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유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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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초대 감찰원장
난징 국민정부 3대 감찰원장

본명
우백순(于伯循)
한문
于右任
한국식 독음
우우임
영문
Yu Youren

태평노인(太平老人)

유인(誘人)
출생
1879년 4월 11일 청나라 섬서성 삼원현
사망
1964년 11월 10일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 [image]
학력
청나라 거인
직업
정치가
감찰원장
재임 기간

3대 1931년 2월 16일 ~ 1948년 6월 9일
1대 1948년 6월 9일 ~ 1964년 11월 10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4. 말년
3. 여담
4. 매체에서
5. 주요경력
6.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1931년부터 1964년까지 무려 33년동안 감찰원장으로 재직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79년 섬서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는 장사를 위해 사천성으로 떠나서 고모의 손에서 자랐다. 염소치기일을 하면서 고전문학을 공부했고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서태후가 피난을 오자 천춘쉬안에게 서태후를 죽여야 한다고 간언하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1903년 과거에 합격하여 거인이 되었다. 하지만 지은 시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혁명파로 지목되어 수배령이 내려져 1904년 상하이에 숨어 신당대학에서 수학하다가 1905년 푸단대학을 개교하였다. 1906년 일본으로 건너가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으며 1907년 귀국, 상하이에서 신주일보를 창간하였고 민호보, 민립보 등을 발간하여 혁명파를 지지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자 "일본이 조선을 대우하는 것보다 고압적 강권이 심한 것은 없다. 그 반동이 마침내 飛彈의 一擲에 피를 뿌렸다."라고 평했으나 동시에 "우방의 원로가 우리 경내에서 죽었다. 우리 정부는 신중한 태도로 우방 사직의 (臣)의 죽음에 대해 청일 국교상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강압적 태도을 비판하면서 일본 측에 대한 조의를 표했다.
1912년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교통부 차장에 임명되었지만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에 취임하면서 그의 독재에 반대하여 곧 사직하였다. 1913년 2월, 리징시 등과 함께 국사유지회를 조지했고, 쑹자오런과 함께 민국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위안스카이와 국무총리 자오빙쥔의 사주로 눈앞에서 쑹자오런이 암살당하는 것을 보고 통곡하였다. 1913년 계축전쟁에 가담함으로 수배령이 내려졌으나 1916년 호국전쟁 이후 수배령이 철회되었다. 1917년 장훈복벽 이후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구국회와 약법 복구를 거부하고 독재정치를 펼치자 1918년 섬서성의 민군인 섬서정국군을 조직하여 섬서성에서의 혁명활동을 이끌며 섬서성 자치론을 주장하였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자 1922년 섬서정국군을 해산하였다. 그해 5월 토적서북 제1로군 총사령에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고 상하이로 가서 교육활동에 종사했다.

2.2. 국민혁명


상하이로 이주한 후 교육활동에 종사하였다. 1922년, 동남고등사범학교의 열악한 시설과 교수진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분규를 일으켜 교장 왕공섭을 축출하자 동남고등사범학교의 새로운 교장으로 초빙되어 교장으로 취임, 상하이 대학으로 개명하고 혁명인재 양성을 위해 노력하며 정치학습을 실시했다. 이게 바로 후일의 상하이교통대학이다. 1924년 국공합작 이후 개최된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2월 1일, 임시집정 돤치루이가 개최된 선후회의 개최연에 잠시 참여하였으나 국민당과 돤치루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관계를 끊었다. 1925년 2월, 베이징으로 북상한 쑨원이 위독해지자 우징헝, 리스쩡 등과 함께 중앙정치위원으로 충원되었으며 베이징 정치분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25년 12월, 중국 공산당 총서기 천두슈로부터 국민당 좌파 지도자로 지목되었다. 이후 국민정부 심계원장을 지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신익희에게 심계원 직원 자리를 내주는 등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때 북양정부로부터 내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6년 1월 국민당 2기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9월 펑위샹의 국민군에게 협력하여 12월에 섬서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해 고경정이 대리하였다. 1927년 국민군 섬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국민당의 1차 북벌에 호응하였다.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국민정부 위원 겸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6월 섬서성 정부주석을 맡았다. 9월에 국민정부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2.3. 반장전쟁에서 중일전쟁까지


