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image] [수상거부]
'''본명'''
장폴 샤를 에마르 사르트르
(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국적'''
프랑스 [image]
'''출생'''
1905년 6월 21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80년 4월 15일 (향년 74세), 프랑스 파리
'''직업'''
철학자, 작가
'''정당'''

'''최종학력'''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철학, 사회학, 심리학 / 학사)
'''신체'''
160cm
1. 개요
2. 생애
3. 어록들
4. 일화
5. 작품
5.1. 소설
5.2. 철학서
5.3. 자서전
6. 기타
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프랑스철학자이자 소설가, 극작가. 1905년 파리에서 출생하여 1980년 사망했다. 유명한 페미니스트이자 아내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하며 보부아르와는 부부적인 관계 이외에도 학문적인 동반자로서 서로의 원고를 검토해주는 평생 관계를 유지했다.[1]
'''실존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로 명명한 최초의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하이데거의 독일 현상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카뮈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자이자, 메를로퐁티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 및 현상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별명은 실존주의의 교황이다.
그 유명한 소설적 자유에 대한 개념을 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들은 철학에 관심이 없더라도 사르트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또 반자본주의, 친 공산주의적 사상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해 파블로 피카소, 존 레논, 조지 오웰, 알베르 카뮈 등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진보 예술가로도 불린다.

