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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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焚書坑儒[1]'''"옛것을 배워서 새것을 비방하는 자들은 '''모두 멸족 시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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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기록중
본래는 기원전 212년과 213년에 일어난 별개의 두 사건을 묶어놓은 것으로,'''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묻음' '''이라는 뜻이다. 실용서를 제외한 사상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탄압책.
진시황은 이전까지는 중국 대륙의 혼란을 종식시킨 유능한 군주였다가 이 사건 하나로 인해 폭군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후에 항우는 초한전쟁 중 주가 등의 유학자(儒學者)들에게 욕을 먹자 '''"시황제 그놈이 왜 그렇게 너희들을 탄압했는지 알겠다"'''며 이기기만 하면 이것을 벤치마킹하려는 기미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그럴 기회는 없었지만. 항우의 성격과 전적을 봤을 때(...) 만약 천하를 얻은 자가 유방이 아니라 항우였다면 진짜 실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2. 발생
진시황 시대 분서갱유, 즉 전국적인 사상 탄압의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사건은 기원전 213년 함양 연회에서 일어났다. 이때 전국에서 부로(父老) 7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벌이다가 참가자 중 한 명인 주청신이 황제의 공덕과 군현제의 실행을 찬양하자, 다른 참가자인 순우월이 옛 것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때 당시 자리에 있던 이사가 '옛 사상과 제도에 매달려 있다면 통치에 해로울 것', '의약 · 점술[2] · 농업 등의 책을 제외한 제자백가의 책들과 시(시경), 서(서경), 진을 제외한 국가들의 역사서를 불태울 것[3] '을 주장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것이 분서 사건이다.
1년 뒤 후생(侯生)과 노생(虜生) 등이 실패로 끝난 진시황의 불로초 탐색을 놓고 '불로초 따위에 정신이 팔리다니, 이건 책 다 불태워서 고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임'이라는 식으로 진시황을 비난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의 불온 사상가 460여 명이 함양에 매장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갱유로 불리게 된다. 갱유에 대해서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고 이설(異說)이 많아 후세 유학자가 꾸며낸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3. 원인
이 사건은 대개 봉건제적인 질서를 옹호하던 유가가 군현제를 철저히 시행하려 하던 법가 통치에 저항한 시도로 보인다. 봉건제는 책봉을 받아 특정 지역을 대대로 다스리는 대리인을 필요로 하여 지방의 자치적인 질서를 용인하는 반면, 군현제는 전국 통치를 황제가 임명하는 지방관을 통해 철저히 황제와 직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과거의 질서 체계를 옹호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로써 존중받으며 통치자에게 충고를 보태는 봉건제적 신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법가는 신료로 임명받는 인물은 철저히 법에 의거한 실무 수행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법을 거스르는 신료의 자율성과 세습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혈연 관계 혹은 혈연 관계로 의제되는 인물을 각 지방의 제후로 임명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종법제도적인 질서가 왕과 제후 사이의 혈연의 거리가 멀어진 서주 시대 후반부터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하극상이 벌어진 것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를 대체할 새로운 통치 구조가 바로 군현제로, 세습되지 않고 철저히 군주에 의해 임명되는 행정 관료인 태수와 현령을 제후 대신 배치하여 고인 물이 썩는 현상을 방지하고, 예를 통한 막연한 통제 대신 법을 통한 철저한 통제로 이들을 제어하자는 이론이었다.
진은 4세기 상앙의 변법 이래 법가의 군현제 질서에 완전히 익숙해진 국가였으나, 10여 년 만에 급속한 통일을 이루면서 영토가 몇 배나 커졌고 당연히 각지의 기득권 세력이 표면 상으로는 사라졌으나 언제 들고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전국을 36군으로 편성하여 군현제의 틀을 씌워는 놓았으나, 이전까지의 중국은 애초에 각지의 문화 자체가 철저히 달랐고 정치적인 의견도 완전히 달랐다.[4]
이로 인한 분열을 막기 위해 진시황은 문자 통일, 도량형의 통일, 도로 규격의 통일[5] 등을 추진하였다. 흔히 '통일 중국'의 첫 다리를 놓았다고 평가되는 이러한 업적들과 같은 맥락에서 분서갱유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통일 중국의 기초를 닦은 진시황'과 '사상을 탄압한 폭군 진시황'은 전혀 둘로 나누어볼 인물이 아니다.
