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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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
缠足
(간체자),
纏足
(정체자)
1. 소개
2. 연원
3. 성행
4. 실상
5. 전족을 하는 이유
6. 소멸
7. 기타
8.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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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어린 여자아이의 발가락을 꺾어 발바닥에 붙여 하나로 뭉친 뒤, 으로 꽁꽁 동여매 일정 크기 이상으로 자라는 것을 막는 중국의 풍습, 혹은 그 풍습으로 인해 만들어진 작은 발을 일컫는 말이다. 일종의 발 페티시 이다.
전족(纏足)이란 단어에서 전(纏)이란 글자는 묶는다, 휘감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전족'이란 '(무언가로) 휘감은 발'이란 뜻이다. 북송 때부터 1000년 이상 지속되며 20세기까지도 성행하다가 본토에서는 1930년대 후반 들어서, 식민지(대만, 홍콩, 마카오 등)에서는 식민모국의 금지 조치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전족이 사라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미국침례회 소속 선교사 로티 문(Lottie Moon 1840-1912)이다.[1]
전족이 된 발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면 클릭(혐짤주의 링크처리) 사실 저 사진에 나온 정도면 놀랍게도 상당히 잘 된(...) 전족에 속한다. 일반적인 전족은 현대 관점에서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흉측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하 본 문서에는 직접적인 사진 첨부는 없으니 안심하고 봐도 된다.

2. 연원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기원은 없다. 전설은 하나라 때부터 다양하게 나타나고 오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많이 알고 있지만 실제 발견된 신발 유물을 토대로 살펴볼 때 당나라 때까지 전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전족이 나타나는 시기는 북송 때부터다. 한족이 자체적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서방 지역의 이민족들이 보여주던 발 끝으로 추는 이 중국에 전래되면서 유행하다가 아예 발을 작게 만드는 식으로 변질되었다는 말도 있다.
사실 유물이나 기록 연구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처음 생겨났을 북송 당시의 전족은 그냥 발을 조여 매서 작게 만든 정도였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고문 못지 않게 변한 셈. 북송 시대에는 전족이 아직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고 기녀나 상류층에서만 성행했던 것 같다. 북송 초기 태평흥국 8년(983) 때의 돈황 벽화를 보면 귀족 부인들의 발이 전족이 아닌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이후에 생긴 것으로 보이며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전족은 아마도 11세기쯤 생겨서 송 휘종 선화 년간에 많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따라서 북송시대에는 전족이 아직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고, 남송에 이르러 상당히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도 궁중의 여인들이나 가기(歌妓)들에게만 보편적인 것이었을 뿐, 사대부 계층의 부녀자 가운데에는 여전히 전족이 되지 않는 여자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잘 된 전족도 대략 17cm 정도는 됐다는데, 근세 조선인의 여자 평균 키가 148cm 정도니 그보다 이전인 송나라 대의 중국인 평균 신장을 고려해보면 3치 금련은 고사하고 그냥 전족을 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이때에는 후기 전족의 발등이 부풀어오른 형태보다 보통 발처럼 평평한 형태를 선호했다고 한다. 상기했듯이 발등이 부풀어 오른 형태가 되려면 '''발 뼈를 꺾어야 한다.''' 남송 시절 전족 유물들도 대부분 14cm 정도였다고, 또 송나라 시절에는 전족에 대한 거부감도 많아 북송말엽의 차약수(車若水)와 정이(程頤) 같은 사람은 당시 퍼져나가던 전족을 반대하고 집안 여인들에게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사서에 의하면 송대의 전족의 기준은 곧고 날씬한 미의 기준이었다 한다. 송나라 시대의 전족은 명나라청나라 때보다 길어, 13.4cm에서 17cm 정도로 송대의 전족은 귀부인들의 전유물로 보통 여인들은 전족을 하지 않았고 당시 전족의 요구사항은 단지 작고 곧고 날씬한 발이지, 후대처럼 뼈를 압박하여 발을 기형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3. 성행


