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

 



'''신라 제56대 국왕
敬順王
경순왕
'''
고려 초에 제작된 경순왕 어진[1]
'''국적'''
[image] 신라[image] 고려
'''시호'''
'''경순(敬順) / 효애(孝哀)'''[2]
'''별호'''
김부대왕(金傅大王)[3]
'''궁궐'''
월성(月城)
'''본관'''
신라 왕조 국성
'''성씨'''
김(金)
''''''
부(傅)
'''왕후'''
[4]
'''왕자'''
마의태자(麻衣太子)
김덕지(金德摯)
'''부왕'''
신흥대왕(神興大王) 김효종(金孝宗)
'''모후'''
계아태후(桂娥太后) 김씨
'''묘지'''
경순왕릉
'''생몰년도'''
음력
897년[5] ~ 978년 4월 4일[6]
'''재위기간'''
음력
927년 ~ 935년 12월 12일 (8년)
1. 개요
2. 신라의 마지막 임금
2.1. 신라의 항복 과정
3. 고려에 항복
3.1. 항복 이후
4. 가족 관계
4.1. 고려에 항복 전
4.2. 고려에 항복 후
5. 자녀 등장
5.1. 족보 위조 현상
5.2. 《김은열 묘지명》
5.3. 《신라경순왕전비》
5.4. 《김씨 분관록》
5.6. 《조선씨족통보》
5.7. 조선 후기 문헌에 등장하는 자녀들
6. 평가
7. 경순왕릉
8. 대중매체에서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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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56대 국왕이자 마지막 임금. 휘는 부(傅), 시호는 경순(敬順). 제46대 문성왕의 후손[7]으로 아버지는 이찬 효종(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桂娥太后)다. 따라서 효공왕의 외조카이자 경명왕, 경애왕의 이종사촌 형제가 된다.[8]
927년 11월 후백제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을 주살하였다. 그리고 경애왕의 외사촌동생 김부(金傅)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부터 935년까지 8년간이다.
경순왕은 이전까지 신라 김씨계 마지막 임금이었던 제52대 효공왕과 촌수로 따지면 13촌으로 굉장히 멀었지만 아버지 김효종이 화랑 시절에 효녀 지은 일화 등으로 명성을 얻어 헌강왕의 사위가 되었고 효공왕 때는 시중까지 되면서 김씨계 후손들 중에서는 가장 왕위에 근접한 위치에 있었다. 신라에서는 적장자가 없으면 사위가 왕위 계승 후보가 되었는데 박씨인 신덕왕도 그런 케이스이다.
정사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등에 경순왕은 왕후[9]와의 사이에 두 왕자를 두었는데 이들 왕자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으며 단지 태자, 왕자라는 기록만 보인다. 야사삼국유사에도 태자, 계자(季子)[10]라 하고 계자의 법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이후 첫째 왕자를 마의태자(麻衣太子)[11]라 부르며 둘째 왕자는 김덕지(金德摯)[12]라 한다.
935년 12월 고려에 항복한 후 경순왕은 정승공(正承公)에 봉해지고 지위가 고려의 태자보다 높았으며 녹봉으로 1천석을 받고 신란궁(神鸞宮)을 하사받았다.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慶州)라 하고 경주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주면서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였다.
975년 고려 경종(景宗)은 정승공 김부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그의 관작(官爵)을 상보(尙父)로 삼았으며 관광순화위국공신(觀光順化衛國功臣)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 정승(政承)에 봉하고 식읍 8,000호를 지급하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978년(경종 3) 4월 붕어(崩御)했으며 시호(諡號)를 경순(敬順) 또는 효애(孝哀)라 하였다.

