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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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0대 가경자 비오 12세

'''제261대 성 요한 23세'''

제262대 성 바오로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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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명'''
성 요한 23세 (Sanctvs Ioannes XXIII)
'''본명'''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Angelo Giuseppe Roncalli)
'''출생지'''
이탈리아 왕국 베르가모 소토 일 몬테
'''사망지'''
바티칸
'''생몰년도'''
1881년 11월 25일 ~ 1963년 6월 3일 (81세)
'''재위기간'''
1958년 10월 28일 ~ 1963년 6월 3일 (4년 218일)
'''대관미사'''
1958년 11월 4일
'''장례미사'''
1963년 6월 6일
'''시복'''
2000년 9월 17일, 요한 바오로 2세
'''시성'''
2014년 4월 27일, 프란치스코
'''축일'''
10월 11일[1] / 6월 4일(캐나다 성공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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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교황 재위 이전
2.1. 사제가 되기 전
2.2. 사제 시절
2.3. 교황청 외교관
2.4. 베네치아 총대주교(추기경 론칼리)
2.5.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와의 마찰
3. 교황 재위기간
3.1. “징검다리” 교황
3.2. 요한이라는 이름
3.4. 세계 평화에의 공헌
3.5. 선종과 시성
4. 평가
4.1. 교회 쇄신에 매진한 탈권위주의자
4.2. 재치있고 선하신 교황 요한
5. 이야깃거리


1. 개요



요한 23세 즉위식 동영상 중 urbi et orbi
가톨릭의 제261대 교황이자 기독교성인이다.
재임 시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를 비롯하여 20세기 후반 이후의 가톨릭이 개방적, 탈권위적인 성격의 현대화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 '''20세기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황'''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2] 20세기 초의 비오 10세가 가톨릭 전통주의를 대표한다면, 요한 23세는 개방 및 탈권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요한 바오로 2세와는 달리 외모가 빼어나거나 대중적인 쇼맨십이 있진 않았으나,[3] 선함과 소박함, 진솔함을 무기로 인망을 얻고 존경받았다. 교황이 된 뒤에도 권위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소박함과 진솔함을 잊지 않았다. 그 때문에 교황으로서 권위가 없고 교회를 세속화시킨다고 바티칸추기경단 일부와 마찰도 컸지만, 교황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았다.
살아 생전 이탈리아인들이 붙여준 별명은 '''선하신 교황(Il Papa Buono) 요한'''. 그리고 교황이 되기 전이나 후나, 실로 그 별명에 어울리게 산 교황이었다.

2. 교황 재위 이전



2.1. 사제가 되기 전


  • 안젤로의 생일이 11월 하순이기 때문에, 아래에서 나이를 표기할 때에는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고 간주한 만 나이로 통일하여 쓴다.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미래의 요한 23세는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의 시골 마을 소토 일 몬테(Sotto il Monte)[4]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1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훗날 안젤로 론칼리는 어려웠던 생활을 회고하며 말하길, "남자를 망치는 것이 3가지 있는데, 술, 여자, 그리고 농삿일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농삿일로 당신 자신을 망치셨습니다." [5] 이런 와중에도 신심 깊은 부모, 특히 어머니의 영향으로 안젤로 역시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다. 그 덕에 7세이던 1889년 2월에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매우 빨리 첫 영성체견진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가난한 농부 집안의 아들이었고 주변에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젤로는 별나게도 공부를 무척 좋아하고 머리가 좋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삼촌 자베리오가 퍽 놀랐다고 한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머리 좋은 티가 나자 반 친구들이 방과 후에 불러내어 때린 적도 있었다. 학교에 가지 앉는 날에도 안젤로는 독학을 하거나 자베리오로부터 배웠다.
가족들에게 처음 사제가 되고 싶다는 뜻을 드러내었을 때 대다수 가족들은 '우리 집안에서 무슨 사제냐?' 하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젤로를 눈여겨 보던 삼촌 자베리오는 그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삼촌의 도움을 받아 안젤로는 1892년(10세)에 가장 가까운 도시 베르가모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여기서 '소신학교'는 마을의 초등학교 위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해당했기 때문에, 소신학교에 들어간다고 꼭 안젤로가 신학생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근방에서 초등학교 이상의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들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마도 이미 그때부터 안젤로는 사제가 되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처음 안젤로가 베르가모로 가던 날, 어머니가 온 집안을 뒤져 보았지만 있는 돈이라고는 단 2리라였다고 한다. 농촌 마을이라 어지간한 물건을 다 물물교환으로 얻었기 때문에 화폐가 별 필요가 없었던 것. 어머니는 도시로 공부하러 가는 장남에게 그 2리라를 건네주면서 울었다.
안젤로는 베르가모에서 공부하다가, 소신학교에 입학하고 3년이 지나 1895년(13세)에 삭발례[6]를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신학생으로서 성직자 입문단계를 밟았다. 그러나 아직 사제가 된 것도 아닌데도, 휴가 기간에 고향으로 돌아갈 때면 마을 사람들은 마치 안젤로가 이미 신부가 된 양 존대했다고 한다. 안젤로는 이러한 것을 거북하게 여겼다. 그러한 대접에 질투가 났는지, 한번은 다른 사제에게 안젤로의 가족들 중 누군가가 '벌써 신부라도 된 양 거만하게 군다.'는 말을 흘렸다. 이 말이 신학교에까지 전해지자 안젤로는 '너 자신을 낮추라.' 하는 꾸지람을 들었다.
1898년(16세)에는 평생 동안 큰 영향을 받은 라디니-테데스키 몬시뇰을 만났는데, 몬시뇰은 안젤로에게 로마에서 공부해보라고 권하였다. 안젤로는 로마 교황청립 아폴리나레 신학교에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 로마에서 공부했다. 아폴리나레 신학교에서 안젤로를 가르쳤던 교수 중에는 훗날 비오 12세가 된 파첼리 신부도 있었다.
1901년(19세)에 이탈리아 정부는 신학생들에게 부여했던 군 면제 혜택을 폐지하고 신학생들도 군인으로 징집했다. 안젤로도 징집되어 이등병으로서 베르가모 여단의 병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한 사제 지망생에게 제일 힘든 것은, '군대 병사들의 분위기' 그 자체였다고 한다. 신학교에서는 하지 않는(혹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행동들을 거리낌없이 행하는 동료 병사들의 문화가 상당한 쇼크였던 듯하다. 하지만 가난한 시골 마을 출신인 덕에 체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서 군대 생활에 나름대로 잘 적응했고, 병장 진급도 오히려 빨리 했다.

