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네시아 전투
1. 개관
BC 190년 리디아 평원에서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가 이끄는 셀레우코스 왕조 군대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1] 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맞붙은 전투. 안티오코스 3세의 삽질에 힘입어 로마군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데 이어 동방의 넓은 영토를 가진 셀레우코스 왕조마저 꺾은 로마는 명실상부한 지중해 세계의 최강자로 떠올랐고, 셀레우코스 왕조는 기나긴 몰락과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2. 배경
BC 200년 경부터 로마와 셀레우코스 왕조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동맹을 맺었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필리포스 5세가 BC 197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로마군에 패하면서 그리스 전역이 로마의 영향력 아래 들어왔지만, 그리스인들의 로마군에 대한 반감이 점차 커지면서 로마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BC 195년 주적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평화 협정을 맺은 안티오코스 3세는 그리스에 직접 원정군을 파견해 패권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원정군은 테르모퓔라이에서 로마군에게 패했고, 로마는 동맹국인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지원을 받아 셀레우코스 해군도 격파해버렸다. 그 결과 오히려 로마군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인 아나톨리아로 쳐들어오게 되었고,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는 마그네시아 앗 시퓔룸이라는 도시 근처의 리디아 평원에서 로마군과 맞붙게 되었다.
이때 셀레우코스 해군을 지휘한 사람이 다름아닌 카르타고의 망명객 한니발 바르카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명장 한니발을 환영하기는 했지만 해군을 맡겨버렸고 지상전에서는 자신이 모든 권한을 장악한 상태에서 한니발의 조언을 청하는 정도에 그쳤다.[2][3]
한편 로마군을 지휘하는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다름아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이었으며, 아프리카누스 자신도 지휘관 중 하나로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당시에는 병 때문에 참전하지 못했으므로 왕년의 라이벌들 간의 드림매치는 무산된 셈이다. 그리고 3차 마케도니아 전쟁 후반기에 로마군에게 한니발식 망치와 모루라는 전술은 이미 로마군에 정착한다. 그래서 자마 전투이후 한니발은 과거와는 다르게 로마군을 이기지를 못했다.
3. 전투
3.1. 양측 전력 및 배치
마그네시아 전투를 기록한 역사가 리비우스와 아피아노스는 로마군은 3만여 명, 셀레우코스군은 7만여 명이었다고 했다. 아래는 그 자세한 내역이다(숫자가 기재 안된 부대가 많아서 아래 나온 숫자를 다 합쳐봤자 7만은 되지 않는다).
셀레우코스 우익
- 갈라티아 보병 1,500명
- 카타프락토이 3,000기
- 친위 기병대(아게마) 1,000기
- 소수의 "은 방패(아귀라스피다이)"
- 다하이 궁기병 1,200기
- 코끼리 16마리
- 크레타, 트라키아 경보병 3,000명
- 뮈시아, 퀴르티아, 엘람 궁병/투셕병 2,500명
- 팔랑크스 장창병 16,000명
- 코끼리 20마리
- 갈라티아 보병 1,500명
- 켈트 동맹군 보병들
- 카파도키아 및 기타 경보병 4,700명
- 카타프락토이 3,000기
- 헤타이로이/아게마 기병 2,000기
- 아랍 낙타 기병 및 낫전차
- 갈라티아 기병 2,500기
- 펠타스트 4,000명
- 기타 수많은 동맹국/속국 보병들
- 코끼리 16마리
로마 좌익
- 기병 500기
- 로마/라틴 군단병 20,000명
- 숲 코끼리 16마리
- 페르가몬 기병/아카이아 동맹 펠타스트 3,000명
- 페르가몬/아카이아 동맹 보병
- 페르가몬/로마 기병 3,000기
반면 로마군은 기병 전력이 특히 열세임을 감안하여 좌측에 강을 끼는 진형을 잡고 소수 병력만 배치하였다. 로마군도 아프리카 숲 코끼리들을 데리고 있었지만 이들은 인도 코끼리보다 덩치가 작아 정면으로 맞서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후방에 배치하였다.