2. 생애


6월 21일 파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장바티스트 사르트르(Jean-Baptiste Sartre)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의 해군장교, 어머니는 독일어교사였던 샤를 슈바이처(Charles Schweitzer)의 딸 안마리(Anne-Marie)다. 그들의 결혼은 1904년이다. 그가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아버지는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후유증인 열병으로 사망하고, 10살이 될 때까지 외가에서 엄격한 외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Charles Schweitzer, 1844년~1935년) 슬하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2] 후일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선천적 근시사시(斜視)[3] 그리고 외갓집의 낯섦 등으로 이 시절에 겪은 심리적 부담에 대해 밝히고 있다. 한편 외할아버지의 깊은 교양은 사르트르의 학문적 탐구심을 크게 자극하였고, 이에 사르트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외갓집과 외할아버지의 관심을 받기 위해 글쓰기에 점점 전념했다고 한다.
파리의 부르주아지 지식인 계층에서 자라난 사르트르는 1915년에 파리의 명문 리세(중고등학교) 앙리 4세 리세 ・ 루이 르 그랑에 입학하는데, 이때에 훗날 작가가 되는 폴 니장(1905년~1940년)을 알게 되었다.[4] 그로부터 2년 뒤인 1917년 어머니가 당시 공장장 조제프 망시와 재혼하게 되면서, 의붓아버지를 따라 1917년에 라로셸(La Rochelle) 학교로 전학하며 이주하게 되는데, 사르트르는 전학한 곳에서 잘 적응하지 못했고[5] 이 시기에 어머니의 돈을 훔쳐 할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한 일이나, 아름다운 소녀에게 다가갔다가 실패하고 자신의 추함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라로셸에서의 그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을 염려한 가족들에 의해 사르트르는 1920년 다시 앙리 4세 리세로 돌아왔고, 폴 니장과도 재회하였다.
1922년부터 2년 동안 리세 · 루이 르 그랑에서 국립 고등사범학교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입학을 위한 준비반 과정에서 니장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 해에 간행한 동인지 「무명 잡지」(Revue sans titre)에 단편소설 「병든 사람의 천사」를 발표하였는데, 고등사범학교에는 불합격되었다가 이듬해인 1924년 고등사범학교에 수석 입학한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레몽 아롱과 메를로퐁티 등과 교제하였으며, 1927년에는 니장과 함께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교정하기도 했다. 1928년에 아그레가시옹(1급 교원 자격) 철학시험에 낙제하였는데, 사르트르의 지인들은 모두 이에 놀랐지만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1929년 수석으로 합격했다.[6] 같은 시험의 차석은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였으며, 이를 계기로 사르트르의 집을 방문한 그녀에게 사르트르는 1929년에 계약 결혼을 제안하게 된다.
사범학교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해 11월 군에 입대하여 기상 관측병으로 18개월간 복무한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도 있었으나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제대 후인 1931년 그는 파리와 파리 근교에 있는 르아브르의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 이때 그는 20페이지 분량의 「진리의 전설」을 집필하는데, 순전히 사르트르 자신의 지식만으로 저술된 이 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출판은 거부되었다. 1932년 베를린 프랑스 문화원의 강사로 있던 레몽 아롱으로부터 처음으로 후설의 현상학에 관해 듣고,[7] 다음 해에 프랑스 문화원의 장학생으로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현상학을 좀 더 깊이 연구한다. 1935년에 상상력에 대한 실험을 위해 친구였던 의사 라가슈로부터 메스칼린 주사를 받았는데, 이때 온몸을 게와 낙지가 감싸고 도는 환각을 겪었고 때문에 반년 동안 우울증 증세로 괴로워했다.[8]
