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Gender
1. 개요
생물학적 성별을 의미하는 섹스(Sex)와는 별개로, 이 단어는 '''사회적으로 정의된 성'''을 뜻한다. 즉, 그 사회에서 여성은 이러이러하고, 남성은 이러이러하다고 정의 내린 개념이 젠더다. 성 역할과 비슷하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는 "정신적인 성별"인 젠더(gender) 문제이고, 인터섹스(intersex)는 "육체적인 성별"인 섹스(sex) 문제인 것만 봐도 gender와 sex의 쓰임이 다름을 알 수 있다.
2. 역사
'사회적 성'이라는 의미로서의 젠더 개념은 페미니즘에서도 논의되었으며, 특히 페미니즘에 의해 대중적으로 통용되었다. 여성으로 부여받은 사회적 역할이 여성에게 본질적인 특질인가 후천적 성질인가를 논의하기 위해선 생물학적 성별과 구분되는 어떤 사회적인 성 개념을 도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저 유명한 책인 《제2의 성》. 이후 페미니즘의 논의가 계속되고 계파가 나뉘면서 젠더를 보는 시각도 나뉘었다. 하지만 보부아르의 시대에는 아직 젠더라는 말이 고안되지 않았다.
젠더란 원래 언어학에서 문법성(grammatical gender)을 가리키는 용어로,[1] 그 이외엔 다른 용법이 없는 사어(死語)였다. 젠더라는 말에 새로운 용법이 생긴 것은 존스홉킨스 의대에서 간성을 연구하던 존 머니가 1955년에 성역할(gender role)이라는 말을 고안했을 때 부터였다. 머니는 생물학적 요소인 성과 구분되는 역할로서의 성별로서 젠더 개념을 고안했다. 원래 간성 연구자였던 머니는 1차성징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애매한 간성인이 스스로를 어느 성으로 생각하는지를 성역할, 곧 젠더로 정의했다.[2] 또한 인류학의 발달로 일처다부제나 모계사회가 있는 비서구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성별 및 성역할을 고정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즉 성별 구분 및 성역할이 사회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사회적 성'이라는 개념이 제시되었고 젠더라고 칭해졌다.
어떤 사람의 성역할(젠더)은 그 사람의 성의 생물학적 정의와 별개라는 머니의 젠더 개념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지는 성으로 의해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던 여성주의자들에게 아주 매력적이었고, 7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에 여성학계에서는 성(sex)이라는 말이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모두 젠더(gender)로 대체되었다.[3] 성(sex)과 성별(gender)은 다른 것이고, 성별은 역할(role)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여성주의의 당위에 완벽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보부아르가 1949년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말한 그 "만들어진 성"을 지칭할 언어가 이 때야 비로소 생겼다.
'제3의 성'이라는 의미로서의 젠더 개념은 성소수자 운동이 본격화하면서 논의되었다. 애초에 간성 연구에서 비롯된 용어니 성소수자들이 이 개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태어날 때 지정된 성(assigned sex)과 무관하게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하는 트랜스젠더들이 양지로 쏟아져 나온 것이 젠더 개념의 중요성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젠더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면서 젠더 이분법을 거부하는 젠더퀴어들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현재 주류 퀴어학에서는 우리가 아는 사회적 성, 즉 젠더는 곧 사회가 정해준 것이며 결코 자연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으로 합의한 편이다. 이런 공리를 바탕 삼아 젠더를 결정하는 각 사회 특유의 구조를 젠더 시스템으로 따로 이름붙였고. 곧 젠더를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불변의 성질이 아닌 사회적 합의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젠더퀴어 세력들과,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LGBT 세력들의 의견 간에 약간의 차이가 벌어졌다. LGBT 세력은 젠더리즘에서 지정성별과 성역할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믿음만이 폐기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젠더퀴어 세력은 젠더이분법까지 폐기되어야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이분법적 젠더에 대한 차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다음의 위키피디아 문서를 참조. 그래도 LGBT 세력과 젠더퀴어 세력이 갈라지지는 않았다.
