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1. 개요
文學 / literature
사람은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그로 인해 안정감을 얻는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정보를 얻어 학습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의사소통이며, 이 의사소통을 발성이나 기록의 형태로 남겨 전달하는 것이 문학이다."문학"이란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작품으로서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을 말한다.
- 문학진흥법 제2조 제1호.
문학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표현되는 예술이다. 문자가 있는 사회라면 어디든지 존재해 온 예술형식이며, 보통 문자가 없는 사회의 구전문학까지 포괄한다. 문학과 상대되는 것으로 논술, 설명서 등으로 대표되는 비문학이 있다.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서정(Lyric), 타자를 서술하는 서사(Epic), 행동을 모방하는 극(Dramatic) 세 가지 중 서정과 서사가 이야기, 즉 문학의 영역에 속하고 마지막의 극이 재현, 즉 구경거리(showing)의 영역에 속한다.
흔히 소설이나 시, 수필 등만을 가리키는 협의로 사용되지만, 광의로서는 언어로 하는 모든 창조적 활동이 문학의 범주에 포괄될 수 있다. 노벨문학상의 '문학'의 의미도 사실 이러한 광의에 가까웠으며, 처칠이나 베르그송, 밥 딜런이 작가가 아닌데도 문학상을 탄 것도 그러한 경위라고 한다. 혹은 이 경우는 노벨문학상이 문학 업적보다 아주 종종 세평이 좋은 다른 분야의 권위자에게 수여하기도 한다는 예로도 자주 언급된다. 이러한 경우는 몇몇 더 있다. 철학자로는 오이겐이 있고, 역사학자로는 몸젠이 있다. 처칠은 자서전이 그나마 유명세를 탔고[1] , 베르그송은 프랑스 철학자 중에서도 아름다운 프랑스어 문체를 가졌기로 아직까지도 유명하다. 그러나 둘 다, 시, 소설, 희곡 류의 글은 한편도 쓰지 않았다. 수상 거부로 남은 사르트르가 문학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것과는 아주 다르다. 베르그송은 자서전도 쓰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사람은 밥 딜런이다. 노벨문학상의 '문학'이 얼마나 범위가 넓은지를 보여주는 사례.
1.1. 문학의 특징
문학은 학문이 아니며, 문자를 사용한 예술의 한 분야이다. 하지만 뒤에 '''학'''자 하나 잘못 붙어 버려 학문과 비슷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따지면 원래 더 옳을 만한 말은 '''문예'''로, '문자 예술'이라는 더 직관적인 이름으로 읽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 있다. 가끔 '문학 이론'을 문학이라고 부르고 문학 작품들은 문학 이론을 써서 만들어낸 공예품 비슷한 걸로 보는 모양이지만, 대부분의 기관에선 백이면 백 예술 장르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사전적 정의로도 그렇게 나와 있다. 저 '문학 이론'도 문예학이라고 불러야 된다는 입장도 있다.
그러면 왜 문(文)에 학(學)이란 말이 붙게 되었을까? 우리가 지금 쓰는 '문학'은, 근대 개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일본에서 만들어낸 번역어다. [2] 이 역어 '문학', 그리고 '문예'의 성격에 대해서는 매우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사실 '문학'은 만들어진 초기부터 '문예'라는 말과 길항작용을 했다. '문학'이라는 말은 근대 이전에 전혀 다른 의미로 쓰였는데, 이는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학문'을 뜻하는 단어였다. 오늘날 '문예'로 통하는 개념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주로 《소설신수》 등이 등장하는 일본 근대 문학 형성기의 개념사를 근거로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최초의 근대소설가인 이광수는 문학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 〈文學이란 何오〉에서 'literature의 역어이면서 정성을 담아 예술적인 내용을 사실성 있게 전문 작가가 쓴 자유로운 내용의 글'을 '문학'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1896년 이후부터 1910년 전까지 계속되어 왔고,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늘날과 같은 의미가 정립되었다. 다만, 현대 문예 이론의 추세에 따라 여성 문학, 아동 문학, 노동자 문학 등 다양한 장르가 끊임없이 문학의 범주에 추가되고 있다.[3]
같은 맥락으로, '국어국문학과'도 '국어-국문학-과'로 읽어야 한다. '국어-국문-학과'로 읽는 것이 아니다. '국어국문학과'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는 학과[4] 이며, '국어국문학'은 국어학과 국문학을 합쳐서 이르는 말이다. '국어학'은 국어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국문학'은 국문학 그 자체 혹은 국문학을 연구하는 학문을 뜻한다. 국어국문학과의 영문 번역명도 '''Department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이다.