2.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견훤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자결시키고 그를 임금으로 세웠다. 이미 박씨의 왕위 세습이 3대나 진행되었던 만큼 견훤포석정 사태라는 급변 상황이 아니었으면 경순왕은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훗날의 공양왕과도 약간 비슷한 케이스. 수백년간의 김씨 왕위 계승을 끊고 박씨가 왕위를 차지한 후삼국시대의 신라 상황에서, 아마도 밀려난 김씨 세력과 견훤의 거래가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경순왕 본인이 계획했다기보다는, 견훤이 판단하기에 아직 한반도에서 정통성의 의미가 큰 신라 왕실을 완전히 폐지하는 리스크를 안는 대신에 민심을 얻기 위해 앉힌 명분상의 임금에 지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박씨가 가져간 왕위를 김씨에게 돌려준다는 식으로 포장하면 신라역적이 아니라고 빠져나갈 여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다. 한편 역적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단 점에서 정통성 논쟁이 벌어질 법도 했는데[13] 효공왕의 죽음으로 예전 김씨 왕계는 계보가 완전히 끊긴 상태였고 김부가 남아있는 김씨 중에서 가장 왕위에 가까운 혈통의 소유자였는지 별 태클은 받지 않았다.
자세히 따져보자면,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은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라고 불린 충신이었고, 백부 억렴도 지대야군사의 벼슬을 지내면서 끝까지 신라를 지킨 충신이었다. 거기다가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로 신덕왕의 왕비인 의성왕후 김씨는 그녀의 친언니였으며, 경명왕과 경애왕은 경순왕에게 외사촌들이었다. 경명왕 사후 조카들을 밀어내고 즉위한 경애왕의 행동은 지금의 박씨들의 본적지를 사방으로 퍼트렸으며, 경애왕은 경주까지 온 견훤에게 부부가 모두 죽음을 맞았으니 자녀들도 거의 죽거나 살았어도 힘을 모두 잃은 지경이었다. 또한 친동생되는 인물은 견훤이 돌아가면서 포로로 끌고 갔으니 박씨들이 왕위를 논할 자격은 자연스럽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견훤은 정작 자신이 올린 경순왕 즉위 후에도 계속해서 신라에 연거푸 쳐들어왔다. 이것은 견훤이 서라벌 기습으로 신라를 무력화시킨 뒤에도, 아직 고려와의 미묘한 힘의 균형 때문에 서라벌을 장기적으로 점령할 능력이 부족했고, 신라 조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마음대로 조종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팽팽한 고려와 후백제의 대결 상황이라는 국제 정세 덕분에 아직 왕조의 명맥은 근근이 유지되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경순왕 휘하의 신라는 실로 처참한 지경이었다. 전왕 경애왕 때까지는 신라군이 고려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며 후백제군과 싸우기도 했지만 경애왕 피살 이후 경순왕이 즉위한 신라의 영토는 이미 건국 초창기의 사로국 시절 수준, 그러니까 경주 주변에만 겨우 통치력이 미치던 상태였다. 고려, 후백제와 힘을 겨루기는커녕 바로 인접한 지역에 있는 경북, 경남 지방의 호족들조차도 제대로 다스릴 능력이 없었던 것은 덤. 그나마 경주를 지켜주던 대야성 방어선까지 견훤의 침공에 완전히 초토화되어 경주 역시 만약 왕건이나 견훤이 앞뒤 가리지 않고 작정하고 쳐들어온다면 사실상 무방비한 상태였다.
930년(경순왕 4년) 9월에는 지금의 강릉시에서 울산광역시까지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의 고을들이 모조리 고려에게 항복하였는데, 경주가 기본적으로 경주 분지 내륙 도시지만 동해 바다에도 상당히 인접한 것을 고려할 때, 이 정도면 정말 신라의 영토는 서라벌 하나만 남은 수준이었다.[14] 왕건은 직접 일어진으로 행차해 성을 쌓았는데 여기가 지금의 포항시 북구 신광면, 즉 경주시 코앞이었다. 견훤처럼 강제로 밀어버리진 않지만 경순왕에게 '이제 슬슬 항복해라'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931년 2월에는 경순왕이 왕건을 서라벌로 초청하였고, 임해전 호수 앞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술기운이 오르자 927년 견훤의 침략 얘기를 하다가 원통함에 왕을 포함해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이에 왕건은 경순왕과 신라의 뭇 신료들을 위로하기 위해 말, 비단, 보화 등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왕건 입장에서는 경주의 신라 조정을 언제든지 잡아먹을 능력이 있었지만, 예전에 한반도를 수백년간 지배해왔던 전조 신라의 상징성을 감안하면 무력으로 합병했다간 민심이 엄청나게 흔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 가능하기 때문에, 경순왕이 스스로 귀순해오는 구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후백제와 고려의 힘겨루기를 수년간 지켜보던 중에 후백제 안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견훤이 935년 음력 3월 실각[15]하고 후백제의 상황이 어지러워지자, 대치 구도가 깨지고 천하의 대세가 고려에 있다고 보았는지 사직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2.1. 신라의 항복 과정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935년 10월 고려로 귀순하는 것에 대해 경순왕이 신하들과 논의하자, 신라 신료들의 태도는 "누군가는 옳다 하고, 누군가는 옳지 않다 하였다"라고 나와있다. 신라는 이미 다 저문 해고 고려의 왕건이 새로운 패자에 오르기 직전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라 정부 내에서는 항복을 반대하는 의견도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맨 위에 있는 마의태자와 경순왕의 대화.

왕자(王子) :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다만, 충신·의사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수비 하다가 힘이 다하면 그만 두어야지,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가벼이 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경순왕 : "작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의 간과 뇌장(腦漿)이 땅에 쏟아지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삼국사기935년(경순왕 9년) 10월 고려에 항복하는 것에 반대하는 태자(太子)와 항복할 뜻을 밝히는 경순왕의 문답 기록이다.

이후 첫째 왕자는 고려 양국(讓國)에 불가함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麻)로 된 옷을 입고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의 동생 김덕지(金德摯) 왕자도 양국(讓國)의 불가함을 태자(太子)와 함께 극력 간(諫)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 태자(太子)를 따라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후 화엄종(華嚴宗)에 귀의하여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도(道)를 닦으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고 전한다.
이와 같이 경순왕은 재위 8년차이자 고려 태조 재위 17년인 935년(경순왕 9년) 10월 30일, 태자(太子)를 비롯한 덕지(金德摯) 왕자 등의 반대파를 뒤로 하고, 결국 고려 귀순을 결정하였다.
신라의 항복은 신라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에서, 역사서에 기록된 바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가 아닌 과반수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다. 원래라면 화백회의는 만장일치가 원칙이므로 항복 안건은 부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순왕은 항복 안건을 과반수 찬성으로 밀어 붙였다. 화백회의 관련해서 한국사 시험이나 수능 한국사 과목에 나올 수 있으니 참고. 여기서 한 가지 의의를 더 찾자면 화백회의는 망국의 순간까지도 남아서 국가 존망을 결정하는 엄청난 영향력을 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경순왕은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보내 개경의 고려 조정에 입조(入朝)[16]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3. 고려에 항복