원나라 때는 몽골족부터 전족 풍습을 받아들여 남송보다 훨씬 심해졌다. 가장 명확한 예는 원나라 잡극이나 산곡에서 사람을 묘사할 때 발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작은 발에 대하여 악명 높은 삼촌금련(三寸金蓮)[2]이 언급된다. 이상적인 발은 크기가 3촌(약 9 cm)쯤 되고 모양이 금빛 연꽃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명나라 대에 이르면 궁의 여자들에겐 전족이 필수가 되었다. 홍무제 주원장은 자신에게 끝까지 저항한 장사성의 본거지 백성들을 처벌할 때, 남자는 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여인은 전족을 못하게 했다. 이후 전족이 되지 않는 것이 천민죄인의 상징처럼 통하여 전족이 더욱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남자들은 아내의 신발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자랑(...)하고 다녔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아내의 신발이 유독 작으면 그만큼 부러움을 샀던 모양. 주원장의 황후인 효자고황후 마씨는 본래 하류층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전족이 되지 않아서 발이 컸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에게 '큰 발 마황후'라고 놀림을 당했다.[3]
청대만주인 여자들의 발은 전족이 되지 않도록 엄하게 금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보면 전족이 됐는지 여부로 한족기인 여성을 구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족 여인들은 청이 전족을 금하자 "남자들은 굴복하여 변발을 하지만,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 하며 전족을 더 심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애초에 만주인들은 여진의 기마 전통의 기풍이 남아 여인이라 해도 승마를 권장했기 때문에 전족을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강희제 때 잠깐 전족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극심한 반발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다. 어차피 여자들의 일인지라, 문자 하나하나까지 트집 잡아 한족 문인들을 탄압한 청나라도 극심한 반발을 감수하고 관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건륭제처럼 한족 여인의 전족을 아주 좋아한 황제도 있었다. 청대의 전족 변형으로 10대 초중반 만주족 여자아이들이 한 '''도조아'''가 있다. 다만, 이 도조아는 여자의 자율에 맡겼고, 한족보다 시행 연령이 높고 길이가 길었으며, 발을 부러뜨려서 묶는 게 아니라 발이 커지지 않도록 꽉 조이는 정도라 염증이나 감염, 기형의 위험은 전족과 비슷비슷하긴 했어도 최소한 한족 여자들처럼 장애인으로 전락하진 않았다. 도조아 말고도 만주족 귀족 여인들은 하이힐처럼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어 전족한 여인의 종종걸음을 모방했다. '''화분혜(花粉鞋)'''라는 신발로, 걷는 데도 시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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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혜의 모습. 종종걸음을 걷기 위해 신발굽이 매우 불안정한 모습으로 디자인되었다.
명청대에는 원나라 때 나온 '''삼촌금련'''(또는 삼치금련)이란 말이 더 발전하여 발의 크기는 9~10 cm를 넘지 않고, 칼날처럼 가늘며 냄새까지 좋아야 한다.'는 현대인 관점에선 '''야만스럽기 그지없는''' 전족 기준이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여자들의 고통이 극심해졌으며 전국적으로 전족 미인 선발대회까지 열렸다. 이날만은 남편 이외의 남자에게 보여주어선 안 되는 전족된 맨발을 문 밖으로 내놓고 남자들의 평가를 받았고,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그 집의 남자는 모든 남자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심사 기준이 흠좀무한데, 발 모양이 예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모양만 예쁜 게 제일 낮은 등급이었고, 모양도 좋고 촉감도 좋은 전족이 중등급, 모양과 촉감에다 향기까지 좋은 전족이 최상급의 전족으로 평가되었다.
태평천국에서도 전족을 금지했고[4] 변법자강 운동을 전개한 캉유웨이량치차오가 전족을 금하는 모임을 만들었으며, 1894년엔 서태후도 다시 금지령을 내렸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족이 곧 미인, 아름다운 여자의 기준이 되는 바람에 '''전족이 안 되면 시집을 못 갔기 때문이다.''' 이 당시 여자에게 시집은 일평생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이렇다 보니 한창 성행할 때 전족은 신분상승의 수단까지 될 정도였다. 전족에 완벽하게 적합한 발을 가진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가족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어떤 여자아이든, 아무리 가난하고 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도 전족만 완벽하게 되면 상당한 가문에 시집을 갈 수 있었고, 가족들의 출세는 물론 그 여자아이를 배출한 마을 전체에 떡고물이 떨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4. 실상