2.2. 사제 시절


군에서 제대하고 1904년(22세)에 로마에서 사제로 서품받았다. 그러나 막상 부모와 삼촌 자베리오는 아들/조카의 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로마행 기차표를 살 돈이 없었던 탓이었다. 안젤로는 부모와 삼촌에게 감사의 편지를 따로 보내야 했다. 고향 소토 일 몬테의 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린 뒤, 로마의 아폴리나레 신학교로 돌아와 사감으로 일하면서 교회법 공부를 계속했다.
한편, 안젤로에게 로마에서 공부하라고 권했던 라디니-테데스키 몬시뇰은 당시 교황 비오 10세 때문에 큰 괴로움을 겪었다. 라디니-테데스키는 사회개혁에 큰 열정을 쏟았고, 그렇기 때문에 (당시 가톨릭 기준으로는 빨갱이스럽단 평가를 받았던) 레오 13세 시절에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임 교황이 된 비오 10세는 보수적인 인물이라 당시 라디니-테데스키가 진행하던 사회운동을 멈추라고 명하고 베르가모의 주교로 임명했다. 비오 10세는 라디니-테데스키를 주교로 임명함으로써 일종의 좌천을 시킨 것이다. 이것이 라디니-테데스키에겐 큰 고통이었다. 아무튼 베르가모의 주교로 임명된 뒤 라디니-테데스키는 1905년에 안젤로(23세)를 비서로 삼아 임지로 부임했다.
안젤로의 고향에서 가까운 베르가모는 롬바르디아의 공업도시로 공장 노동자들이 많고 가난한 곳이었다. 신자들은 새로 부임한 주교가 '로마에서 온 귀족 출신 성직자'이기 때문에 선입견이 있었지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는 라디니-테데스키의 태도를 보고 점차 생각을 바꾸었다. 안젤로는 주교의 비서로 일하는 동안 노동자들의 고충을 알게 되어 사회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후에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게 된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 때문에 근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아 교황청으로부터 찍혀 있었다.[7]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태도였던 것과 달리 교리에서는 의외로 보수적이던 라디니-테데스키 주교는 계속해서 비오 10세와 충돌했다. 교리에서는 보수적인 라디니-테데스키에게는, 교황과 계속 충돌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정신적 고통이었다. 심지어 교구 안에 자신과 교황 사이를 이간질하는 첩자가 있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라디니-테데스키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쇠약해지다가 1914년에 안젤로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가 선종한 날짜는 교황 비오 10세가 선종하고 2일 뒤였다. 라디니-테데스키 주교를 진심으로 존경하던 안젤로에게는 이 죽음이 큰 아픔이었다. 바로 이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듬해(1915), 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는 병력을 징집했는데, 안젤로도 33세 나이로 재징집되었다. 안젤로는 (첫 징집 때 달았던) 병장 계급을 받고는 밀라노의 의무대에 배치되었다. 후방으로 이송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꾼으로 노릇하면서도 또한 성직자로서 활동했다. 1916년에 이탈리아 정부는 군에 징집된 모든 사제들을 군종 신부로 임명했다. 이때 안젤로는 군종 신부로서 중위가 되었다. 한편 안젤로의 남동생들도 군에 징집되었고 여동생 1명은 암에 걸려, 안젤로는 공적인 일로도 사적인 일로도 바쁘고 힘들었다. 이 시기에 안젤로는 베르가모 주교의 명으로 학생용 호스텔을 짓고 학생들을 받아들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8]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19년에 공식적으로 제대하여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성체대회를 준비하는 일을 하였다. 1921년(39세)에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안젤로를 몬시뇰로 임명하고 전교회(당시에 일어난 가톨릭 선교단체)를 통합하고 이끄는 역할을 맡겼다. 안젤로는 이 일을 크게 부담스럽게 여겼지만 주변의 권유로 받아들였다. 당시에 서로 독자적으로 일어나 중구난방으로 활동하던 유럽의 전교회를 통합하고 바티칸의 지휘를 받는 조직으로 만드는 일을 하였다.
1920년대 초, 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에서 집권하던 시기에 안젤로는 여러 번 무솔리니를 비판하는 언행을 하곤 했다. 그 외에도 '가톨릭 신자가 비가톨릭 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용함이 좋겠다.'[9]는, 당시 가톨릭으로서는 놀랍도록 좌파적인 주장을 하여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에 바티칸 일각에서는 안젤로에게 '근대주의자(modernist)'[10] 혐의가 있다는 딱지를 붙였다. 쉽게 말하자면 '저놈 이단자 아닐까요?'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2.3. 교황청 외교관


