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노스 왕조
1. 개요
디아도코이 시대 이후 마케도니아를 지배한 왕조
디아도코이 전쟁 초반 패권을 장악했던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의 손자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가 전사한 이후에 에피로스의 피로스 1세를 몰아내고 세운 왕조로,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와 친교를 맺으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견제했다. 필리포스 5세 때에는 클레오메네스 전쟁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이후 일련의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에게 패배하며 멸망했다.
2. 역사
2.1.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의 아시아 장악 전쟁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는 BC 323년 바빌론에서 불과 33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대왕의 이복동생인 필리포스 3세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그는 이미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실권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생전에 말했던 "가장 강한 자"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BC 323~317)는 제국을 통치할 기량이 부족한 데다가 항상 형의 뒷전에 밀려나 있어서 제왕이 되기 위한 교육도 받지 못한 평범한 젊은이일 뿐이었다. 그는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는 노장이면서, 대대로 마케도니아의 아르가이 왕가를 비호해 온 안티파트로스의 비호 속에서 왕위는 유지할 수 있었다. 안티파트로스는 통일 제국을 유지시킬 힘이 있었으나 BC 319년 천수를 모두 누리고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제국의 실권은 폴리페르콘에게 넘어갔다.
안티고노스는 곧 폴리페르콘에게 대항했으며, 리키아 총독 에우메네스, 바빌로니아 총독 셀레우코스, 메디아 총독 페이톤, 마케도니아 총독인 카산드로스와 합세하여 폴리페르콘을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마케도니아 본국에는 필리포스 3세를 인정하지 않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 미망인 록사나, 그리고 어린 왕 알렉산드로스 4세(BC 323~305)가 있었다.
폴리페르콘은 그들의 진영으로 들어가 안티고노스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안티고노스는 곧 에우메네스나 셀레우코스, 페이톤 등이 나중에 자신과 겨룰 세력이 된다고 판단하여 에우메네스와 페이톤을 붙잡아 처형하였으나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의지하여 이집트로 도망갔다. 안티고노스는 재빨리 소아시아를 장악하고, 시리아로 쳐들어가 상당 부분을 획득했다. 곧 카산드로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트라키아 총독인 리시마코스가 안티고노스에 대항하자, 안티고노스는 자신이 마케도니아의 유일한 섭정임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그리스인은 모두 자유인이며, 도시국가의 독립은 존중되어야 한다"라는 선포를 하여 그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즉시 같은 포고를 함으로써 이에 대응하였다.
2.2.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입소스 전투
셀레우코스의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안티고노스는 바빌로니아와 엘람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진전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안티고노스는 당시 프톨레마이오스령이었던 페니키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역시 별로 득이 되지를 못하였고, 오히려 BC 312년 '''가자의 결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군과 셀레우코스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를 회복했고, 안티고노스의 영토는 시리아와 소아시아로 국한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셀레우코스를 제외한 모든 적들과의 적대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섭정" 칭호도 포기해야만 했다. 일단 전쟁이 정리되는 듯 보였으나 다시 2년도 채 안돼 프톨레마이오스군이 동맹군을 이끌고 안티고노스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놓고 벌인 쟁탈전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가 뛰어난 전공을 올려 아테네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획득하게 되었다. 카산드로스는 그리스 도시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아테네인들과 마케도니아 장수들은 곧 안티고노스를 왕으로 추대했고, 그로써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BC 306~301)가 탄생했다. 특히, 안티고노스 1세가 왕위에 오르던 해,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데메트리오스가 이집트 해군을 대파함에 따라 이 왕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안티고노스 1세는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 연안에 안티고네이아(BC 306)를 세워 수도로 삼고 이 사건을 기념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안티고노스 측에서 공세로 나와 이집트군을 공격해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패배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역시 왕조를 선포하고 국왕이 되었다(BC 305). 이 사건 직후 셀레우코스와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도 왕을 자칭하여 알렉산드로스 3세의 대제국은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헬레니즘 세계는 5왕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 1세는 동맹국인 로도스와의 사이가 틀어져 그들의 해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데메트리오스 1세가 이들을 공략하는 데 실패하여 결국 불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이 사건 이후 "폴리오르케테스(공성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 1세는 그리스 본토에서 커다란 성과를 올려 아테네를 포위한 카산드로스군을 격파해 안티고노스 왕조는 이제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을 장악하게 되었다(BC 302). 이를 발판으로 카산드로스에게 항복을 강요했는데, 궁지에 몰려있던 카산드로스를 구하기 위해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동맹을 맺고 안티고노스 1세를 공격했다. 이때 안티고노스 1세의 휘하에 있던 제후들이 반역을 일으키거나 협력하지 않아 결국 안티고노스 1세가 '''입소스의 결전'''(BC 301)에서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동 왕이었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도망쳐 겨우 목숨만을 건지고, 안티고노스 왕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수도 안티고네이아는 곧 근처에 세워진 안티오키아에 묻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2.3. 데메트리오스 1세의 비극과 피로스 1세
'''데메트리오스 1세'''(BC 306~285)는 그리스 본토로 도망쳐 재기를 노렸다. 가장 먼저 카산드로스의 동생인 플레이스타르코스가 뺏어간 소아시아의 킬리키아와 리키아를 탈환했다. 한편 아테네인들은 지난날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리스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먼저 아버지의 원수인 셀레우코스 1세에게 딸 스트라토니케를 주어 화해를 함으로써 배후를 안정시켰다. 이후 아테네의 참주를 쫓아내고 공화정체를 회복시켰다. 이리하여 데메트리오스 1세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BC 294년 카산드로스 왕국 내의 왕위 다툼에 개입하여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5세를 쫓아내고 자신이 마케도니아의 왕좌에 앉았다.