진형을 짜고 난 안티오코스 3세가 한니발에게 자기 군대를 보여주면서 "이 정도면 충분한가?" 라고 물으니 "로마 놈들이 아주 탐욕스러운 놈들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오." 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사실 누가 봐도 충분하고도 남는 전력이었다.
마케도니아/헬레니즘식 팔랑크스는 로마의 레기온과 비교해 볼 때 '정면 한정' 전투력에서는 전투력 우위에 있다. 다채로운 대응을 못한다는 점이 약점이지만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모루'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정면에서 레기온을 몰아붙일 수 있는 '최강의 모루'로서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오리엔트식 카타프락토이 중기병은 당대에 명성이 높은 중기병이었다. 이후에도 파르티아 시기까지 로마군 기병에 비해서 전투력이 우위에 있다고 평가될 정도.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면 '최강의 망치'로 쓸 수 있었다.
전형적인 한니발식 회전 전술이라면 코끼리를 돌격(자마 전투)시키거나 기병에 대응하도록 하여 우세를 점하고, 팔랑크스가 레기온과 충돌하는 사이에 카타프락토이로 로마 기병을 제압한 다음 레기온의 측면을 두들겨서 '필승 패턴'으로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3.2. 진행 과정
셀레우코스 좌익의 낫전차들이 돌격을 시도하다가 로마 우익의 화살/투석 세례를 받고 혼란에 빠졌다. 셀레우코스 좌익을 지휘하는 안티파트로스와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는 안티오코스 3세의 명령을 기다렸지만 기병 전체의 지휘권을 가진 안티오코스 3세는 이미 카타프락토이와 함께 돌격해 버린 뒤였고, 낫전차와 코끼리들이 돌아와 기병 대열을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뒤이어 로마 우익을 지휘하는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가 기병/경보병들을 모두 이끌고 들이치자 셀레우코스 좌익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한편 셀레우코스 우익의 안티오코스 3세와 카타프락토이들은 로마 좌익의 소수 기병들을 간단히 패주시켜 버렸다. 로마군 입장에서는 측면이 노출당한 위기였지만,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군의 측면을 노린 것이 아니라 그대로 로마군의 캠프를 향해 돌격해 버렸다. 셀레우코스 우익의 나머지 병사들은 왕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와중에 로마군 중앙도 전진하여 셀레우코스 중앙의 팔랑크스와 교전하기 시작했다.
로마군 캠프에 도착한 안티오코스 3세는 캠프를 지키던 그리스/마케도니아 자원병들의 저항에 맞딱뜨렸고, 자신이 아군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자칫하면 로마군 중앙의 군단병들이 캠프 쪽으로 올 수도 있었다. 그 순간 왕의 선택은...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런 왕을 따라가던 '''수천 명의 중장기병들도 고작 2천여 명의 캠프 수비대 앞에서 줄줄이 도망쳐버렸다.'''[4]
이렇게 지휘관과 좌, 우익이 나란히 사라지고 적 기병대에 완전히 포위돼 버리자, 중앙의 팔랑크스는 사각 방진을 짜면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어 빠져나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팔랑크스 부대 사이에 두 마리씩 예쁘게 배치해 놓은 코끼리들이 적 기병대의 공격에 놀라 날뛰는 바람에 대열이 전면 붕괴되어 버렸다(...).
4. 전투 이후의 경과 및 의의
군사적으로 마그네시아 전투는 가우가멜라 전투, 비수대전과 함께 무능한 총사령관과 막장 지휘체계가 우월한 전력을 어떻게 말아먹을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라피아 전투에서 이 마그네시아 전투와 거의 비슷한 실책을 보여주며 패배한 바 있다. 그 때 한 번의 실수는 병력을 어떻게든 재건하여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만회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실수 후에는 답이 없었다.