또한 트랜스젠더 및 젠더퀴어 세력들과 일부 래디컬 페미니즘 세력 사이의 갈등도 있다.
한국에서는 젠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공공기관 젠더전문관 양성을 추진하고 있다.
3. 젠더의 이분법적 구분
젠더 이분법 항목 참조.
4. 비 이분법적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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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의 비 이분법적 구분은 젠더가 하나의 스펙트럼이라는 관점을 따른다. 즉 젠더 자체는 어떤 연속된 성질의 집합이며 무 자르듯 딱 반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요지. 이 관점에 따르면 젠더는
- 상호 간에 배타적인 이산적 범주로 구분할 수 없는 연속된 스펙트럼이다.
- 성징이 아닌 인간 정체성의 표현에 따라 결정된다.
- 사회가 제재하거나 조정할 수 없는 개인의 문제이다.
5. 비판
이론 상당부분이 사회학적, 과학적 검증이 대단히 부실하다. 젠더 개념의 창시자인 존 머니부터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을 무시한 채 자신의 성 역할 이론을 환자에게 강요하다가 여러 사람의 인생과 그들의 가정을 파탄 낸 인물이다. 데이비드 라이머 항목 참조. 존 머니가 연구 과정에서 저지른 여러 건의 연구 윤리 위반이 알려지고 성정체성이 선천적으로 결정됨을 지지하는 연구 결과가 잇달아 발표되면서 그의 후천적 성정체성 결정 이론은 학계에서 폐기되었다. 존 머니의 비윤리적인 실험으로 인한 라이머 가의 끔찍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진영에서 존 머니의 젠더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사회학으로 변주되어 살아남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6. 각종 오해와 통념들
- 남자/여자들은 무조건 자기보다 미인인 남자/여자를 보면 “기생오라비”/"했네, 했어..." 라며 시기하고 질투한다.
- 정말 어지간히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이나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는 이상 그런 반응을 보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이 매력적인 동성의 모습을 좋아하고, 이에 환호하고 동경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성 연예인과 마주쳤을 때 동경하고 감격하는 모습을 보인다. 현실 속에서는 잘생긴/예쁜 남성/여성이 왕따당하기는 커녕 자주 사람들이 말을 걸어주고, 되려 외모가 출중한 사람 중심으로 모임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공통적으로 잘생긴 남성/예쁜 여성을 주인공으로 대우하는 분위기가 형성 되며, 아예 대놓고 치켜 세워주며 기를 세워준다. 즉, 이 편견은 일부 사람들을 가지고 일반화한 경우에 해당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격 차이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다.
- 남자/여자들 사이에서 잘생겼다는 이유로 괴롭힘 당하는 일은 없다. 남초/여초사회에서 남자/여자들은 잘생긴 남자에게 들러붙으려고 한다. 미인인 남자/여자애가 왕따를 당했다면 그것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의 착각이거나 피해자가 성격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 여자들은 무조건 잘생긴 남성을 보면 홀라당 넘어가서 그 남성의 모든 단점에도 개의치 않는 충실한 시녀가 된다.
- 남자들도 예쁜 여자가 단점이 많으면 싫어하듯이 여자도 남자가 아무리 잘생겨도 단점이 많으면 싫어한다. 아무리 잘생겼어도 사회적 이미지가 나쁘면 여성들은 관심 끄고 돌아선다. 단점도 어느 정도 작아야 외모로 덮어진다. 외모만 좋다고 해서 그 외모로 절대 거대한 단점들을 커버할 수 없다. 요지는 그 남성의 전반적인 이미지와 캐릭터성이 흔한 여성들의 보편적 선호에 부합하냐는 것이다. 즉, 단점이 봐줄 만한 수준이고 다른 장점도 존재해야 외모가 빛을 발하지, 외모만 갖고는 아무것도 안 먹힌다. 이걸 이해하지 못해서 이슈가 된 사례가 바로 저 유명한 맹모닝 셰프 논란이다.[5]
- 여성이 야하게 입고 다니는 것은 남성들에게 만만한 여자, 밝히는 여자, 남자가 꼬시기만 기다리고 있는 여자라고 스스로를 광고하고 있는 셈이다.