파리로 돌아와 다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36년 단편 <벽>을 완성했고 소설 《구토》를 출판(1938년)함으로써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소집되었다가 1940년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1941년에 가짜 신체장애 증명서[9]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파리로 귀향, 메를로퐁티 등과 같이 대독 저항 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1943년에 《존재와 무》를 내놓아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그리 활발하지 않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당시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인 알베르 카뮈를 알게 된다. 그리고 종전 후인 1945년 10월 제3의 길을 알리기 위한 잡지 <현대>지를 창간하여 실존주의에 대해서 논하면서 소설, 평론, 희곡 등 다채로운 문필 활동에 종사하였다. 또 1945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각지에서 강연을 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제3의 정치 세력을 위해 민주 혁명 연합 준비 위원회를 결성했으나 친미화, 우경화로 내부 분열이 생겨 1949년 11월 해산되고 말았다. 1950년대 프랑스 공산당의 노동력과 용기에 감동해 <현대>지에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는 글을 썼으나 이 때문에 많은 동료들이 떠났다. 6.25가 벌어지자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다가 격퇴당했다 말하며 북한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이후로도 죽을 때까지 북한 정권을 계속 옹호했다. 1960년대에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북베트남 정부를 지지했다. 1964년 <말>을 출판한 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올랐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1968년 5월의 68운동에서 사르트르는 청년들을 향해 정치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하였고, 그를 체포할 것을 권하는 참모들에게 당시 샤를 드골 대통령이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넣을 수는 없다"며 사르트르의 체포를 말렸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 한국의 시인 김지하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선동죄 혐의로 체포되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을 때,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의 번역본을 받아 읽어보고는 곧바로 석방 호소문에 서명을 해주었다고 한다.[10]
이후 문학 저술을 계속해 1971년 귀스타브 플로베르 평전 <집안의 천치> 1, 2권을 출판하였으나 1973년에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문학 저술을 중단했다. 특히 사르트르에게 실명은 죽을 때까지 큰 고통을 주었다.
1943년에 발표한 희곡 <파리떼>는 독일군 점령하에 파리에서 뒤랭에 의해 상연되었다. 그 후 <출구는 없다>가 성공을 거둔 이후 <무덤 없는 사자(死者)> <공손한 창녀> <더러운 손>과 <악마와 신> <네크라소프> <알토나의 감금자>등의 문제작을 발표하고 뒤마의 <키인>,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의 번안(飜案) 등을 합하여 실존주의 연극시대를 가져오게 했다. 사상적인 뒷받침과, 고전적인 극작법의 기술과, 철학자로는 보기드문 무대적인 감각과, 시사적인 소재 등을 고루 갖추어 세계적인 성공을 얻었다. 양식이나 내용상 희곡으로서의 신선미는 약간 부족하나 연극에 코뮤니즘과 크리스차니즘 이외의 사상을 가져오게 한 것은 큰 공적이다.
1980년 4월 15일에 지병인 폐기종이 악화되어 치료를 받고 있던 도중 병원에서 사망한다. 이때 그의 나이 75세였다. 그가 사망했을때 프랑스의 신문사들에서 특보로 실렸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3. 어록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1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서 연약함 속에 존재를 이어가다가 우연하게 죽는다.

