 절을 한다니요, 어찌 그런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하늘이 주는데도 가지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되돌리지 못합니다."

이극녕은 반발하면서 목을 베겠다고 위협까지 했지만 이존호의 부채질은 멈추지 않았다. 이존호는 방법을 바꿔 자신과 같은 양자들의 처를 이극녕의 부인 맹씨에게 보내 그녀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맹씨는 본래 사나운 여인이었는데 욕심도 나고, 또 이런 모의를 했다는게 알려지면 화를 당할까 두려워 이극녕을 들들 볶아대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이극녕은 본래 장승업이존장(李存璋) 등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둘은 모두 이존욱의 측근이었는데, 이존호는 진왕 이존욱이 궁을 비운 틈을 타 장승업과 이존장을 죽이고 이극녕을 절도사로 삼으려고 했다.[3]
헌데 태원 사람 사경용이 우연히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경용은 본래 이극용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몸이라 이 모든 사실을 이존욱과 이극용의 부인 태부인에게 알려주었다. 그 둘은 깜짝 놀라 장승업을 소환해서 말했다.

"돌아가신 왕(이극용)께서는 이 아이의 일을 공들에게 맡겼습니다. 만약 밖에서 이간질하는 말을 듣고 우리 모자를 저버리려고 하신다면, 다만 우리가 살 땅만을 남겨주시고 대량으로 보내지만 마십시오. 다른 것으로 공에게 누를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승업은 깜짝 놀라 영문을 물었다. 이존욱은 사정을 알려주며 친족끼리 싸우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이 물러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장승업이 분기탱천해서 말했다.

"이극녕이 대왕의 모자를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집어넣으려는데, 그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이존장 등을 불러모아 이극녕을 잡아넣을 계략을 꾸몄다. 장승업은 모든 장수들을 불러 모아 성대한 연회를 펼치다가, 때가 되자 갑자기 매복시킨 병사들을 보내 이극녕과 이존호를 붙잡았다. 이존욱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일전에 모든 권한을 숙부에게 넘기려 하였을때 숙부는 거절하셨습니다. 헌데 어찌 저와 어머니를 원수로 남기려고 하셨나이까?"

이극녕은 할 말이 없어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이 모두가 참소하는 사람들과 꾸민 일이니, 내가 무슨 말을 다시 하겠는가?"

이극녕과 이존호는 이날에 처형되었고, 이는 이존욱이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2.3. 말 위에서 얻은 천하



2.3.1. 협채의 전투, 노주 구원전


908년, 후량의 군대는 협채라는 요새를 짓고, 노주를 계속 공격하고 있었다. 노주를 지키고 있던 장군은 이사소였는데 그는 근성있게 버티고 있었지만 양식이 떨어지고 있었고, 병사들은 불안해했다. 이에 이사소는 허장성세를 보이기위해 성벽 위에서 장수들과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다 적군에게 화살을 맞았는데,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기 위해서 조용히 처리하여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주전충은 계속해서 이사소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했지만 그때마다 이사소는 전령을 베는 것으로 화답했을 뿐이었다.
이때쯤 이극용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은 주전충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때 이존욱은 부하들을 소집해서 말했다.

"지금 노주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하동 울타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주전충은 우리 아버지가 죽었다고 안심하고 있잖는가? 지금 공격하면 우리가 무조건 이긴다."

이 계획에 장승업 등도 동의를 하였다. 이존욱은 야율아보기와 이무정(李茂貞) 등에게 호응하라고 권하였고, 본인 스스로는 주덕위(周德威) 등을 대장으로 삼아 정예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군대가 출발한 것이 908년의 4월 24일이었는데, 5월의 초하루에 이존욱은 협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는 아직 아침이었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존욱의 대군이 벼락같이 공격하자 자고 있던 후량의 병사들은 놀라 당황하기 일쑤였다.
이존욱은 명장 주덕위를 서쪽으로 보내고, 이극용의 양자이자 이존욱에겐 형이 되는 이사원(李嗣源)을 동쪽으로 보내 각각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크게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적을 공격하였는데, 무려 1만이나 되는 적이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해보고 죽어버렸다. 협채를 무너뜨린 장군 주덕위는 곧바로 힘겹게 버티고 있는 노주로 달려가 이사소에게 소리쳤다.

"선왕은 돌아가셨고 지금의 왕께서 협채를 무너뜨렸소. 그대는 속히 문을 여시오!"