- 19세기까지는 남성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여성들이 치장을 했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은 대다수의 여성들은 스스로 남성들에게 밝히는 여자, 야한 여자로 보이길 원하지 않는다는 이론이 정착되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하의실종 패션을 스스로 자신을 멋진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자기표현용으로 입거나 최신 패션, 최신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 입지, 자발적으로 남성들을 의식하고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입는 경우는 많지 않다.
- 해외에도 이런 터무니 없는 관점이 종종 있는 모양이라, 국제적으로 슬럿워크 같은 시민운동이 열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쉽게 말해 "내가 네 앞에서 발가벗고 있다고 해도, 내가 원하기 때문에 벗은 것이지 너를 위해 벗은 건 아니다" 정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
- 남성은 다부지고 믿음직하며 호방하고 외향적이고 진취적이어야 하며, 여성은 조신하고 순종적이며 조용하고 내향적이고 내조나 잘 하면 된다.
- 이러한 성 역할은 시대가 변하면서 깨지고 있다. 현대사회는 유니섹스의 시대로, 양성 모두의 장점을 개인 내부에서 종합적으로 활용하는 역량을 갖고 있을 때 가장 유리하다.
- 또한 성 역할은 개인의 행복을 저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아이가 인형을 품에 안고 잠드는 것을 원한다고 가정하자. 이 남자아이가 "나는 누구지? 나는 남자야." 라고 정체성을 확인한다면, 그는 인형을 안고 자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남자아이가 "나는 누구지? 나는 나야." 라고 정체성을 확인한다면, 그는 자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런 경험을 함으로써 행복 수준을 높일 수 있다.
- 또한 이 항목에 쓰인 표현 자체가 남자와 여자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차용하고 있음을 주의하자. 그렇게 서술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서술하는 것이다. 즉 애초에 남자는 인형을 안고 잠들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 "나는 누구지? 나는 남자야."라고 인식하는 것이 인형을 안는 것과 배치되지 않는다.
- 즉, 남성적인 여자도 있을 수 있고, 여성적인 남자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너무 과도해서 동성집단에서 배척을 당할 정도라거나[6] 아니면 본인이 괴리감을 느끼는 경우가 아니라면 무슨 문제가 되는가?
- 여성은 수학&과학이나 이해적 문제 해결에서 남자보다 떨어진다. 또는, 남성은 국어&사회나 암기적 문제 해결에서 여자보다 떨어진다.
- 연구에 따르면 여성은 수학&과학이나 이해적 문제 해결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보인다. 남성 대상 고정관념도 마찬가지. 오히려 이런 종류의 고정관념으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경우 능력이 저하된다. 고정관념으로 인해 수행 수준이 저하되는 이 현상을 두고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이라고 한다. 해당 문서 참고. 심지어 이는 단순히 시험장에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기만 해도 나타날 수 있다고 하며, 정말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7]
- 물론 심적 표상과 같은 인지적 오퍼레이션에서 차이가 있다는 보고가 있긴 하지만, 이건 수학&과학 교육의 맥락이라기보다는 훨씬 기본적이고 전반적인 수준에서의 인간의 정보처리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에 가깝다. 이와 관련하여 학계에 흥미로운 (그리고 논쟁적인) 반론이 몇 건 제기되었는데,[8] 1995년의 논문에서 흑인과 백인의 수학 점수 결과를 통계적으로 엄밀히 해석하면 "고정관념 위협으로 인해 흑인 학생의 수학 점수가 떨어지긴 하는데, 고정관념을 없애준다 해도 딱히 수학 점수가 같아지진 않더라" 가 된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 여성의 성취 동기는 고정관념을 내면화했을 때 추가로 촉발되는 불안에 의해서도 더욱 훼손된다. 젠더를 연구하는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성공할 것에 대한 두려움" 이라고 부른다. 성공하기 싫어한다거나 실패하려는 의지를 갖는다는 말이 아니고, 성공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일정 부분 훼손될 수 있다는 것. 예컨대 한 논문에서는,[9] "앤(Anne)은 의학 시험에서 자신이 학과 1등을 했다는 걸 알았다." 는 문장을 보여주고 주인공의 심정을 짐작해 보라고 하자, 과반수의 여학생들이 기쁨에 더하여 불안도 함께 보고했다. 반대로 "존(John)은 의학 시험에서 자신이 학과 1등을 했다는 걸 알았다." 는 문장을 남학생들이 보았을 때는 불안을 짐작한 학생이 거의 없었다고.
