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읍

 


'''장항읍'''
長項邑
Janghang-eup
}}}

<colcolor=#ffffff> '''광역자치단체'''
충청남도
'''기초자치단체'''
서천군
'''행정표준코드'''
4580033
'''하위 행정구역'''
10리
'''면적'''
18.81㎢
'''인구'''
11,108명[1]
'''인구밀도'''
590.53명/㎢
'''행정복지센터'''
장항로 208 (창선1리)
홈페이지
1. 개요
2. 교통
2.1. 도로
2.2. 철도
2.3. 버스
2.4. 항만
3. 역사
3.1. 장항의 건설과 발전
3.3. 군장국가산업단지의 실패와 장항국가생태산업단지
4. 공공기관
5. 하위 행정구역
5.1. 장항 시가지 지역
5.1.1. 창선1리
5.1.2. 창선2리
5.1.3. 신창리
5.2. 장항 시가지 외 지역
5.2.1. 화천리
5.2.2. 송림리
5.2.3. 원수리
5.2.4. 성주리
5.2.5. 장암리
5.2.6. 옥남리
5.2.7. 옥산리
[clearfix]

1. 개요


충청남도 서천군 서남부에 있는 이다. 동쪽으로는 마서면, 서쪽으로는 서해, 남쪽으로는 군산시 구 시내권 및 소룡동[2], 북쪽으로는 마서면에 접해있으며, 장항읍의 이름은 서천군의 옛 남부면 지역에 있었던 '''장'''암리와 '''항'''리를 합쳐 만든 서남면 장항리에서 유래하였다.

2. 교통



2.1. 도로


장항읍 내의 주요 도로로는 4번 국도의 일부인 대백제로(서천, 보령, 부여 방면), 68번 국지도의 일부인 장산로(하굿둑, 군산, 부여 방면), 617번 지방도의 일부인 장천로(보령, 종천 방면), 장마로(마서면 방면) 등이 있으며 이 중 대백제로 구간에 동백대교가 개통된다면 기존에 하굿둑을 경유하여 군산을 가는 것 보다 더 빠르게 군산을 갈 수 있게 된다. 고속도로의 경우 장항읍에서는 직접 연계되지는 않으나, 서천읍에 있는 서천IC, 화양면에 있는 동서천IC, 군산시에 있는 군산IC를 행선지가 어디냐에 따라서 적절하게 이용하면 된다.

2.2. 철도


본래 장항선의 종착역이었던 장항역이 장항 시가지 지역인 창선2리에 있었으나 장항선 직선화 공사로 장항읍이 아닌 마서면으로 신역사가 이동하었다. 그래서 현재는 장항선 열차를 타려면 버스나 택시를 타고 국립생태원 후문에 있는 장항역까지 가야한다. 시외버스의 경우 대부분 국도를 경유하여 가므로 요금도 비싸고, 시간은 더더욱 오래걸려 장항선 연선 지역을 빠르게 가야하는 경우에 어쩔 수 없이 열차를 타고 가야되는 상황이다. 참고로 원래 있던 역사는 장항화물역이 되어 장항화물선의 역으로서 화물수송의 기능만하고 있었으나 2016년 12월에 철도 파업 이후 운행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2.3. 버스



2.3.1. 시내버스



2.3.1.1. 서천군 농어촌버스

서천군 농어촌버스의 노선 계통은 크게 5개로, 617번 지방도를 경유하는 옥산 방면, 원수리-송내리-신포리-(도삼리)-산내리-삼산리를 경유하여 서천으로 가는 장상(원수) 방면, 마서면 덕암리를 경유하는 서천 방면, 원수리를 경유하여 화양으로 가는 화양(원수) 방면, 송림리 방향으로 가는 장암 방면이 있다. 이 중 가장 운행횟수가 많은 노선은 서천 방면으로 마서면 경유 또는 종천면 경유 노선 포함 30분에 1대 간격으로 운행하며, 마서면 경유 서천 방면 버스가 장항역을 경유한다.

2.3.1.2. 군산시 시내버스

장항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국립생태원 입구, 금강하굿둑, 군산역 입구, 군산제일고등학교, 군산시외버스터미널, 구 시내, 대학로, 나운동, 군산의료원을 경유하여 새만금북로를 통해 군산대학교(미룡동)까지 가는 배차 간격이 1시간인 군산 버스 71번 버스가 있다. 추후 동백대교가 개통한다면 동백대교를 경유하여 구 시내 지역으로 가는 노선으로 바뀌거나, 새로 노선이 신설될 확률이 높다.