인간은 자유라는 저주를 받았다. 세계에 내던져진 이상, 인간은 그가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당신에게 달렸다.

타인은 지옥이다. (L'enfer, c'est les autres.)[12]

체 게바라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다.

[13]

반공주의자는 개다. 나는 이 생각을 바꾸지 않을것이다. 절대로 바꾸지 않을것이다.


4. 일화


  •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기상관측병으로 복무하였고 그러다 포로로 잡힌 적이 있다. 하지만 수용소 안에서도 유대인이 박해받은 이야기[14]에 빗대어 투쟁을 응원하는 연극을 벌이기도 했다. 덧붙여 자신이 사시임을 이용, 실명했다고 군의관을 속여 포로수용소에서 나왔다. 하지만 한편으로 독일군에게 정보를 주고 풀려났다는 설도 있다.
  • 1950년 중반 문인 알베르 카뮈와 친했으나 나중에는 사이가 틀어져 인연을 끊었다. 이유는 알제리 독립전쟁, 한국전쟁[15] 에 관한 견해차이로, 알제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부모들은 모두 프랑스인(어머니는 스페인계 프랑스인)이던 카뮈는 알제리 독립전쟁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16]
  • 영화 시민 케인이 개봉했을 당시 혹평을 가했다. 이는 사르트르의 영화 철학과 시민 케인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프랑스 영화계 흐름인 누벨바그와 깊은 관계를 맺는데, 누벨바그는 다소 거칠고 순간적인 장면을 포착하는 데 의의를 둬서 시민 케인류의 영화와는 방향성을 달리 한다. 따라서 사르트르가 시민 케인을 혹평한 건 명작을 알아보지 못한 흑역사라기보다는 영화적 관점을 달리 이해한 것에 가깝다.
  •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 해방전선(FNL)에게 무기를 지원했다. 또한 알제리 독립을 주도하던 프란츠 파농의 저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파농이 사망하는 바람에 추도사가 되어버렸다.
  •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절하였다. 본인 왈 "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절한 적도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나는 자본주의가 준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노벨상위원이었던 라르스 일렌스텐(Lars Gyllensten)이 저술한 회고록의 내용에 따르면 노벨상을 거절했던 사르트르는 정작 몇 년 후 생활이 곤궁해지자 변호사를 통해 노벨상위원회에 뒤늦게라도 상금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위원회 측의 대답은 "나가라."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상들도 거절한 적이 있는데 이때 "살아있는 동안 그 누구도 평가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 사팔뜨기에다가 키도 작았지만 여자에게 인기가 있었다.[17] 동정은 이미 중학생 때 뗐다고 한다(...)[18]. 작가이자 철학자, 페미니스트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19]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많은 여성들과의 엽색행각도 유명하다. 말년에 넘쳐나는 인세로 여대생들과 사귀면서 생활비를 대주었다. 때문에 원조교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 말년에는 라비라는 유대인 조수를 두면서 사망 1달 전 유신론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사르트르는 "메시아유대교(예수를 받아들이는 유대교)"에 대한 호감을 느끼며 지지하게 되었다고 했다. 보부아르 등 무신론자들은 사르트르의 이런 전향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며 사르트르의 난잡한 사생활을 공개했다. 정작 어이없게도 사르트르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무신론자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져, '두려움에 가득 차 죽어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라는 황당한 주장이 나돌았다. 심지어는 가톨릭 매일미사(...)에도 간간이 올라오는 루머다. 게다가 전향 여부도 불확실하다.
  • 말타의 매할리우드의 스타 감독으로 떠오른 존 휴스턴프로이트에 대한 전기영화를 만들고자 각본가로 사르트르를 영입하려고 하였다. 이에 사르트르는 사례금으로 2만 5,000달러를 선불로 요구했고 완성된 시나리오는 300쪽에 달하는 길이였다. 이것은 영화가 최소한 5시간 이상은 상영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20] 결국 휴스턴은 시나리오 분량을 줄이기 위해 사르트르를 아일랜드로 초대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도착한 수정본은 첫 번째 원고보다 더욱 포괄적이고 방대해진 상태였다고 한다.[21]
  • 샤를 드골과 정말 사이가 안 좋았는데, 사르트르는 드골을 프랑스의 히틀러라고 까고 드골은 사르트르를 아무것도 모르고 입만 산 놈이라고 서로 신나게 욕을 해댔다. 결국 68운동 기간 중에는 아예 드골 정권에서 사르트르를 체포해버릴 것을 드골에게 건의했는데 드골은 "사르트르도 프랑스다."라면서 거부했다고 한다. 날 욕하는 것도 프랑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그걸 처벌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 와이프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는 51년 동안 계약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던 걸로 유명했다. 2년마다 계약갱신하였으며, 심지어 사르트르의 제자였던 올가라는 여자와 함께 세 명이서 한 지붕 아래에서 살기도 했다.
  • 6.25 전쟁 당시 북한 측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지원하는 남한이 북침했다는 김일성의 주장을 그냥 믿었다. 사르트르 외에도 서방의 상당수의 좌파 지식인들이 '미제의 사주를 받은 남한 괴뢰분자'들이 북한을 쳤다는 북침 주장을 믿었다.[22] 게다가 죽는 그날까지 북한정통론을 지지했다. 당시 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본격적으로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 또한 나치와 다를 바 없는 전체주의 사회라고 주장[23]이 되었는데, 사르트르는 이에 반발하고 공산당을 적극 옹호하며 공산당이 없이는 반동 세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북침설의 옹호 또한 이러한 정치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는 평생동안 북한 정통설을 지지했다.
  • 냉전 초기 굴라그 등 소련이 인권을 마구 탄압한 사실이 밝혀지자 카뮈와 논쟁을 벌이며 소련의 인권 유린과 학살을 정의로운 폭력이라며 계속 옹호했다. 그러나 50년대 중반부터는 성향이 변하면서 1956년 소련의 헝가리 반소시위 진압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68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24] 그 직후에 창간된 리베라시옹 발행인을 지낸다.
  • 문화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마오쩌둥을 고평가 하면서 마오이즘을 지지하고 문화대혁명을 높게 평가했으나, 70년대 이후에는 그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동구권과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소년적 동경심에 금이 가면서 서구 극좌조직의 테러에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다만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를 철회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 사르트르는 진보적 폭력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썩어빠진 자본가들이 만든 구조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진보적 폭력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소련의 악명높은 인권유린 현장인 굴라그를 쉴드친 것도 사회주의식 구조변화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옹호한 것이었다. 물론 굴라그에서 학대받으며 죽어간 이들은 썩어빠진 자본가들이 아니라 그냥 무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5. 작품



