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손통

 



叔孫通
생몰연대 미상.
1. 소개
2. 생애
3. 평가
4. 대중매체에서


1. 소개


전한박사이자, 유학자. 또 다른 이름으로는 숙손하(叔孫何)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진시황 때부터 문학에 뛰어났다 해서 조정에 불려가 박사 후보자가 되어 의 조정에 몸을 담았다.
진시황이 죽고 진승이 산동에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2세황제 호해는 박사들과 여러 유생들에게 의견을 물었다.[1] 박사들과 유생 30여 명이 일제히 '''진승 저 놈은 반란군이니 당장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숙손통이 황제의 얼굴을 보니, 그는 크게 노하여 얼굴빛이 변해 있었다. 숙손통은 곧 황제가 자신이 정치를 못해 반란이 일어났다고 해석해 유생들의 말에 못마땅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판단하고, 앞으로 나아가 공손하게 말했다.

저들의 말은 다 틀린 것입니다. 진승은 일개 좀도둑일 뿐이니 지방에 관리들이 알아서 처벌할 것입니다. 자애로우신 황제 폐하의 은총으로 모든 백성이 법을 지키고 직분에 충실한데 무슨 반란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호해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리고 숙손통에게 옷과 비단을 하사하고 박사의 벼슬에 임명하였다. 궁에서 나온 후, 다른 유생들이 숙손통에게 "어찌 그리 아첨을 잘 하느냐"고 묻자 "내가 그렇게 아첨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 호랑이 입에서 못 나왔을 것"이라며 빨리 달아날 준비나 하라고 대꾸한다. 호해가 '반역자'라고 대답한 사람들을 어사에게 넘겨 조사 후 처형해버렸기 때문이다.
변장을 하고 고향인 설(薛) 땅[2]으로 돌아왔는데 항량이 그 곳을 점령한 상태였으므로 항량에게 몸을 맡겼고, 그를 따라 회왕을 모셨다가 회왕이 의제로 추대되고 강남으로 옮겨가자 그냥 남아 항우를 섬겼다. 그러다가 또 항우의 세력이 약화되자 유방에게 항복하고 정착하게 된다.[3] 원래 숙손통은 유학자들이 입는 길고 치렁치렁한 도포를 입고 다녔는데 누군가가 '한왕(유방)은 유복(儒服)이라면 질색을 한다더라[4]'는 걸 주워듣고는 도포를 벗어버린 뒤 제자들까지 일부러 초나라 풍습의 짧은 옷을 입게 했다. 그 모습에 흐뭇해진 유방이 '어디에 쓸만한 사람 없느냐'고 묻자 학문이 뛰어난 자…는 놔두고 왕년에 떼도둑이었거나 깡패 출신이던 제자들만 소개하였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선생을 여러 해 동안 섬기고 한나라에도 같이 들어왔는데, 왜 우리는 놔두고 저런 시원찮은 놈들만 추천하느냐"는 불평을 하자 답변이라고 한 말이 일품이다.

지금 한왕은 화살과 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하를 다투고 있는데 '''니들이 활 쏘고 돌 던져가며 싸울래?''' 이 몸이 너희를 잊고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좀만 있어봐라. 곧 너네를 쓸 때가 올 거다.

잘 보면 본인도 유학자면서 '유학자는 전쟁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제 입으로 말하고 있다. 후대라면 '덕이 강한 사람이 전쟁에서도 이기고' 뭐 이런 소리라도 할 법한데 그런 소리 없다. 후대에도 안 나올 현실주의임은 물론이고, 공자맹자의 시대에도 함부로 못할 이야기다. 초한전쟁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숙손통이 얼마나 현실주의를 추구했는지 보여준다.
초한대전이 끝난 후 위의 대화처럼 알맞은 기회가 오자 숙손통은 한나라의 예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한다. 한고제 유방부터 한미한 출신에 추종자들의 상당수도 예의범절 같은 것과 거리가 멀고, 진나라의 복잡한 예식을 냅다 잘라내버리니 당시 한나라의 궁중 예절은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이었던 것. 자신들끼리 공적 다툼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몸싸움을 벌이고 심지어 칼을 뽑아 대궐의 기둥을 찍었다는 일도 있을 정도. 이는 아무리 편한 것을 좋아한다지만 유방도 굉장히 골치 아파 하는 상황이었다. 숙손통은 이렇게 골치 아파하던 유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궁중 예절을 간소하게 정리해보겠다고 조언했고 유방의 명을 받아 한나라의 예법을 새로이 만들었다.

'''선비(유자)들로는 천하를 얻을 수 없지만 천하를 다스릴 수는 있습니다'''. 오제는 각기 다른 음악을 즐겼고 삼왕의 예는 서로 달랐습니다. 예란 시대와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간략하게 하기도 하고 화려하게도 하니 고로 하은주 삼대(三代)의 예는 빼기고 하고 더하기도 해서 서로 중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고대의 예법과 진나라의 의례를 취해 한나라의 의례를 만들고자 합니다."