2.3.2. 시외버스


시외버스 터미널로는 장항버스정류장이 있으며 주요 행선지로는 서울남부, 대전, 대전서부, 천안, 군산, 전주 등이 있으며 특히 대전복합의 경우 직통이지만..서울남부, 대전서부, 천안 방면의 시외버스의 경우 완행 버스인지 직통 버스인지 보고 탈 것. 안그러면 괜히 시간 낭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차가 너무 적다고 생각되면 71번 군산 시내버스나 군산행 시외버스를 통하여 군산시외버스터미널이나 군산고속버스터미널로 가면 보다 더 많은 배차에 다양한 행선지로 갈 수 있게 된다. 단, 천안행의 경우 군산터미널도 배차 간격이나 소요 시간이 비등비등하므로 차라리 장항선 연선 지역은 귀찮더라도 장항선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이 보다 더 빠르고 좋다.

2.4. 항만


현재 한솔제지 장항공장 을 조금 못가서 장항항이 있다 한솔제지를 넘어 옛 장항제련소 방향으로 쭉가면 장항신항이 있다 대게 안강망 어선들이 많으며, 몇몇 군산 어청도,연도에 사는 주민들이 어선을 신항에 정박시킨다.[3]

3. 역사




3.1. 장항의 건설과 발전


장항은 본래 서천군 남부면 일대의 갈대밭이었던 지역으로, 이 지역 땅을 갖고 있는 지주들도 개간하지 않고 버려두고 있는 땅이었다. 1914년 서천군 일대에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진 뒤에도 장항에 큰 변화는 없었다. 장항에 본격적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산미증식계획이 시작된 뒤였다.
1923년 일본인 지주들은 서천수리조합 설립 인가를 받은 뒤 수리조합을 설치, 시초면 봉림리에 봉림저수지, 종천면 흥림리에 흥림저수지를 만들어 몽리구역 3,100정보를 마련하고 추가로 장구리 지역을 포함한 장항 옥남지구에 400정보를 추가하여 3500정보의 넓은 몽리구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장항에 옥남방조제가 건설되면서 가타키리 카즈미라는 일본인 지주에 의해 매립공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장항 개발 홍보용으로 제작된 『伸ぴ行く長項(발전하는 장항)』(1937)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장항이 경남철도(장항선)의 종착역이 되자 항구로써의 생명을 발휘해 왔다. 즉 충남의 물자는 물론 경기·강원·충청도 각도 심줄로서 물자의 집합을 이루고 특히 미곡의 반출은 년 60만석에 이르렀다. 그런데 항만의 설비를 갖추지 않고 또 상수도 시설의 부적으로 인해 일본 배의 입항이 자연 감소하고 또 하주(물건주인)측의 불편이 많고 더구나 장항항의 쇠함과 성장함은 충남의 산업, 농민의 경제에 영향을 주는 곳이 커서 장항 항만시설을 급히 서두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충청남도 당국은 장항항 대책을 계속해서 강구하여 왔다. 마침내 전 도지사 이범익(李範益) 때에 이르러 장항항 수축 및 시가지 매립을 단행하게 되었고, 현 도지사 정교원(鄭僑源) 때에 이것을 이어받아 실행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장항지방에서는 축항기성회를 만들어 가타끼리(片桐)를 회장으로 그 발전을 노력해 마침내 새로운 장항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장항항 수축공사, 매립공사의 실현은 충청남도 당국의 대 영단이 있었다. 단 총독부 당국이 이것을 후원해 주었기 때문에 속히 개척되었다. 이 문제 때문에 장항 지주들이 단결해서 매진한 열성으로 마침내 보답을 얻게 되었다. 이 수축공사에 있어서는 국고의 보조에 의존하고, 매립공사에 있어서는 전액 도비의 부담으로 이루어 졌다. 이것을 시설하는 재원은 채무에 의한 것으로 매립토지 상환 재원으로 충원한 것이다. 이 시설이 완성되는 그날 장항항에 많은 물자가 모이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 확실하다.

현재 장항에 집중되는 각종 화물의 상권은 대체로 미곡과 마찬가지로 아산·예산·천안·연기·서산·당진의 각 일부를 제외 모두 장항과 군산항에 반출되는 상황이지만 장항항 시설 완성의 그 날은 서산·당진의 각 일부를 제외한 도내 일원의 화물은 모두 장항으로 운송될 것이다. 또 인접한 타도에 있어 현재 상권은 충북의 진천·음성·괴산·청주·충주·제천·단양, 강원도의 원주·평창·정선, 경기도의 이천·용인·수원·진위(振威)·광주·여주등이지만 조치원 장항을 잇는 중남(中南)의 중앙선인 조장(鳥長: 조치원과 장항)철도의 개통과 경기철도의 장호원선의 연장에 동반, 더욱이 충북 관내의 단양·제천의 일부, 강원도 관내의 횡성 및 영월의 각 부분까지 확장될 것이 확실하다. 당면한 것으로 충남 중앙선인 조장 간(조치원·장항간) 철도의 부설은 가장 시급한 것이 되고 있다. 또 장호원선의 연장도 머지않아 실현을 보게 될 것이다.