이사소는 애시당초 이극용이 죽었다는것도 믿지 않았기에 이 말을 듣지 않고 버텨댔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대가 싸우다 포로가 되어, 이제 나를 기만하고자 함이 아닌가?"

그리고 주덕위에게 화살을 쏘려고 하다가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자 그만두었다. 이사소는 일이 이렇게 되자 반신반의하며 주덕위에게 요구했다.

"왕께서 오셨다면, 지금 뵐 수도 있겠지?"

주덕위는 이존욱을 데려왔다. 이존욱은 그때 흰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극용을 애도한다는 뜻이었다. 이사소는 그 모습을 보고 미친듯이 울면서 기절하려고 했고, 다른 사람들도 통곡하면서 문을 열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주전충은 몹시 놀라고 두려워서 탄식하였다.

"이극용은 죽었으나 이아자(이존욱의 아명) 같은 아들이 있으니 죽었다고 할 수가 없구나.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이아자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개, 돼지와 같을 뿐이니..."


2.3.2. 백향 전투의 대승


911년, 협채의 대승 이후로 진군은 파죽지세로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이제 하북성의 백향현을 공격하게 되었는데,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이존욱은 여유 만만했다.

"저놈들 시끄럽기만 한데 우리 군사들은 딱 군율이 있으니까 무조건 이김."

그리고 상황을 보다가, 후량군이 '''배고파서 밥먹으러''' 돌아가려고 할 때 주덕위 등이 "저들이 달아난다!"고 외치자 전군을 동원해 공격하자 적은 그야말로 대패하여 참수된 병사만 2만이 넘었다. 이제는 확실히 대세가 바뀌게 된 것이다.

2.3.3. 연나라를 평정하다(911년 - 914년)


일전에 이극용은 유언으로 하북의 유인공 부자를 처리해줄 것을 원했다. 유인공의 아들 유수광(劉守光)은 아버지를 가두고 스스로 절도사가 되어 형을 잡아다 죽였으며, 온갖 해악과 악행을 멈추지를 않았다. 이런 인물들이 항상 그렇듯 욕심은 터무니없이 컸다.
911년 8월 13일, 유수광은 국호를 대연이라고 칭했다. 또한 연호를 응천이라고 바꾸었고, 수하들을 어사대부니, 좌상이니 하고 삼으니 연의 사람들은 놀라워하고 "이게 뭔일이여" 하는 식으로 당황하였다.
이존욱은 이 말을 듣고 그렇게 웃긴 일이 없다는듯 한참을 크게 웃더니 말했다.

"저들이 햇수로 점치는 것을 기다렸다가, 내 마땅히 그 점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볼 것이다."

주나라 무왕상나라를 정복하고 나라의 운명이 몇년이나 갈지를 점친 것을 빗댄 말로, 과연 얼마나 저 황제 노릇이 갈지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이존욱의 수하 장승업도 한술 더떠 아예 사신을 파견해 치하하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적을 교만케 하자는 것이었다. 이존욱은 이를 받아들였다.
황제가 된 유수광은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용성을 공격했다. 의무 절도사인 왕처직은 이존욱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존욱은 수하의 명장 주덕위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왕처직을 도와주게 했다. 주덕위는 왕처직을 구원함은 물론, 연나라 땅인 탁주를 포위하여 항복시키는 공을 세웠다.
그러자 겁을 먹은 유수광은 영토 내의 모든 장정들을 소집해 얼굴에 글자를 새겨 병사로 삼는가 하면, 후량에도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주전충은 스스로 50만의 대군이라 일컬으며 이존욱을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때 후량은 국지전에서 계속해서 패배하고 있었고, 주전충은 극도로 민감해져 사람을 마구 죽여 부하들은 공포에 떨었다. 주전충은 6군을 통솔하며 이존욱을 물리치려고 했는데, 밤중에 땔나무를 하던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돌아와서 소리쳤다.

"진왕이 온다! 대규모로 도착하였다."

