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득

 

施得
생몰연대 미상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신라 중대 문무왕 시대의 수군 지휘관.
이름이나 관등을 보았을 때 진골이 아닌 6두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670년의 설오유와 함께 나당전쟁 당시 진골 귀족이 아닌 자가 대병력을 인솔한 유이한 사례 중 하나.

2. 생애


나당전쟁이 진행되던 7세기, 당나라는 육로를 이용해 675년 대대적으로 신라를 침공했으나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의 승리로 패퇴했고 이듬해인 676년 11월에는 절치부심한 설인귀가 당나라 수군을 이끌고[1] 신라의 서해로 쳐들어오게 된다.

(중략)겨울 11월에 사찬(沙湌) 시득(施得)이 수군[船兵]을 거느리고 설인귀(薛仁貴)와 소부리주(所夫里州)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을 벌여 이기고서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기 권7 7 신라본기 문무왕 16년 11월(676년 음력 11월) 기사

당시 17관등 중 8관등 사찬 관등에 있던 장수 시득이 소부리주[2]에 있는 금강 하구 기벌포[3]에서 100척 정도의 병선으로 맞서 싸웠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가해 크고 작은 전투 22번에서 모두 승리했고 4천여 명의 수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이 나당전쟁의 마지막 싸움인 기벌포 전투이며 이 전투를 끝으로 당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완전히 포기했고 7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끝이 났다.

3. 기타



소설 삼한지에서는 시득을 김유신천관녀 사이의 서자 김시득으로 해석하는 파격적인 설정을 내놓기도 했다. 김유신의 아버지로 시작한 소설이 김유신의 아들로 마무리되는, 어찌보면 수미상관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1] 당나라는 앞서 백제, 고구려와의 싸움 때도 황해로 대규모 수군을 보내 쏠쏠한 성과를 봤다.[2]백제수도권,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과 인근 지역을 관할[3]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