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젠차오
1. 개요
봉천군벌의 일원인 장쭝창의 부관 시종빈의 딸.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인 직예군벌의 쑨촨팡을 10년 만에 암살함으로서 원수를 갚은 것으로 유명하다. 쑨촨팡을 암살한 뒤 자수하여 7년간 감옥에 수감되는 처벌을 받았으나 1년만에 사면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여성 공산당 간부로서 활동했다.
2. 생애
2.1. 아버지를 잃은 가련한 소녀
스젠차오는 안휘성 동성현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농사를 짓는 동시에 두부를 판매하는 상인이었지만, 아버지와 삼촌은 군대에 입대해 장교가 되면서 가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시종빈은 15세에 북양군에 입대하여 초장, 영장, 연대장 등을 거치며 빠르게 승진했다. 시종빈이 장쭝창의 부하가 되면서 일가는 산동성으로 이주, 스젠차오는 산동성 제남에서 자랐고 소녀 때 전족의 풍습에 따라 발을 묶었다. 그후 그녀의 아버지 시종빈은 여단장, 소장을 거쳐 산동군무방판 겸 2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스젠차오는 천진 사범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던 1925년 10월 3일, 시종빈은 손봉전쟁 중 안휘독판에 임명되어 쑨촨팡과 싸우다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 쑨촨팡은 포로로 잡힌 시종빈을 참수하여 3일간 효수했다. 그로부터 2년이 채 되지 않은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쑨촨팡은 관망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국민당 가입 제안도 거절하였다. 9월 들어 장제스가 직접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이 쑨촨팡의 지배 구역인 강서, 복건, 강소, 안휘 지역으로 진공했고 쑨촨팡은 치열하게 맞서 싸웠으나 결국 1927년 3월에 이르러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북으로 도주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거행되어 쑨촨팡이 의탁했던 대원수 장쭤린이 패하여 퇴각하다가 황고둔 사건으로 사망하고 그 후계자 장쉐량이 동북역치를 결정하면서 쑨촨팡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다. 1930년 중원대전에서 마지막 재기를 노렸던 쑨촨팡은 거기서도 패하자 톈진의 조계지에 은거, 전 중화민국 국무총리 진윈펑과 함께 '톈진 불교도 사회'(天津佛教居士林)를 설립했다.
아버지를 잃은 스젠차오는 복수를 결심했다. 스젠차오의 본래 이름은 시곡란(施谷蘭)이었는데, 아버지를 잔혹하게 살해한 쑨촨팡에게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 이름을 시검교(施劍翹)로 바꿨다. 스젠차오는 먼저 시종빈이 거두어 기른 자신의 사촌인 연태경비사령 시중성을 찾아가 같이 복수를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시중성은 쑨촨팡을 두려워하여 복수를 거절하였고 분노한 스젠차오는 시중성과 남매로서의 연을 절연한다고 선언하고 떠났다. 1928년, 복수를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해 중국 각지를 떠돌던 스젠차오는 산서성에서 옌시산의 부하이자 시중성의 바오딩 군관학교 동기 시정공을 만나게 되었다. 시정공은 스젠차오의 결의에 동감을 표하며 돕겠다고 했고 스젠차오는 감동하여 그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결혼 후에 시정공이 복수에 나서려 하지 않자 스젠차오는 시정공을 독촉했는데 시정공은 쑨촨팡과 같은 인물을 어떻게 죽이겠느냐면서 그가 죄를 많이 지었으나 어차피 누군가는 그를 죽일 것이라고 변명했다. 실망한 스젠차오는 아이를 데리고 남편의 곁을 떠나 1935년 6월, 톈진으로 돌아왔다.
2.2. 복수
톈진으로 돌아온 스젠차오는 우연히 프랑스 조계지의 영화관에서 쑨촨팡이 타고 다니는 차량을 포착하였다. 스젠차오는 그 차량번호를 외워 쑨촨팡을 추적하였고 그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으나 복수할 방도를 찾지 못하자, 그녀는 절망에 빠진 채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 그 절은 다름아닌 쑨촨팡이 평소 다니던 거사림(居士林)이란 절이었다. 그녀의 사정을 알리 없는 주지로부터 "그 유명한 쑨촨팡님도 이곳에서 불교에 귀의했으니 아가씨도 열심히 불공을 드리라."는 말을 들은 스젠차오는 마침내 복수의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1935년 11월 13일 오후 3시, 쑨촨팡이 경전을 낭송하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뒤에서 접근하다가 브라우닝 권총으로 세번 쏴서 무릎을 꿇고 있던 쑨촨팡을 암살했다.
암살 후, 그녀는 범죄 현장에 머무르며 자신이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적힌 전단을 목격자들에게 나눠줬다.
전단의 뒤에는 2개의 시를 써서 부친을 위한 복수를 한 심정을 적었다.여러 선생님들께 드립니다. 첫째, 오늘 시검교는 쑨촨팡을 죽였는데, 이는 부친 시종빈의 복수를 위한 것입니다. 둘째, 상세한 상황은 제가 쓴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읽어주십시오. 셋째, 큰 복수는 이미 하였으니 저는 법원에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넷째, 불당에 피를 뿌리고 여러분을 놀라시게 해서, 거사림과 여러 선생님들께 죄송합니다.
부친의 원수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고
모친의 귀밑머리가 하얗게 샌 것이 더욱 가슴아프다.
모친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 걱정되지만
시간은 더이상 미루지 못하게 하였다.
그녀의 이 같은 사연은 수많은 대중과 언론 매체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여론은 그녀를 동조했고 사람을 함부로 죽여 원한을 샀던 쑨촨팡이 살해된 것에 통쾌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스젠차오는 1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곧 항소했고 이후 2년 간의 재판 끝에, 톈진고등법원은 그녀를 7년 유기형에 처했다.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펑위샹, 국민정부 위원 리례쥔,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 감찰원장 위유런, 화북판사처 주임 장쥐를 비롯한 사회 명사들 역시 연명으로 스젠차오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으며 전국부녀회 및 그녀의 고향인 안휘성의 각계 인사들도 백성을 위해 악인을 제거한 협녀 스젠차오를 선처해달라는 구명운동을 벌였다. 이에 1936년 10월 20일에 국민정부는 국민정부 주석 린썬의 명의로 스젠차오에 대한 사면령을 내렸다. 형기는 고작 1년 남짓 채운 상태였다.십년 전의 일은 감히 되돌아 볼 수 없고
사물은 그대로지만 상황은 바뀌었네
절에 자주 온것은 부처에게 절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검교는 죽기를 원할 뿐, 신선이 될 생각은 없다.
스젠차오의 암살은 효를 숭상하는 유교 윤리에 익숙한 중국인들에게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일본 침략자들에 대한 복수의 정치적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2.3. 이후의 삶
1949년, 스젠차오는 쑤저우 여성 위원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57년엔 중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 베이징시위원장에 임명되어 여성 공산당 간부로서 활동했다.
1979년 8월 27일, 스젠차오는 대장암 수술 직후에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화장되어 쑤저우시에 있는 쓰촨 영 공동묘지(西天灵公墓)에 묻혔다.
3. 매체에서
만해 한용운이 스젠차오의 쑨촨팡 암살 사건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스젠차오의 일대기를 소설로 집필했다. 제목은 철혈미인이다.
4.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작림 평전, 쉬처, 아지랑이.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시검교의 복수사건
- 영문 위키피디아 스젠차오 문서
- 중문 위키피디아 스젠차오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