1925년(43세)에는 주(駐)불가리아 교황청 순시자로 임명받았다. 교황청 순시자가 신부여서는 권위가 없다는 이유로 주교로 서품받았지만, 이것은 안젤로가 교황청이나 이탈리아 종교계에서 힘을 얻지 못하도록 좌천시키는 작업이기도 했다. 불가리아처럼 가톨릭 신자가 소수인 나라로 가는 교황청 외교관은 한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파견된 순시자는 무려 6백 년 만에 불가리아로 가는 교황청 외교관이기도 했다.
안젤로는 외교관으로 임명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본인이 신자들 속에서 일하는 사목자를 바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교관이 되면 누이들을 하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론칼리 집안이 가난하므로, 안젤로는 누이들을 자기 일을 돌보는 하녀로 두어 월급을 주었다. 성직자든 뭐든 론칼리 집안에서 그래도 가장 성공한 사람이 안젤로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도와달라 돈을 부쳐달라는 부탁을 많이 들었으므로, 가족들을 돕는 일환으로 누이들을 하녀로 두었던 것. 그런데 외교관이 되어 해외로 나가버리면 더 이상 누이들을 하녀로 둘 수 없고, 따라서 월급도 줄 수 없으므로 꺼려했다. 하지만 결국 외교관이 되었다.
불가리아 정교회교황청 순시자로서 부임하는 안젤로를 두고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정교회를 전복시키려는 음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안젤로는 불가리아에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의혹들을 피하려 노력했고, 불가리아의 가톨릭 하층민들을 껴안고자 애썼다. 당시 불가리아 가톨릭은 프랑스인 사제들이 이끌었는데, 전례에서 기도도 불가리아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했다고 한다. 안젤로는 '불가리아어로 기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불가리아 정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고자 노력했다. 당시 불가리아 국왕 보리스 3세가 이탈리아 공주 조반나의 결혼 문제를 두고, 안젤로는 교황청의 대리인으로서 양측을 조율해야 했다. 보리스 3세는 정교회 신자로서 정교회식으로 결혼하고 아이들에게 정교회 세례를 주고자 했으나, 당연히 조반나 공주와 교황청은 반대했다. 처음에는 보리스 3세가 교황청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듯하였으나, 결혼식 당일에 기습적으로 정교회 결혼성사를 거행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왕비로부터 아기를 빼앗아 정교회 세례를 주었다. 이 일로 안젤로는 교황청에 소환되어 질책을 받았다.
1935년(53세)에는 터키/그리스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받아 불가리아를 떠났다. 당시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 정부와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과감하게 공식 문서에 터키어를 도입, 터키 정부와 유화적인 관계를 맺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 불필요한 어그로를 끌지 않고자 성직자의 복장인 수단 대신 평범한 양복을 입었는데, 한 번은 양복을 입은 자기 사진을 어머니에게 부치면서 "양복을 입은 주교 아들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스탄불에서 그는 국제 정세와 각종 국가들의 정보들을 입수해서 교황청에 보고하는 역할도 맡았다.
한편 터키에서 미사를 드리며 성경을 터키어로 읽거나, 라틴어 전례문을 읽다가[11] 터키어 기도문을 짧게 덧붙이기도 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항의하거나 또는 로마에 알리기도 했다고 한다. 안젤로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나오는 반발을 보고, 겉으로는 어떻든 속으로는 상당히 상처를 받은 듯하다. 한편 그리스에서는 안젤로가 활동할 때마다 정부가 감시요원을 붙였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교황청과 무솔리니가 동맹을 맺었다 여기고, 교황청 대사가 '무솔리니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했다고 한다. 터키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리스에서는 정말로 언행 하나하나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또한 가난한 가족들에게 어떻게든 돈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성직자로서 받는 월급을 쥐어 짜야 했다. 35년/39년에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가 선종하여 슬퍼했다.
사적으로 공적으로 힘든 와중에도 동방정교회와 화해를 적극 모색한 덕에 1937년 안젤로가 교회일치위원회를 방문했을 때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불가리아든 터키든 그리스든 모두 가톨릭이 소수종교인 지역이라, 교황청 대사로서는 한직에 불과했다.
1944년(62세)에 프랑스 주재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었는데, 처음 소식을 듣고 명령이 잘못 전달된 줄 알기도 했다. 한직만을 맴도는 자기가 갑자기 프랑스 주재 대사라는 요직[12]에 임명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안젤로가 임명된 것은 당시 교황 비오 12세가 처음 프랑스 대사로 생각한 성직자가 건강상 이유로 임명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직만을 맴돌긴 했지만 가는 곳마다 온후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평을 듣는 안젤로 주교를 프랑스 대사로 임명했던 것. 이 사실을 알고 안젤로는 '''"이 없으면 당나귀라도 일해야지."'''하고 자조했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에 좌파 사상의 영향을 받은 신자, 성직자들이 제법 있었으므로, 역시 적당히 그쪽 물이 든 안젤로가 파견되면 잘 다독거릴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외교관'이란 말을 들었으며, 외교관으로서뿐만이 아니라 또한 주교로서 프랑스의 본당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붙잡힌 나치 독일 포로들의 공정한 처우와 석방을 프랑스 정부에 촉구하는 한편, 나치에 협력한 혐의가 있는 주교들을 조사해 교회에서 퇴출시켰다.
1951년(69살)에는 바티칸 공식 옵저버로서 유네스코에 파견되어 총회에서 '유네스코는 인종과 언어와 종교를 가리지 않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내용으로 연설을 하였다. 다른 참석자들은 가톨릭의 대주교가 가톨릭 중심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고 놀랐다고 한다.