그 말을 들은 주전충은 모골이 송연해져 군영을 불태우고 밤중에 도망가다 길까지 잃게 되었고, 도중에 '''밭갈이하던 농부들이 괭이와 몽둥이를 들고 쫒아오자''' 도망가는 통에 군수 물자와 병기를 전부 잃어버리기까지 하였다. 뒤늦게 알고보니 이존욱의 부대는 본대가 아닌 선봉대에 불과했는데 그걸 보고 겁에 질려 도망쳤던 것이고, 이 사실을 깨달은 주전충은 너무나 부끄러워 건강이 악화되고 말았다.
한편 그때 이존욱은 다른 방면으로는 주덕위와 이사원을 파견해 유수광을 지근지근 밞아주고 있었다. 믿고 있던 후량이 개털리자 유수광은 발악으로 거란을 끌어들이려 한연휘를 파견하지만, 야율아보기는 한연휘를 오히려 자기 부하로 만들어버렸다.(...)
유수광은 이제 모든 희망을 잃고 사신을 주덕위에게 파견하여 화친을 구걸했는데, 사신의 목소리가 매우 애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덕위는 냉랭하게 말하였다.

"대연 황제(유수광)은 어찌 암컷같이 납작 엎드리는가? 나는 명령을 받아서 죄인을 토벌하려 왔을 뿐이고 동맹을 맺는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다."

유수광은 정말 공포에 질려 몇 번이나 사신을 파견해 애원하였고 주덕위는 못이기는 척 이존욱에게 이 말을 전하였다. 이존욱은 그 말을 듣고 스스로 유주로 떠났고, 홀로 성 아래에 도착해 여유있게 유수광에게 말했다.

"나는 본래 공과 더불어 당조를 부활시키고자 하였으나, 공은 저 주전충이 한 짓을 따라하였소(황제를 참칭한 것.). 장부의 성패란 본래 모름지기 향하는 대로 될 뿐이니 공은 어찌하겠소이까?"

"나는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일 뿐이오. 오직 왕께서 판단해주시구려."

그러더니 유수광은 도망가버렸고, 이존욱은 유주에 입성하여 갇혀있었던 유인공을 잡았다.
유수광은 멀리 도망치다가 발에 동상이 걸리고 길을 잃어 자신의 부인에게 밥을 구걸하게 하다가 잡혀서 이존욱의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이존욱은 연회를 즐기고 있던 중에 유수광을 보자 비웃었다.

"어찌 주인께서 손님을 피하여 먼 곳에 갔던 것이오?"

그 후 애원하는 유수광을 단칼에 처형해 버렸다.

2.3.4. 거란야율아보기를 물리치다


922년, 이존욱이 한참동안 세력을 키우고 후량을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던 시기에, 야율아보기는 대군을 이끌고 유주, 탁주(탁현), 정주를 공격했다. 야율아보기의 부인이었던 술률황후는 이에 반대하였다

"우리에겐 양과 말이 풍부한데 어찌 병사들을 피곤하게 하십니까. 또한 듣기로 진왕 이존욱은 군사를 부리는데 가히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만일 패배가 있다면 후회한들 어찌되겠습니까?"

하지만 야율아보기는 이 말을 듣지않고 출병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이존욱의 장수들과 병사들은 안색이 변하였고 도망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모든 장수들이 도망치길 청할 때 이사소가 나서서 말하였다.

"강한 적이 앞에 있으니 우리는 전진은 할 수 있으되 후퇴는 할 수 없고, 또한 가볍게 움직여 민심을 동요시키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존욱도 용기를 얻고 용감히 싸워 승리하였고, 마침 시간이 지나자 폭설이 내려 말들이 죽자 야율아보기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탄식하였다.

"하늘이 아직 나로 하여금 여기에 이르게 하진 못하는구나!"

하지만 이존욱도 야율아보기에 대해 감탄하게 되는데, 그들이 떠난 자리를 가자 볏짚을 깔고 앉은 모양이 반듯하고 하나의 어긋남이나 어지러움도 없어서 못내 탄식하였다.

"오랑캐가 법을 적용함이 마침내 이와 같은데, 중국에서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이리하여 야율아보기의 계획도 좌절시키면서 어느 정도는 두 번째 원한까지 갚을 수 있었다.