'''작위'''
'''낙랑왕(樂浪王)'''
'''공신호'''
관광순화위국공신(觀光順化衛國功臣)
추충순의숭덕수절공신(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
'''훈위'''
상주국(上柱國)
'''직위'''
정승공(政丞公), 사심관(事審官)
'''존호'''
상보(尙父) · 도성령(都省令)
'''봉토'''
경주(慶州)
'''궁궐'''
유화궁(柳花宮), 신란궁(神鸞宮)
'''후비'''
낙랑공주 왕씨
부인 왕씨
''''''
헌숙왕후[17]
무려 천년 가까이 한반도를 지배한 신라의 항복은 고려가 한반도의 정통성을 넘겨받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기에 경순왕의 항복 과정은 고려사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935년 12월 1일 백관을 거느리고 경순왕 일행이 수도 금성에서 출발했다.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와 보물을 실은 말(寶馬)이 30여 리에 걸쳐 이어져 도로가 꽉 메워졌으며 지나가는 길에 구경하러 나온 이들이 담을 두른 듯하였다. 가는 길에 자리한, 이미 고려에 편입된 상태였던 고을에서는 매우 융숭하게 접대하였다고 한다.
12월 10일 경순왕이 개경에 도착하자 왕건은 의장(儀仗)을 갖추고 교외에 나가 맞이하고 위로하였으며, 고려태자와 여러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호위하여 들어오게 하고, 유화궁(柳花宮)에 묵도록 하였다. 12월 20일에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경순왕이 혼인해 왕건의 사위가 되었다.
12월 26일에 경순왕이 신라국을 양도하고 왕건에게 신하의 예로 알현하기를 요청했지만 왕건은 일단 거부했다.

'본국(本國)은 오래 위란(危亂)을 겪었습니다. 역수(曆數)가 이미 다해 기업(基業)을 보호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신례(臣禮)로써 뵙기를 바랍니다.'

- 경순왕의 상서(上書). 고려사 태조 세가 기록.

'본국(本國)은 오래 화란(禍亂)을 겪어, 역수(曆數)가 이미 다했습니다. 다행히 천자의 빛(天子之光)을 보게되었으니 부디 정신의 예(庭臣之禮)를 차리고자 합니다.'

- 경순왕의 상서(上書). 보한집 권상 기록. 고려사 기록과 조금 다르다.

선양 문서에서 나오듯이, 당시 동아시아 세계관에서 양위는 몇 번 거절한 뒤 주변의 추대로 어쩔 수 없이 내가 맡겠다는 식으로 연출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28일, 여러 신하들이 경순왕의 귀순 요청을 받아달라고 왕건에게 아뢰었다.

'하늘엔 두 해가 없고, 땅엔 두 왕이 없습니다.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다면 민(民)은 누구를 믿어야 하겠습니까? 부디 나왕(羅王, 신라왕)의 청을 받으시옵소서.'

- 군신(群臣)의 주청(奏請).

드디어 936년 1월 8일(음력 935년 12월 12일), 왕건은 본궐의 정전 천덕전(天德殿)에 거둥하여 백관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짐이 신라(新羅)와 피를 입술에 바르며 동맹을 맺은 것은 두 나라가 길이 우호(友好)를 유지하고 각자의 사직(社稷)을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나왕이 굳이 신하로 있겠다고 요청하고 그대들도 그것이 옳다고 하니, 짐의 마음이 매우 부끄러우나 여러 사람의 뜻을 거스르기가 어렵다."

- 고려사 태조 세가 중 발췌. '''신라의 합방이 결정되다.'''

경순왕은 천덕전 뜰에서 알현(謁見)하는 예를 올리니 여러 신하가 하례하여 함성이 궁궐에 진동했다. 이후 후백제견훤을 앞세운 고려군에 의해 멸망하여 후삼국시대의 난세가 종결된다.

3.1. 항복 이후


935년 12월 태조 왕건는 경순왕을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였다. 그 지위는 태자인 왕무(훗날 혜종)보다 더 높았으며 왕건이 죽은 이후엔 국왕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존재로 인식되어 그 영향력이 상당했다. 선양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 참고할 사례로 중국(오대십국시대)에서는 전 왕조의 왕가는 모조리 척살하는 악순환이 일상화되어 있었던 만큼[18] 왕건의 경순왕 우대는 당시 동아시아 사회로서도 꽤나 유화적인 대우였다.[19] 왕건은 경순왕이 왕으로서 통치하고 신라의 수도이던 서라벌을 경주로 개명한 후 경순왕에게 아예 식읍으로 내주며 사심관[20]까지 줘 계속 자신의 고향에서 대우를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937년 6월 12일에 진평왕 때부터 대대로 내려져온 신라의 보물 천사옥대를 왕건에게 헌상했다.
975년 10월(광종 26년 혹은 경종 원년) 경순왕을 상보로 책봉하는 칙명인 책상보고(冊尙父誥)가 내려지고 상보(尙父)로 책봉되었다. 이 상보 존호는 과거 견훤이 고려에 투항해 왔을 때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왕이 아버지처럼 여길 만한 사람 즉 명목상이지만 상왕처럼 추켜주는 것과 같았다. 이때쯤 되면 경순왕도 고령이었을테니.
고려 조정은 신라 지배층에 대한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태조 왕건의 첫째 딸인 '낙랑공주 왕씨' 뿐만 아니라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와도 혼인을 시켰다. 낙랑공주 왕씨신명순성왕후 소생의 딸이고, '부인 왕씨'는 호족 박지윤(朴智胤)의 딸인 성무부인 박씨 소생의 딸이다.[21] 둘은 이복자매가 된다.
슬하의 딸은 태조 왕건의 손자인 경종과 혼인하였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경종은 그를 장인으로 특별히 배려하여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인 상보(尙父)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한편 태조 왕건도 경순왕의 백부인 김억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슬하에 아들 왕욱(王郁)을 낳았는데, 그의 아들이 고려 제 8대 국왕으로 고려 왕실의 중시조인 현종이다. 그래서 왕욱(王郁)은 '안종(安宗)'으로 추존된다. 이와 같이 고려 왕실은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 신라 왕실의 피가 섞인 왕으로 대를 잇게 되었다.
경순왕은 신라가 멸망한 지 43년이 지난 978년(경종 3년) 4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출생 시기가 명확하지 않지만 상당히 장수했으며, 정황상 최소한 약 80여세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그의 선택으로 그의 후손들은 이후 고려 500여년 역사에서 중요한 귀족 가문이 되었다. 또한 많은 자손들도 남겼는데, 이들은 갈라져서 많은 본관을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도 상당한 명문가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현대까지도 최대 규모 성씨의 하나로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씨) 항목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경순왕은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고 살았다고 하겠다.

