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국기
1. 개요
당나라 사람 고음(顧愔)이 통일신라에 사신으로 와서 방문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견문록이다. 삼국사기에는 영호징이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고음이 쓴 신라국기를 영호징이 정릉유사(貞陵遺事)를 쓰면서 인용했고, 그것을 삼국사기가 또다시 인용하면서 영호징이 쓴 신라국기라고 와전 된 것이다.
2. 상세
고음은 768년 신라에 보낸 사신단에 사관으로 파견된 인물이며, 이 때 신라의 상황에 대해서 파악한 정보들을 고음이 귀국 후 정리한 것이다.
발해국기나 고려도경과 비슷하게 중국인이 한반도 국가를 직접 탐방하고 쓴 책으로 당대의 시대상을 잘 알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사료가 될수 있으나 아쉽게도 지금까지 전해지지는 않고, 신당서 신라전이나 삼국사기에서 진흥왕, 진덕왕, 경덕왕 본기에 일부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도경이 반쪽이나마 남아서[1]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신라국기 원문이 전해지지 못하는 점은 아쉬운 부분.
3. 삼국사기 인용문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은 『신라국기(新羅國記)』에서 말하였다.
“귀족의 자제 중 아름다운 이를 택하여 화장을 시키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높이 받들어 섬겼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37년(서기 576) 봄.'''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은 『신라기(新羅記)』에서 “그 나라에서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진덕왕 8년(서기 654) 봄 3월.'''
망덕사(望德寺) 탑이 흔들렸다.【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 ‘신라가 당나라를 위하여 이 절을 세운 까닭에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두 탑은 마주 보고 있으며 높이는 13층이다. 두 탑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하였다. 이러한 일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이 해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닌가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제9권 신라본기 제9 경덕왕 14년(서기 755) 봄.'''
또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귀인들의 자제 중 아름다운 자를 가려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받들었으며,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다 받들어 섬겼다”고 하였다. 이는 대개 왕의 정치를 돕기 위한 방편이었다. 선랑이었던 원화로부터 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무릇 이백여 명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사선(四仙)이 가장 어질었으니, 저 ≪세기≫ 중에 설하는 바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