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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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2대 마르첼로 2세

'''제223대 바오로 4세 '''

제224대 비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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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명'''
바오로 4세
'''본명'''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 (Giovanni Pietro Carafa)
'''출생지'''
나폴리 왕국 나폴리
'''사망지'''
교황령 로마
'''생몰년도'''
1476년 6월 28일 ~ 1559년 8월 18일 (83세)
'''재위기간'''
1555년 5월 23일 ∼ 1559년 8월 18일 (4년 87일)
223대 교황.
1476년 6월 28일 나폴리 남작 가문의 후손으로 베네벤토에서 멀지 않은 아벨리노의 카프릴리오에서 태어났으며, 삼촌인 올리비에로 카라파 추기경에게 양육되어 로마에서 교육을 받아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배웠다. 삼촌에 이어 1505년부터 1524년까지 키에티 혹은 테아테의 주교가 되었고, 1513년부터 1514년까지 레오 10세 교황의 특사로 잉글랜드에 파견되어 헨리 8세와 만났고, 1518년에 브린디스의 대주교, 1515년부터 1520년까지 플랑드르와 스페인의 대사가 되는 등 교회 안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개혁가였던 그는 개인적으로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고, 인문주의에 관심을 가져 에라스무스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나폴리 사람으로서 그는 외세, 특히 스페인이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교구에서 자행되는 부정과 비리를 척결하려고 노력했다. 하드리아노 6세가 자신의 개혁 계획에 동참하라는 뜻에서 그를 선택하자, 그는 1524년에 교구장직을 포기하고 티에네의 가에타노와 함께 테아티노회를 설립했다. 그가 사임한 교구 이름을 딴 이 수도회는 엄격한 청빈을 지키고 사도적 생활방식을 재건하고 교회의 부정과 비리를 혁파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이 수도회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1527년 로마 약탈 후 베네치아에 있을 때나 로마에 있을 때나, 1536년 12월 추기경으로 서임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개혁파의 지도자였다. 루터파와 화해하는 것에 반대하고 인문주의와 절연했으며, 다시 개소한 이단심문소의 책임자로서 가혹함을 보여주었다. 1549년 2월에 나폴리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1553년에는 추기경단 단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카를 5세 황제의 반대를 뚫고 그가 마르첼로 2세 교황의 후임자로 선출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79살이었다.
바오로의 선출은 개혁가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희망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의 통치 스타일은 독재자 스탈이었고, 전임 교황들의 중립 노선을 철회했다. 그리고 조카인 카를로 카라파는 프랑스와의 연합을 통해 스페인을 치고 마침내 이탈리아에서 몰아내 버리자고 교황을 설득했다. 교황군은 교황령을 침공한 나폴리 총독 알바 공작에게 패했고, 교황은 어쩔 수 없이 카베 평화조약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정책 현안에서도 그는 온건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에서 가톨릭과 루터파의 공존을 인정한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을 이단과의 협잡으로 비난했고, 1556년 카를 5세의 퇴위나 1558년 페르디난트 1세의 선출은 교황의 승인을 얻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스페인에 대한 반감은 잉그랜드의 메리 1세와 불화를 일으켰다. 그녀가 사망하자 그는 몰수된 교회 토지의 반환을 주장하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그녀의 소유권을 자신에게 내놓으라고 강요함으로써 잉글랜드에서 개신교의 궁극적 승리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개혁가로서 금욕적이고 고집이 센 교황은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는 1552년 4월 28일에 중지된 트리엔트 공의회 재개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완고한 반개신교주의자인 그는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1556년 봄에는 고위 성직자 60명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는 여기에 비이탈리아인 주교들을 추가하여 기존 공의회를 대신하는 교황의 공의회로 확대시킬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카베 평화조약 이후 그는 로마의 이단심문소에 집중했다. 심문소의 권한을 크게 확대하고 미카엘 기슬리에리(훗날의 비오 5세)를 책임자로 두었다. 그는 심문 법정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는데, 신앙에 대한 결벽증이 심하여 조반니 모로네 추기경 같은 죄 없는 사람까지 이단자로 몰라 수감했고, 레지널드 폴의 잉글랜드 교황 특사직을 박탈했다. 그는 이단심문소를 검사성성으로 승격시켜 금서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개신교인들을 사주한다고 의심하여 로마와 교황령의 게토에 유대인들을 몰아넣은 다음 독특한 모자를 쓰라고 강요했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교회가 간절히 기다린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발판을 마련되었다. 추기경 임명에 신중을 기했고, 교구장들의 교구 상주를 역설했다. 수도원들에 재속 성직의 추천을 금지했고, 자기 수도원을 떠난 수도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주교 임명에 너무 신중을 기한 나머지 많은 주교좌가 몇년 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반감과 사람들에 대한 의심에 눈 멀었던 그가, 품행이 나쁜 조카 카를로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정치 고문으로 삼기까지 한 것 그리고 친척들에게 의지한 바 커서 수익성이 좋은 지위를 그들에게 약속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그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뒤늦게 알게 된 바오로는 크게 화내며 그들의 직무를 박탈하고, 1559년 1월에는 로마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평판은 이미 크게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바오로는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서를 개혁할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는 로마 전례의 품위를 높이고, 총독을 통해 풍기문란 행위와 폭력을 진압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편협함과 정책의 엄격함, 불관용 그리고 족벌주의로 그의 평판은 매우 나빴고, 그에 대한 기대는 실망과 분노로 변했다. 그가 사망하자 민중이 들고 일어나 검사성성 청사를 공격해 죄수들을 풀어 주었고, 캄피돌리오 언덕에 있는 그의 흉상을 부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