4. 가족 관계



4.1. 고려에 항복 전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에 나온대로 문성왕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나, 증조-증손 뻘임에도 그 세대수가 명확하게 쓰여있지 않고 경순왕을 빼고 보면 고려 시대에 태종 무열왕의 후손들이 김씨의 주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문성왕의 직계 후손임을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신라고려 개국공신 4명 중 한 명인 김인윤이 원성왕의 후예이면서 '''태종 무열왕의 9세손'''으로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는 점을 보아, 이들을 최측근 가신으로 둔 경순왕 또한 문성왕의 직계가 아니라 단순히 그의 유지를 받드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며 태종 무열왕의 후손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단은 문성왕의 현손(또는 증손)으로 보는 편이다.
  • 조상 : 문성왕(文聖王)
  • 조부 : 의흥왕(懿興王) 김인경(金仁慶)
  • 부왕 : 신흥왕 김효종(金孝宗)
  • 외조부 : 헌강왕(憲康王)
  • 모후 : 계아태후(桂娥太后)
    • 왕후 : 죽방부인(竹房夫人)
      • 왕자 : 역사에 실명(失名),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
      • 왕자 : 역사에 실명(失名), 문헌에 김덕지(金德摯) - 승명 범공(梵空)

4.2. 고려에 항복 후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태조 왕건의 첫째 딸인 '낙랑공주 왕씨' 및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슬하의 딸은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고로 경종과 헌숙왕후는 외사촌 관계가 된다.
  • 후비 : 낙랑공주 왕씨(樂浪公主 王氏)
    • 딸 : 헌숙왕후 김씨[22] - 경종 왕주(王伷)에게 출가
  • 후비 : 부인 왕씨(夫人 王氏)

5. 자녀 등장



5.1. 족보 위조 현상


조선 조에 들어와서까지도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는데,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 이들이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신분제 변화와 더불어 족보 위조 현상으로까지 나타났다. 조선이 망하면서 더 이상의 특권은 없었지만 가문 그 자체를 일종의 명예로 여기는 문화는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조선이라는 전근대적 체제가 사라져 전보다 쉽게 족보를 위조할 수 있었던 일제강점기, 특히 1930년대 들어 극에 달한다.
이후 족보를 우후죽순 발간하면서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근거 없는 각종 시호와 군호를 붙여 미화하고 상계를 경순왕대까지 끌어올려 표기한 경우가 만연했다.
조선 초기에 성씨는 양민에게까지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이 멸망하기까지 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누구라도 성씨와 본관을 가지게 되었다.
경주 김씨 영분공파는 경순왕의 제3남 영분공(永芬公)의 후손을 자처하는데, 이들의 족보에는 오류가 있음이 확인된다.# 1785년 목간본 경주김씨족보에는 ‘경순왕 - 영분공 - 임흥공(林興公) - 파간 억종(嶷宗) - 파간(波干) 계옹(季邕) - 아개공(阿盖公) - 예겸(禮謙)’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특히 경순왕의 7세손인 김예겸은 삼한벽상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삼한벽상공신이란 경순왕의 고려 항복 이후 왕건이 후삼국 통일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이므로# 김예겸은 물리적으로 절대 경순왕의 7세손일 수 없다. 게다가 김예겸의 조부와 증조부가 파간, 즉 파진찬이라는 신라 관등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분공부터 김예겸까지의 계보를 신뢰한다면 영분공은 8세기 후반의 사람이 되어 절대 경순왕의 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경주 김씨 영분공파는 신라왕의 후손이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경순왕의 후손은 아닌 셈이다.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 그의 형 김부일은 고려사 열전에 경주 사람으로서 신라 왕실과 같은 성이라고 나와 있을 뿐 정확히 누구의 후손인지 나와 있지 않다. 경주 김씨뿐 아니라 강릉 김씨같이 다른 신라 왕의 후손 가문일 수도 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문선에서는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라고 나온다.

5.2. 《김은열 묘지명》


조선 후기 들어 1784년 경순왕 4자(子)라는 『김은열 묘지석』을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김은열 묘지명》을 기사(記事) 하였다. 주요 내용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후 8자를 더 두었는데 『일, 굉, 명, 은열, 중석, 건, 선, 종(鎰, 鍠, 鳴, 殷說, 重錫, 鍵, 鐥, 鐘)』이라 한다. 특히 『2자' 굉'과 4자 '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평장사를 역임하고, 공(功)이 있는 신하(臣下)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성북 십리 밖 오룡산(五龍山) 남쪽 삼십리 주변을 하사(下賜)해 주었다』고 한다.
이듬해 1785년 후손이라 자처하는 경주 김씨 김사목이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보국대안군 은열공 묘지명》을 추기(追記) 하였는데,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시호를 작호(作號)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일부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아들들 서차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은 찬(撰)한 사람도 없고, 배위(配位)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 8자들의 모친 관계도 2자 굉(또는 황)과 4자 은열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어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8자들 이름 또한 장남인 김일(金鎰)[23]을 제외하면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5.3. 《신라경순왕전비》


1784년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바탕으로 1814년 후손 강릉김씨 김계락(金啓洛)이 찬하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전비(前妃) 박씨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태자(太子), 차자(次子), 영분공(永芬公)이며, 딸은 경종 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또 후비(後妃) 왕씨는 5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 은열, 석, 건, 선, 추(殷說, 錫, 鍵, 鐥, 錘)이고, 두딸은 이금서(李金書),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을 배척하고, 『3자를 영분공(永芬公)이라 추가하였다.』 또 『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 하였다.』 이와 같이 이름을 배척하거나, 추가하고 개명까지 하는 등 가필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들은 《김은열 묘지명》을 재차 왜곡하여 자신들의 족보류에 경순왕의 첫째 왕자 태자의 이름을 '김일'(金鎰)이라 하고, 둘째왕자 이름을 '김굉'(金鍠)[또는 '김황'(金湟)]이라 한다. 또 3자를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이라 하며, '경주 김씨 영분공파' 파조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해당 《김은열 묘지명》에선 『2자 '굉'(鍠)[또는 '황'(湟)]과 4자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고려 평장사를 역임하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성북 십리 밖 오룡산(五龍山) 남쪽 삼십리 주변을 하사(下賜)해 주었다.』 고 하고 있다.