2.4. 베네치아 총대주교(추기경 론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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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로는 1953년(71살)에 베네치아의 총대주교 겸 사제급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베네치아와 리스본의 총대주교는 가톨릭 교회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총대주교의 착좌 후 빠른 시기에 추기경으로 서임됨은 물론, 추기경으로 서임되지 않더라도 추기경의 의장을 갖추는 특권을 누렸다.[13] 20세기에 들어서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지내다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이 3명이나 있었는데 바로 성 비오 10세, 성 요한 23세, 그리고 하느님의 종 요한 바오로 1세였다. 밀라노 대교구장이었던 바오로 6세 또한 교황이 되었다.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 안젤로의 문장은 상단부에는 베니치아의 상징인 사자가, 하단부는 론칼리 집안의 문장인 탑이 있는 것이었다. 문장이 말하는 바는 결국 '''론칼리 집안 출신 베네치아 총대주교'''라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내용인데, 교황이 된 뒤에도 전임자 비오 10세의 전례를 따라 총대주교 시절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교황 문장으로 따왔다. 사목표어는 'Oboedientia et Pax(순명과 평화)'.
안젤로는 베네치아에서도 예의 자기 성품대로 따뜻하고 온화하게 다른 사람들을, 혹은 문제들을 껴안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또한 성직에 입문한 뒤로 신자들 속에서 일하는 사목자를 꿈꾸었기 때문에, 외교관 대신 일선 교구를 맡음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젤로는 교황이 되리라 예상치 못했다. 베네치아 총대주교가 된 시점에서 이미 70대 노구였으므로, 이를 마지막으로 고향 소토 일 몬테로 은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안젤로의 조카 중에서도 (주교 삼촌을 둔 영향인지) 신부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 삼촌이 고향 마을로 은퇴하면 거창한 축제를 열려고 준비하기도 했다. 안젤로는 이 소식을 접하고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럴 필요 없으니 관두라." 하였다.

2.5.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와의 마찰


추기경 시절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라면, 당대 바티칸의 실세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와의 대립 정도. 파스칼리나 수녀는 안젤로 추기경에게 엄청난 결례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배우 클라크 게이블바티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파스칼리나 수녀와 비오 12세 모두 게이블의 팬이었다. 그런데 파스칼리나 수녀가 스케줄로 잡혀있었던 론칼리 추기경의 교황 면담을 취소하고, 게이블의 교황 알현을 스케줄에 넣어 론칼리 추기경을 바람 맞힌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저 두 사람이 연예인 팬이라 저지른 즉흥적인 사태라기보다는, 고위 성직자들에 대한 일종의 '기싸움'으로 벌인 일이기는 했다. 실제로 파스칼리나 수녀가 비오 12세의 묵인 하에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들의 교황 알현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서 교황과 파스칼리나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킨 것이 이 무렵이다. 또 파스칼리나 수녀는 훗날 "안젤로 추기경이 교황으로 즉위할 것을 알았더라도, 배우 하나 때문에 바람맞히는 일을 했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대답은 YES였다고 한다. 심지어 "이 세상에 추기경은 많지만 클라크 게이블은 1명뿐 아닙니까?" 하는 말까지 남겼다.
그런데 안젤로는 교황이 된 뒤에, 자신을 계속 경계한 것은 물론 결례를 저지른 적이 있는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에게 보복을 하긴커녕 바티칸으로 불러 위로를 건넸다고 하니 그야말로 대인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파스칼리나 수녀와 요한 23세의 성향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결국 죽을 때까지 둘이 화해는 하지 못했다. 요한 23세가 파스칼리나 수녀를 위로하려고 부른 자리에서도 잔잔한 키배가 벌어졌다니 말 다했다. 요한 23세와 파스칼리나 수녀가 만났을 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보수 성향이 강했던 파스칼리나 수녀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후임자인 바오로 6세도 파스칼리나 수녀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화해했다. 그 후에는 바오로 6세가 파스칼리나 수녀의 자선 사업에 직접 도움을 주었다.

3. 교황 재위기간




3.1. “징검다리”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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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76세) 10월 9일 비오 12세선종하고 동월 28일 콘클라베에서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으로 선출되면 흰색 수단(soutane)을 입고 사도궁 발코니에 서서 그 앞에 군중들과 온 세상을 위해 축복함이 관례다.[14] 누가 교황이 될지 모르므로 바티칸 재단사들은 미리 대/중/소 크기로 임시 수단을 지어둔다. 그런데 허리통 굵기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허리통이 굵은 론칼리 추기경이 교황이 되자 당황했다. 그래서 수단을 뜯어서 옷핀으로 고정시켜 겨우 입혔는데, 사람들은 수단이 너무 꽉 조여서 꼭 죄수복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당시 콘클라베는 정말로 누가 교황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신문에서는 차기 교황이 될 만한 추기경 후보를 20명이나 뽑았는데, 선거에 참여한 참가한 추기경 총수가 51명에 불과한 만큼, 40%가 후보로 거론된 것이다. 하지만 론칼리 추기경은 그 신문에 소개되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투표가 시작되자, 콘클라베 시작 전 예상과는 달리, 처음부터 안젤로가 유력한 교황 후보임이 드러났다. 첫 투표부터, 비록 당선이 유효한 투표 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론칼리 추기경은 가장 표를 많이 받았다. 투표가 계속되면서 한때 지지율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표가 몰려 교황으로 당선되었다.
추기경단 중 이탈리아파와 프랑스파가 나뉘었는데, 쉬어가는 역할도 하면서 양(兩) 파가 모두 합의할 만큼, 나이도 많고 야심도 없으면서도 덕망은 있는 추기경이 론칼리 추기경뿐이었다. 새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에서 두 파가 서로 합의에 달하지 못하자, 서로가 합의할 수 있고 쉬어갈 수 있는 사람을 뽑자고 의견이 모인 것이다. 당시 가장 유력한 교황 후보로 꼽혔던 프랑스파 타르티니 추기경이 낙선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이 사람은 능력도 있고 정치 세력도 당시 추기경들을 통틀어 가장 큰 편에 속했지만, 정적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과격하고 괄괄한 성격이 문제였는데, '''교황(비오 12세) 앞에서 그 자리에 없던 누군가를 욕하는 육두문자를 퍼부었다'''는 일화까지 있다.[15] 추기경단을 비롯한 바티칸 내부에선 권위주의자에다 고집불통인 전임 교황 비오 12세, 그리고 비오 12세의 신임을 등에 업고 바티칸의 실세로 위세를 날렸던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워낙 오래 지쳐서 '이제 좀 쉬자.'는 의견이 강했다. 그래서 론칼리 추기경을 뽑은 것이다.
그래서 요한 23세 즉위 당시에는 '징검다리 교황'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콘클라베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안젤로 자신도 교황이 되리라 생각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3.2. 요한이라는 이름