역사 저술을 불태운 것 또한 진의 정통성을 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본래 역사서는 함부로 쓸 수 없는 책으로 철저히 관의 주도에 의해 쓰이는 책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으로 각국이 저술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국 각지의 역사서가 존재하는 상황은 '세계 유일의 황제'를 추구하던 진의 입장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결과 분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선진시대의 역사서가 춘추, 국어, 죽서기년 정도만 남은 것은 후세의 사가들에겐 탄식 거리지만.[6][7]
4. 분서갱유는 과장인가?
춘추전국시대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제자백가의 서책들과 대부분의 역사책이 불타버려서 현재 전해지는 것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며 분서갱유로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 아예 소실된 책들이 수두룩하다. 당시 사람들은 벽을 파고 책을 숨기는 등 법을 피해 책을 지키려 필사적이었다. 참고로 이 무렵에 사용된 책은 당연하겠지만 간독이었다.[8] 분서갱유는 유가에 한한 것이 아니라 역사나 문화 전방위적으로 행해졌다.
다만 일각에선 분서갱유 과장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의 분서갱유 항목 그러나 출처가 불명확하여 지지하는 학자가 많은지는 알 수 없다. 위키백과 영문판의 Reasons for skepticism 단락 각주에 따르면 Martin Kern, Michael Nylan 등의 학자가 주장한 관점이다.
서적 탄압을 피해 유생들이 서적을 숨기거나 아예 암송하는 식으로 대처했는데도 그전 기록이 아예 통째로 소실된 수준까지 간 건 진시황 만큼이나 항우의 탓도 컸던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지나가는 길에 고을이 있는 족족 학살로 쓸어버리는 것에 휘말려서 책 내용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대량으로 죽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
김태권도 한나라 이야기에서 과장되었다는 의견을 보이는데, 이 책자부터가 진시황이 폭군으로 오명을 썼다라고 주장하며 호해까지도 꽤 능력있는 군주라고 재평가하는 터라 이런 과오에 대해 부정하는 게 많다.
5. 결과
결과적으로 보면 유가를 일시나마 크게 위축시킨 사건이다. 그 증거로, 분서의 풍파 때문에 현전하는 중국의 고서 중에 기원전 3세기 이전의 것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진의 멸망과 전한의 건국을 거치면서 각지에서 고대의 경전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는데, 문제는 기억과 기록의 대립이었다.
기본적으로 간독은 필사본이고, 대부분은 외운 유학자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경전들이 복원되었다. 이 시대에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책 몇 권씩 외우던 것은 학자들이라면 다 달고 있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책 문서 참고. 심지어 고대 바드들은 문자 없이 '''자기 머리 속에 책 몇 권에 해당하는 지식을 욱여넣고''' 지식계층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460명의 학자들은 전 중국에 인구를 감안할 때 너무 적은 수였다. 전 중국의 식자층은 그 정도의 피해는 복원할 수 있었다.
결국 한나라 초기에는 시경, 서경, 예기, 춘추의 4경이 모조리 복원된다. 주역은 애초에 '''점치는 책'''으로 분류되어 분서갱유의 화를 피했고, 악경은 발견되지도 암송되지도 않아 영구히 소실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각 복원본마다 내용이 달랐다는 것이다. 책을 외운 사람들끼리도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고, 필사본 시대에 작성된 책이라 글자가 좀 다르다던지 해서 내용이 바뀌는 일도 흔했다. 결국 이걸 정리해서 논리화 하는 학문이 필요했는데 이게 바로 한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훈고학이다.
