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사
修信使
1. 개요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사절단. 과거 조선이 일본에 문물을 전달해준 조선 통신사에 대비하여 일본의 문물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명칭이 수신사로 정해졌다.
2. 1차 수신사
1876년 2월 22일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하였고 그를 위시한 75명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김기수 일행은 4월 29일 부산을 출발해 5월 7일 도쿄에 도착하였고 20일간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의 각종 시설을 시찰하였다. 김기수는 기행문「일동기유」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의 서구화된 일본의 모습을 소개하고 일본과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3. 2차 수신사
1880년 3월에는 김홍집을 수신사로 임명하였고 김홍집 일행은 7월 6일 도쿄에 도착해 1개월간 머물다가 8월 28일에 귀국하였다. 김홍집은 일본의 시설을 시찰하고 황준헌(황쭌셴)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신문물 수입과 외교 정책을 건의하였고 이후 조선책략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과 위정척사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4. 3차 수신사
1881년 강화도 조약의 무관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병호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조병호는 일본으로 가는 도중 조사 시찰단 민종묵과 이헌영을 만나 관세에 관한 조선 측 안을 협의한 후, 11월 17일 일본 정부에 관세 자주권에 입각한 조선 측 해관세칙 초안을 제출하고 통상 장정 및 세칙 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병호에게 전권이 위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칙 협상을 보류시켜 조병호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1] #
5. 4차 수신사
1882년 8월 30일 조선은 임오군란에 대한 책임 문제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고 제물포 조약 5조에 의거해 박영효를 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임명해서 일본에 파견하였다.[2] 박영효 일행은 4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의 근대적 발전상을 확인하고, 서구 외교관과의 교섭을 통해서 국제 정세를 파악하였다. 한편 박영효는 일본으로 향하는 도중에 태극기를 제작하여[3] 공식석상에 내걸었고 오늘날 태극기의 원형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