5.1. 소설



5.2. 철학서


  • 상상력 (L'Imagination) (1936)
  • 상상계 (L'Imaginaire) (1940)
  • 존재와 무 (L'Etre et le néant) (1943)
  •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1946)
  • 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1960)
  • 문학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a littérature?) (1948)

5.3. 자서전


  • (Les Mots) (1964)

6. 기타


  • 철학 계통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블랙 라군에도 딱 한 번 언급되는데, 작중 인물의 평을 빌리자면 변태 사팔뜨기 노인이다.(...) 앞서 말한 여자를 후리는 능력(...) 때문이 아닐까 한다.
  • '샤르트르'는 완전 틀린 발음이다. 프랑스에 샤르트르 지방이 있기는 하다.[25]

7. 관련 문서



[수상거부] 사르트르 본인은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1] 보부아르는 현대 페미니즘의 원론을 제시한 <제2의 성>의 저자이다. 철학 교수 자격 시험에서 보부아르는 최연소 차석을 기록했고 사르트르는 수석을 기록했다. 심사위원들은 차석이지만 보부아르 쪽을 더 높게 평가했다.[2] 샤를 슈바이처는 소르본 대학교의 독문학 교수로서 훗날 의료선교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백부이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모친과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사촌, 사르트르와 슈바이처는 오촌 관계가 된다.[3] 독감 후유증 때문에 각막에 백반이 생겨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게 결국 사시로 발전했다고 한다.[4] 덧붙여 2002년에 제국 이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에마뉘엘 토드는 니장의 손자이다.[5] 사르트르 본인은 이 시기가 '좌절의 세월'이라고 술회했다. 그런데 이건 사르트르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등 본인이 너무 설쳐댄 탓도 있다.(…)[6] 참고로 폴 니장도 같은 해에 합격했다.[7] 1929년 후설이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한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를 놓친 것으로 보인다.[8] 갑각류에 대한 공포는 이후 평생 지속되었다.[9] 사시 증상을 실명이라고 우겨서 군의관을 속여 나왔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독일군에게 협력했다는 음모론으로 발전하기도 한다.[10] 그리고 이듬해 2월에 김지하는 풀려났다.[11] Jean-Paul Sartre,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Paris: Nagel, 1970, p. 17. , 이 말은 하이데거를 인용한 것이다. 사르트르, 존재와 무 참조.[12]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 나온 대사이다.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서로가 주체가 되기 위해 투쟁하는 관계, 즉 지옥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을 제목으로 한 만화드라마가 만들어졌다.[13] 본 문장은 사르트르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wikiquote의 사르트르 항목에 언급되지 않으며, 구글링해도 한국 자료 외에는 찾을 수 없다. 즉, 한국 외에서는 사르트르의 발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인인 사르트르가 B, C, D 등 영어여야 성립되는 문장을 썼겠냐는 문제가 있다. 프랑스어로 "탄생"은 "Naissance", "죽음"은 "Mort"로 영어와 많이 다르다. 이러한 근거에서 본 문장은 사르트르의 말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14] 당시 홀로코스트가 벌어졌을 텐데 저런 이야기를 골랐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것이다.[15] 사르트르는 본색이 드러나지 않은 동구권, 공산주의에 대해 환상이 대단했기 때문에 남한이 먼저 침공했을 것이라 믿었으며, 후일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입장이고 마오쩌둥도 고평가했다[16] 그전부터 소련에 대한 견해 차이로 카뮈와 다소 껄끄러운 관계였다. 카뮈는 아나키스트적 기질이 강해 공산주의에 부정적이었던 반면 사르트르는 소련에 비교적 후한 평가를 내렸다.[17] 사실 유머감각이 있어 사람들을 잘 웃기는 성격이었다.[18] 프랑스가 세속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적인 색이 강해지면서 그 서유럽에서도 성관계가 무척(...) 자유로운 편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 환상 갖진 말자. 일단 프랑스 대혁명이나 파리 코뮌 등의 역사적 사건 이전의 프랑스는 지금의 한국보다 보수적인 나라였으며, 성관념에 대한 역사적 변혁이 많았다. 프랑스도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많기도 하고 개인에 따라 성관념은 천차 만별이기 때문이다.[19] 말년까지 계약결혼을 계속했으며, 아를레르를 양녀로 들였다.[20] 그전에도 프랑스의 소설가 장 주네의 책에 서문을 본문보다 길게 쓴 적도 있었다고 한다.(...)[21] <광기에 대한 잡학사전> 미하엘 코르트, 을유문화사.[22] 정작 동구권인 유고슬라비아는 북한과 소련의 북침설에 만평까지 내놓으면서 비웃었다. 이것은 당시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정권이 친서방 정책으로 소련은 물론 북한과도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23] 이 주장을 전체주의론이라고 한다. 1950년대 유행했다. 대표적인 주장자로는 한나 아렌트가 있었는데, 전체주의 = 파시즘이란 공식에 입각해서 전체주의 사회인 소련이 파시즘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이는 1970-80년대 수정주의에 의해서 반박되었다. 파시즘은 전체주의를 포함하고 있긴 하나 그 하나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24] 동시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려진 사회개혁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여져서 시위세력 간의 동질감이 있었고, 68운동 주도세력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25] 덤으로 '오르셰'도 틀린 발음이다. 외래어 표기에도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