교황으로 최종 당선이 되기 전, 안젤로는 자기가 교황으로 당선되리라 짐작하고, 만약 당선될 경우에 추기경들 앞에서 할 라틴어 연설문을 미리 작성하였다. 당선된 뒤에 교회법이 규정한 대로 추기경단 대표와 의전 사제가 콘클라베 결과를 받아들일지, 그리고 받아들인다면 교황명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물어보았을 때, "결과를 받아들이며, 교황명으로 요한을 택하겠다."라고 말하면서 미리 작성한 연설문을 읽었다. 이 연설문은 요한 23세의 사목방침과 영성을 간결하게 드러내었다.
교황은 이름으로 요한을 선택한 이유를 부친의 이름과 자신이 세례성사를 받은 본당의 이름, 가톨릭 교회의 주교좌 대성당의 이름이 모두 요한이기 때문이라고 한 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지금까지 총 22분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셨으며[16]

, '''이 이름을 선택한 분들은 대부분 짧은 기간 동안 교회를 통치하셨습니다'''. 로마 교황좌의 장엄한 계승 앞에 우리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이름을 감추어 버립니다."

실제로 14세기의 요한 22세(18년 119일 재위)를 제외하면 어떤 요한 교황도 15년 이상 재임한 적이 없다. 역대 22분의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교황 가운데 요한 23세는 12번째로 오래 재임한 교황이며, 5년이 안 되는 재위기간만으로도 이 요한 교황들 가운데 평균에 든다.

3.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세간의 예상과 달리 요한 23세는 교황이 된 지 얼마 안 된 1959년 1월부터 공의회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교회법 개정 작업을 추진하고, 추기경들의 숫자를 대폭 증가시켰다. 1959년(77세) 1월 20일, 요한 23세가 공의회를 개최하고자 한다는 의중을 처음으로 국무성 장관 타르디니 추기경에게 드러내었을 때, 의외로 타르디니 추기경은 놀라긴 했지만 적극 찬성하였다.[17]
같은 달 25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그 자리에 있던 추기경 70명에게 "공의회 개최를 하려고 한다"면서 반응을 살폈을 때, 대부분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요한 23세는 실망하였다. 어떤 추기경은 교황이 경험이 없고 충동적이라, 별다른 고려 없이 즉흥적으로 공의회 개최를 이야기했을 거라고도 했고, 어떤 추기경은 교황의 귀가 얇아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설득당해 그랬을 거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요한 23세는 즉흥적으로 결정하지도,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결정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명백히 자기 주관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였다. 그 와중에 자신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불면증에 시달렸다.
요한 23세는 공의회에서 무엇을 다루면 좋을지 전세계 가톨릭교회 주교와 중요 기관들에 설문지를 보내었으며, 이들 중 70% 정도가 답장을 교황청으로 보냈다. 그중에는 별의별 의견이 다 있었으며, 교황청에서는 이렇게 모인 답장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처음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1963년에 거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교황청 관리들이 "1963년은 너무 빠르다"고 말하자, '''오히려 1962년으로 개최 일정을 앞당겨버렸다.'''[18]
그리하여 1962년 10월 11일, 회개와 쇄신을 위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나만으로 요한 23세는 가톨릭 역사에 엄청난 한 획을 그었다.''' 자세한 내용에 관심 있으면 책을 찾아보길 권한다. 변화가 너무 엄청나서 여기에 대충 적기도 힘들다. 위의 관련 항목은 정말 간략하다 못해 부실하니, 저 항목만으로 공의회에 대해 알았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게 좋다.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가톨릭의 역사는 공의회 전과 공의회 후로 나뉜다고 해도 괜찮다. 이런 점을 지적한 논문이나 단행본 또한 부지기수라, 예를 들기가 어려울 정도다.
안타깝게도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결과를 보지 못한 채, 개회 1년 만인 1963년 6월 3일에 81세 나이로 선종했다. 이후 후임 교황 바오로 6세가 공의회 재개를 명하여 끝을 보고 개혁작업을 시작했다.