하지만 이 때를 노려 셀레우코스 1세가 킬리키아를,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리키아를 가져감으로써 소아시아의 영토를 빼앗겼으며. BC 288년 에피루스 왕인 피로스 1세,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의 공격을 받아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BC 286년, 절치부심한 데메트리오스 1세는 아들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게 그리스와 테살리아를 맡기고 소아시아 원정에 나섰으나 기근과 역병에 지친 병사들의 배신으로 셀레우코스 1세에게 붙잡혔고, 3년 뒤인 BC 283년, 셀레우코스 1세의 영역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도중 사망했다. 이후 안티고노스 2세가 뒤를 계승하여 제3대가 되었지만, 아직 마케도니아 왕위 등극까지는 좀 더 기다려야 했다.
2.4. 안티고노스 2세의 선정과 피로스, 외치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의 제3대 왕이 된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BC 277~239)는 켈트족의 침입과 피로스 1세와의 대립이라는 난제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켈트족의 침입으로 고통받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뭉쳐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 연합군을 이끌고 '''리시마케이아 전투'''에서 켈트족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공적으로 그는 대외적으로 마케도니아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왕조를 중흥시킨 안티고노스 2세는 성정이 온화하고 관대하여 군주의 인상으로 걸맞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런 "'따르고 싶은 군주의 인상"'은 안티고노스 왕조 군주들의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의 통치가 수월해지는 한 가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후 갈리아인의 침입으로 인해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사이가 좋아져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BC 275년 로마와의 피로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피로스 1세가 그 이듬해인 274년, 아직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단계인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천재라 불리는 무인의 공격에 마케도니아군은 결국 대부분의 영토와 수도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이어 BC 272년 아르고스에서 피로스 1세가 뜻하지 않게 사망하자 안티고노스 2세는 다시 뜨거운 환호 속에서 왕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서쪽의 일리리아, 동쪽의 트라키아와 친선관계를 구축하고 코린트, 에우보이아, 테살리아에 군대를 주둔시켜 그리스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다지는 데 힘썼다. 그러자 마케도니아에 흡수당할 것을 두려워 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이집트의 지원 속에 '''크레모니데아 전쟁'''(BC 267~261)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테네는 BC 263년에 항복하고 마케도니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크레모니데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자, 제2차 시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여기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편을 들어 이집트의 해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고, 이집트의 영향하에 있던 에게 해의 여러 섬들에 대한 지배권을 비로소 손에 넣었다.