5.4. 《김씨 분관록》


1887년 경주 김씨 후손 대제학 김창희(金昌熙)가 숭혜전을 건립하면서 각 김씨 문중에서 제출한 수단(收單)을 바탕으로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기록한 《김씨 분관록》을 편찬하면서 그의 증조부 김사목(金思穆) 및 아버지 김정집(金鼎集)이 근기한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 8자들은 모두 배척하였다.
경순왕 왕자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김덕지(金德摯)는 울산 김씨 시조이며, 경순왕 아들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은 의성 김씨 시조이고, 아들 언양군(彦陽君) 김선(金鐥)은 언양 김씨 시조, 또 아들 삼척군(三陟君) 김추(金錘)는 삼척 김씨 시조라 하였다.

5.5. 《증보문헌비고


1908년 칙명(勅命)으로 간행된 문헌으로 경순왕 왕자는 역사에 이름이 실명(失名)으로 개골산 입산하였는데 문헌에 별자(別子) 김덕지(金德摯)라 하며 울산 김씨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 계자(季子)도 역사에 이름이 실명(失名)인데 개골산에 입산한 왕자와 동일인으로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하였다. 또 아들 김영분(金永芬)을 두었다고 하였다.
《김은열 묘지명》을 원용하여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8자를 두었는데, 일(鎰) · 황(湟, 평장사[24] · 명종(鳴鍾. 경주 김씨 파조) · 은열(殷說. 대안군, 평장사 경주 김씨 파조. 경순왕 제4자) · 석(錫. 의성 김씨 시조) · 건(鍵. 강릉군) · 선(鐥. 언양 김씨 시조) · 추(錘)라 하며, 경순왕 왕자들과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5.6. 《조선씨족통보》


1924년 윤창현이 민족의식 고취 및 함양 일환으로 발행한 문헌인데, 경순왕 왕자들의 이름은 역사에 실명(失名)인데, 첫째 왕자 태자(太子)는 개골산 입산하였는데 후대에 마의태자라 하며, 별자(別子)는 문헌에 이름이 김덕지(金德摯)라 하며 울산 김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 계자(季子. 막내 아들)는 해인사에 입산하였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여기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등재된 1자 일(鎰) · 2자 황(湟) · 3자 명종(鳴鍾) · 6자 건(鍵) · 8자 추(錘)를 누락하고, 3자 김영분(金永芬)은 경주 김씨 파조, 4자 김은열(金殷說)은 공부시랑으로 경주 김씨 파조, 5자 김석(金錫)은 의성 김씨 시조, 7자 김선(金鐥)은 언양 김씨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