장항은 이와 같이 장항선의 부설과 장항항 개발을 통해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는데, 위의 서술에서도 보다시피 한반도의 물자를 일본으로 유출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직접 장항 개발을 후원해 주었다는 점에서 장항 개발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있어 중요한 사업이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장항이 개발되기 시작하자 마동면 장항리[4][5][6]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1931년 장항리 일대의 인구는 1,256명에 불과하였지만, 5년 뒤인 1936년에는 7,856명까지 증가하였다. 이 시기 장항을 묘사한 『伸ぴ行く長項』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장항은 충청남도 서천군의 마동면 장항리를 중심으로 하고 이에 산서리·수동리를 병합한 시가지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매립한 항만 시설이 완공된 그 날에는 발전해 가는 시가지를 포함해 대장항을 드러낼 것이고 더욱이 배후 서천평야도 발전해 갈 것이다. ···( 중략 ) ··· 장항을 중심으로 마동면 전체의 인구가 최근 4년간에 3천여 명이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장항이 갑자기 경남선의 종착역으로서, 또한 충남 유일의 이름 있는 항으로서 중요성을 드러낸 결과이며, 전입자의 증가에 의한 것이다. 확대되고 있는 장항의 현황에서 생각하면 이미 2만 인구[7]

를 포용하고 있다. 충청남도 주요도시의 인구는 대전을 제외하고 조치원 1만 수천 명, 공주 1만 수천 명, 논산 8천여 명, 강경 1만 수천 명, 예산 1만 수천 명, 서산 1만 명, 온양 1만 명, 천안 2만 명이라 일컬어지지만 장항은 이미 이들의 주요 도시에 육박하고 게다가 최근 발전하는 상태로 보면 이들의 주요 도시를 능가하는 것도 먼 일은 아니다.

장항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마동면 수동리, 산서리, 장항리와 서남면 옥남리, 옥산리, 장항리를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통합, 장항읍이 형성되었으며 본래 장항 지역을 관할하던 마동면과 서남면이 통합되어 마서면으로 개편되었다.

3.2. 장항제련소 개발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까지 한반도에서는 금을 필두로 한 광업이 성행했다. 일본에서 군국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전략물자 조달의 결제수단으로서 금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금 광산과 더불어 금을 제련하기 위한 제련소 시설도 확충되었다. 흥남제련소를 건설했던 조선제련주식회사의 주도 하에 건설된 장항제련소 역시 이 시기에 건설되어 조선 3대 건식 제련소로서 명성을 갖게 되었다. 『伸ぴ行く長項』의 묘사는 다음과 같다.

소화 11년(1936) 6월 3일 준공한 것으로 장항제련소의 설비는 조선내의 제련소에 설치되어 있지 않는 용광반사로와 규석광이 많은 조선의 실정에 비춰보아 습식찬 공장을 설치한 것과 분석의 설비는 특색이다. 현재 제1기 설비는 145톤의 분광을 소결(燒結)하는 소분로 3좌, 1주야 100톤의 광석을 용광하는 각로(角􆧖) 1좌, 1주야 30톤의 광석을 용광하는 환로 1좌, 1주야 30톤의 분광(粉鑛)을 처리하는 회소로(回燒􆧖) 1좌, 한 달에 140톤의 전기동을 산출하는 전해설비, 한 달에 1천 톤의 광석을 처리하는 습식찬 광장 100마력 전동직렬 라르형 터보 송풍기 1대, 100㎾ 직류 전동 발전기 1대 등 그 외 광석의 운반시료 채석등 각종 설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1주야 150톤의 광석을 용광하는 각로 1기, 100마력 전동직격 카트형 터브 2대, 100㎾ 직류 전동 발전기 1대, 원 운반용 5톤 적 가솔린차 2대 등으로 증설하는 일이 되어 이것은 오는 8월 완성하는 것이다.

