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드 보부아르

 


[image]
'''본명'''
Simone Lucie Ernestine Marie Bertrand de Beauvoir (프랑스어)
시몬 뤼시 에르네스틴 마리 베르트랑 드보부아르
'''출생'''
1908년 1월 9일,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사망'''
1986년 4월 14일 (향년 78세), 프랑스 파리
'''직업'''
철학자, 작가, 사회운동가
'''국적'''
[image] 프랑스
'''최종학력'''
파리 대학교, 철학, 사회학, 문학 전공
1. 개요
2. 생애
3. 중기
4. 계약 결혼


1. 개요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여! 그대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전부 보부아르 덕택이다."

- 엘리자베트 바댕테르(Élisabeth Badinter), 보부아르의 장례식에서 낭독한 조사 중에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및 작가이다. 현대의 페미니즘을 성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고, 여성운동을 통해 낙태죄를 폐지시키고[1]제2의 성》(1949)을 저술하였으며, 장폴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


전 법조인인 아마추어 배우 조르주 드 보부아르와 베르됭 출신인 프랑수아즈 브라쇠르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귀족 출신이긴 하나 몰락한 부르주아의 가문에서 성장한다. 파리에서 태어난 시몬은 명문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뫼즈 은행의 은행장인 귀스타브 브라쇠르가 파산하면서[2] 가난에 허덕이게 되고 생계 문제로 부부관계까지 악화된다.
아버지 조르주는 아들을 원했으나 시몬을 포함한 두 딸만을 얻었고 어린 시몬에게 "넌 남자의 뇌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몬은 머리가 우수했고 조르주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학문적 성공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두 딸의 교육을 중요시 여기게 되는데 시몬의 여동생인 엘렌 드 보부아르는 화가가 되었고 시몬은 아버지가 좋아했던 희곡, 문학 등의 취미를 교육 받았다.
이후 시몬은 15세의 나이에 작가를 꿈꾸게 되며 여러 방면의 지식을 습득하다가 철학에 이끌려 파리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된다. 이때 장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과 만나게 된다.
바칼로레아 시험을 통과한 시몬은 수학, 언어학, 문학,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1929년 소르본에서 라이프니츠에 대한 발표를 했고 장폴 사르트르와 인연을 맺는다. 같은 해 최연소 나이에 철학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하였다.

3. 중기


1943년 여름에 시몬은 교직에서 해고를 당하는데 시몬이 문란한 관계를 여학생들에게 주입시키려 한다며 시몬을 따르던 여학생들의 부모들이 항의한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사건으로 시몬은 큰 상심에 빠졌으나 이때 즈음 첫 출간한 소설 "초대받은 여자"가 호평을 받자 이를 계기로 작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소설, 에세이, 희곡 등의 여러 가지 작품을 출간했으며 장폴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라는 회지를 창간하여 주요 멤버로 활동한다. 1949년에 문제의 소설인 제2의 성을 발표하고 1954년에 "레 망다랭"을 발표하여 공쿠르상을 수상한다. 이후 여러 서적들의 출간을 계속하여 문필가로서의 안정적인 자리를 잡게 된다.
실존주의 철학을 연구하면서도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지식인이 직접 나서서 행동하는 "앙가주망(engagement)"을 지지한 시몬은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사회운동과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현실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껴 독자 노선을 선택하게 된다. 또한 프랑스의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등 드골의 노선을 반대하는 정치적 운동을 펼쳤는데 이 때문에 1960년대 초에 극우파의 테러 위협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낙태와 피임 자유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권익 보호, 가정폭력 근절에 힘쓴다.

4. 계약 결혼


시몬 드 보부아르를 유명하게 만든 스캔들인 계약결혼은 아직도 현대의 일반인들에게 시행하기 망설여질 정도로 파격적인 관계였다. 시몬은 사르트르와 함께 계약결혼이라는 새로운 결혼관계제도를 도입한다. 1929년부터 시작한 이 결혼은 2년의 효력이 있었고 서로에게 뜻이 있으면 다시 2년을 갱신하는 식의 관계였다. 자유로운 연인관계를 원했던 시몬은 사르트르에게 최소한의 규칙만을 조건으로 삼았고 그 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방식을 요구했다. 이 내용은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서로 파트너를 바꾸든 상관하지 않지만 서로가 합의하거나 요구하는 날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말 것." 사르트르도 이 사항에 동의를 했고 사르트르의 성격을 잘 알았던 시몬은 이 계약관계를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재계약을 갱신하였다. 두 사람은 언제든지 계약의 갱신을 거부할 수 있었지만 사실상 서로의 입장에 만족을 했기 때문에 말만 자유지 현실은 종신계약이었다. 이 기간동안 두 사람은 결혼관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서로의 원고를 검토하는 등 학문적 동반자로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1947년 시몬은 미국 여행 중 작가 넬슨 앨그렌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사르트르와 약속한 작업일정에는 항상 맞추어 귀국했다. 넬슨 앨그렌 외에도 영화감독 클로드 란즈만과도 아내로서의 관계를 유지했는데 당시 클로드 란즈만은 26세였고 보부아르는 란즈만보다 18살 연상이었다. 31세에는 스물 세 살의 청년 자크 로앙 보스트와도 연애를 했다. 이외에도 동성 애인도 여럿 두면서 다자연애관계를 유지했다.
여성 인권을 주장한 인물로, 성평등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제2의 성》 마지막 문장인 "이 주어진 현실 세계를 자유가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임무다. 이 숭고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남녀가 그 자연의 구별을 초월해서 분명히 우애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시몬도 여자들 중에서도 페미니즘에 역행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비판하는 태도를 자주 내비쳤는데, 당시 자신이 주장한 페미니즘을 시대를 거스르는 악행이라고 비방하고 보부아르에게 여자로서의 정절을 강요한 부류 중에 일부 여자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결혼을 한 여자들은 남편에게 종속된 삶과 교육에 익숙해져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그 삶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 보부아르를 정숙하지 못한 타락한 존재로 여기고 비난하는 일이 많아서 시몬 자신도 기성세대 여자들과 기존 고정관념에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여자가 가진 여성성, 즉 보편적으로 알려진 소극적, 의존적인 여성성은 여자가 가지고 태어나는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모순에 의해 구성된 사회적, 문화적 산물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제2의 성》에서 아래와 같은 발언을 남겼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수컷이 사회 속에서 취하고 있는 형태는 어떠한 생리적, 심리적, 경제적 숙명에 의해서가 아니다. 분명 전체가 수컷과 거세체와의 중간 산물을 만들어 내어, 그것에다 여성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위 인용구는 페미니스트들이 '성별(sex)'과 '젠더(gender)'를 개념적 특성으로 구분하는 기반이 되는데 페미니즘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문구이다.

[1] 이 운동에는 카트린 드뇌브도 포함되어 있었다.[2] 시몬에겐 외할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