더욱 큰 문제는 대한민국의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문학 과목의 교육 방식이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입시정책인 수능 시험, 그리고 취준생들이 준비하는 공무원 시험(5급 제외)에서 출제하기 때문에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문학이 학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학문처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5]
따라서 일각에서 사용하는 이른바 "문학과 예술"이라는, 문학을 예술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는 부적절한 것이다.[6]
대한민국에서는 문학진흥법에 문학을 예술의 하위분야라 엄중히 규정하고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역시 문학을 예술의 하위분야로 규정한다..## 또한 대한민국예술원법에 따라 대한민국예술원에도 역시 문학 분과가 포함되어 있다.
2. 갈래
갈래를 볼 때에는 유개념(Gattung)과 종개념(Art)의 두가지 범주를 볼 수 있는데, 유개념은 대분류이고 종개념은 소분류로 한다. 이렇게 볼 때 문학을 시, 소설, … 식으로 분류하는 건 이때까지 있었던 한국의 많은 고전 문학의 갈래들을 무시하는 것이 되어서 대분류로 분류하는 것이 시급했다. 옛날의 문학에선 한문학의 기준을 따른 48개의 분류가 있었지만 문학의 새로운 지평이 끊임없이 열리던 현대문학에선 적용할 수 없었던 분류였다.
한국 현대 문학은 아무래도 서양의 문학 형태를 뒤따른 형태로 발전하다 보니 큰 형식에 대한 논의 문제는 없었다. 여기서 문제는 고전 문학. 아무래도 그런 틀이 있기 이전의 문학이기 때문에 쉽사리 서양의 기준에 끼워넣기 어려운 중립적인 형태 역시 상당수 존재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관동별곡 같은 가사 문학. 이를 시와 수필 중 어느 쪽으로 분류할지에 대한 논의가 매우 활발했으며 아직까지 문학 교과서에서 정하는 바 역시 계속 달라지는 등, 이에 관해 국문학에서 복잡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최초로 제시된 건 이병기의 2항 구분으로 시가문학과 산문문학의 두 갈래가 속한다. 기준은 운율의 유무로, 사실 문학의 한 특징만을 보고 너무 크게 나눈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많았다. 김기동은 산문 장르군과 율문 장르군의 두 가지로 나누었고 율문 장르군에 시적 장르와 극적 장르 두 개, 산문 장르에 소설 장르, 희곡 장르, 수필 장르, 평론 장르가 모두 들어갔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판소리계 소설과 현대 희곡이 찢어지는 불상사가 생겨서 비판받았다.
그 뒤 조윤제가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에서 시가, 산문으로 나누었지만 후에 《한국시가의 연구》에서는 하지만 가사가 나서면 어떨까? 하면서 형식은 운문이지만 내용은 마냥 시라고 하긴 어려운 '문필 문학'을 새로 만들고 가사를 넣었다. 근데 이렇게 되면 문필과 가사는 형식으로 분류하는 것도 아니고, 내용으로 분류하는 것도 아니고. 뭐야 이거? 이렇게 2중 적용의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그 뒤 이능우가 "애매한 문필 분류가 아니라 수필로 취급하자!"라며 기존의 시, 소설에 '수필' 분류를 만들어 가사를 넣었다. 여기선 또 희곡이 빠져서 문제가 되었다.
조윤제는 후에 이 애매한 문필 분야를 다시 쪼개서 소설, 희곡으로 정했다. 그게 시가, 가사, 소설, 희곡의 4부문에 평론과 잡문의 부수부문이다. 근데 아무리 봐도 가사가 붕 뜨는 걸로 봤을 때 소설도 너무나도 협소한 영역을 포괄하다 보니까 영 좋지 않은 분류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평론과 잡문이 전 분류에선 제대로 문학 분류 안에 들어갔는데 이번엔 또 '부수부문'이라면서 빠졌다.
후에 장덕순은 서정적 양식, 서사적 양식, 극적 양식이라는, 유개념으로써의 활용을 제대로 염두에 두고 '서정'과 '서사'라는 큰 의미의 분류를 만들게 되었다. 내용적인 측면에 가장 치중한 분류를 통해서 형식 분류 역시 같이 가져오려는 목표를 노렸지만 수필이 서사적 양식에 속하게 된다는 점, 그리고 가사를 주관적, 객관적 나눠서 서정적, 서사적으로 찢는 것 역시 너무 인위적이고 애매한 것 아니냐는 반론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큼직큼직하게 뭉치로 분류할 수 있는 내용적 분류라는 개념은 후에 갈래 분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슷하게 분류한 게 김윤식으로 유개념으론 '기본형', 종개념으론 '변종형'으로 정해두고 서구권 변종형을 '변종 1형', 비서구권 변종형을 '변종 2형'으로 분류하고 장덕순과 비슷한 서사, 서정, 극 형식을 만들었는데, 가사는 쿨하게 서정으로 넣어두고 수필은 쿨하게 빼버린 특이한 분류를 보였다.