좋게 말하면 예법 따윈 시대에 따라 변하니까, 굳이 어렵게 하거나 옛날 흉내 내려고 할 것도 없이 대충 이 시대에 맞게 적당히 하면 되는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대충 가라로 모양새나 흉내내자는 것인데, 유학자가 대놓고 사이비 짓하자고 말한 것이다. 숙손통이 이렇게 예법을 정비한 동기는 유방이 초기에 엄격하지 못한 군신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정치적인 목적에서 '우리 유가를 어디 마음껏 이용해보시라'라고 권하면서 유학의 지위 상승을 노린 것이다.
이 예법에 따라 조회에서 모두가 황제를 공경하자 유방이 비로소 '''내가 이제야 황제 좋은 줄 알겠구나'''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 공로로 벼슬과 함께 500근의 황금을 받았는데, 함께 작업에 참여했던 제자들의 존재를 귀띔하여 그들에게도 낭관(郎官) 벼슬을 내리게 했다. 제자들에게 "여기 500근의 황금을 챙겨왔으니 나누어 가라. 그리고 너네 다 낭관에 임명되었다" 하자 모두 기뻐했다.
물론 유학자인 만큼, 난세의 혼란이 가라앉고 치세의 안정기에 접어들자 원리원칙을 지키는 강직한 면모도 많이 보였다. 유방이 말년에 여후의 아들인 혜제 대신 척희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자 진시황의 고사를 예로 들어 '''소신의 피를 궁궐 바닥에 흩뿌린 후에 태자를 바꾸십시오'''라는 강경 발언으로 장자 승계의 원칙을 고수했다.

3. 평가


숙손통은 유학자이면서도 극한의 현실주의적 처세가라 할 수 있다. '유가의 지위 상승을 위해 설사 학풍을 변질시켜서라도 적용한다' 는 '정치적인 목적' 에서의 현실영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당연히 유가들에게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당대에도 "옛 법을 어기려 들다니, 말도 안된다. 당신 마음대로 해라." 라며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훨씬 후대에 자치통감을 저술한 사마광도 "숙손통 같은 사이비가 이런 짓을 하는 바람에 예법에 큰 상처를 입혔다" 며 분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처세술과 유학, 예법을 제정한 능력에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감탄해 "숙손통은 시대의 요구에 맞춰 급한 일부터 순서대로 처리하고 예법을 정비했다. 그의 물러가고 나아감은 모두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따랐으며 마침내 한나라의 큰 유학자가 되었다.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며, 길은 원래 구불구불한 것'''(大直若詘 道固委蛇)[5]이라는 얘기는 숙손통의 경우에 딱 맞는다"는 평을 남겼다.

4. 대중매체에서


초한전기에도 나와 위에 나온 진나라 말기 반란군을 좀도둑이라고 말하는 일화가 나오고, 유생들이 이를 질책하자 "조고한테 죽고 싶냐?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이 재물들을 당신들이랑 나눠 가지려 했는데 안되겠다"고 말한 뒤 도망친다. 이후로 간간히 등장은 하나 큰 비중은 없고 가장 중요한 한나라의 예법을 만든 일마저 해하전투 후의 상황이 대폭 축소, 생략되었기에 안 나왔다.

[1] 분서갱유 이미지가 강한데 적어도 갱유는 전국의 유학자를 싸그리 잡아 죽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불온분자 색출이었지 유학을 완전소멸시키자는 것도 아니었고.[2] 영주가 맹상군이었던 그곳 맞다. 이곳은 맹상군 이후 별의별 사람들이 마구 모여들어 사마천이 그 땅의 풍속을 두고 '문란하다'라고 서술했을 정도의 동네였는데, 유학자이면서도 특이한 행보를 보인 숙손통의 면모는 고향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3] 이런 숙손통의 행적은 의리와 충성을 중요시 하던 유생과 협객들에게 엄청난 비난거리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바꿔가며 섬긴 군주가 10여 명이나 된다'''라고 당대에 공공연히 비난받을 정도.[4] 원래부터 날건달 출신이기도 했고, 군사를 일으켜 자수성가한 인물이라 그런지 육가와의 대화에서 '시서 그런거 쓸 데가 있긴 하냐?'라고 궁시렁거리기도 하는 등 유학의 실용성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학자의 갓을 벗겨 오줌을 누었다는 일화까지 있다. 다만 장량 등은 극진히 대우했고, 육가의 경우에도 '그것이 필요한 때가 지금'이라고 반박하자 민망해하면서도 인정하긴 하는 등 쓸모만 증명하면 태도를 바꾸기도 했다. 나중에 가면 "내가 책 보기 싫어하고 왜 이런 게 있는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 보니 책에 있는 말이 다 맞더라"고 할 정도로 유가에 대해 인정하기도 했다.[5] 대직약굴, 도고위이. 노자의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뱀 사(蛇)자는 '구불구불 갈 이'자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