- "뭐, 유능한 여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드센 년이거나, 누구한테 한 번 대 줬겠지!"
- 남성우월주의에 갇혀있다는 시대착오적 고백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성을 팔아서 유능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급의 주장은 고려할 가치도 없을 정도이지만,[10] 한 가지 짚어볼 만한 점은 "드센 년" 이라는 표현에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여성이 직업적 성취를 올리는 것이 허용되는 사회가 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남성 코스프레를 하는 역할을 통해 성공한 것이다. 미디어에서 등장하는 커리어우먼들과 여성 고위 간부들의 모습을 보면 워킹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이들의 면모는 "남성적"인 것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만을 보여주는데, 여성적인 면모는 그런 고위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여성 판사, 최초의 여성 응원단장[11] , 최초의 여성 파일럿 같은 사람들도, 금녀의 문을 처음 열어젖히기 위해서는 유사-남성으로서 열어야만 했던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하면서 성공한다 하더라도, 남성적인 역할(ex. 독립성, 주체성, 유능성 등)에 대한 칭찬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성적인 역할(ex. 배려성, 우애성, 돌봄과 유대 등)이 없다고 까이는 게 태반이다. 드센 년이라는 표현은 유능한 여성이 얼마나 부정적인 (혹은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물론 인식이 많이 개선되고 과거보다 성 평등의 원칙이 확고해진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다양한 세대에서 아직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존재하기에 종종 문제가 되는 것이다.
- 남성은 싸우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다. 남자가 싸우는 걸 두려워하면 남자가 아니다.
- 파란색은 남자아이의 색이고, 분홍색은 여자아이의 색이다.
- 역사적으로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20세기 초까지, 분홍색은 "정열적이고, 진취적이며, 열정적이고, 제왕의 상징인 빨간색과 가깝다" 고 여겨져서 남자아이 전용의 옷 색상으로 사랑받았다. 반면 하늘색은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고, 차분하고, 조신하며, 섬세한 느낌을 준다" 고 여겨져서 여자아이 전용의 옷 색상이었다. 옛 성화나 명화, 그림들을 살펴보면 분홍색 옷을 입고 있는 소년이나 청년 남성의 모습, 그리고 하늘색~파란색 옷을 입은 소녀, 성녀 및 아가씨들의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 현대로 와도, 디즈니의 신데렐라와 엘사는 모두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다.
- 또한 이는 위에서 쓴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선택의 권리를 제한하며 행복의 수준을 떨어뜨릴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하늘색이 더 예쁘고 공주님 같은데?" 라고 말하는 여자아이들도 있고,[12] 분홍색에 매료되는 남자아이들도 있다. 이들에게 "안 돼, 넌 남자/여자아이잖아!" 라고 말할 경우, 이들은 자신의 의향을 거둘지 모르지만, 자신이 원치 않는 색상의 옷을 입으면서 만족하기는 힘들 것이다.
- "남자가 돼 가지고 칠칠맞게 눈물 흘리면서 울고 있냐? 모름지기 남자라면 무조건 눈물은 보이면 안 된다." 또는, "남자는 세 번만 우는 법이랬다. 태어날 때,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나라를 잃었을 때."
-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적절하게 슬픔을 표현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 단, 너무 참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자주 우는 것도 과히 좋지 않은 생활습관이다. 정서심리학에 따르면, 장기적이고 과도한 반추(rumination)는 우울증의 전조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 눈물을 잘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고독사가 많은 편이라고 한다.