이 훈고학으로 성립된 사서삼경을 금문경(今文經)이라고 부르는데, 대표적으로 시경의 삼가시(노시, 제시, 한시)와 금문상서가 있었다. 이후, 시경과 효경, 예기, 춘추 등은 노공왕(? ~ BC 129)이 공자의 집을 철거할 때 과두문자로 쓰인 공자 대 원문이 발견되면서 원전을 보존하고 있다.[9] 다만 고문경은 전한 시대에는 위서가 아니냐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금문경이 대세를 차지하고 동중서 등의 유가 정책도 이를 기반으로 시행되었으나, 전한 말 유흠이 고문을 정리하면서 권위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후에는 고문경의 권위가 더 높아졌다.
또한 이런 전례들 덕에 동양의 도서 보존은 상당히 아스트랄한 방식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가령 '집을 고치려고 벽을 허물고 들보를 들어내 보니 책이 숨겨져 있더라' 하는 일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한대부터 일어난 고문(古文)과 금문(今文), 비기(祕記) 떡밥이 이렇게 일어난 것으로 분서갱유로 사라진 경전을 학자들이 기억력에 의존하여 복구함으로써 금문이 형성되었으나, 학파마다 복구된 내용이 달라 논쟁이 일어나는 찰나에 저런 식으로 숨겨 두었던 책이 발견되어 원전으로서 권위를 주장하게 됨으로서 고문이 형성된 것이다.
시경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6편이 실전되었고, 모형과 모장이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을 《모시》(毛詩)라고 한다. 또 한편으로 고문시경의 발견 이후에는 금문시경이 묻히는 바람에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한시만 본전이 아닌 외전이 10권 전한다. 반면, 상서는 오히려 금문경이 어찌어찌 현대까지 전해졌으니, 오히려 다른 책들과 같이 노공왕이 찾은 고문경의 원전이 소실됐다. 중간에 동진의 매색이 고문경을 다시 찾아서(?) 바쳤고 상당기간 진본으로 인정됐었으나 후세에 위작임이 밝혀져 '위고문상서'라 하여 원전의 가치는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뒤 중국에서는 이후로도 이러한 역대급 문화 탄압이 2차례나 더 벌어졌다.[10]
정작 본 목적이었던 불온사상 탄압은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다. 진나라의 멸망을 이끈 유방과 항우는 둘 다 유학을 경멸한 인물이었고, 한나라 건국 이후 유학은 정권의 안정을 위협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정권유지에 이용된다.
6. 창작물에서
아랑전설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설정 진의 비전서는 세 권을 모두 소지한 주인에게 불패의 힘과 불사의 능력을 부여하는데 시황제는 이 책의 힘을 가진 자가 자신을 노릴 수도 있다 생각해서 두려워하며 이 책을 제거하려 했지만 명분이 없다 보니 결국 모든 서적을 제거한다며 분서갱유 사건을 벌인다. 그러나 그 난리통에도 진의 비전서는 한 권도 소실되지 않았다. 그후 비전서는 기스 하워드가 전부 소지하게 된다.
Fate 시리즈에서도 이문대의 황제가 수천년 동안 온갖 반란을 겪으면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뿌리부터 완전히 뽑아 버리기 위해 수도 함양에서 자신을 찬양하는 걸 제외한 지방에서 글이나 노래를 익힌 사람이 있으면 '''위성 궤도 상의 장성에서 폭격을 날려 마을째로 소멸시켜버리는''' 방식으로 시행하고 있었으며, 인게임에는 "책은 불태워라"과 "유학자는 묻어버려라"의 두 가지 스킬로 나뉘어 구현되었다.
인디아나 존스의 3편 최후의 성전 중반부에 나치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고 책들을 한데 모아 불사르는 모습이 보인다. 인디는 얼떨결에 히틀러와 마주쳐서 노트에 사인도 받는다.
7. 현대의 인터넷 용어
라이트노벨이나 만화책 등을 읽고 그 내용에 분노한 독자가 책을 불태워서 인증하는 것. 즉, 서적에 관련된 상품파괴인증을 에둘러 말하는 표현이다. '갱유'에는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분서라 하기도 한다. 다만 미디어매체의 발달로 요새는 책 뿐만이 아니라 CD 같은 것들도 함께 부숴서 인증해도 분서(갱유)로 취급하기도 한다.