여유롭게 승리를 거둔 로마군은 우선 셀레우코스 왕조와 휴전을 맺은 뒤 느긋하게 갈라티아를 공략했다.[5] 로마가 그때 당장은 병합을 시도하지 않았으므로, 아나톨리아 각지의 군소 세력들도 셀레우코스를 버리고 로마 쪽으로 줄을 바꿔 잡았다. 전후처리는 BC 188년 아파메아 협정을 통해 이뤄졌는데, 안티오코스 3세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아나톨리아 주요 영토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마그네시아 전투 이전에는 양국의 경계가 에게 해였지만, 패전의 결과 양국의 경계는 타우루스 산맥이 돼 버렸다. 막대한 배상금을 감당하지 못한 안티오코스 3세는 토착 신전의 재물들까지 탈탈 털어갔는데, 이는 안 그래도 좋지 않던 민심이 더욱 나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와의 대규모 전쟁으로 고갈되어 가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사적 자산은 이 전투의 패배로 결정적인 손실을 입었으며 특히 코끼리 군단은 이때 아예 해체되어 버렸다.[6] 게다가 BC 210년의 대규모 동방 원정으로 형식적인 복종을 받아냈던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박트리아 등도 모두 활개를 치기 시작하였다.[7] 그후 셀레우코스 4세와 안티오코스 4세의 노력으로 제국을 어느정도 부활시킬 수 있었지만.. 그놈의 내전과 권력 다툼 때문에 제국 마지막 명군(이 될뻔했던) 안티오코스 7세때 메디아 까지의 영토를 모두 상실한다.
한니발은 로마를 징벌하겠다는 유년기의 맹세를 지키려다 결국 로마를 지중해 최강 패권국가로 만들어준 안습인생의 정점을 찍고 음독자살했다. 그 "충분하고도 남는 전력"을 주옥같은 삽질로 고스란히 로마군에게 갖다 바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속이 뒤집혔을까...
한편 소아시아 중앙의 갈라티아 지역에 정착했던 켈트 계통의 민족인 갈라티아인들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도와 군대를 보내 참전했다.[8] 그런 이유로 마그네시아 전투가 끝난 후, 로마의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만리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에서 했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있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전열 양쪽 날개에 배치된 것을 보았으며, 그들이 최선을 다해 안티오코스를 도왔고, 또 (그리하여 나는) 그들을 적법한 적으로 간주하고 싸웠으며, 그에 따라 그들을 죽이고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리비우스 로마사 4권/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번역/ 현대지성/ 559쪽
5. IF
역사에 만약은 없긴 하다만, 만약에 안티오코스 3세가 낫 전차와 코끼리로 대열을 무너뜨리거나 중앙 캠프를 공격했다가 그냥 도주해 버리는(...) 뻘짓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판단을 했다면 어떨까? 낫전차를 먼저 돌격시키지 않고 한니발처럼 우익의 기병대를 우선 우회시키고 코끼리를 기병대와 근접한 위치에서 먼저 돌격시킨 다음 낫전차를 좌익의 기병대와 따로 배치한 다음 팔랑크스와 군단병이 부딪히는 사이 기병대로 뒤에서 쓸어버리는 식의 전술을 폈다면?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이 만약 승리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되면 로마는 더이상의 동방 확장을 노리기 힘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에 대한 영향력도 흔들렸을 것이고, 페르가몬과 로도스를 비롯한 동맹들은 떨어져 나가거나 셀레우코스 제국에게 점령됐을 것이다. 그러면 안티오코스 3세는 동방원정때 얻은 메가스 칭호에서 더 나아가 제국사의 정점을 찍은 왕으로 기록됐을 것이며, 동방과 아나톨리아에 대한 지배권 또한 확고해져 전술한 아르메니아, 파르티아,박트리아는 반란은 꿈도 못꿨을 것이며 그의 후임인 셀레우코스 4세는 재위 동안 배상금 문제로 고생하다 세상을 뜨는일도 없었을 것이며 안티오코스 4세 사후 정통성 문제때문에 내전이 일어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안티오코스 3세는 설령 암살당하더라도 후계자들이 모두 유능하니 눈을 편히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10]