5.7. 조선 후기 문헌에 등장하는 자녀들


  • 1784년 《김은열 묘지명》 - 김노규 근기[26]
    • 아들 :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25]
  • 1785년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 - 김사목 근기[27]
    • 아들 : 일(鎰), 황(湟), 명종(鳴鐘),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
  • 1814년 《신라경순왕전비》 - 김계락 근기
    • 전비 박씨(3남 1녀)
      • 왕자 : 태자, 차자, 영분공[28]
      • 공주 : 헌숙왕후 김씨
    • 후비 왕씨(5남 2녀)
      • 아들 :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
      • 딸 : 이금서(李金書), 황경(黃瓊)에게 출가[29]
  • 1887년 《김씨 분관록》 - 김창희 근기
    • 왕자 : 학성부원군 덕지(德摯)
    • 아들 : 의성군 석(錫), 언양군 선(鐥), 삼척군 추(錘)
  • 1908년 《증보문헌비고》 - 칙명 간행
    • 왕자 : 덕지(德摯. 승명 범공)
    • 아들 : 일(鎰), 황(湟), 명종(鳴鐘),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
  • 1924년 《조선씨족통보》 - 윤창현 간행
    • 왕자 : 태자 마의태자, 별자 덕지(德摯. 승명 범공)
    • 아들 :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6. 평가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써 무의미한 저항을 펼쳐서 백성들을 희생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임금이며, 나라에 망조가 든 것도 물론 경순왕 본인의 책임은 결코 아니었다. 여기서 "무의미한 저항"이란 곧 고려에 대한 저항이었지, 후백제에 대한 저항은 아니었다. 자신들을 어떻게든 집어삼키려 했던 후백제에게는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저항하면서 귀순 전까지 버텨냈고, 이는 유선이나 후술할 순종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즉 무기력한 임금이 결코 아니었단 것.
대한제국 순종황제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둘의 경우는 매우 다르다. 순종은 주권을 일본에 넘길 생각 자체도 없었던데다가 한일병합 문서에 자신이 옥새를 찍지도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아 강제로 병합당한 경우다. 결과로 본다면 신라의 경우엔 항복으로 경순왕 본인 뿐만 아니라 신라의 백성들에게까지도 비교적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지만 대한제국식민지화의 결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비교하기가 어렵다. 또한 당시 고려는 신라가 악감정을 가질 만한 짓도 저지르지 않았고, 통일 이후에도 자국 백성으로 대해줬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엔 조선을 무단통치하면서 조선인을 2등 신민으로 차등 대우를 했고, 한국적 전통을 국가신토로 곡행(曲行)시키고, 특히 태평양 전쟁 때에 강제징용과 위안부로까지 끌고 가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공출이라며 각종 물자를 빼앗아 가면서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나 글겅이질을 해 반감을 샀다.[30] 이 둘의 사례를 동일시하는 건 전형적인 일제의 악행을 미화하는 것과 마찬가지.
고려와 연합해서 후백제를 저지했던 것이나, 경애왕 때 병장기 만드는 시설과 숙련된 군인까지 통째로 날려버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병력을 육성하여 고려와 연합해 후백제를 막아낸 걸 보면 확실히 조직력과 운영 능력 그리고 군사적 수완은 보통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에게 투항할 때도 그나마 신라 왕실이 가장 가치가 높을 시점을 골라 투항했고, 이걸 보면 외교적인 안목 또한 대단했다고 볼 수밖엔 없다. 왕건이 괜히 경순왕을 경계해서 강릉 쪽으로 진출할 길목에 고려 부대들을 박아둔 게 아니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잠재력을 보여준 걸 보면 헌제나 고려 공양왕과도 같이 열심히 노력은 해봤으나 결국 한계로 말미암아 망국을 피할 수 없었던 사례. 때를 잘 만났다면 신라를 다시 일으켰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은 근거 없는 상상만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 한국사를 통틀어서 망국의 왕들 중에서는 손꼽힐 만한 행복한 여생을 보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하들에게 시해당한 위만조선우거왕이나 패망한 후 당나라로 끌려가 그 곳에서 최후를 맞은 고구려의 보장왕과 백제의 의자왕, 풍왕, 요나라로 끌려간 뒤 이후 역사에서 아예 사라져버린 발해의 대인선과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유력한 것으로 점쳐지는 후백제의 신검[31], 유배지 삼척에서 사사당한데다가 자신의 일족들까지 학살당한 고려의 공양왕, 일본에게 무기력하게 나라를 빼앗기는 걸 지켜봐야 했던 대한제국순종 등과 대비해보면 더욱 그렇다. 일족이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어 들과 손자도 신라의 중신을 지냈으며 증손자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 영웅이자 신라왕실의 외척이 된 금관가야구형왕 정도가 그나마 그와 비견될 만할 듯하다. 중국사에서도 이 정도로 평온한 말년을 보낸 망국의 황제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였던 헌제오대십국시대 후주의 마지막 황제였던 공제 시종훈 정도인데, 전자는 이런저런 생고생을 했고, 후자는 가문 자체가 대우받긴 했으나 그 자신은 단명하였다. 유선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쪽 역시 점령국 군주 사마소가 손꼽힐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라는 걸 감안하여 처세술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7. 경순왕릉




8. 대중매체에서


비록 출생일은 불명이지만 헌강왕의 외손자라는 점을 고려할 때 최응과 비슷한 연배로[32] 추정되지만 '왕위 계승권 1순위인 김씨'라는 설정 때문인지 왕건 역의 배우보다 연상인 60대 초반의 원로배우들이 해당 배역을 맡았다.
  • 2000년작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신귀식[33]이 연기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버티려고 해도 하도 심각한 상황이라 결국 나라를 고려에 바친 군주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견훤서라벌 침공 때 견훤을 도와준 신라의 유염#s-2김응겸이 "김씨 왕가의 가장 큰 어른이다"라며 그를 새 왕으로 권하였고 마지못해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견훤이 서라벌을 떠난 뒤 바로 "우리 동맹국은 고려지 백제는 아니오. 내가 비록 중신들의 권유로 이 자리에 올랐지만 이 황좌를 탐낸 적은 1번도 없었다"라며 그를 왕으로 만들어준 견훤에게 협조했던 반역자 중신들인 유염과 김응겸을 역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처형하는 모습이 그나마 진정한 신라 왕 같은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준 장면. 그 외에는 대부분 고려에게 나라를 바치는 것을 논의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그 과정에서 고려에게 나라를 바치려는 아버지의 행동에 반대하는 아들 마의태자와 갈등을 빚는 장면도 덤. 고려에 항복을 결정하는 마지막 대전 회의에서 '차라리 전 백성신하에게 자결을 요구하라'라며 반대를 하는 마의태자에게 "신라를 망친 것은 백성과 신료들의 죄가 아니라 황실의 죄이니 이제 와서 백성이나 신료들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할 수는 없다"며 고려에 항복하는 장면은 명장면.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한 이후로는 경순왕까지 3명이 한 자리에 3자 대면을 하는 장면도 있다.
  • 2009년작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경종의 상보 겸 자문역이니 나와도 무리가 없을 법한데 등장하지 않았다.