3.4. 세계 평화에의 공헌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미국소련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요한 23세는 소련 서기장인 니키타 흐루쇼프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에게 각각 전쟁 반대 입장을 밝혔다. 또한 라디오를 통해 "현 세대엔 전쟁이 아닌 평화가 필요하다"란 내용을 담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미소 양측에 은밀히 (소련의 핵미사일 쿠바 배치와 미국의 해상 봉쇄에 관한) '동시 철수'라는 중재안을 제시하여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같은 해에 개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 결과 맨 위의 표지에서 보듯, 요한 23세는 교황으로는 처음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19]
이듬해인 1963년 4월에는 사순 기간을 맞아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라는 회칙을 발표하여 세계평화에 관한 천주교회 차원의 가르침,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요한 23세가 선종하기 불과 2개월 전의 일이었고, 그가 교황으로서 남긴 마지막 주요 업적으로 기록되었다.

3.5. 선종과 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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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시신
성 예로니모 제대 안에 안치된 시신
부모와 형제 대부분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요한 23세도 가족력을 피할 수 없었고, 교황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위암 진단을 받았다.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고자 자신의 병을 숨겼고, 바티칸에서는 교황이 위통을 앓고 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요한 23세의 몸 안에 자리 잡은 암세포는 바티칸 공의회 1차 회기가 끝날 무렵에 크게 전이되었지만, 요한 23세는 놀라운 정신력으로 육체의 고통을 버텨냈다. 결국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서도 "교황이 위통이 아닌 위암을 앓고 있으며, 이미 말기"라고 보도했다.
1963년 6월 1일, 성 베드로 광장에는 '선하신 교황'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몇 차례 의식을 잃었다가 회복을 반복한 교황이 6월 2일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2번 반복한 말은 요한 복음서 21장 15~19절에 나오는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였다.[20] 이 말을 끝으로 교황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성령강림대축일 전날인 6월 3일 오후 7시 49분에 선종하였는데, 그 시간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봉헌된 교황의 건강을 기원하는 야외 미사가 끝난 무렵이었다.
유해는 6월 4일 사도 궁전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운구되어 이틀간 조문객을 받았고, 6월 7일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 매장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시복 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관을 열었는데, 유해가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선종 후 유해에 특수 용액을 주입해 방부처리했기 때문이다. 2000년 9월 17일에 이미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요한 23세의 거룩함을 기리기 위해 선종 38주년인 2001년 6월 3일 무덤을 개장해 얼굴에는 피부 보호용 밀랍을 한 겹 씌우고 교황으로서의 의관을 갖춘 후 청동과 유리로 만든 새로운 관에 입관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신자들의 공경을 받고 옥외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그 후 교황의 유리관은 지하 무덤이 아니라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의 성 예로니모 제대 아랫쪽에 안치되었다.
선종한 직후 요한 23세에 우호적이던 일부 추기경들은 "시성 관련 절차가 확립되기 이전의 관습에 따라, 요한 23세를 즉각 시성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임자 바오로 6세는 그러한 선례를 남길 경우 시성성의 절차를 무시하는 좋지 않은 영향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거부하였다.
2013년 7월 5일, '''드디어''' 교황청에서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성인으로 공식 승인한다고 선포하였다. 시성식2014년 4월 27일. 복자에서 성인이 되려면 승인받은 기적사례보고가 1건 더 필요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업적이 능히 기적 사례를 대신한다.'는 이유로 교황 프란치스코가 시성을 허가하였다. 본디 성인의 축일은 해당인물이 사망한 날짜로 정함이 원칙이지만, 가톨릭 교회는 요한 23세의 축일을 공의회를 개회한 날짜인 10월 11일로 정하였다.[21] 가톨릭교회에서는 요한 23세를 교황사절, 베네치아 총대주교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일치 운동수호성인으로 삼았다. 그 외에도 요한 23세의 고향 소토 일 몬테 마을도 주보성인으로 요한 23세를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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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식, 2014년 4월 27일
시성식 당일 모여든 인파

시성식 때 불린 축가 '''Pastore buono del gregge di Cristo'''(기독교인의 선한 목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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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성상도 제작되었다.

4. 평가



4.1. 교회 쇄신에 매진한 탈권위주의자


현대 가톨릭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황이다. 본시 성품이 '''소탈하고 서민적'''이었고 개인적인 욕심도 없었지만, 교황으로 당선된 초부터 가톨릭교회를 '''쇄신'''하려고 결심한 상태였다. 현대 사회의 발전과는 달리 격리되어 쇠퇴의 위기를 맞고 있던 가톨릭교회의 쇄신을 위해 노력했다.
권위주의적이던 이전의 교황들의 스타일에서 탈피해, 되도록 '''검소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적인 예로, 교황청 기관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서는 교황에 대해 언급할 때, 말하자면 "존엄하신 분의 입술에서 옥음이 내리셨다" 같은 식으로 표현했는데, 요한 23세는 그냥 "교황이 말했다"라고 쓰라고 지시했다. 이런 공식적인 활동에서뿐만이 아니라 교황청 안에서 인부들과 만날 때에도 시골 신부 같은 '''온화하고 탈권위적'''인 태도로 대해서 크게 인망을 얻었다.
추기경들은 교황이 너무 권위가 없다고 싫어하기도 했다. '''사회정의에도 관심'''을 쏟아서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등 관련 교서를 발표했는데, 미국의 우익 신자들이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당시 가톨릭의 분위기에 거스르는 점이 많았다.
또한 다른 기독교 종파들, 동방정교회개신교와의 화해 및 대화에 대한 노력을 기울인 교황이기도 했다. 이미 교황이 되기 전부터 동방정교회와의 대화에 노력한 요한 23세는, 동방정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던 이전의 시각에서 탈피해 '''갈라진 형제'''로 규정했다. 또한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다.

