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호 수용소

 


1. 개요
2. 상세


1. 개요


예전에 존재했던 북한정치범수용소. 일명 '26호 교화소'라고도 한다.

2. 상세


평양직할시 내의 승호구역(현 승호군)에 존재하던 수용소였다. 다른 수용소와는 달리 마을 형태 수용소가 아닌 감옥 형태의 수용소로, 수성 교화소와 유사하다. 1급 정치범 본인이 수용된 것 또한 수성 교화소와 유사한 점.
북한 주민들에게는 '''수성 교화소, 용평 완전통제구역과 함께 공포의 대상이었다'''. 정치범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인권유린과 혹독한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정치범에 대한 무차별적인 고문 또한 다른 수용소에 비해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옥 형태의 수용소였으며 감시도 이중 삼중으로 철저했기 때문에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특별 사면 없이 살아서 나가거나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탈북자 중에서도 경험한 사람이 없는 데다가 이미 폐쇄된 수용소이기 때문에 그 참상이 구체적으로 전해진 바는 없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경우 이 수용소의 비참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증언하고 있는데, 탈북자 출신의 조선일보 기자 강철환과 납북되었다가 가까스로 탈북에 성공하여 한국으로 돌아온 신상옥 감독이 바로 그들이다.
강철환의 경우에는 그의 친구의 아버지인 리성흡[1][2]에게서 승호 수용소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이 요덕 수용소에서 겪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닐 정도의 끔찍한 이야기였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강철환씨의 경험이 궁금한 사람들은 수용소의 노래 링크 참조. 신상옥 감독의 경우에는 탈북을 시도했다가 붙잡혀 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김정일의 지시로 인하여 특별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생을 다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강철환 씨의 <수용소의 노래>를 읽어보았는데, 그 책의 내용은 내가 있었던 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런 승호 수용소도 '''1994년 폐쇄'''되었다. 평양과 지나치게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1991년 국제 인권단체인 엠네스티에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의 실체에 대하여 최초로 폭로할 때 언급된 수용소였기 때문이다. 북한 정부는 폭로에 큰 충격을 받고 수용소의 정치범들을 재배치하였으며, 엠네스티로의 정보 유출 경로를 알아내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으나,[3] 끝끝내 알아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위에서 언급된 리성흡 또한 엠네스티에서 파악한 수감자 중 한명이었으며, 이후 그는 김정일의 특별 지시로 석방되었다. 그 외에도 납북된, 월북한 남한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는 북한 정부가 자발적으로 월북하였다고 선전한(물론 남한 측에서는 북한에 의한 강제 납북으로 보고 있다) 전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4]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 남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외에 북송교포와 일본인 처들도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1] 전 남산학교 교원이자 로동당 교육부장을 역임한 고위 관료. 김정일의 개인 교사였으며 그의 이복동생 김평일과도 절친하였다고 한다. 김평일과의 친분과 김정일의 독재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승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엠네스티의 폭로 이후 김정일의 특별 사면으로 가까스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김정일의 독재를 계속 비판하다가 수용소에 재수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그의 두 아들과 며느리는 요덕 수용소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었으며, 그의 아들 중 한 명이 강철환과 요덕 수용소에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3]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정보는 북한에서도 특급 비밀에 속하며, 심지어 수용소에서 정치범을 석방할 때에도 수용소에 대해 발설하면 재수감하거나 사형에 처한다. 정치범들 또한 수용소를 나갈 때 외부에 이를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지장을 찍는다고 한다.[4] 현재 평양에서 농업과학원으로 근무하며 살아가고있는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