(중략)

조선의 금 광산은 하저에 굴진하기에 따라 많은 각종 유화광물을 수반하고 이들은 건식제련에 의존하지 않으면 채취 곤란해서 장래 더욱 건식 제련시설의 확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조선제련이 건식 제련시설을 설치함에 따라 반도 광업계 내지는 공업계에 공헌하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장항제련소가 안보(安保) 소장 이하 전 직원이 열렬한 노력으로 그 사업, 그 사명의 달성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장항제련소의 설치에 장항이 갑자기 활기를 더해 온 것은 사실이고, 또 이것에 따라 자극 받아 장항에 공업을 일으켜 공장을 신설하려고 하는 자가 많아지는 징조가 있음은 장항이 여러 방면에서 관찰하여 공업지로 적절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3.3. 군장국가산업단지의 실패와 장항국가생태산업단지


일제강점기 당시 장항은 번성한 도시였지만, 해방 이후에는 일본으로 물자를 유출하는 항구의 기능을 상실한 전형적인 식민지 도시였다. 장항은 제련소를 통해 그 충격을 완화하였으며, 장항항 역시 장항제련소의 물동량을 담당하는 항구로서 재기능하였다. 이 시기에는 제련소 직원이 제일가는 신랑감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그러나 이 역시 1980년대에 접어들며 제련소가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제련소의 기능 대부분이 울산온산제련소로 이관되었다. 게다가 서천군 전체적으로 마땅한 성장동력을 갖지 않아[8] 전반적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8월에 2021년까지 장항읍, 마서면 일원을 포함해 군산까지 아우르는 군장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장항에는 개발의 기대가 부풀어올랐다. 아산만, 광양만과 함께 이 지역을 전국 3대 신산업임해공단으로 육성하고 대단위 항만을 개발해 대중국무역의 최일선을 담당하는 무역기지로 개발한다는 계획이었다. 1차금속, 기계, 비금속광물, 석유화학 등 8개 업종을 유치할 예정이었던 군장국가산업단지 장항지구는 서천의 희망이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개발은 답보상태를 계속했다. 군산지구가 간척되고 공단이 들어오는 상황 속에서 장항은 삽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경제성 문제였다. 당시 계획에 따르면 군산지구를 만든 뒤 장항지구 개발을 시작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군산지구의 개발이 IMF 금융위기와 겹치면서 실제 입주율이 예상치보다 밑돌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계획 면적은 점차 줄어갔고[9], 그러고도 사업성을 담보하지 못해 착공이 치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다. 둘째는 환경문제였다. 장항지구 개발을 위해서는 장항읍과 마서면 일대의 갯벌을 메워 간척지를 만들어야 했지만, 이 일대의 갯벌이 그 자체로 보전의 가치가 높은데에다 철원, 천수만과 더불어 한국의 주요 철새도래지라는 점이 환경단체와 환경부의 반발을 불러왔다. 개발이 지연되자 장항을 비롯한 서천군 전역에서 개발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붙었고, 시민단체가 중앙부처에 항의방문을 하기도 했다.
결국 2007년 정부에서 간척 계획을 필두로 한 군장국가산업단지 장항지구 개발을 내륙산단으로 변경하고, 국립해양생물자원관국립생태원을 제공하는 형식으로 개발 지연을 둘러싼 갈등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동안 장항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였고, 한때 인구 3만 명을 넘기던 장항은 이제 1만 2천명을 밑도는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4. 공공기관


서천군서천읍 관내에 있어야할 소재지들이 서천이 아닌 장항에 소재하는 이유는 과거 '''장항읍'''이 서천읍보다 규모가 크고. 장항이 비중이 월등하게 컸기에 당연히 장항읍에 소재하였다.[10]
서천경찰서가 신창리에, 서천소방서가 화천리에,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 서천등기소가 원수리에,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이 송림리에 있다.

5. 하위 행정구역



5.1. 장항 시가지 지역



5.1.1. 창선1리


장항 시가지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본정1정목이라 불렸으며, 해방 이후에는 창선동1가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1988년 전국 읍면부의 동을 리로 변경하는 정책에 따라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과거 일본에 쌀을 보내던 물량장과 미곡창고가 이 지역에 있다.

5.1.2. 창선2리


장항 시가지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본정2정목으로 불렸다. 해방 이후에는 창선동2가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1988년 전국 읍면부의 동을 리로 변경하는 정책에 따라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장항 개발 초기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했던 지역이라 하여 신부락이라는 지역이 있다.[11]

5.1.3. 신창리


장항 시가지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삼기정으로 불렸다. 해방 이후에는 신창동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1988년 신창리로 되었다. 장항전통시장, 서천경찰서, 풍농비료공장[12], 퍼시픽글라스, 한솔제지 공장이 위치해있다.