9. 기타


조선조 말에 들어와 후처 낙랑공주 왕씨 소생들인 경주 김씨 일문들에 의해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정비 죽방부인을 전비(前妃) 박씨로, 낙랑공주를 후비(後妃) 왕씨라 기록하고, 공주 왕씨(公主 王氏)는 누락하고 있는데, 사실 낙랑공주는 신라가 멸망한 뒤에 시집왔으니 신라 왕비는 아니다. 다만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후 그 지위가 정승공(正丞公) 낙랑왕(樂浪王)이라는 제후왕의 작위에 봉작되었기 때문에 낙랑공주는 신라국의 왕비가 아닌 고려의 제후 봉국인 낙랑국의 왕비가 된다.
1934년 간행된 《신라삼성연원보》는 그의 첫째 부인으로 송희부인(松稀夫人) 석씨(昔氏)를 등장시켜 슬하에 14남 3녀를 두었다고 하는데, 역사학계와 신라계 김씨들은 위보로 간주하고 있다.출처
먼 옛날 진평왕옥황상제에게서 받았다는 천사옥대[34]를 고려에 항복한 직후인 937년에 창고에서 꺼내 왕건에게 바쳤다. 중국의 전국옥새처럼 신라에서 일종의 천명을 상징하는 물건이란 의미가 있었던 듯 하다.
의외로 무속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왕이다. 그 이유는 그가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한 것이 괜히 저항했다가 백성들에게 유혈사태가 일어나게 하는 것보다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까지도 각지에 경순왕을 모시는 사당이 많이 남아 있었으며 경상도와 충북 일대, 경기도 일부 지역에 경순왕 사당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시골을 돌아다니다 보면 경순왕 사당과 이를 모시는 무당들이 가끔 보인다. 무속에서는 삼국유사와 마찬가지로 '김부대왕'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으며, 그 아들인 마의태자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어진의 눈썹 모양이 상당히 특이한데, 당나라 시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0.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一年冬十一月 경순왕이 즉위하다. 이름은 부(傅)이고, 문성대왕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一年冬十一月 전왕의 시호를 경애라 하고 장사지내다
一年冬十一月 아버지 이찬 효종을 추존하고, 어머니를 왕태후로 삼다
一年冬十二月 견훤이 들에 쌓아놓은 곡식을 태우다
二年春一月 김상이 흥종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다
二年夏五月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二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秋八月 견훤이 왕충에게 쫓겨나다
二年秋八月 견훤이 대목군의 벼를 베어가다
二年冬十月 견훤이 무곡성을 함락시키다
三年夏六月 천축국 삼장 마후라가 고려에 오다
三年秋七月 견훤에 맞서 출정한 홍술이 전사하다
三年秋七月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三年冬十月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다
四年春一月 선필이 고려에 항복하다
四年春一月 태조가 고창군에서 견훤을 크게 이기다
四年春二月 태조가 승리 보고를 하자, 왕이 만나기를 청하다
四年秋九月 동쪽 바닷가의 주군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五年春二月 태조가 왕을 찾아가다
五年秋八月 태조가 왕과 신료들에게 물품을 보내주다
六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夏四月 김불과 이유를 당에 보내 조공하다
七年 당 명종이 고려에 책명을 주다
八年秋九月 노인성이 보이다
八年秋九月 운주 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十八年冬十月 항복을 반대하던 왕자가 개골산에 들어가다
十八年冬十一月 태조가 거처를 마련해 주고, 장녀 낙랑 공주를 왕에게 시집보내다신라의 멸망
十八年冬十二月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식읍으로 삼다
十八年 태조가 왕과 혼인 관계를 맺다
高麗 景宗 四年 경순왕이 죽다. 시호를 경순(敬順)(또는 효애(孝哀)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이하, 경순왕과 상관없지만 삼국사기 경순왕 항목에 추가로 적혀 있는 기록이다.
신라사의 시대 구분
高麗 仁宗 二十三年 논하여 말하다