[1]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으로, "아시아티쿠스"라는 이름은 이 전투에서 승리해서 얻은 것이다.[2] 물론 태생부터 바다와 친한 카르타고인이 해전에 무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 지상전에서 한니발이 보여준, 상식을 벗어나는 재능을 고려했을 때 로마군에 대한 경험을 살린다면 어느 정도 괜찮은 활약을 펼칠 수 있으리라 추측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지상에서 로마군을 숱하게 때려잡으며 스스로를 증명한 한니발에게 해군을 맡겨버리고 지상군에 대해서는 단순한 조언가로 만들어버린 것은 한니발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가진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은 아니었다. 또한 한니발의 커리어에서 해전 경험은 그 전까지 찾아보기 힘들다. 즉 한니발은 9살에 아버지를 따라 스페인으로 이주하여 스페인의 원주민들을 상대로 군사경력을 쌓았으며 그 이후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쭉 육상에서 커리어를 쌓아왔다. 다시말해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 사람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실상의 히스파니아 사람이다. 아무리 한니발이 천재라해도 제대로 된 해전은 펼친 경험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한니발이 비티니아 해군을 이끌고 승리를 거둔 적은 있지만, 이건 한니발이 뱀이 든 솥을 적선을 향해 던지는 기지를 발휘한 것으로 묘사되지, 한니발이 해전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영웅전의 특성상 특이한 부분을 과장해서 서술했을 수는 있지만...[3]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당시 안티오코스는 한니발에게 독립된 군대를 주어 북아프리카로 보내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사람 토아스가 로마를 상대로 승리하면 한니발은 돌아오지 않고 왕이 될 것이라며 반대했고, 결국 계획은 철회된다. 실제로 위만처럼 망명한 타국 장군이 반기를 드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므로 이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로 군대를 이끌고 떠나면 적어도 카르타고는 그에게 복속될게 뻔한데, 그때도 한니발이 신하로 남아 있으려 했을까? 여러모로 한니발에게 독립된 지휘권을 주지 않은게 멍청한 결정이라 보긴 어렵다. 안티오코스가 너무 쉽게 말아먹어서 문제지.[4] 캠프 수비대와 싸우느라 시간을 허비하다 뒤늦게 전장으로 복귀했지만 본대가 이미 박살난 것을 보고 도망쳤다는 주장도 있다.[5]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는 루키우스 스키피오에게 군단들을 인수한 뒤 장병들을 사열하고 집합시키고 나서 한 연설에서 안티오코스와의 전쟁을 종결시킨 단 한 번의 전투에서 그들이 발휘한 무용을 칭찬했으며, 이젠 새로운 전쟁, 즉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갈리아인들은 안티오코스를 군사적으로 도왔으며, 선천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아 그들의 세력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안티오코스를 타우로스 산맥 저너머 시리아로 물러나게 한 일도 헛된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출처: 리비우스 로마사 4권/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번역/ 현대지성/ 502~503쪽[6] 셀레우코스 왕조의 전투 코끼리를 두려워한 로마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와 맺은 평화 조약에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에 앞으로 두 번 다시 전투 코끼리 부대를 넣지 말고 영원히 해체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었다.[7] 다만 아르메니아는 눈치를 봐서 조용히 있었다. [8] 리비우스의 로마사에서는 그 이유가 갈라티아인들이 로마를 증오하였고 따라서 로마와 싸우던 안티오코스 3세를 도우려 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9] 갈라티아에 정착한 갈라티아인들이 원래 갈리아 지역에서 동쪽으로 떠난 자들이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갈라티아인들을 갈리아인들과 동일시했다.[10] 데메트리오스 1세 시절 내전이 일어난 것은 그의 정당하지 못한 즉위 방법 때문이지 능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