4.2. 재치있고 선하신 교황 요한


요한 23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가 많이 전하는데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교황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상류층 사람들에게 노골적인 무시와 푸대접을 당하곤 했다. 한 번은 어느 고급 파티에서 누군가 성직자인 그에게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여주며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요??" 하고 물었다. 요한 23세는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 네. 어머님이신가 보군요. 참 잘생기셨습니다.[22]
  • 요한 23세가 외교관으로 재직하였을 때의 일이다. 한 여자가 파티에서 야한 복장으로 나타나서 론칼리 몬시뇰에게 아는 척을 하자, 그 여자에게 사과를 건네며 이렇게 디스를 했다고 한다.
>자매님!! 이 사과를 드시고 부끄러움을 느끼시지요.
이 에피소드는 구상 시인이 요한 23세에 관해서 쓴 수필에 소개된 것이다.
  • 요한 23세는 밤에 잠을 조금 자고 일찍 일어나는 대신 낮잠을 자곤 했다. 요한 23세가 낮잠을 자는데 뭐라고 잠꼬대를 하고 있어서 들어봤더니,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모릅니다. 교황에게 물어보지요.
  • 로마시 경비대장이 요한 23세를 알현하러 와서 예법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요한 23세는 경비대장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일어나세요! 당신은 장교지만 나는 병사였답니다.
사실 요한 23세는 신학생 시절 징집되어 병사로 1번, 사제 시절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의무병으로 징집되어 복무한 적이 있다. 대전 중에 군이 복무 중인 사제를 군종 신부로 임명함에 따라 장교 임관이다.
  • 요한 23세가 아직 안젤로 추기경이던 시절, 동유럽공산주의 정권 밑에서 복역하다 풀려난 추기경이 로마에 찾아왔다. 안젤로는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 같이 기차를 타고 바티칸으로 향하는데, 감옥에 있다 나온 이 추기경은 바깥 구경을 더 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차가 잠시 정차한 틈을 타서 두 추기경이 함께 산책하기로 했는데, 바깥 구경을 정신 없이 하는 사이에 기차가 떠날 시간을 놓쳤다. 감옥에 있었던 추기경이 당황하는데, 안젤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지금 제 뒤에 있는 분 보이죠? 이 분이 기관사입니다. 기차에서 내려올 때 잡아왔죠. 이 분이 있는 한 기차는 떠나지 못합니다.
  • 요한 23세는 소탈하면서도 개방적인 인물이라 가톨릭교회의 오랜 관성을 혁파하려고 했다. 그래서 권위적이며 보수적인 로마인이었던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 타르티니 추기경과 마찰이 잦았다. 교황 집무실이 국무원장실 바로 위에 있던 관계로, 국무원장은 요한 23세에게 화가 나면 "저 위에 계신 분"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 소식은 돌고 돌아 요한 23세의 귀에까지 전해졌고, 국무원장과 독대한 자리에서 요한 23세가 말을 꺼냈다.
>저 위에 계신 분은 오직 하느님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국무원장보다 1층 위에서 일하는 사람일 뿐이고요. 다시는 계급을 혼동해서 부르지 마십시오.
  • 요한 23세가 교도소를 방문하였을 때, 수감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들이 제게 오시기 어려울 것 같아서, 제가 여기에 왔습니다.
  • 요한 23세가 교황청을 산책할 때였다. 포도원에서 일하던 정원사가 와인을 한 잔 권했다. 요한 23세는 맛을 본 뒤 이렇게 말했다.
>엔리코, 다른 신부들이 여기에 와서 와인을 맛보지 못하도록 해주겠소? 한 번만 맛을 보면 추기경들이 모두 미사에 쓰자(성체성사)고 할 테고, 어쩌면 하루에 네댓 번이나 미사를 드리자고 할지도 모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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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몬티니 추기경과 교황