2.3.5. 위박 번진을 멸망시키다


위박 번진은 하북 3진의 하나로써 당나라 조정에서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던 강력한 번진 세력이었다. 당나라 말기에 삽시간에 최강으로 떠오른 주전충이 건재할 시기에는 위박 번진도 돌아가는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있었지만, 주전충 사후가 되자 위박 번진 역시 다시금 강력해지기 시작했으며 자립하여 후량에 대항해 후당에 구원을 요청했다.
후량 내부에서 알아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자 이존욱은 당연히 기뻐했다. 그는 즉시 위박 번진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장군 이존심에게 군단을 이끌어 진군하게 했는데, 이 움직임에 후량 장수 유심은 놀라 황급히 병력을 주둔시키기 시작했다. 유심의 움직임을 본 이존욱은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현장에 나서야 일일 쉽게 해결 될 것이라고 여겨 현장으로 나갔다.
이리하여 위반 번진의 곤수 장언은 5백여 명의 은창효절군(銀槍效節軍)과 함께 이존욱을 만나러 나갔다. 과거 양사후가 위박 번진을 장악하면서 여타 강력한 친위 부대 장수들을 죽였고, 이후 스스로 은창효절군이라는 또다른 친위 부대를 만들었다. 이 은창효절군은 용사 수천 명을 선발해 조직한 정예병이었다. 그런 호랑이 같은 용사들이 5백이나 함께 하니, 이존욱을 만나는 장언은 나름대로는 꽤 조심을 했던 것이다.
이존욱과 은창효절군의 용사들을 거느린 장언은 영제(永濟)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장언을 본 이존욱은 무슨 말이 나오기도 전에,

"너는 주군을 능멸하고 위협했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잔혹했다. 내가 이곳에 온 며칠 사이에 너를 원망하는 사람을 100명을 보았다. 나는 백성을 위할 뿐임으로, 네가 공로가 있다하나 지금 너를 죽여야겠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장언의 목숨을 빼앗았다.
장언은 무슨 항변을 하거나, 혹은 도주하며 은창효절군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항전하게 해보거나 하지도 못했다. 그냥 이존욱을 보자마자 꾸지람을 한번 듣더니 그대로 살해당했다. 장언 뿐만 아니라 같이 온 여타 지휘관들 7명도 뭐라고 해보기도 전에 문자 그대로 끔살당했고, 은창효절군의 용사들은 아무리 용맹하다고 해도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눈 하나 깜빡도 하지 않고 위박 번진의 주요 인물을 처리한 이존욱은 그런 5백여 명의 은창효절군에게 말하였다.

"죄는 이 8명에서 그쳤으니 나는 이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죄를 묻지 않겠다. 나머지에게는 물을 것이 없다. 모두 힘을 다하여 내 수호자가 되어라."

그리하여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나타난 이존욱은 어디 산책이라도 가는양 가벼운 복장을 입고 느긋하게 그들 앞에 서 있었을 뿐이다.
이 시점에서 은창효절군의 5백 명 병사들은 모두 무장을 한 상태였다. 딱히 대규모 병력을 옆에 거느리고 있지도 않고 무장을 하지도 않은 이존욱을 죽이는 것은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 쉬운 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존욱은 그런 점을 전혀 생각지도 않고 은창효절군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였고, 이때에 이르러서야 은창효절군은 이존욱이 자신들을 죽이려는게 아니며 오히려 마음을 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관대함과 배포에 크게 감동하여 이존욱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존욱은 지난 100여 년이 넘게 당나라의 중심부에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당대에 이르러서도 후량의 황제들을 벌벌 떨게 했던 위박 번진을 단신으로 하루 만에 평정해버렸다.
이후 이 은창효절군은 진왕 이존욱의 친위 부대에 편입되어 장전은창군(帳前銀槍軍)이 되었고, 이후 후량과의 전투에서 여러차례 눈부신 무훈을 세우게 된다. 특히 치열했던 918년 12월, 호류의 전투에서 이들이 보여준 무공은 상당한 것이었다.