[1] 정확히 말하면 현재 존재하는 어진은 고려 초의 원본을 베낀 것이다. 2007년에 5점의 어진이 존재함을 확인했다.기사[2] 삼국사기에 김부식이 주석을 단 기록.[3] 삼국유사 기록.[4] 고려사에 따르면 羅王太后竹房夫人라고 써져있기 때문에 왕의 생모 또는 전왕의 아내지 왕의 아내가 아니다. 다만 왕의 생모는 계아태후인데 이름도 계아이고, 신라에서 태후는 보통 왕의 모계를 이르던 점을 생각하면 '''김인경의 아내'''이자 '''왕의 할머니로서 당대 신라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그녀가 왕비가 아님은 확실하다.'''[5] 삼국사절요에서 김효종과 김계아의 혼인 시점.[6] 경기도 연천 장남면에 위치한 신라경순왕의 릉(新羅敬順王之陵)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7] 문성왕의 5세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근거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라서 신빙성은 의문이다. 문성왕의 후손들이 모두 20세가 되기 전에 아들을 얻었다는 가정하에서 가능하기는 한 편. 한편 세대 수로는 증조-증손 정도로 비교적 가까움에도 정확한 세대 수가 누락되어 있다는 점에서 직계 손자가 아닌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8] 경순왕의 어머니 계아태후와 경명왕, 경애왕의 어머니 의성왕후는 모두 헌강왕의 딸로 자매간이다.[9] 죽방부인(竹房夫人)이라고 착각되는 경우가 많은데, 《고려사》에 931년 5월 고려 태조가 서라벌(徐羅伐. 경주)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신라왕태후 죽방부인(竹房夫人)'''을 비롯한 관료들에게 물품을 나누어 주었다고 했기 때문에 '''경순왕의 어머니''' 아니면 '''전왕 경애왕의 아내'''이다. 왕후의 성(姓)과 이름 등은 전하지 않고 당시 신라 왕실의 관례에 따르면 그녀는 신라 왕족 출신이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10] 막내 아들이란 뜻.[11] 일제시대 들어 마의태자라 부르기 시작했다.[12] 후손 하서 김인후 가장.[13] 삼국지의 비슷한 예를 들면 원소동탁 따위가 옹립한 놈은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며 헌제 대신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시도했다. 참고로 유우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의 장남 동해왕 유강의 후손이다. 유강은 모후의 폐위 이후, 황위 계승을 거듭 사양하였다. 유우는 종법제 하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후한 황실 못지 않은 정통성을 지닌 셈. 더군다나 통일신라 말기처럼 후한의 황위 계승 또한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다.[14] 하지만 후삼국시대 후기 당시 신라가 해안 영토를 모조리 잃고 해안선이 없는 내륙국으로까지 쇠퇴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고창 전투, 운주 전투 이후 대부분의 경상도 일대 영토들이 고려 땅이 되고 수도 서라벌만 겨우 지배하는 소국으로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약장현이나 문무대왕릉 등 서라벌 외곽의 동해 해안 일부 지역이나 지금의 울산시 일부 등 동해안 지역 조금이나마 경순왕이 고려에게 항복하여 신라가 멸망하기 이전에도 신라가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을 정도다.[15] 아들 견신검에 의해 폐위되어 금산사에 감금당한다.[16] 제후가 천자를 만나는 걸 입조라고 한다. 즉 고려왕 아래에 들어간다=나라를 바치겠다는 선언과 같다.[17] 고려 경종 왕주(王伷)에게 출가.[18] 이 악순환이 끝나는 게 왕건보다 한 세대 뒤인 송태조 조광윤 시대였다. 사실 중국에서도 선양시에 전 황제를 무조건 죽이지는 않았다. 이는 삼국시대 조비에게 선양한 헌제가 산양공으로 천수를 누렸다라는 점에서도 알 수있는데, 남북조시기에 남조에서 찬탈을 하면서 죽이기 시작하였다.[19]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왕건은 신라 김씨 왕족 뿐만 아니라 옛 후백제 견씨 왕족 역시 어느 정도 우대했는데, 정종의 왕비가 견훤의 외손녀였다. 견씨를 박대했다면 굳이 왕가와 피를 섞으려 하지 않았을 것. 다만 이는 정종의 왕비가 순천의 대호족이자 후백제 신하 출신 인물 중 유일한 고려의 개국공신인 박영규의 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남동부 최대의 호족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혼인 정책인 셈. 물론 태조가 견훤을 상보로 모시고 양주 일대의 넓은 식읍을 주었고 견훤 가문이 이제가기 등의 족보를 남긴 것을 보면 고려가 견훤의 후손을 무작정 박대하진 않은 것으로 보이며. 궁예의 후손을 자처하는 광산 이씨, 순천 김씨의 족보가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궁예의 후손도 박대하지 않고 그럭저럭 고려의 귀족으로 살아간걸로 보인다. [20] 고려시대에 향직을 통괄하는 지방관을 칭한다. 왕건은 경주의 민심을 확실히 고려에 흡수하려고 경순왕에게 고향의 자치를 맡겼다고 할 수 있다.[21] 부인 왕씨는 잘 알려 있지 않은 탓인지, 경순왕 아내들을 언급할 때 자주 등장하지 않는 편이나 삼국사기에 분명히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경순왕 왕비 관련 설화에 등장하는 별빈 안씨(別嬪 安氏)에 대해서는 역사학계는 오역으로 보고 있으며, 추정컨데 낙랑공주 왕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게 정설에 가깝다고 한다.[22]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조선조 말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전비 죽방부인 소생이라 하는데, 역사학계에선 후비 낙랑공주 소생으로 추정하는 것이 정설에 가까우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다.[23] 942년 건립된 흥녕사 징효대사탑비에서 잡찬 관등으로 등장한다. 같이 기록된 인물은 대부분 왕건의 후손 또는 장인이므로 그 또한 왕건의 딸 낙랑공주 소생으로 추정된다.[24] 나주 김씨 시조 김운발의 아버지라 한다. 역대 나주 김씨 족보에 시조 김운발은 경순왕의 후손이라 하였다. 그러나 1887년 김홍집이 정해보 후기를 쓰면서 《김은열 묘지명》을 원용하여 경순왕의 계자(季子) 이름이 혹운(或云) 황(湟)이라 한다고 하면서 부터 시조 김운발의 아버지라 한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는 김굉(또는 김황)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후 맞아들인 낙랑공주 소생의 제2자로 고려 태조의 외손이라 기록되어 있다.[25] 이 내용은 근거가 부족하다. 신라 멸망 사후 800년이 지나서야 작성된 금석문에 새겨진 내용인데 그 때까지 발간된 어느 사서에도 겹치는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금석문 하나만을 바탕으로 하는, 말 그대로 추정이다.[26] 경순왕이 고려 항복 후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 및 '부인 왕씨'를 맞이하여 낳았다는 자녀들[27] 경순왕이 고려 항복 후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 및 '부인 왕씨'를 맞이하여 낳았다는 자녀들[28] 전비 박씨 소생 3남 1녀[29] 이 내용 또한 근거가 부족하다.[30] 또한 패전 후 한반도를 끝까지 식민지로 유지시키려고 수작을 부렸다가 미국소련의 압박에 깨갱하여 한반도를 식민지화에서 마지못해 포기했다.[31] 삼국사기에는 신검을 부추겼던 능환 등은 곧바로 처형되고 신검의 동생인 견용검, 견양검은 강주로 유배갔다가 몇년 뒤 처형되었지만 신검은 다른 사람들의 강압에 의해 임금이 된 것이라 하여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관직을 하사했다고 나와있다. 이로 인해서 화병이 난 견훤이 사망했다는 기록은 덤. 다만 학계에서는 이후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점과 신검을 살려둘 경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도 고려사 말미에 세 형제 모두가 제거되었다는 이설이 있다고 기록하면서 은연 중에 숙청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32] 최응이 898년생이므로 동년배로 가정하고 나이를 계산하면 경순왕은 29세에 즉위해서 37세 때에 고려에 항복한 뒤 80세까지 천수를 누린 것이 된다.[33]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유정현,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김윤환을 맡았는데 경순왕을 연기할 당시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이때 견훤 역을 맡은 서인석 씨가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노태우를 연기하면서 원수 사이였던 둘이 고등학교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 사이로 재회하는 배우개그가 성립되었다.[34] 고려사에서는 성제대(聖帝帶)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