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환

 


'''강철환
姜哲煥 | Kang Cheol-hwan'''
'''출생'''
1968년 9월 18일 (55세)
평양직할시 중구역 경림동 [1]
'''본관'''
진주 강씨
'''국적'''
[image] 대한민국
'''가족'''
조부 강태휴, 여동생 강미호
배우자, 슬하 2남
'''경력'''
조선일보 기자 (2001~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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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저서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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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탈북민 출신의 언론인, 사회운동가.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가장 유명한 탈북자 출신 기자다. 북한의 강제 수용소인 요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1992년에 탈북하여 남한으로 입국하였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었다.

2. 상세


1968년 평양 출생으로 본관은 진주 강씨이다. 그의 할아버지 강태휴가 재일교포조총련 출신 간부였다고 한다. 1959년 재일교포 북송 사업 당시, 할아버지가 가족들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넘어가기 전에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북한에 들고 갔으며 수용소로 들어가기 전까지 평양에서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가 김일성, 김정일 후계문제로 사회주의에 맞지않는 봉건사회라고 비판 후 여러 관련된 문제[2]연좌제가 적용됨에 따라 1977년 일가족이 북한 요덕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가 수감될 당시 9살의 어린이였고, 당연히 아무 범죄도 저지른 게 아님에도 수감된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후임 조총련 회장을 비판한 것 뿐임에도, 민족반역죄란 죄를 덤탱이 쓰는 바람에 온 가족이 수감되어 끌려간 것이다. 10여 년을 수용 생활을 하다가 당시 일본 조총련들이 가족을 찾는 과정에서 북한의 재일 교포들이 수용소에 끌려가서 찾을 수 없자 조총련의 막대한 대북 지원금이 줄어들었다. 강철환도 일본에 친척이 있는 가족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3] 풀려나서 요덕군에서 고모의 지원으로 근근히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수용소로 끌려가게 될 상황[4]에 처하자, 동료인 안혁과 함께 중국으로 탈북하여 6개월 동안 칩거하면서 일본에 거주하던 고모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들어올 수단을 찾다가 결국 밀항이라는 방식으로 대한민국으로 들어왔다.
저서로 "수용소의 노래"[5]가 있다. 정치범수용소에서의 생활에 대한 수기다. 참고로 대왕의 제전이라는 책을 각색해서 2004년경 출판한게 수용소의 노래다.
여담이지만 그의 여동생인 강미호는 남편과 함께 2010년대 초반에 재수감되었다 카더라.
뜬금없이 지만원이 2019년에 강철환을 탈북광수라고 지목을 했는데, 정작 1980년 당시 강철환은 요덕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면 명백한 명예훼손. 이에 강철환은 하태경 새로운보수당 책임대표[6]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5.18 민주화운동은 북한에서도 민주 혁명 의식을 일으킨 민주화 혁명[7]이었는데, 지만원이 광주 정신을 왜곡하고 있다"'''며 지만원의 사죄를 촉구하였다.

3. 저서


  • 《대왕의 제전》, 1993.
  • 《평양의 어항》(Aquariums of Pyongyang) , 2000.
  • 《수용소의 노래》, 2003.
  • 《아! 요덕》, 2006.

4. 기타


[1] 남한 형식으로 표기하면 평양특별시 중구. 이북 5도 기준으로는 그냥 평안남도 평양시.[2] 당시 조총련 내부에서는 전임자와 후임자간의 파벌 다툼이 존재했는데, 실제로 수기 중에서 강철환의 할머니가 당시 조총련 후임자(한덕수)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악담을 퍼붓기도 한 것으로 보아 이러한 대립구도 하에서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3] 1987년~1989년. 그의 수기에서는 1987년으로 추측했으나, 최근 그에 따르면 1989년이 맞다고 한다.[4] 기존 서술에 의하면 친한 자들과의 술자리에서 한국 노래를 부르고 이 노래의 출처를 대북 라디오에서 들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술자리 동료들 중 하나의 밀고로 체포될 뻔했다가 보위부원에게 뇌물과 같은 성씨라는 점을 이용해 한 번 모면했지만 결국에는 위의 사안으로 체포 명령이 하달되었음을 뇌물을 준 보위부원에게서 몰래 들은 것이다.[5] Aquariums of Pyongyang(평양의 어항)이라는 제목으로 영문판도 발간.[6] 하태경 의원은 과거 열린북한방송 대표를 맡은 바 있어 강철환 기자와 매우 친한 사이이다.[7] 당시 북한의 386세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남조선처럼 북에도 이런 민주화 혁명을 일으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