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시인)
1. 개요
신동엽(申東曄)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석림(石林)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김수영(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으로 평가받는다."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2. 일생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태생이다. 1944년 부여국민학교 (현 부여초등학교) 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한다. 이후 단국대학교에 입학해 사학을 전공했으며, 1953년에 졸업했다.
1950년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었고, 1951년 국민방위군이 해체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픈 나머지 게를 함부로 먹었다가 디스토마에 감염되었는데, 이는 그의 요절의 원인이 되었다.
1953년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의 자취방에 살다가 돈암동 네거리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다.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인병선[1] 을 만났고 1957년 결혼했다. 결혼한 그 해인 1957년, 인병선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수학하는 대신 가난한 시인과의 삶을 택하고 학교를 중퇴한다. 그리고 신동엽의 고향인 부여로 내려갔다.
인병선은 부여에서 양장점을 열어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고, 신동엽은 충남 보령시의 주산농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1959년 폐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교편에서 물러난 후 처와 자식들을 다시 서울 돈암동 처가로 돌려보냈다. 자신은 부여에서 요양하며, 이때 글에 집중한다. 그로부터 1년 후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이때 문단에 처음 등장했다.
다행히 1960년부턴 병세가 좋아졌다.
3. 기타
-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 <껍데기는 가라>가 유명하다. 수능 대비 모의고사 문제에도 자주 출제될 정도로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익숙한 작품. 최근에는 작품의 참여시적 성격과 더불어 서정시적인 면모도 높이 평가되어 재평가받고 있다. 짧은 시들 중에는 명시가 많다. '껍데기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아니오', '원추리', '진달래 산천' 등등 하나 같이 간결한 언어 선택으로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조금 긴 시들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모습('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등등)도 보인다. 서사시인 '금강'은 동학 농민운동을 다룬다. 신하늬라는 독자와 시인 자신의 창작된 투사체가 역사 속 실제 인물인양 이야기에 등장하면서 몰입해서 시를 읽을 수 있는 문학적 장치였다는 찬사와, 역사성과 고증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엇갈린다.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와 경기도 고양시 북한산 백운대 남서면에 '신동엽길'이 있다.[2]
- 2013년경, 생가 바로 옆에 신동엽문학관이 생겼다.
- 장남 신좌섭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다. 신좌섭 교수의 장남이자 신동엽의 손자인 신재원이 상산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사망했고 명예졸업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