지금까지의 문제점이 바로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 크게 발전했던 수필계 문학의 분류가 곤란하다는 점이었다. 가사, 설, 경기체가, 가전체 등등의 픽션과 논픽션이 구분되지 않았던 상황을 도대체 서양의 기준에서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는 것. 특히 한국에서는 서사 문학이 진지한 예술로 취급받지 못해 하나의 고유한 갈래라는 인식도 약했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생긴다. 아니, 애초에 동양에서 文을 유럽처럼 문사철로 구분하지도 않았던 판국에, 서양의 문학체계를 가져와서 연구하면 모양새가 영 이상해진 것을 위에서 끊임없이 봐왔다. 이처럼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등장한 것이 70년대 조동일이 만든 4갈래설이다. 조동일은 현재까지 한국 고전문학의 거장으로 고전문학에 대해서는 건드려 보지 않은 부분이 없는 수준. 여기에서도 연구를 통해 이때까지의 갈래구분이 어설픈 기준으로 애매모호한 잡탕들을 만들어낸 것에 비추어, 이 구분은 '''전환표현의 방식'''과 '''자아와 세계의 대립 방식'''이라는 추상적인 기준을 가져와서 분류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전환표현의 방식'''이란 관점에서 서정은 '비특정 전환표현', 교술은 '비전환표현', 서사는 '불완전 특정 전환표현', 희곡은 '완전 특정 전환표현'이라는 방식으로 분류하고, '''자아와 세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서정은 '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이 없는 세계의 자아화', 교술은 '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 서사는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 희곡은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이 없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것이다. 깊이 가면 성리학까지 끌어다 쓰는 신공을 보인다.[7]
이 분류에서 가장 특기할 점은 '''가사와 수필이라는 희대의 난적'''을 장르 돌려막기나 땜빵 신장르같은 미봉책을 안 쓰고 '''정식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상 뭐가 분류되면 반대로 뭐가 분류 안되고, 어찌어찌 분류를 한다 해도 기준에 일관성이라곤 없던 방식에서 떠나, 비록 엄청난 수준의 뜬구름이라도 예외 처리 없이 제대로 분류할 수가 있게 된 것. 거기에다가 장르를 분석하기 위한 기저가 제대로 마련되기도 했다. 분류를 위한 분류가 아닌, 국문학적 연구에 있어 큰 의미가 있을 수 있는 분류 방식이 되었다. 소설과 시는 대충 봐도 다르지만, 어떤 점에서 다르냐고 물을 때 그에 대한 국문학적 대답이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직관적이며 깔끔한 동시에 체계적이라는 점 때문인지, 초중고 교육과정에서는 대개 3갈래설 중 하나 아니면 이 방식을 통해서 가르치기 마련이다.
문제점도 당연히 있는데,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문제점은 '''추상적인 용어의 뜻이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 '특정'이라는 표현과 '전환'이라는 표현이 특히 문제인데, ''전환''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대충 용어를 정의했다간 속출하는 예외의 숲에 파묻혀버리고 만다. 그래서, 학부 수준 선에서도 제대로 이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는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특정''은 애초에 '''정의가 거의 안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연구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정의 하나하나 다시 뜻풀이를 짚어갈 뿐만 아니라 나름의 재정의도 다시 해야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또한, 비교적 명확한 개념인 자아와 세계의 관계로 규정한 것 역시 '''과연?''' 이라는 말이 나온다. 과연 진짜로 세계라는 말이 자아 반대말로 막 갖다쓸 수 있는 표현인가, 경기체가와 가사는 그럼 자아의 세계화인가 세계의 자아화인가 등등.
이 후 김수업이 노래문학/이야기문학/놀이문학/기타 문학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써서 4분류를 만들어냈는데, 엥? 이거 완전 시소설희곡+쩌리 아니냐? 라고 하기엔 기본적으로 노래문학과 이야기문학, 놀이문학은 각각 시, 소설, 희곡의 좀 더 넓은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다. 김수업의 말을 빌리면 노래 문학은 "마음속에 생겨나서 나타내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제 목소리 그대로 제 입을 통하여 자기의 것으로 토로해 내는 문학", 이야기문학은 "마음속에 생겨나서 나타내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마치 자기의 것이 아니고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꾸며서 자기는 단순한 전달자에 지나지 않는 듯이 표현하는 문학", 놀이문학은 "마음속에 생겨나서 나타내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남에게 시켜서 남들의 입으로 마치 그들 스스로의 것인 양 토로하게 하는 문학"이라고 정의했다. 문제는 기타 문학이란 "위의 세 갈래에 들지 않는 모든 문학을 다 '''싸잡아 넣은 것'''"이라는 분류가 결국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게 엄연한 유개념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 이렇게 되면 서로 다른 갈래간의 체계적이고 유기적인 관계가 흐려진다는 것. 이런 문제 때문에 논의상으로는 존재하더라도 이 이름으로 교육이 이루어진다거나 할 순 없게 되었다.
