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문 납북 사건
1. 개요
1979년 노르웨이에서 해외연수 중이던 수도여고 지리교사 고상문(1948년 12월13일생) 씨가 납북된 사건.
2. 납북되기 전 고상문씨 상황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한 고씨는 1978년부터 수도여고 지리교사로 근무했으며, 1979년 우수 논문작성으로 서울시 교육감상을 수상하고 정부가 주관하는 연수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1년 과정으로 1979년 네덜란드 국제훈련센터(ITC) 지질연구소로 유학을 떠났다.
연수 중 1주일간의 부활절 휴가를 이용, 동료들과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4월 16일 오슬로를 여행 중이던 고씨는 이날 오후 9시 50분쯤 관광을 하던 중 소지품이 든 가방을 시내버스에 놓고 내렸다. 노르웨이 주재 한국 대사관에 여권 분실 신고를 하기 위해 급히 택시를 탔으나, 남북한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택시 운전사가 고씨를 '''북한 대사관에 내려준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됐다.
당시 고씨는 신혼 15개월로,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연수 중에 아내에게 꾸준히 엽서로 연수 생활과 소감을 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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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건 발생 및 전개
1979년 4월 16일, 노르웨이 오슬로의 한 시내버스에서 고상문 씨의 여행가방이 발견된다. 그리고 2개월 후 6월 30일, 북한은 고상문 씨가 자진입북했다면서 본인의 기자회견 내용을 방송을 통해 공개했다.
그러나 외무부는 고씨가 여행 중 여권이 든 가방을 잃어버린 뒤 택시를 타고 대사관을 찾았지만, 공교롭게도 북측 대사관에 잘못 들어가게 되면서 현장에서 억류돼 제3국을 거쳐 강제 북송된 것이라는 상황을 파악하고 노르웨이 경찰에 수사를 요청하며 고씨 송환을 추진했다.
8월 22일, 노르웨이 경찰이 오슬로 한 호텔에서 고씨가 작성한 숙박계를 찾아냈다. 문제는 숙박계에 적힌 출생지와 국적이 평양과 북한으로 기재되어 있었다는 것. 링크. 노르웨이 측은 이 것을 보아 '고씨가 강제 납치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수사를 종결했다.
하지만 임신 중인 아내가 있는 등 월북할 동기를 전혀 찾을 수 없고, 애초에 노르웨이에 연수를 가게 된 것도 대한민국 정부가 선발했던 것이라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1] 실종 직전까지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여행 중이다가 분실물이 생긴 후 실종된 점과 숙박계 작성 당시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므로, 납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4. 그 후
신상옥 감독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중앙텔레비죤 방송에 출연하여 남한을 비판하는 고상문의 침울한 표정을 보고 북한이 써준 대로 대본을 읽고 있는 것임을 직감하고 자신과 같은 신세라 고상문을 내심 불쌍하게 여겼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탈북 시도를 하다 붙잡혀 끌려간 정치범수용소에서 다른 죄수로부터 고상문이 간첩 혐의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북한은 지들이 고상문을 납북해온 주제에 고상문이 미국 간첩으로 의거입북했다는 황당한 죄를 만들어 그를 승호 수용소에 가둬놓은 것이다. 이후 1994년 7월 국제사면위원회는 그가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있다고 확인하였으니, 1979년 부터 장장 15년 이상을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수감 사실이 알려져 국제적으로 시끄러워지자 북한은 그를 석방했다.
가족으로는 아내와 사건 후 태어난 딸이 있었는데, 아내는 20여 년 가까이 국가와 북한을 상대로 남편의 송환을 호소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다 199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뉴스, 기사.
2011년, 북한 당국이 작성한 만 17세 이상 평양시민 신상 자료에 따르면 고상문씨는 평양에 거주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기사.
2015년, 한인 입양아 출신으로 노르웨이 3대 일간지 다그블라데트(Dagbladet)의 부편집장을 맡고 있는 하이디 쇠비 씨가 고상문 씨 사건 다룬 책 'KIMS LEK'(김일성의 게임)을 출간해 이 사건이 다시 재조명 되기도 했다.
2015년, 고상문(67세) 씨는 북한 농업과학원 소속으로 보위부의 감시 속에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
현재 고씨의 외동딸 현미 씨가 아버지의 송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가 납북될 당시 생후 8개월이었던 그녀는 2019년 현재 41세의 중년이 되었다.
5. 관련 문서
[1] 당시 해외 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라 해외에 나가려면 절차가 까다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