2.3.6. 왕언장과의 대결과 후량을 멸하고 후당의 건국


왕언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철창의 명수로서 무용으로 따지면 당대에 누구도 비할 바 없었으며,[4] 주전충이 아직 주온이었던 시절부터 용맹하게 싸워 보필해온 충신이었다. 이존욱은 후량에게 번번히 승리하여 모두들 두려워하였는데 왕언장만은 이존욱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이존욱이 왕언장의 부인과 자녀를 생포한 후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왕언장은 두번 듣지도 않고 그 소식을 전하러 온 사신의 목을 베어버렸으며, 이 소식을 들은 이존욱은 왕언장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때 이존욱은 계속된 승리로 자신감에 차있어, 자신의 이씨(李氏) 성은 할아버지가 공을 세워 국성을 받은 것이니 당나라의 이씨를 계승한다고 말하고는 당나라를 다시 세웠다. 이것이 바로 후당(後唐)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후량의 주우정은 당황하여 왕언장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말했고 왕언장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수천명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왕언장이 죽을 힘을 다해 승리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켜보려고 하였으나, 후량은 이미 망하게 될 나라라 도리가 없었다. 간신배들이 중상모략을 하며 왕언장을 모함했고, 왕언장은 조암과 장한걸이라는 소인들이 나라를 망치는 것을 알고 그들을 향해 불평하게 되었다. 이 소리를 들은 조암과 장한걸은 왕언장을 미워하며 단응이라는 무장과 함께 왕언장을 해치려 하였다. 단응은 왕언장을 매우 시기하고 있었기에 이에 동조하여 당시의 황제인 주우정에게 모함을 하였고, 왕언장은 죄도 없이 파면되었다.
바로 그해 10월, 후량은 형세가 몹시 위급해져 왕언장을 다시 등용해 단응과 함께 10만 군사를 이끌게 하였지만 주력은 단응이 이끌었다. 적은 병력으로 뭘 해볼 수도 없어 왕언장은 이존욱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이존욱은 왕언장을 놀려댔다.

"그대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여긴다고 하는데 어찌 나에게 사로잡혔는가? 그대는 아직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가?"

"대세가 이미 기울어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으니 나로서도 할 말이 없다네."

이존욱은 왕언장을 흠모하므로 치료해주고 자신에게 귀순할 것을 권고했지만 왕언장은 듣지 않았다. 대신에 희대의 명대사를 남겼다.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법이지! 나는 나라에 큰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아침에 양나라의 장수가 되었다가 저녁에 당나라의 장수가 되겠는가!"

왕언장이 결코 귀순하지 않을 것을 깨달은 이존욱은 어쩔 수 없이 왕언장을 처형하였다. 한편, 주력을 이끌던 단응은 5만의 군사와 함께 귀순했고, 후당은 개봉을 함락하고 후량을 멸망시켰다.
이존욱은 그 후에 곽숭도를 파견하여 전촉을 멸망시켰다.

2.4. 천하는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없다


이렇게 빛나는 무훈을 세운 이존욱이었지만 내치에는 완전 꽝을 넘어서 막장가도를 달리며 답이 없는 행보를 이어나갔다.
우선 자신의 모사이자 내정에 일가견이 있던 장승업이 화병으로 죽어버린 게 치명타였다. 본래 장승업은 이존욱이 황제가 되는 것에 반대하였지만, 이존욱이 듣지 않자 마음이 답답해져 앓아 눕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존욱 본인이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되었다. 본래부터 이존욱은 음률과 가무에 능한 풍류남아였다. 평소에 이존욱은 노래를 좋아해 100곡을 만들었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할 일을 안 하는 건 아니었으나 대업을 완수하고 장승업이 죽고 나서는 자제력을 잃고 나태해지며 끝내 막장 일로를 걷게 된다.

2.4.1. 연극배우 코스프레


이존욱은 연극을 무척 좋아했는데, 스스로 "이천하"(李天下)라는 예명을 만들고 배우 노릇을 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이때 같이 공연했던 영인들은 이존욱의 환심을 사 이간질을 함으로써 후당의 정사를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개념이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경신마라는 사람이 그러했다. 이존욱이 춤을 추면서 연극 준비를 하다가 "이천하, 이천하!" 하고 자신의 예명을 사방에 소리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경신마는 곧바로 달려가 이존욱의 뺨을 후려쳐버렸다.
황제가 뺨을 얻어맞은, 고금 역사에 없을 일이 벌어지자 주변에선 모두 놀라 식은땀만 흘렸다. 이존욱도 하도 어이가 없어 물었다.

"어찌하여 천자의 뺨을 친단 말이냐?"

그러자 경신마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理天下)''''은 하나뿐인데 어찌 이천하를 찾는단 말이냐?"

가만히 생각해보던 이존욱은 오히려 껄껄 웃더니 경신마를 칭찬하였다. 어느 날 사냥을 떠났을 때, 이존욱과 수하들이 멧돼지를 잡으러 논밭을 짓밟자 마을의 현령이 이것을 제지하였다.
한참 노는데 기분이 언짢아진 이존욱은 현령을 해치려고 했지만 눈치를 본 경신마는 곧바로 튀어나오더니 현령의 뺨을 때리면서 엄숙하고도 웃기게 소리쳤다.