이렇게 달려와서 현재의 갈래론은 3갈래론과 4갈래론의 양강 체제에 다양한 이론들이 달려 있는 상황이다.
2.1. 갈래 구분
- 서정 갈래: 언어를 아름답게 구성하여 심상이나 교훈을 남기는 형식이다. 언어가 만들어질 때 만들어져 사실상 문화와 문명의 탄생 때부터 존재해온 예술 형식 중 하나로 세계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 중국의 《시경》, 인도의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 그리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등 서사시, 이스라엘의 시편 등 고대 문자 문화권에서는 단연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심지어 낙후된 문화권에서도 구비문학이라는 형태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 서사 갈래: 서술자를 통해 특정 배경에서 어떤 인물이 겪는 사건과 갈등을 허구적으로 형상화 하는 문학 양식으로, 서술자를 통해 이야기 전달/ 인물,사건,배경이 어우러져 이야기를 구성한다.
- 극 갈래
- 교술 갈래: 대상이나 세계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문학 양식으로, 개성적인 발성이나 문체로 형상화한다.
3. 문학 관련 시험 논쟁
4. 각종 오해와 통념들
- 교과서에서 배우는 대로 문학을 평가할 수 있다.
- 대다수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교과과정의 작품 해설을 싫어한다.[9] 대학에서 문학 수업을 들을 경우 교수는 항상 학생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어떤 대답이 나오더라도 웬만하면 '흥미로운 의견' 내지는 '좋은 의견'이라고 말해준다. 사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관점은 분석이다. 원래 시험을 내려면 엄연히 답이 필요하고 분석에는 명확한 답이 존재한다. 수사법이라던가 당시 시대상으로 비춰본 것으로 문학을 분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감상도 하는 것이다. 감상에는 개인마다 편차가 존재하고 그 편차 때문에 좋지 못한 행동이다. 문학을 분석할 수는 있지만 평가는 불가능하다.
다만, 최근 문학 이론은 상호텍스트 성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 작품은 독자들에게 읽히는 순간부터 작가의 손을 떠났으며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작품을 읽고 접하는 독자들에 의해 분석과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학자들 사이에서는 주류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작가의 의도를 배제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작품의 특징이나 의미를 결정하는 데에는 작가의 의도가 모든 것이 아니며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오히려 중요시 되어야 한다는 것.
오히려 그렇기에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을 방해하는 요소로 요겨져 비판 받기도 한다.
오히려 그렇기에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을 방해하는 요소로 요겨져 비판 받기도 한다.
5. 관련 문서
[1] 확실히 방대하고 당시 상황을 살펴보는 데는 유용한 자료이며, 문장력도 훌륭하긴 하지만, 승전국의 지도자라는 권위가 없었다면 노벨문학상을 줄 정도의 작품이었는지는 글쎄...[2] '문예'도 이것과 비슷한 케이스다. 두 말 모두 'literature(영)/Literatur(독)/littérature(프)'라는 단어가 원어였다.[3] 장르소설이나 라이트 노벨과 같은 상업성이 짙은 문학도 대부분의 문예 이론에서는 문학의 범주에서 논한다. 물론 일부는 전통적인 문예만 인정하는 견해를 보이지만, 이론의 학문적 추세는 '''문학(문예)이 맞다.'''는 것이다.[4] 대학의 학과는 '-학'을 전공하는 학과만 '-학과'로 끝나고 나머지는 그냥 '-과'로 끝난다. 정치외교학과, 물리학과, 철학과는 정치외교학(정치학+외교학), 물리학, 철학을 전공하는 학과이고 조소과, 동양화과, 성악과는 조소, 동양화, 성악을 전공하는 학과이다.[5]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흑과 백, 0과 1로 나뉠 수 없지만, 문학 작품을 통해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까지도 정해진 답처럼 주입해 버리는 현 기류가 학문이 아닌 문학을 학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6]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원제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의 직역이며, 기존 서술처럼 단순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7] 하지만 성리학 빠진다고 갈래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성리학은 장식이라는 평도 있다.[8] 설, 기, 제문 등 고전 수필 포함[9] 어느 시인이 수능에 자신의 시가 나와서 그 문제를 풀어봤는데 자신은 그저 시의 여운을 더하기 위해 사용한 문구였을 뿐인데 막상 문제의 답은 자신의 시에서 지나치게 상징성을 찾으려 했는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라 당황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