단순히 천을 감싸서 발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실제 행위가 너무나도 잔혹하기에 내용을 생략하고 또 생략한 것이다. 중국 측 기록을 보면, 아이가 4-5세 때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발가락들을 발바닥 쪽으로 꺾은 다음에 천으로 동여맨다'''고 한다. 그러니깐 '''뼈를 부러뜨리고 묶어서''' 성장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당시는 당연시 했지만, 오늘날 보기에는 잔혹한 아동학대에 불과하다. 무사히 전족 만들기를 마쳐도, 전족을 한 여자는 발에 영구적인 장애를 입게 되어 제대로 걷지 못하게된다.
실제 X-ray 촬영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발등뼈도 반으로 꺾였다. ## 전족된 발의 사진에서 발등이 기형적으로 높은 것은 발등뼈를 꺾어서 발 길이를 줄인 결과이다.
또한 발을 동여매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전족이 되기 시작한 초기 1-2년 정도를 억지로 많이 걷게 해서 발가락 관절에 일부러 상처를 내고 부러트리며, 그걸 반복했다. 그렇게 되면 뼈가 곪아서 연해지는데, 계속 강하게 동여매서 크기를 작게 하는 것이다. 물론 위생관념과 거리가 멀었던 시대라 이 과정에서 적지않은 아이가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 등으로 죽거나 더 큰 장애를 가지게 된다. 멀쩡한 뼈를 부러트리고 관절을 뭉개며 살을 괴사시키는데 아무 일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긴 하지만... 이렇게 전족이 완성되기까지는 약 3년이 걸린다. 이렇게 완성된 전족의 X-ray 사진을 보면 척골[5]이 발등 쪽으로 둥글게 휘어 솟아올라 있다. '''엄지발가락과 발뒤꿈치가 맞닿아 있는 형태.'''
현재의 관점으로 봤을 때 모양이 무척 흉하다. 발 사이즈가 그냥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발가락과 발꿈치가 뒤틀려버리기 때문. 당연하지만 전족이 된 여자 본인도 무척 고통스러운 데다 걷기도 불편했다.
발을 감싼 상태로 생활하기 때문에 악취가 상당히 심해서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손님: 이 고약한 냄새는 무엇이냐?
하인: (머뭇거리며) 주인 마님이 전족을 잠시 풀었습니다.
손님: 전족을 풀었다고 이 정도 냄새가 날 리가 없다. 솔직히 대답하거라.
하인: (더욱 머뭇거리며) 실은 양쪽 다 풀었습니다.