"이놈아! 현령이란 놈이 천자가 사냥을 좋아한다는 것도 모른다는 말이냐? 어찌 알면서 백성들에게 경작을 시켜 천자의 사냥을 방해되게 하였느나. 안다면 어째서 밭을 그냥 뒤집어서 천자의 말이 통쾌하게 달리도록 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곡식을 거두는 일 따위가 천자의 흥보다 중요하단 것이냐?"

이존욱은 이 말을 듣고서야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생각이 제대로 돌아 현령을 풀어주었다.
다만 면전에서 이런 일갈을 당했음에도 이존욱은 자신만의 풍류를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유흥으로 정사를 다스리지 않은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환관과 연극 배우를 총애해 환관을 부하 장수들과 관리들을 감시하는 감찰로 쓰게 한 것이 신하들의 엄청난 불만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2.4.2. 악질 탐관오리, 공겸[5]


덤으로 공겸이라는 자를 등용하여 세금을 거두게 한 건데 이 인간이 저지른 세금 착취는 악랄함을 넘어서 그야말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땅을 걸어가도 세금을 내게 했으며 다리를 지나가도, 심지어 배를 타고 가는 것도 세금을 따로 내게 했다. 이런 세금 착취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작서모세'(雀鼠耗稅). 직역하면 '참새와 쥐 때문에 소모되는 세금'이란 뜻이다. 당시 세금은 당연히 쌀과 같은 곡식으로 냈는데, 이 곡식을 운송하고 창고에 보관하다 보면 자연히 새나 쥐가 곡식을 훔쳐먹게 되므로 그 소모분을 미리 걷는다는 발상이었다.[6]
보다못한 대신들이 이러다간 백성들이 들고 일어선다고 간언했음에도 이존욱은 무시하며 '뭐 잘하고 있네?'라고 여겼다.
결국 이존욱이 죽으면서 공겸은 명종 이사원의 명령으로 능지 처참형을 당했는데 백성들이 찢겨나간 공겸의 살점에 오줌을 누기도 하고 씹어 내뱉어 발로 짓뭉길 정도로 엄청난 원망을 받았다. 오죽하면 야사에서 공겸을 죽이니 3년은 풍년이 올 정도로 하늘도 좋아했다고 전했을 정도.

2.4.3. 막장 부인 유 황후 및 비참한 최후


더욱 이존욱을 막장화시켰던 건 유 황후였다. 그녀 역시 막장으로 살다간 인물로 일생 동안 정말 염치라고는 1도 없는 철면피였다. 어릴 때 전란으로 원건풍이라는 자에게 유괴되어 욕을 당하며 고생하다가 미색만으로 황궁에 입궐했다. 처음에는 후비였지만 결국 이존욱의 다른 후비들을 제치고 황후가 되었다. 이존욱은 유 황후의 출신이 천하다는 소문을 듣고 끊임없이 놀려댔으며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 유 황후의 아버지라고 자칭하는 유산인(劉山人)[7]이라는 노인을 데리고 오게 했다. 원건풍은 이때 왔는데 원건풍은 분명 이 노인이 유 황후의 아버지가 맞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유 황후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봐 친아버지가 분명한 그 노인에게 '''"넌 누구야? 우리 아버지는 전란 때 돌아가셨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라는 희대의 패드립을 날리며 욕설을 마구 퍼붓고 곤장을 쳐서 내쫒게 했다. 유산인은 한숨을 쉬며 떠났으며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이존욱은 황후의 침소로 갈 때마다 일부러 낡은 옷을 입고 흉내내면서 그 패륜 행각을 대놓고 조롱하기도 했다.

'''"아비다. 아비가 딸을 보러왔다!"'''