- "남자라면 마땅히... 여자라면 모름지기..." 와 같은 인지는 흔히 성심리학에서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이 과할 경우 개인의 행복이 저해될 수 있다.
- 설혹 울고 싶어서 울게 되더라도 부끄러워할 필요는 별로 없다. 슬픔이란 남자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써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게다가 남성들에게도 인형을 통해서 적절히 감성을 길러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 남자는 기계와 공구를 다룰 줄 알아야 하며, 전문가를 부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 가정의 수도, 보일러, 전기, 가전기기 등을 고치지 못하고 사람을 부르자고 얘기하면 "남자가 돼서 그것도 못해? 창피하게" 하고 핀잔을 주는 경우가 있으나, 아무리 남자라도 기계 분야에 대해 접해보고 배워볼 기회가 없으면 잘 모른다. 기계 분야의 전문가들도 처음부터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고 모두 지식과 경험을 쌓아서 습득한 것이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건드리면 오히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몇만원, 몇천원 내고 끝낼 거 몇 배, 몇십 배 들여가며 그냥 새로 사야 하고, 심하면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칠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자면 기계를 다루는 전문가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가라는 것인가?
-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지."
- 치마 입기를 싫어하는 어린 딸을 둔 부모들이 종종 이걸로 탄식하곤 하는데, 탄식할 이유가 전혀 없다. 본인이 입고 싶은 옷을 입으면서 행복과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 모습에 자신을 맞추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딸이나 조카가 치마를 입기 싫어한다고 해서 억지로 입히려고 하지 말자. 게다가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이 사회적으로 이상한 것도 아니다! 남성의 경우, 치마를 못 입게 하는 이유는 풍성한 다리털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이것도 문화적으로 다 달라서, 실제로 바지는 서구 역사에서 꽤나 늦게 발명되었으며 고대 로마 등에서는 남자들도 치마를 입고 지냈다.[13]
- 한편 킬트는 스코틀랜드가 문화 콘텐츠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인데, 한국의 현실에까지 고스란히 대입하기는 곤란하다. 대신, 킬트의 사례를 들어서 옷차림의 성별 차이를 문화가 강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다.
- 원나잇 스탠드는 개방적인 성문화를 암시하는 것이다.
- 이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자신의 원나잇 스탠드 경험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이 간주하고 사회 역시 그것을 잘 수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남성들은 여기에 잘 부합하지만, 여성들은 원나잇 스탠드 경험을 밝혔다가는 결혼을 아예 못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남성들은 원나잇 스탠드를 일종의 무용담처럼 생각하고 자랑하려 하지만 여성들은 있는 힘을 다해 숨기고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세태는 극도로 보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성문화를 암시할 뿐이며, 개방적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별로 없다. 성별을 막론하고 개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는 순결을 운운하면서도 자신은 어떻게든 원나잇 스탠드를 해서 동료 남성들에게 떠벌리겠다는 심산은 전형적인 내로남불의 마인드일 뿐이다.
- 여성이 등장하는 모든 매체들에서 여성 캐릭터는 그저 인형처럼 박제되어 있고, 내성적이며, 소극적이고, 무기력하며, 유약하고, 자기주장이 없는 경향으로 묘사된다.
- 의외로, 일본 애니메이션과 같은 비서구권 매체들에서는 주체적 여성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작품들에서는 여성들이 거침없이 남성들을 이끌고, 남성을 훈계하며, 남성들을 지휘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 어떤 시청자/독자들은 "남자가 돼 가지고 가오 떨어지게...", "저 남자들은 자존심 상해서 어쩌냐" 같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해서 그 어떤 '백마 탄 왕자님' 의 도움도 바라지 않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 캐릭터들은 미국을 벗어나서 찾아보면 의외로 많이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디즈니를 비롯한 여러 제작사들에서도 이런 점을 인지하여 주체적 여성상을 통해 어린 시청자들에게 역할 모델을 만들어주려 애쓰고 있다.