5. 이야깃거리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서문에서 화자인 멜크의 아드소는 "까오르의 자크라는 노인네가 교황으로 선출돼 요한 22세를 참칭했다"면서, "하느님이 보우하사 다시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거역스러울 터인 이 이름을 쓰는 교황이 없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 요한 22세가 1334년 선종한 이후 요한 23세가 즉위한 1958년까지 수백 년 간 요한이라는 이름의 교황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대목이다.
사실 15세기에 이미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재위(1410년∼1415년)했으나 폐위되어 무효화된 적이 있는데, 폐위될 때 죄목이 '''이단, 성직 매매, 배반, 알렉산데르 5세의 독살, 볼로냐의 200명 이상의 여인들을 유혹한 죄'''였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항목 참조.
요한 23세가 생전에 사용하던 지구본을 복원하는 데 한지가 사용된다고 한다.#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 시절 론칼리 대주교는 "제3차 유엔 총회에 상정된 대한민국 독립 승인 결의안 의결을 적극 도우라"는 당시 교황 비오 12세의 당부에 따라,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 지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 4달만에 UN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승인을 받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 정부 유엔 승인에 바티칸 역할 있었다.
[1] 10월 11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 날이다.[2] 그의 직접적인 후임자 바오로 6세를 비롯해서 이후 등장한 교황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요한 23세의 노선을 이어받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요한 23세가 재위 시절에 행했던 개혁 조치들이 없었다면 요한 바오로 2세프란치스코 교황 같은 이들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3] 교황에 선출된 후의 한 대외 행사에서 어느 신자가 "새 교황은 별로 잘생기지도 않고 늙은이네." 하며 실망 섞인 반응을 보이자, 요한 23세는 "미안합니다. 콘클라베미인대회가 아니라서요."라고 답했다고 전한다.[4] 이탈리아어로 '산 밑 마을'이란 뜻이다. 훗날 요한 23세를 기리고자 마을 이름에 '요한 23세'를 덧붙여, 소토 일 몬테 조반니 벤티테레치모(Sotto il Monte Giovanni XXIII)가 되었다.[5] 농사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15명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가장이 농삿일에 매달리는 것은 온 몸을 망가트릴 만큼 고된 일이 아니었을까? 요한 23세의 이 말은 평생 고생한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묻어난다.[6] 신학생이나 성직자, 수도자들이 정수리 부분만 동그랗게 삭발함으로써 속인과 구분되는 인물임을 표시하는 의례. 오늘날 가톨릭 사제 양성 과정에서는 삭발례를 하지 않는다.[7] 훗날 요한 23세가 교황이 된 뒤에, 교황청 문서들 중 자기 관련 서류를 보았는데, 거기에 '근대주의자 혐의가 있다.'는 문구가 적힌 것을 보고 열이 뻗친 나머지 그 문서에 직접 "나, 요한 23세 교황은 근대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선언한다!"라고 적었다. 이후 분노가 가라앉자 "나는 성무성성으로부터 감시받던 사제도 교황이 될 수 있다는 예다."라고 추가로 적어넣었다.[8] 여기에 누이 2명을 불러 여사감으로 임명했다.[9]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10] 여기서 말하는 근대주의(modernism)는 20세기에 그리스도교 세계에 분 조류를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성으로 재분석하고 해체하여 다시 쌓아 올리자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비오 10세는 근대주의를 이단의 온상으로 강경하게 단죄하고 1910년에는 모든 성직자들이 反근대주의를 맹세하도록 했다. 비오 10세 교황의 이 조치는 1967년에 폐지되었다.[11] 당시 가톨릭에서 하던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성경이나 전례문을 싹 라틴어로 했다.[12] 프랑스 주재 교황청 대사가 요직인 이유는, 당시 가톨릭 신자 비중이 매우 높은 프랑스에서 프랑스 주재 대사에게 각 교구주교 후보 추천권이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각국에 파견된 교황청 대사가 파견국 교구들의 주교 후보 3인을 교황청에 추천하면 교황이 그중 1명을 임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당연히 프랑스 주재 대사가, 가톨릭 인구가 거의 없는 터키 주재 대사보다 훨씬 요직이다.[13] 리스본의 총대주교는 교황보다 크기가 작은 세디아 제스타토리아와 공작 부채를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14]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에 하는 이 축복을 '도시(로마)와 온 세상에'라는 뜻의 라틴어 urbi et orbi라고 부른다. 교황은 당선 직후뿐만 아니라 예수성탄대축일예수부활대축일, 그리고 교황이 판단하기에 특별한 때에 이 장엄한 축복을 행한다.[15] 이때 교황 앞에서 욕설을 퍼붓는 타르티니 추기경의 모습에 열받은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는, 타르티니 추기경에게 삿대질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교황 앞에서 육두문자를 퍼붓는 사람이나, 일개 수녀의 신분으로 추기경에게 대든 사람이나 참 대단한 인간들이다.[16] 사실은 요한 20세는 없다. 요한 15세를 요한 16세라고 잘못 명명했는데, 이게 요한 21세 명명 이후에 밝혀졌기 때문. 그러므로 요한 23세가 사실은 22번째 교황이 된다. 사실 대립교황까지 치면 요한으로 명명된 교황은 23명을 넘는다.[17] 도메니코 타르디니 추기경은 위 문단을 비롯, 비오 12세, 파스칼리나 수녀 문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바로 그 인물로, 해당 문서들에 지속적으로 추기경으로 언급되지만 실제로는 요한 23세가 추기경으로 서임했고, 그 이전에는 주교도 아닌 평사제였다. 파스칼리나 수녀가 비오 12세의 눈과 입이었다면 타르디니 추기경은 조반니 몬티니 추기경과 함께 그 오른팔과도 같았던 최측근으로, 요한 23세의 즉위 이후 고령과 건강 문제로 은퇴를 청했으나 교황은 허락하지 않았다. 요한 23세와는 비오 12세 시절에도 의견 충돌이 많았던 사이였는데 오히려 더 중용받음을 보면 대단한 능력자고, 요한 23세도 후에 타르디니 추기경이 공의회 개최에 흔쾌히 동의한 것에 매우 놀랐다고 회고한 걸 보면, 두 분 모두 대인배이기도 하다. 이후 공의회 준비 등 바티칸 공무에 시달리던 끝에 요한 23세보다 2년 먼저 심장마비선종한다.[18] 그런데 요한 23세가 위암으로 인해 1963년에 선종했기 때문에, 만약 처음 일정대로 1963년에 했거나 교황청 관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 이후로 미루었더라면, 요한 23세는 자신이 계획한 공의회 시작도 보지 못하거나 공의회를 연다는 계획이 아예 무산되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때만 하더라도 아직 요한 23세 본인도 자신이 위암에 걸린 줄 몰랐다. 공의회 성사를 위해서 정말로 하늘이 도운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19] 이후 1994년 요한 바오로 2세,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20] 예수부활 후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재회했을 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3번째로 받은 사도 베드로의 대답. 굳이 같은 질문을 3번씩이나 한 것은, 십자가 수난 당시 베드로가 목숨을 부지하려고 3번 예수를 모른다고 한 것에 대해, 예수가 친히 용서해주기 위함이라고 해석된다. 이 대답을 듣고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하여 자신의 후계자이자, 사도들의 수장으로 재신임했다. 오늘날 교황들이 갖는 교회 수위권의 유래 중 하나가 되는 성경 속 일화.[21]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나 미국 성공회는 요한 23세의 축일을 각각 6월 3일, 6월 4일로 정하였다.[22] 어느 서적에서는 "부인이신가 보죠?"라고 응수했다는 서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