하는 거야 자기 마음이지만[11] 여태 평이 좋았던 작가의 작품에서 분서갱유 인증글이 나타나거나, 단순 처분을 넘어서서 분서갱유까지 가는 팬이 많아진 작품이라면 확실히 인기에 심각한 적신호가 왔다는걸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8. 같이보기
[1] 중국에서는 焚坑(fénkēng), 그러니까 분갱(태우고 묻음)이라고 줄여서 쓰기도 한다. 저걸 직역하면 "유교 문서를 소각하고 유학자들을 구덩이에 쳐넣고 생매장시킨다"가 된다.[2] 역경이라고도 불리던 주역은 당시에도 점 치는 책으로 분류되어 분서갱유의 화를 피했다.[3] 본래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마다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현존하는 해당 시대의 역사서는 없다. 흔히들 헷갈리는 사항인데 공자의 춘추는 원래는 '''역사서가 아니다'''. 공자의 춘추는 역사에서 예에 걸맞은 것 혹은 예에 어그러진 것을 지적하여 군주와 제후를 바로잡기 위한 목적을 갖고 쓴 책으로 역사평론서에 가까운 책이었는데 하도 그 시대 기록이 남은 게 없어서 역사 기록으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4] 애초 춘추시대부터 진나라의 통일까지 텀이 530년이나 되니 모든게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초나라 지역은 완전한 중원도 아니었다.[5] 당시 군사력의 중심이던 전투 마차의 빠른 동원을 가능하게 하여, 군사와 행정에 큰 도움이 된다.[6] 사마천의 사기조차 이보다 100여년 뒤에 나온 책이며 그나마도 몇몇 왕들은 뭘 했는지 기록이 없는 등 사마천이 그렇게 고생하며 썼는데도 이정도다.[7] 덧붙여서 초중기 고조선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도 걸림돌이 된다. 이유인 즉슨 대립을 한 연나라나 교류를 활발히 한 제나라 사서에 고조선에 대한 기록들이 상당수 서술되었을수밖에 없는데 이 기록물들이 분서로 죄다 날라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기(역사책), 정사 삼국지, 한서 등에 고조선에 대한 기록들이 일부 실려있기는 하지만 그리 상세하게 실려있지 않기 때문에 초중기의 고조선이 어떤 나라였고, 어떻게 세를 확장해나갔는지에 대해서 전적으로 신화와 고고학에 의존해야되는 실정이다.[8] 종이가 발명된 것은 채륜이 활약하던 후한 시대다.[9] 고문경(古文經) 발견으로 노공왕은 유교 역사에 빠지지 않는 인물이 됐지만, 감히(!) 공자의 집을 철거하려 한 점에서 보이다시피 노공왕은 유교 학자는 결코 아니다. 사냥과 유희를 좋아하는 인물로, 공자의 집을 철거하려 한 것도 자기 궁전 넓히려고 그랬던 것. 노공왕은 노나라의 왕이 아니라 한나라 경제의 서자 유여 가 제후국 노나라로 봉해진 것이고, 자신의 유흥을 위해 백성들을 착취한 자에 불과하다.[10] 아닌 게 아니라 마오쩌둥은 자신이 열 명의 진시황보다 강하다면서 진시황이 파묻은 것의 1만 배인 '''460만 명도 얼마든지 매장할 수 있다'''고 권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실제로 모택동이 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죽어나간 사람이 수천만 명이다. 물론 이건 각종 정책의 실패로 인한 원인도 있기는 한데 그걸로 사람이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쓴지라....[11] 사실 이유야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냥 전개가 맘에 안 들어서, 커플링이 맘에 안 들어서, 캐릭터가 맘에 안 들어서 등등. 그래도 보통은 책이나 관련 굿즈를 처분한다고 쳐도 원형 그대로 처분할 뿐 태우거나 뽀개는 식으로까지 인증하지는 않기에 이 수준까지 갔다면 분서갱유를 시전한 독자나 팬들의 마음이 단단히 빡돌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