-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인식이 나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데, 사실 위의 설명을 뒤집어서 다시 보자면 미국에서는 실제로 그런 무기력한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50년대, 1980년대 정도 즈음에 이런 경향이 크게 나타났으며 이는 《백래시》 의 저자로 유명한 수전 팔루디(S.Faludi)와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실제보다 훨씬 더 과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로 인해 과거에는 미국 창작물들에서 남성은 무조건 마초가이여야 환영받고 여성은 무조건 창백한 귀공녀 같아야 환영받았다. 오늘날에도 이런 문화적 특성은 그대로 이어져서, 아직도 미국인들은 여러 남성 캐릭터들 중에서 흔히 "Bad Ass" 스러운 캐릭터, 즉 선 굵은 몸에 건조한 성격을 지닌 간지남을 선호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 그렇다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 젠더 평등하고 PC한 장르가 분명하다! vs 일본 애니메이션은 여성에 대한 매춘 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걸 보여주는 장르다. 그렇지않고서야 여캐를 이렇게 만들리가 없다!
- 이것 또한 간단히 말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일단 현대 주류 페미니즘의 이론화 자체가 미국에서 제안되고 정교화되었기에, 일본 창작물에 대한 분석을 제대로 실시하려면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 논리가 새로 필요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실제로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주체적 여성들의 모습을 미국에 비해서 더 즐겨 그려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시리즈를 예로 들면, 서구에서는 이 정도로 당차고 강한 여성 캐릭터들을 쉽게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항상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흔히 제기되는 문제는 포르노에 가까운 카메라 워크와 연출이다. 이를 적당히 비유하자면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당찬 여전사" 가 한편으로는 미니스커트 판치라를 숱하게 당하며, 수시로 바스트 모핑이 묘사되는 캐릭터일 수도 있다. 다시 앞의 예를 들면, 세일러문 캐릭터들의 치마 길이 역시 비현실적일 정도이지만, 그 길이는 여성이 차려입어야 할 이상적 복장의 일부로서 무난히 받아들여지곤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판치라가 묘사된다. #세일러문 검열된 장면 모음(후방주의) 그리고 여러 작품들에서 샤워씬, 온천씬, 해수욕씬, 탈의씬, 슴만튀 등의 장면들은 내용 전개에 불필요할지라도 관례적으로 삽입되게 마련이다. 유튜브의 한 애니 리뷰어는 리코와 이즈미 사기리 캐릭터를 예로 들어서 "이 업계 최대의 문제점" 이라며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관련영상(영어)[14]
- 종합적으로 보아, 서구 창작물에서 여성들이 다루어지는 방식이 무기력하고 연약하며 순종적인 캐릭터성으로만 단편화시켜서 비판을 받는다면,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런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하되 남성 시청자들을 위한 눈요깃거리 재료로서 여캐를 공급한다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는 또 미국의 창작물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로리로 대변되는 미성년 여자 캐릭터를 성적으로 대상화했다간 미국 사회에서 매장당하기 딱 좋기 때문.[15] 결국 막무가내 식으로 문예비평을 시도하기에는, 어떤 경우든 상당히 복잡하다. 문화검열의 신풍속(?)을 이끄는 프로불편러건, 그들의 공세로부터 애정하는 작품을 변호하려는 팬덤이건 간에, 이런 배경 정도는 감안할 필요가 있다.
- 남자들은 의젓하기 때문에 털털하고 대범해서 군대도 다녀오고 고된 일도 묵묵히 참고 견디지만, 여자들은 철이 없어서 속좁고, 쫑알대고, 예민하고, 자기중심적이다.
- 여자는 고용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자주 이용되는 고정관념. 남녀 성별에 따라 성격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성격이 나뉘는 것이다.