5. 전족을 하는 이유


이렇게 끔찍하고, 고통스러우며 반인륜적인데도 전족이 성행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과 분석이 있다. 아래의 가설 중 어느 하나만이 이유가 아니라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전족을 통해 지배층이 우월감을 표출하려 했다는 설. 전족이 된 여자는 걸어다니는 것도 힘들어서 지팡이를 짚고 종종걸음으로 다녀야 한다. 따라서 가내수공업을 제외하고는 전족이 된 여자는 노동력이 없다. 때문에 전족이 된 아내 = 부의 상징이 되어 부자들이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족이 된 아내를 선호했으며, 이것이 유행으로 번져 평민들까지 전족을 좋게 여겼다는 것이다.
  •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했다는 설. 이 가설은 이제 거의 폐기되었다. 지금의 중국남아선호사상계획생육정책의 영향으로 극심한 남초 현상을 겪지만, 중국 역사상 남자가 여자보다 많았던 기간은 별로 없었다. 전근대 중국은 아내가 도망가면 새로 아내를 들이면 되는 시대였고, 정실 아내만이 아닌 도 둘 수 있었다. 더구나 전족은 상류층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못 걷게 만들 만큼 상류층 여자들이 흔하게 가출했을 리가 없다.
  • 예상 외로 전족된 발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선호했다는 설. 현재 남아있는 전족 관련 자료의 대부분은 중년 혹은 노년의 여인들의 을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이다.[6] 이는 발을 성기와 마찬가지로 생각하여 젊고 어린 여자들이 노출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린 여자의 전족된 발은 대부분 아기처럼 부드럽고 야들야들했다고 한다. 또한 방중술 관련 도서인 소녀경에 따르면, 이러한 어린 여자의 전족된 발을 이용하여 성교에 활용하기도 했다고한다.
  • 전족이 여자의 질 조임을 향상시켰기 때문에 주요 기득권인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유행처럼 번져나가 사회 풍습이 됐다는 설. 전족을 하면 발이 기형이 되어 뒤뚱거리며 걸을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자란 여자는 허벅지 근육이 약해져 다리가 매우 부드러워지고, 허벅지 근육보다 회음부 근육이 단련되어 성교시 남자가 여자에게서 느끼는 성감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다만 이 설은 질 근육이 전족을 통해 뒤뚱거리며 걷는 것으로 단련될 수 있는지에 관한 정확성이 불분명하다[7]. 가장 좋은 확인법은 전족을 한 여자가 걸을 때 사용하는 근육과 정상인이 걸을 때 사용하는 근육을 비교하는 것이겠지만, '전족을 한 여자'라는 표본 자체가 계속 줄어들고 있기도 하고, 민감한 주제기에 현실적으로 어려울 듯하다.
최근 연구에서는 '''"여자를 소녀 때부터 장시간 앉혀 가족을 위해 직물을 짜고 옷을 만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전족을 만들었다"'''는 설이 제기됐다.#, #

6. 소멸


이 악습은 근대 내내 축출하려고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8] 그러나 5.4 운동 이후 중국인들도 인식이 바뀌어 되면서 전족이 사라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전족의 거부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중국 여성 운동의 중요한 모토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저우언라이의 아내 덩잉차오. 중화민국 북양정부와 국민정부, 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사상의 차이가 있음에도 공통적으로 실시한 정책 중 하나도 이 전족 폐지 정책이었다.
당시 중국 여인이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전족이 된 발을 보여준다는 것은 알몸을 보여준 것만큼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심지어 낯선 남자에게 여자가 전족이 된 발을 보여주는 일은, 그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9] 변법자강운동 당시 일어났던 천족운동(天足運動)은 전족된 발을 모두 풀고 전족도 금지하는 것이었는데, 강제로 전족된 발을 보이게 된 여자들은 수치심에 못 이겨 자살하는 사건도 빈번했다고 한다.
21세기 초반에는 전족된 여자는 아주 나이 든 할머니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본토에서 전족이 악습이라는 생각을 중국인들이 인식하게 된 때가 1930년대부터이니, 그 이전에 전족이 되었던 여자들만 전족을 한 것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과거에 이미 전족이 된 할머니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져서, 홍위병들이 전족이 된 할머니들을 끌어내어 '자본주의 창녀'라고 욕하면서 조리돌림했다.