2.5. 동맹 전쟁과 그리스 패권
그러나 BC 253년에 조카 알렉산드로스가 반란을 일으켜 코린트를 손에 넣었다. 이 상태가 10년 동안 지속되면서 마케도니아가 그 동안 쌓아온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BC 244년에 혼인외교와 계략을 적절히 사용하여 코린트를 회복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동안 형성된 아카이아 동맹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지배를 끊임없이 방해하였으며, 이 동맹에게는 어떠한 계략을 써도 잘 통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아카이아 동맹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원을 얻게 되자 사태는 점점 커지게 되었다. 아카이아 동맹은 코린트를 기습하여 마케도니아군을 물리치고 점령했다. 그와 동시에 유력한 그리스 도시인 에피다우로스, 트로이젠 등이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벗어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카이아 동맹의 숙적인 아이톨리아 동맹의 지지를 획득하여 아카이아 동맹에 대항했다. 마케도니아는 아이톨리아 동맹과 연합하여 자주 그리스 땅을 침공했으나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안티고노스 2세는 스토아 학파 철학자인 제논의 제자로서, 그가 제논을 수도인 펠라로 초대하고자 하였으나 제논이 거절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군주가 법 아래에서 신민들을 위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상당히 개화된 군주였으며, 그 자신이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다. 안티고노스 2세는 그의 치하에서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지배가 공고해져 안정적인 왕조를 이룩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 뒤를 이은 이는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BC 239~229)였다. 아버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에페이로스(에피루스)에 대해 공격적으로 나아갔는데 에페이로스의 왕 알렉산드로스 2세를 이겨 이미 소년 시절부터 그 이름이 높았었다. 그의 시대에는 두 라이벌이 크게 힘을 얻었는데, 아이톨리아 동맹과 아카이아 동맹이 서로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에 대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 에페이로스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이 겹쳐 그의 치세에는 왕권이 서서히 약해지는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데메트리오스 2세는 두 동맹으로부터 보이오티아를 떼어내는데 성공함으로써 치세를 만족스럽게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북방 민족과의 싸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다르다니아인들의 침입이 거세지는 속에서 어린 아들 필리포스 5세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필리포스가 너무 어린 관계로, 데메트리오스 2세의 사촌인 '''안티고노스 3세 도손'''(BC 229~221)이 제5대 왕으로 즉위했다. 안티고노스 3세의 별칭인 “도손”은 “맡아 두는 자”, “주려고는 하지만 주지는 않는 사람” 등을 뜻했다. 즉위 초, 선왕 때부터 이어져 온 북방 민족과의 대처를 성공적으로 끝낸 이후, 아카이아 동맹의 리더인 시크온의 아라투스를 지원해 아이톨리아 동맹의 리더인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 3세를 약화시켰는데, 결국 수 년간의 전쟁 끝에 BC 222년의 셀라시아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킴으로써 스파르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직후 일리리아인들의 침입을 받아 마케도니아로 귀환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일리리아인들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그 전쟁 도중에 사망하게 된다. 안티고노스 3세의 8년 치세 동안 안티고노스 왕조는 마케도니아에서의 안정적 왕권을 결정적으로 굳히게 된다. 그의 치세 동안 더 이상 마케도니아에 대항할 만한 그리스 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2.6. 그 후, 그리고 1차 마케도니아 전쟁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인 '''필리포스 5세'''(BC 221~179)가 그 뒤를 이었다. 필리포스 5세는 이제 겨우 18세가 된 혈기 넘치는 젊은이였다. 당숙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 왕이 되자마자 그는 지난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이룩한 업적을 본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전 그리스로 확대하기 위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로마로부터 패배의 쓴잔을 맛보기 전까지 팽창주의 정책을 견지하게 된다. 즉위하자마자 그리스에서 발생한 동맹 간의 전쟁에 관여해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BC 215년에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와 함께 로마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이었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살로나를 비롯한 달마티아 지방의 패권을 노리고 있었는데, 선수를 로마에게 빼앗긴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에게 대패를 맛본 로마는 마케도니아에 제대로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필리포스 5세에게 약간의 양보를 하여 결국 BC 205년 잠정적인 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로써 필리포스 5세는 달마티아 해안의 점령지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고, 이에 자신감이 붙은 그는 아이톨리아 동맹에도 유리한 조건의 조약을 강요하여 인준을 받아냈다. 이어 셀레우코스 제국의 대왕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고, 안티오코스 3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몰아붙여 이집트가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필리포스 5세는 이에 편승하여 아나톨리아 북서부와 에게 해 도서지역, 친 이집트 계열의 도시국가를 자국령으로 획득하고,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로부터 아나톨리아의 해안 지방을 빼앗았으며,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로도스와 페르가몬을 침공하기도 했다. 페르가몬군은 마케도니아군에 대패하여 한때 왕국이 국가 존립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페르가몬령이었던 다르다넬스 해협 연안은 아예 필리포스 5세가 자국 영토로 병합해버리기도 했다.