1928년 2월에 개최된 국민당 2기 4중전회에서 대회 주석단에 선출되어 대회 집행을 맡았으며 다이지타오, 장제스, 탄옌카이, 정유분과 함께 국민당 중앙상무위원 겸 국민정부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 심계원 원장을 맡았다. 1928년 8월에 개최된 국민당 2기 5중전회에서 장제스, 후한민, 다이지타오, 탄옌카이, 쑨커, 정유분과 함께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0월 고궁박물원 참사에 초빙되었다.
1929년 국민당 3차 전국대표대회에 앞서 장제스가 각 당부의 대표들을 중앙에서 지명함으로 자신의 반대파들이 많은 광저우, 상하이에서 반대파들이 대표로 선출되지 못하게 막으려 하자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3전대회 참여를 거부하고 상하이에 칩거했지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 2월 16일, 국민정부가 감찰원장으로 지명한 차이위안페이가 끝내 감찰원장 취임을 거부하자 국민정부로부터 신임 감찰원장으로 지명되어 국민정부 조직법 반포 3년 만인 1931년 2월에 감찰원을 구성하였다. 1931년 3월 2일, 장제스, 다이지타오, 정유분, 엽초창, 쑨커, 주페이더, 차이위안페이, 장런제, 우징헝, 왕충후이 등 12명과 함께 훈정 실시를 건의하였으며 1931년 5월 국민회의에서 결정된 중화민국훈정시기약법에 6월 1일 감찰원장 명의로 서명함으로 훈정이 실시되었다. 훈정 실시와 더불어 국민당 3기 5중전회에서 감찰원장으로 재선출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9월 28일에 중앙일보에 원장의 명의로 "전 국민이 모두 정성으로 단결하여 국가의 정당한 자위에 나서야 하며, 고난 중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국난을 벗어나야 한다."고 연설하며 학생들의 무모한 항일운동을 비판했다. 이후 특별외교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11월 2일, 장제스, 우톄청, 다이지타오, 구웨이쥔 등과 함께 정부의 대일 방침에 대해 논의,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하기 전에는 일본 측과 어떠한 접촉도 있을 수 없다. 또한 장래 철수 이후 어떻게 교섭을 시작할 것인가. 그 수속은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 등에 대해서도 먼저 의견을 표시하지 않는다. 다른 간접적 방법을 가지고 철병을 촉구한다."고 결의했다. 1차 양광사변의 압박으로 장제스가 국민정부 주석 겸 행정원장에서 하야하고 개최된 국민당 4전대회에서 감찰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에 재선출되었으며 또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 1932년 1월 1일에 취임하였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왕징웨이송호정전협정을 체결하자 이에 반발하여 5월 21일, 왕징웨이 탄핵안을 중앙집행위원회에 상정했으나 중집위는 이를 기각했다.
1935년 쑨촨팡이 그가 죽인 사람의 딸 스젠차오에게 암살되자 스젠차오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중일전쟁 중에는 중국 문화 보호를 위해 힘썼다. 중일전쟁 발발 후 충칭에서 집무를 계속했으며 1938년 국방최고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43년 3월 15일, 중앙일보와 대공보에 "만세의 태평을 열기 위해" 일본해의 명칭을 폐기하고 태평해로 개칭할 것을 주장했다. 1945년 5월 국민당 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재선되었다.

2.4. 말년


1946년 10월 제헌국민대회 주석단으로 선출되었으며 1947년 4월 국민정부 조직법이 수정되면서 감찰원장 겸 국민정부 위원에 다시 선출되었다. 1948년 4월에 실시된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후스, 우징헝, 왕윈우와 함께 장제스를 총통 후보로 추천했으며 자신은 부총통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자신의 장점만을 선전하는 신사적인 유세를 하였다. 4월 16일, 512인의 추천으로 부총통 후보로 등록되었으며 4월 23일 오전에 있었던 1차 투표에서 493표를 얻어 4위를 기록함으로 낙마했다. 이후에도 1947년 <남중국과 태평해. 지리적 명칭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일본해 명칭은 이 바다가 오직 일본하고만 접해 있다는 대단히 그릇된 인상을 준다. 이 부적절한 명칭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이 바다를 일본의 내해로 만들려는 일본의 또 하나의 제국주의적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세계평화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일본해라는 명칭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국가의 출판물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 맞다."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해 개칭 운동을 벌였다.
1949년 6월 11일에 설치된 중국 국민당 비상위원회에서 비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부천대가 단행된 후 대만으로 이주했으며 대만에서 죽을 때까지 감찰원장을 맡았다. 1950년, 쩌우루, 쥐정과 함께 천리푸의 부탁을 받고 국민당 개조를 장제스에게 요청했으나 장제스는 대륙에서부터 말을 안 들었던 천리푸를 숙청해버리는 것으로 답했다. 이후 국민정부 평의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2년에 개최된 국민당 7전대회에서 중앙평의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고향인 섬서성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1964년 폐렴으로 인하여 타이베이 영민총의원에서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66년 그를 기념하기 위한 동상이 위산에 설립되었으나 1996년 대만 독립주의자들의 반달리즘으로 파괴되어 계곡으로 던져지는 수모를 당했다. 2014년, 서거 50주기를 맞아 부총통 우둔이가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이 열렸다.

3. 여담


장제스가 사망한 후 장제스의 종신독재와 장징궈의 세습을 불만스러워했던 대만 야권에서는 다음과 같은 농담이 돌았다고 한다. 죽어서 천국에 간 장제스가 쑨원과 재회했는데 쑨원이 장제스에게 헌정을 실시했냐고 묻자 장제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쑨원이 초대 총통은 누구였냐고 묻자 장제스는 자신이 했다고 했다. 이에 쑨원이 그럼 2대 총통은 누가 했느냐고 물었는데 장제스는 자신이 연임했다고 쑨원에게 말하기 부끄럽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순 없어서 위유런이라고 했는데 이는 중국어로 자신이 또 맡았다는 뜻(余又任)과 같은 발음을 이용한 것이었지만 쑨원은 그대로 속아서 서예가가 총통이 되어 문치국가가 되었다고 기뻐했다.

4.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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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국대업에서 등장한다. 배우 허환산이 분했다. 뒤에 앉아 있는 수염난 노인. 앞에서 서서 발언하는 사람은 우톄청.

5. 주요경력


중화민국 역대 감찰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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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실시

1대

2대
위유런
(1948년 6월 9일 ~ 1964년 11월 10일)

이사총
난징 국민정부 역대 감찰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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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3대

헌정실시
자오다이원(趙戴文)

위유런
(1931년 2월 16일 ~ 1948년 6월 9일)

6.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당대40년사, 신승하, 고려원.
  • 만주사변기 중일 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국초기혁명운동의 연구, 민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 중국의 국민혁명과 상해학생운동, 정문상, 혜안.
  • 민국인물사전, 하북인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