그러나 아무리 당시 상황이 난세라 해도 패륜아를 용납할 리는 만무했으니 유 황후는 천하의 개쌍년과 동시에 인간말종으로 낙인찍혔고 이는 남편 이존욱의 이미지까지 덩달아 실추시켰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수명마저 줄어드는 계기 중 하나가 작용하게 된다.
사실 악녀 유 황후는 이런 막되먹은 인성뿐만 아니라 뇌물과 축재를 통해 많은 재산을 불리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간신 장전인을 양아버지로 삼는 등 패악질로 널리 알려져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후당에서 인플레가 일어나 월급을 못 받은 군인들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유 황후는 '''"나한테는 화장대 하나, 은대야 세 개밖에 없다."'''라며 마지 못해 그것들을 위문품이라고 수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에게 나눠주게 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장난치냐고 하면서 더 빡쳐서 거세게 반발했고 그들의 기세에 겁을 먹은 유황후는 그제서야 많은 재물을 풀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우리 처자는 이미 굶어 죽었는데 이게 뭐가 소용 있는가?"'''이라며 분노했고 그들은 장종의 양자 이사원을 옹립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한때 주군이었던 이존욱에게로 칼끝을 돌렸다. 이존욱은 이 쿠데타를 스스로 막아내던 도중 날아온 유시(流矢)에 맞아 중상을 입은 채로 궁궐로 후퇴했다.
이렇게 치명상을 입은 이존욱은 우유가 먹고 싶다고 유 황후를 찾았으나, 그녀는 그를 환관에게 맡기고 자신은 재물을 바리바리 싸서 어딘가로 먹튀한 뒤였다. 이존욱은 결국 우유를 먹지 못하고 그렇게 앓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존욱이 총애하던 연극 배우 선우가 사타족의 전통방식대로 이존욱의 시체를 검, 갑옷, 악기 등과 함께 올려놓고 불을 질러 화장했다. 이존욱의 유해는 이사원이 즉위한 후 황제의 예로 옹릉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도망친 유 황후 역시 비참한 최후를 피하지 못했다. 유 황후는 어느 암자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 숨어 살면서 화를 면하려고 했으나, 그를 미워하던 백성들에 의해 발각되어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결국 유 황후는 평생동안 더럽게 모은 재물들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게 된 셈. 본인의 부정 축재와 남편을 버린 것도 문제였지만 아버지를 매질해 내쫓은 패륜아였기에 보호할 가치를 그 누구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능한 이존욱이 망한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난행 때문이지만 이런 여자를 황후로 삼은 탓도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존욱에게는 일곱 아들들이 있었으나, 아버지처럼 모두 요절하거나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다만 운좋게 자손들 중 몇몇은 살아남았는지 그의 자손이 송나라 때에 벼슬을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3. 평가


장종은 원대한 포부로 하분(河汾)에서 일어나, 힘껏 싸워 변락(汴洛)을 평정했으며, 집안의 원수가 이미 설욕되고, 국운이 중흥했으니, 아무리 소강하나라를 이어 천자가 되었거나 광무제가 나라를 얻어 다스려도,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천하를 얻는 데에는 엄청난 고생을 하고도, 그것을 얼마나 빨리 잃었는가? 어찌 거듭된 승리에 교만해지지 않고, 안온한 환경에서 즐기며, 목욕의 어려움을 잊고, 사냥과 여색에 탐닉하였음을 자랑하였는가. 밖으로는 악공과 광대가 정치를 어지럽혔고, 안으로는 암탉이 홰를 쳤다. 재물을 매우 아껴 군대의 분노와 원한을 샀으며, 재물을 징수하여 만민의 재물을 고갈시켰다. 대신들은 죄가 없는데도 붙잡혀 처벌되었고, 뭇사람은 울음을 삼키며 재앙을 피했다. 무릇 여기에 하나라도 있으면 망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모두 가지고 있었으니,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다리겠는가! 조용히 생각하면 족히 만대의 명백한 경계로 삼을 만하다.

