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13세
226대 교황.
1. 초반(?) 생애
1502년 1월 1일 볼로냐에서 지역 상인인 아버지와 귀족인 어머니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8년 동안(1531~1539) 법학 교수로 재임했다. 이 시기에 자코모라는 사생아를 1명 낳았다. 훗날 교황이 된 그는 자코모를 산탄젤로 성의 관리자로 임명했다. 1539년에 그는 로마로 가서 40세쯤에 사제서품을 받고, 바오로 3세 교황 아래서 변호사이자 행정가로 높이 평가받으며 교황청 사법기관의 요직을 맡았다. 1556년에 바오로 4세는 그를 교회 개혁을 위한 특별위원회 위원에 임명하고, 같은 해에 프랑스에, 1577년에는 브뤼셀에 외교사절로 파견했으며, 1558년 7월에 비에스테의 주교로 임명했다. 1561년부터 1563년까지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에 교회법 전문가로 참석했고, 공의회 교령 초안 작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비오 4세 교황은 그의 노고를 인정하여 그를 1565년 3월 12일에 산 시스토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했다. 교황 특사로 스페인에 파견되어 펠리페 2세의 신임을 얻은 그는, 펠리페의 영향력 덕분에 비오 5세 선종에 따른 콘클라베에서 24시간 이내라는 빠른 시일 내에 교황에 선출될 수 있었다.
2. 교황 시기
그레고리오 13세는 비오 5세보다 융통성이 있었지만, 트리엔트 공의회 교령과 가톨릭 개혁 실행에서는 비오만큼 단호했다. 한때 품행이 정결하지 못했던 시절의 그였지만, 성 가롤로 보로메오에게 영향을 받아 매우 모범적으로 생활했다.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했던 그는 절친한 톨로메오 갈리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교황청 국무원장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만 들었다. 그는 교령 실행을 위해 추기경 위원회를 구성하여, 주교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과 주교들의 교구 상주 의무 준수를 강조했다.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당시까지 주로 외교 업무만 담당했던 교황대사를 교회 개혁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성좌의 권위가 위협받던 루체른, 그라츠 그리고 쾰른에 새로운 교황 대사관을 설치했다. "잘 훈련된 성직자 없이는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관점에 적극 동의한 그는, 거액을 들여 로마와 기타 도시들에 대학을 설립하고 주로 예수회에 위탁했다. 로마 대학[1] 을 재건하여 크게 기부하고(1572), 독일 신학원의 장래를 보장해 주었으며, 1579년에는 잉글랜드 신학원을 설립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 마론파 신학원, 아르메이나 신학원과 헝가리 신학원(훗날 독일 신학원과 합병했다)을 설립했다. 이 신학원들, 특히 독일과 잉글랜드 신학원은 전문성을 갖춘 엘리트 성직자들을 많이 배출해 개신교가 득세한 나라에서 훌륭한 열매를 맺었다.
가톨릭의 유지와 회복을 위해 그레고리오 13세는 개신교에 좀 더 공격적으로 대응했다. 위그노파와의 전쟁 중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소식이 프랑스에서 로마로 전해졌을 때, 그는 사은찬미가를 노래하며 정치적 반역의 패배이자 불신앙에 대한 가톨릭의 승리를 기념했다. 그리고 그는 위그노파에 대항한 가톨릭 동맹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트리엔트 교령을 실행하려는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네덜란드와 아일랜드로 관심을 돌리라고 촉구하면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기를 바랐다. 1578년과 1579년 아일랜드의 잉글랜드 침공 계획이 무산되었을 때, 그는 엘리자베스에 대한 반란을 모의하고 있던 로베르토 리돌피를 개인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네덜란드 남부의 여러 주가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1579년 1월 6일 아라스 동맹에 가입하는 것에 대해서 만족을 표시했다.
그러나 성직자의 결혼 허용, 성인들에게 전구를 요청하는 것에 대한 금지 그리고 양형성체에서 양보를 요구했던 스웨덴의 요한 3세와의 협상은 성과가 없었고, 스웨덴은 결국 가톨릭을 버리고 루터교회를 받아들였다. 로마와 러시아 교회의 일치를 위한 시도들 역시 결렬되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확실히 가톨릭으로 돌아왔고, 독일에서도 개신교의 팽창이 주춤해지면서 많은 지역에서 가톨릭 교세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1573년부터 독일 가톨릭교회의 발전을 위해 추기경들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인 독일 위원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독일 북서부에서 가톨릭 재산권을 보장하기 위해 알브레히트 5세 공작의 막내아들인 바이에른의 에른스트에게 트리엔트 공의회가 정한 성직 겸임 금지를 무시하고 5개나 되는 교구를 허락했다.
그레고리오 13세는 유럽에서뿐 아니라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브라질에서까지 선교사업을 하던 예수회를 지원했다. 그는 마닐라 교구를 설정하고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프란치스코회와 아우구스티노회에 균등한 지원을 했다. 1575년 그는 성 필립보 네리의 오라토리오회를 인가했고, 예수의 데레사에 의한 맨발의 가르멜회의 개혁 역시 1580년에 승인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제의한 교회법전의 개정 작업을 추진했고, 로마 카타콤바의 재발견으로 교회 역사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1582년 2월 24일에는 전임 교황들이 추진하던 율리우스력의 개정을 프라스카티 인근 몬드라고네 교황 저택에서 완성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우리가 쓰고 있는 그레고리력이다. 가톨릭 국가들은 10일의 삭제(1582년 10월 5~14일)와 윤년 횟수 조정을 포함한 이 새로운 역법을 채택했으나, 개신교 국가들은 한 세기 이상 따라 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오는 건축 사업에도 열정적이었다. 예수회 본원인 제수 성당을 완공했고, 나보나 광장에 있는 2개를 포함해 총 4개의 분수를 주문했으며, 퀴리날레 언덕에 커다란 여름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1575년의 희년이 특별히 성대하게 거행되도록 로마 재건에 더욱 힘썼다. 그러나 대규모 건축 사업, 가톨릭 군주들에 대한 막대한 지원, 대학과 단체에 대한 후원금을 주체할 수 없어서 부득이 교황의 독점권과 관세에서 추가 수익을 올려야 했다. 또한 소유권에 작은 결함이라도 보이면 온갖 법적, 행정적 조치를 동원하여 토지를 반환받았다. 이 때문에 재산을 빼앗기고 불만이 고조된 귀족들이 폭도로 돌변하여 그의 말년에 로마와 교황령에서 폭동과 불법이 만연했다.
[1] 훗날의 그레고리오 대학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