7. 기타


  • 오랜 기간 내려온 풍습답게, 전족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문학 작품도 무척 많다. 금병매에서는 서문경반금련의 전족에 반한다고 나온다. 영화로 만들어진 금병매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전족은 그냥 크기가 작아진 정도로 나와 사람들이 '독특하긴 하지만 이해 못할 취향은 아닌 것 같아.' 하고 반응한다. 물론 수호지나 금병매나 나온 시점은 명나라대이고 작가도 명대의 풍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별 소용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 작중 시점 자체는 송나라대이니 억지로라도 고증을 따져보자면 말 그대로 그냥 성장이 억제된 작고 예쁜 발이었을 것이다. 상기했듯이 그 당시 전족은 딱히 발 뼈를 꺾는 것도 아니고 그냥 더 자라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수준이었으니. 물론 그 이후는 맨 위의 사진과 같이...
  • 펄 벅은 "중국에서 가장 없애야 할 것이 전족"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소설 대지 3부 아들들에선 '중국인은 모두 전족을 한다.'고 말하며 비웃는 백인들을 풍자하면서 중립적으로 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아름다움을 위해 건강을 해친다는 점에서, 하이힐이 현대의 전족이라는 시각도 있다. 하이힐과 전족은 배경과 형태, 미용효과[10]를 생각하면 차이가 크다. 하지만 전족이 된 발의 실루엣은 웨지힐 형태의 하이힐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다.
  • 전족 수준이 아니라도 '작은 발'이 미인의 한 가지 조건이었음은 서양에서도 비슷했던 듯하다. 근대 영국 배경인 유명한 동화 <소공녀>에선 주인공의 작은 발을 놓고 급우들이 "분명 비싼 신발로 작아 보이게 커버했을 거야."라고 열폭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멀리까지 갈 것 없이 이 아가씨만 봐도... 정확히 말하면 '직접 노동하는 하위계층'과 '직접 노동하지 않고 하위계층의 생산력으로 부양받는 상위계층'이 분화된 문화권에서는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풍조가 흔히 나타나고,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풍조가 나타난 문화권에서는 육체노동에 유리한 큰 손과 큰 발등의 신체적 특징을 천시하는 풍조 역시 흔하게 나타난다. 즉 고강도의 노동에 종사하기 유리한 신체적 특징, 또는 고강도 노동으로 인해 발달한 신체적 특징들이 하위계층의 특징으로 여겨져 천대받고, 그 반대의 특징이 귀족적인 외모로 대우받았다는 것. 이런 풍조는 특히 여자의 외모에 대한 평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편이었지만, 심지어 당시의 사회적 풍조에서 여자보다 훨씬 신체활동이나 운동을 많이 하던 남자에 대해서도 '큰 발'을 노동계급의 신체적 특징이라고 여겨 천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 예를 들어 근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남주인공 레트 버틀러가 남자다운 당당한 풍채를 가지고 있고 말타기나 사격 등 신체적 활동능력 역시 뛰어나다고 묘사된 것과는 별개로, 이 인물의 외견에 대한 묘사에는 '귀족적인 작은 발'이 포함되었다.[11] 즉 당대의 유럽보다 귀족주의 문화의 영향력이 훨씬 약했던 근대 미국에서조차, '작은 발'과 같은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신체적 특징을 그 인물의 귀족적인 면모로 보고 아름답게 여기는 풍조는 있었던 것. 다만 남자는 귀족 출신이라 해도 대외활동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았기에 무조건 '귀족적인' 특징이 선호되진 않았지만, 여자는 대외활동을 제약받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런 특징이 선호되는 경향이 더욱 강했던 것 뿐이다.[12] 전족을 받아들이지 않은 한반도에서도 발이 크면 ‘도둑발’이라며 놀렸던 풍습이 있었다.
  • 사회 풍조 때문에 여자에게 영구적인 장애를 입히는 악습이라는 점은 여성 할례와 유사하다.