2.7.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필리포스 5세가 팽창주의 움직임을 전혀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로도스와 페르가몬이 로마에 원조 요청을 하는 바람에 로마가 '''제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주고 말았다. 제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1차와는 달리 로마가 총력전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에 필리포스 5세의 군대는 BC 198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때, 마케도니아군이 항복의 표시로 창을 들어올렸는데 로마군이 이 표시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케도니아군을 그대로 도륙했다는 일은 유명하다. 필리포스 5세는 시간을 질질 끌며 내심 셀레우코스 제국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안티오코스 3세는 이미 이집트와 새로운 전쟁을 벌여 필리포스 5세를 도와 줄 형편이 아니었다. 이에 실망한 필리포스 5세는 로마의 보호국이 되는 조약을 승인하고 만다. 그의 패배 직후, 소아시아에 상륙한 로마군은 BC 189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안티오코스 3세는 필리포스 5세에게 다시 동맹을 맺어 로마에 대항하자고 제의했으나 이제 와서 굳이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를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필리포스 5세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아직 마케도니아의 독립이 위태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필리포스 5세는 자신의 팽창주의 정책이 좌절된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국가의 내정에 전보다 훨씬 주력했으며, 이로 인해 마케도니아는 다시 번영을 되찾게 되었다. 영토도 크게 줄고, 그리스 도시국가에 대한 통제권도 잃어버렸지만, 필리포스 5세는 이 손실을 트라키아와 발칸 반도의 내륙 쪽으로의 확장으로 만회할 생각이었다. 서서히 부활해가는 마케도니아는 신흥 강대국인 로마와 저물어가는 대제국인 셀레우코스 사이에서 중간자의 역할을 하면서 부를 쌓았다.
셀레우코스 제국과는 BC 198년과 BC 190년의 원조 거절로 대변되는 외교적 트러블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동맹에 준하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외교적 움직임은 로마의 곱지 않은 시선을 불러왔다. 그러나 필리포스 5세는 로마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변국과의 분쟁에서 로마가 노골적으로 마케도니아에게 불리한 조약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그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로마군의 좌익을 두들겨 부쉈던 것을 끝내 잊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그 때 한 무명의 호민관의 재치가 아니었다면 키노스케팔라이 전투는 필리포스 5세의 승리로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로마인들의 의혹 속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마케도니아의 부흥을 위해 힘썼다. 그런 일의 일환으로 호전적인 게르만계 부족인 바스타르나이족을 이용하여 다르다넬스 해협 건너에 영토를 마련할 생각으로 그 준비에 착수해 있었으나, BC 179년에 병사하는 바람에 이를 실현하지 못했다
2.8. 3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멸망
그 다음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제7대, 마지막 국왕 '''페르세우스'''(BC 179~168)였다. 페르세우스는 마치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를 연상케 하는 외모를 지녔다고 하며, 성격이 호탕해서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동생인 데메트리오스가 왕위 계승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자 아버지를 설득해 동생을 죽이고 말았다. 걸림돌이 없어진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왕 시대에 잃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기 위해 열심이었다. 일단 필리포스 5세의 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트라키아, 일리리아 정복 사업을 지속했다. 또, 페르세우스는 자신의 풍모를 활용해,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활용하여 자신을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며 자신이 로마의 손아귀로부터 그리스를 구해내겠다고 공공연히 외치고 다녔다. 그러자 그리스 안에서 로마의 세력이 커져 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그리스 도시국가들, 로도스 등이 그에게 접근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셀레우코스 제국 역시 이런 움직임에 호의적이었다. 페르세우스는 각지에 있는 친 로마 세력을 견제하고 약화시킨 다음 자신이 키워놓은 세력으로 대체해가는 방식으로 세력을 불려갔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세력이 다시 신장되자 이번에는 페르가몬이 위협을 느껴 로마가 간섭하기를 요청해왔다. 로마 역시 마케도니아의 부활을 경계하고 있던 터라 마케도니아에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선포했다. 페르세우스는 이에 대응하여 우선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로마를 거스르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던 안티오코스 4세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를 유린하고 알렉산드리아 포위에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군대를 보내주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비록 안티오코스 4세의 지원이 없었지만,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초기에는 그리스인들의 열광적인 지지 속에서 전쟁을 그럭저럭 잘 이끌어 갔는데, 일리리아인의 지원이 끊어지자 서부 전선에 공백이 생겼고 그리하여 로마군에게 쫓겨 마케도니아 남부의 피드나로 들어오게 되었다. BC 168년의 '''피드나 전투'''에서 양군은 처절하게 싸웠지만, 결국 마케도니아의 방진이 밀리게 되었다. 피드나 전투에서 견고한 팔랑크스가 무너지는 순간, 페르세우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는 로마에 포로로 붙잡혀 가 일생 나머지를 알바 푸켄스에서 살게 되었다.
3. 역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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