구오대사의 저자 설거정

어린 시절부터 유능하다는 평가를 꾸준히 받아왔고, 실제로도 그 평에 걸맞은 모습을 계속 보여주었다. 이존욱이 18세에 부친 이극용 사후 산서성에 자리하고 있던 후당의 전신인 진나라[8]를 물려 받았을 때 남으로는 이미 옛 당나라의 4분의 1을 지니고 있어 천하의 패권을 쥐고 있는 후량, 북으로는 욱일승천하고 있던 거란, 동으로는 유연(劉燕)이랑 접경하여 3면에서 압박을 받는 위태로운 형세였다.
맞서 싸운 상대 중에 야율아보기는 거란 왕조를 개창한 꽤 걸출한 인물이었고, 주전충을 상대로는 거의 "호구 왔능가" 수준으로 안드로메다 관광을 보내버리까지 했다. 주전충이 황소의 난을 진압한 인물에다 이극용을 상대로는 그렇게 크게 밀리지 않았다는 부분을 생각하면 군사적인 능력은 실로 굉장한 편이었던 셈. 야율아보기의 부인의 평도 그렇고, 당대에는 "대적할 수 없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3면이 적들로 둘러싸인 위태로운 정세에서 이존욱은 유연을 멸하고 거란을 격퇴시켰으며 당나라가 거의 200년 가까이 처치곤란해 했던 하북 3진의 성덕(조나라), 위박(위나라) 번진까지 폐하는 한편 종국에는 후량마저 멸망시킴으로써 일개 지방 왕조를 중원의 패권을 쥔 오대의 정통 황조 중 하나로 승격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더 나아가 이무정기나라를 멸하고 고계흥의 형남국을 종속시켰으며 사천의 전촉을 멸함으로써 최악의 형세부터 시작하여 연전연승하여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는 위업을 달성하였으니 이 판도는 후주의 명군 세종이 통일 전쟁을 다시 시작하기 이전까지 오대 십국 중 최대의 판도였다. 이존욱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이 아니었다면 당말로부터 이어온 오대 십국 초반의 화북의 대할거는 좀 더 시간을 끌었을 것이고 거란이 그틈을 타 요태조요태종보다 20년 더 빨리 중원을 남침하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이존욱은 오대 십국 시대 초반부의 주인공이라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모습은 딱 거기까지.''' 전술한 것처럼 걸출한 군사적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정에서는 무능을 넘어선 막장 가도를 달리며 그 상태에 멈춰버렸고 통일 사업이나 백성들의 내정을 안정화시키는데는 철저히 실패하면서 이존욱 자신은 평생의 원수였던 주전충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고야 말았다. 잘 싸우는 군주와 잘 다스리는 군주는 다르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선례인 셈. 유능한 군사적 능력 및 식견과 간언을 받아들일 정도의 도량도 갖추고 있었으니 내치를 잘만 꾸려나갔더라면 평가가 더 높아졌을 것이고 더 잘 되었다면 오대 십국을 끝낸 통일 군주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러 모로 난세의 명군이자 치세의 암군이라 칭할 만한 황제다.
이존욱의 사후 사천에서 후촉이 독립해버렸으나 다행히 명종 이사원이 내정을 바로 잡은 덕분에 후당은 다시 중흥을 이룩하였지만, 석경당의 원맨쇼(?)로 이존욱이 힘겹게 쌓아올렸던 나라는 처절히 멸망당하고 후당은 결국 중국 역사에서 오대 십국의 단명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연운 16주를 통째로 거란에 할양하는 실로 나사빠진 짓을 하면서 후일 북방 민족이 중원을 짓밟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4. 둘러보기(계보)





'''후당의 역대 황제'''
후량 3대 말제 주우정

'''초대 장종 신민제 이존욱'''

2대 명종 흠황제 이사원
''' 당나라의 역대 진왕'''
이극용

'''이존욱'''

후당 건국
[1] 이전엔 세리라는 드립을 넣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세리는 국가에서 임명한 공무원이 아니지만 공겸은 일단은 이존욱이 임명한 관리이다. 때문에 세리보다는 탐관오리에 더 적합하다.[2] 보통 건국 군주에게는 묘호를 태조(太祖)로 붙이는 게 맞지만, 이존욱이 아버지 이극용의 묘호를 태조로 정했기 때문.[3] 심지어, 자치통감에 따르면 모든 영토를 통째로 후량에 넘기고 이존욱을 후량의 수도 대량으로 잡아가려고까지 했다고 한다.[4]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극용의 양아들인 이존효 역시 초패왕 항우 급으로 용맹하고 화려한 무패 기록으로 이름을 떨치긴 했는데 이극용에게 반기를 들었다 허무하게 처형당하는 바람에 왕언장과의 우열은 떡밥으로 남았다.[5] 이전엔 세리라는 드립을 넣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세리는 국가에서 임명한 공무원이 아니지만 공겸은 일단은 이존욱이 임명한 관리이다. 때문에 세리보다는 탐관오리에 더 적합하다.[6] 이 작서모는 후대에 조선에서도 써먹는데 아니나다를까 취지와 실상은 이 때와 같았다.[7] 이름이 아니고 '산에 사는 유씨 늙은이'라는 뜻이다.[8] 이진(李氏), 북진, 호진이라고 한다. 다만 북진, 호진은 후진이랑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