8. 매체


  • 무협지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나 각종 시대극에 거의 안 나온다. 발만 CG 처리하면 굳이 고증 못할 것도 없겠지만 현대 중국인들 입장에서도 흑역사 취급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단지 현대인들의 미감에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아무튼 절대다수의 시대극에서 여자들은 그냥 잘 뛰어다니고, 무협영화에서는 발차기도 잘한다. "보아하니 그대는 귀족 집안 출신인 듯 한데 왜 전족을 하지 아니하셨소?" 같은 말을 묻는 실례되는 남주인공도 없다. 무술에서 풋워크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보면 전족을 하고 무공은 절대 무리다.
  • 굳이 고증을 위해 등장시킬 때는 신발을 신은 모습이 작아 보이도록 분장하거나, 전족을 해서 제대로 뛰거나 걷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가령 사대가족 중 송씨 3자매인 쑹아이링, 쑹칭링, 쑹메이링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송가황조>에선 쑹칭링이 집을 나와서 사회 활동을 하겠다며 뛰쳐나가자, 집안의 여자 어른들이 붙잡으려 하나 제대로 뛰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전족으로 속박된 구세대의 여자와 자유롭게 뛰어가는 신세대 여자를 간접적으로 묘사한 것.

  • 전족에 관련된 정보를 자세히 읽고 싶다면 중국계 미국인 작가 리사 시가 쓴 <설화와 비밀의 부채>를 추천한다. 뜨겁게 삶은 닭 속에 어린아이의 발을 집어넣어 뼈를 부드럽게 한 후 부러뜨리는 과정, 맨발로 사금파리 위를 매일같이 걷게 하여 고름과 썩은 살을 제거하는 과정, 매파가 전족을 보고서 소녀의 등급을 매기는 과정 등이 아주 리얼하게 묘사되었다.
  • 렌세이 나미오카[13]가 쓴 「큰 발 중국 아가씨」도 전족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주인공이 전족과 기타 '구시대가 강요하는 여성상'을 거부하고 교육의 기회와 자유로운 삶을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 실제로 당대 여자들 중 드물게 전족을 거부했었다는 작가 자신의 어머니가 모델이고, 책에는 작가가 어머니께 바치는 헌사도 있다.

[1] 참고로 이 사람은 로티 문 크리스마스 특별헌금(Lottie Moon Christmas Offering)이 있을 정도로 중국 선교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다.[2] 송나라-원나라 때는 1척이 31.2 cm였으므로 1촌은 3.12 cm이다.[3] 한번은 효자고황후의 발이 크다고 비웃은 그림이 붙었고, 사람들이 그걸 보고 비웃은 적이 있다. 주원장은 이를 알고 비웃은 사람들을 다 죽이려고 했는데, 황후가 만류해서 그냥 넘어갔다는 일화도 있다.[4] 홍수전은 전족을 싫어했으나, 정작 태평천국의 고위 간부들은 전족한 여인들을 가까이 했다. [5] 발 뒤꿈치에서 발가락 사이의 뼈[6] 심지어는 그조차도 계속적인 관리를 하지 않아 전족이 거의 풀린 상태다. 전족은 계속 발을 동여매고 뼈를 곪게해야 하지만 현대에 남은 노년 여자들은 더 이상 발을 고통스럽게 동여매지 않고 편하게 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과서적인(?) 전족과는 모습이 좀 다르다.[7] 근육을 단련하는 것과 관련한 스트레칭과 요가 자세 등이 실제로 인터넷에 자주 소개되고 있으나, 과학적으로 어떤 원리를 통해 단련되는 것인지 출처를 찾기 어렵다.[8] 중국에서 오랫동안 지내면서 많은 중국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중국인 및 한국인들에 대한 소설도 쓴 여류작가 펄 벅의 소설 대지를 봐도, 주인공 왕룽이 전족된 롄화에게 반하는 게 나온다.[9] 비슷하게 이슬람권에서도 여성이 히잡을 벗고 머리카락을 낯선 남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성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10] 전족이 발에만 미용효과를 기대한다면, 하이힐은 키 높이, 각선미, 신체비율 개선 등의 미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11] 이 부분은 사실 찰스턴의 명문가 출신이라는 레트 버틀러의 혈통적 특성을 설명하는 장치 중 하나이다.[12] 전족뿐 아니라 코르셋 같은 풍속도 결국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13] 중국계 미국인 소설가. 중일 전쟁의 여파로 미국에 피난해 정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