5.2. 장항 시가지 외 지역



5.2.1. 화천리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화천정으로 불렸으며 해방 이후 화천동으로, 1988년 화천리로 되었다. 서천소방서, 장항공업고등학교 등이 위치해있다.

5.2.2. 송림리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송빈정으로 불렸으며 해방 이후 송림동으로, 1988년 송림리로 되었다. 송림해수욕장,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이 위치해 있다.장항 수심원이 있었던 유부도가 송림리에 속한 도서이다.

5.2.3. 원수리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수동리로 불렸으며, 해방 이후 부군면 통폐합 이전에 있었던 수여리와 원모리의 이름을 따 원수동으로 개칭했다. 1988년 원수리가 되었다.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 서천등기소, 장항중학교, 원수농공단지가 있으며 과거 소규모의 조선소가 들어와 있었으나 철수했다.

5.2.4. 성주리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산서리로 불렸으며 1948년 성주동으로, 1988년 성주리로 개칭되었다. 전형적인 농촌 지역으로 장항초등학교, 장항고등학교가 있다.

5.2.5. 장암리


장항의 명칭 유래가 되기도 했던 명칭으로, 조선시대에는 장암진이 있어 군사기지 역할을 했다. 1936년 장항제련소가 들어서 있었으며, 이 지역을 상징하는 것으로 제련소 굴뚝이 있다. 현재는 제련소 기능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LS니코동, LS산전 공장이 들어서 있으며 장항제련소 인근의 중금속 오염으로 인하여 인근 주민들이 소개된 바 있다.

5.2.6. 옥남리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옥남정으로 불렸다가 해방 이후 옥남동으로, 1988년 옥남리로 개칭되었다. 읍면 단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의 전형적인 농촌이나 장항국가생태산업단지 계획에서 아파트 단지를 비롯한 주거지와 상가, 학교가 들어설 예정인 지역이다.

5.2.7. 옥산리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옥동리로 불렸다가 해방 이후 옥산동으로, 1988년 옥산리로 개칭되었다. 옥남리와 마찬가지로 농촌 지역이며 장항국가산업단지 계획 상에서도 공장 부지 일부만 걸쳐져 있다.[참고_B] 참고로 명칭만 보자면 송림리에 있어야 할 송림초등학교는 주소상 이곳에 있다.[13]

[1] 2020년 8월 주민등록인구[2] 대죽도, 소죽도, 유부도 및 기타 송림리 소속 도서 지역 한정이다.[3] 아무래도 군산 내항에서 가는것 보다 장항신항에서 가야 시간과 기름이 단축된다[4] 본래 서남면 장항리였으나 일부를 떼어 마동면에 편입하였다. 서천군청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서천지명유래'에서는 단순히 서남면 장항리라고 서술하였으나 마찬가지로 홈페이지에 있는 2009년판 서천군지에는 『伸ぴ行く長項』의 기록을 바탕으로 마동면 장항리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는 당대 자료가 명시된 후자를 기준으로 서술. 이후 본 문단에서 말하는 장항리는 마동면 장항리를 의미한다.[5] 보다 구체적으로는 마동면 장항리 1구, 장항리 2구로 구분하였다.[6] 단 개요에서 설명된 명칭 유래의 설명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서남면에 장항리를 그대로 남겨둔 채 마동면에 장항리 일부를 편입한 것.[7] 당시 장항의 배후지였던 마동면과 서남면의 인구를 합친 것으로 추측.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1935년 마동면의 인구는 13,419명, 서남면의 인구는 10,316명이었다.[8] 본래는 1960년대 중반 비인공업지구 계획이 있었지만 슬그머니 없던 일이 되었다.[9] 사실 초기 계획안 자체가 약 350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인 서천군에 약 80제곱킬로미터의 간척지를 만든다는 위엄찬 계획이었기 때문에 계획 초기에 면적이 상당히 줄어든 편이었다. 그것에서 더 줄어든 것.[10] 충청남도 내에도 같은 곳이 하나 더 존재하는데, 논산시강경읍이 위와 비슷하다.[11] 일반적으로 로터리부터 창선우편취급국이 있는 사거리까지를 말한다.[12] 일제강점기 당시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조성되었다가 버려진 부지에 지어졌다.[참고_B] 공장 부지 예정지역 절반은 마서면 옥북리가 가져갔다. 사실 이것도 줄어든 것으로, 서천군/역사 항목에 있는 초기 토지이용계획도 상에는 공장 부지 대부분이 마서면 옥북리 지역이었다. 옥남리 지역에 들어서기로 했던 주거지역 계획이 공장 부지로 변경되어 그나마 비중이 줄어든 것.[13] 학교 건물은 옥산리, 운동장은 송림리로 나뉘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