-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남성이 철없는 모습을 보이면 "쟤가 유달리 이상한 거야" 라고 생각하고, 여성이 철없는 모습을 보이면 "여자라서 원래 이상한 거야" 라고 생각한다. 이런 인지적 함정에 대한 심리학적인 연구도 (특히 인종차별 등에 관련하여) 정말 어마어마하게 이루어져 왔다. 결국 사람들을 관찰한 것을 근거로 결론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에 맞게 자신의 관찰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당초 결론을 다시 뒷받침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1] 라틴어 계열의 유럽 언어에는 남성명사, 여성명사 외에 중성명사가 존재한다. 즉 성별이란 뜻으로 양성 이분법을 전제로 하는 섹스를 대체하기 위해 양성 이외의 제3의 성을 포함한 개념으로서 젠더라는 용어가 고안된 것이다.[2] Money, J (1955). "Hermaphroditism, gender and precocity in hyperadrenocorticism: Psychologic findings". Bulletin of the Johns Hopkins Hospital. 96 (6): 253–64. PMID 14378807.[3] Haig, David (April 2004). "The Inexorable Rise of Gender and the Decline of Sex: Social Change in Academic Titles, 1945–2001". Archives of Sexual Behavior. 33 (2): 87–96.[4] 해외 과학잡지의 글을 모아서 내던 월간 사이언스가 "인류의 성은 무지개빛이다"라는 특집 기사를 낸 것이 80년대 초반 일이다. 사상지가 아닌 교양 과학 잡지에 난 기사이다. 무려 40여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급진적 주장으로 취급되는 걸 보면 국내 성 구분 개념이 어떤지 알 수 있다.(유교, 개신교의 영향도 크지만 무종교가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데도 그렇다)[5] 소위 시청자들의 "여심 공략" 같은 목적으로 내세운 인물이라지만 제작진은 여심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고 비판받았으며, 도리어 "여성 시청자들이 그렇게 단순하고 우스워 보였느냐."라는 역풍으로 인해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6] 과도하다는 이유로 "항상" 배척을 당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편견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정확한 맥락은 반전 정도로 받아들여져야 함에 유의.[7] 예컨대, 여성인 수학자들조차 수능 문제를 만들 때 주변 동료 학자들에 의해 자신의 여성성이 강조되면 수학적 사고에 일부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다는 것. 다행히 이는 해결책이 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면 된다.[8] Sackett, Hardison, & Cullen, 2004; Jussim, Crawford, Stevens, Anglin, & Duarte, 2015.[9] Horner, M. S. (1972). Toward an understanding of achievement-related conflicts in women. Journal of social issues, 28, 157-175.[10] 업무에 미숙해서 실수할 때마다 몸으로 때우며 수습을 하는 여성이 실제로 있다고 일단 가정이라도 해 보자. 그러나 업무 실적이라는 것은 그걸로 만회가 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일도 못 하고 조직과 회사에 피해만 입히는데 월급까지 주면서 고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여성은 B급 야동 바깥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11] 응원단은 원래 여자가 하는 거 아니었냐는 사람을 위해서 얘기해본다. 기록에 남은 최초의 치어리더는 남자이며, 19세기 말엽에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교의 학생회장이던 한 남학생이 미식축구 경기를 관람하던 도중에 관중들 앞에서 응원을 호소하던 것이 치어리딩의 시초라고 한다. 이렇게 '이 직업은 여자들이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하는 것도 명백히 성차별적인 생각이다.[12] 이 때문에 유아용품 전문점에 문의하는 젊은 어머니들 중에는 하늘색 여아용 물건이 없다고 컴플레인을 거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한다.[13] 여기서 더 나아가면, 고대의 미니스커트는 오히려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 병사들의 복장과 같이, 미니스커트식 갑옷도 존재한다.[14] 시간이 없거나 영어가 안 된다면, 해당 영상의 11:02 지점 한 장면만 멈춰놓고 보자.[15]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Fate/kaleid liner 프리즈마☆이리야인데, 서구 기준의 정치적 올바름을 기계적으로 적용한다면 심지어 우스개로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품이라는 농담도 가능할 정도지만, 실상은 어린 소녀들의 성적인 장면들이 너무 많아서 호주에서는 아동 포르노 시청으로 오해받아 경찰이 출동하고, 러시아와 캐나다에서는 아예 아동 포르노로 분류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