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구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신석구
申錫九'''

'''출생'''
1875년 5월 3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 금관리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
'''사망'''
1950년 10월 10일(향년 77세)
평양형무소
'''직업'''
독립운동가, 목사
'''국적'''
조선대한제국
일제강점기대한민국
'''본관'''
평산 신씨
'''호'''
은재(殷哉), 춘정(春汀)
'''종교'''
개신교(감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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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목회 활동
2.4.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2.5. 공산정권에 맞서다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교 목사.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신석구는 1875년 5월 3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의 평민 집안에서 신재기(申在綺)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7살 때 어머니가 별세하고 15살 때 아버지도 별세해 조실부모했다. 이후 가정을 이룬 형의 집에 얹혀 살았다. <은재 신석구 목사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15살부터 17살까지는 순진한 생활을 했지만 18살부터는 양반 계급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음란한 짓, 즉 천인 여성을 첩으로 삼고 여색을 즐기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20세에 접어든 1895년 2월에 이이의 격몽요결을 보고 "나의 재질과 처지가 큰 문사는 될 수 없으나 이 책에 쓴 대로만 실행한다면 의인은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방탕한 생활이 죄악임을 깨닫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나 23세에 결혼한 후 형이 사망하자 "나는 지금까지 복선화악(福善禍惡)이란 말에 속았다. 이 세상에 이치란 건 없다. 이 세상이란 아무 짓을 하여서라도 잘 살면 그만이다."라고 외치며 그때부터 무슨 불의한 일이든지 기회만 있으면 양심의 가책까지도 눌러가며 기탄없이 행했다고 한다. 그렇게 다시 방탕한 삶을 지내던 중 27세에 친구 김진우가 경영하는 전당포의 서기로 일했지만 32세에 사업이 실패했고 김진우가 사기 횡령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은재 신석구 목사 자서전>에 따르면, 신석구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대는 노모가 계시고 또 부양할 가종이 많으니 그대가 만일 복역하면 가정이 풍비박산이 될 것이다. 나는 가족이 처자 둘 뿐이라 간단하니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죄를 대신 담당할 것인즉 그대는 뒤에서 뒷수습이나 잘하라.

그렇게 그는 친구 대신 3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을 사칭하고 보석으로 풀려나 귀가했다가 아내에게 자신이 사망했다는 거짓 신고를 하게 한 뒤 집을 떠났다. 이후 각지를 떠돌던 신석구는 1907년 2월 서울에 도착하여 친구 김규홍의 소개로 어느 양반집 자제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친구 김진우를 만났디. 김진우는 그때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사업을 경영하다가 다 실패하고 할 수 없이 양약 몇 병을 얻어가지고 매약상의 길을 떠나게 되어 신석구에게 같이가기를 청했다. 신석구는 "내가 저 친구를 위해 고생을 하기로 작정했으니 끝까지 도와주어야겠다."고 판단하고 그를 따라 경기도 장단군 고량포에 이르러 한 집을 빌어 약국을 시작했다.
얼마 후, 김진우는 신석구에게 자신이 서울에 있을 때부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밝히며 함께 예수를 믿을 것을 권했다. 그러나 신석구는 유교 외에는 어떤 사상도 이단이라며 거부했다. 신석구가 본인의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김진우는 거듭된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는 그를 안타깝게 바라봤다가 이런 말을 던졌다고 한다.

자네가 만일 주를 아니 믿으려거든 죄가 없는가 생각하여 보게.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사함받으라는 말이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네.....

신석구는 그 말을 듣고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되새겼고, 마침내 기독교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시키는 것을 지켜보며 통분을 느끼고 나라를 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빼저리게 느꼈고 나라가 망하게 된 근본 원인은 큰 도가 없는 까닭이라고 파악하고 기독교에서 그 도를 찾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리하여 기독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했다.

2.2. 목회 활동


신석구는 1907년 7월 14일 고량포교회 예배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그는 그날 밤부터 사흘간 지금까지 지은 죄를 기억나는 대로 고하며 회개기도를 했다. <신석구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기도하던 중 문득 "하나님이 왜 귀가 어두우시냐. 한 번만 고하여도 사하셨을 것인데 세번이나 기도할 것은 무엇이냐"는 소리가 들려와서 다시는 전에 지은 죄로 인해 기도하지도 않고 염려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신석구는 믿음 생활을 시작한 지 한달 후 개성에서 순행 전도사인 정춘수가 고량포교회에 저녁예배 설교를 하러 온 것을 계기로 정춘수와 친분을 맺었다. 그는 정춘수를 따라 개성으로 가서 그의 집에 1년간 유숙하면서 미국인 의사 W.T 리드의 어학 교사로 있으면서 환자에게 선교 활동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이후 1908년 3월 개성 남부교회에서 A.W 와슨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친구 홍종숙의 소개로 선교사 W.G 크렘을 만나 개성 북부교회에서 전도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기독교 교리를 생소해했고 영혼 구원, 천당이나 죽음 이후의 부활 같은 것은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신석구 자서전>에 따르면, 신석구는 1907년 7월 29일경 성령 체험을 했다고 한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 마음 눈앞에 나타나며 주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는 내 머리에 떨어지는 듯하며, 나는 곧 그 십자가 밑에 엎드린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가슴이 찢어질 듯이 복받쳐 오르던 죄뭉치는 구름 흩어지듯, 안개 사라지듯 아주 없어지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충만하여 넘쳤다.

이후 신석구는 자신을 괴롭혔던 죄의식이 말끔히 사라졌고 부활이 실존했음을 인식했다. 그는 1909년 2월 개성 북부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910년 11월 강원도 홍천에서 본처 사역자로 파속되었으며, 1912년 9월 전도사 직첩을 받았다. 또한 1914년 9월 가평구역 본처 전도사로 전임되었으며, 1915년 10월부터 춘천지방 순행 전도사를 맡아 복음주의 신앙에 입각하여 지방 부흥 사업에 힘썼다. 1917년 9월 27일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 후 1918년 11월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자로 파송받아 목회 활동을 벌이다가 3.1 운동을 맞이했다.

2.3. 3.1 운동


1919년 2월, 신석구는 오화영으로부터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천도교 측과 연합하고자 하는데 참가하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이에 그는 "나는 나의 몸을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이 좋다고 하면 찬성하겠다."고 하고 4~5일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대답을 유보했다. 며칠 후 마침내 독립선언 계획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그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경무총감부에 구류되었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형식상 금일 조선독립은 성립되지 않으나 씨를 심을 때에는 추수가 있을 것을 판단하는 것과 같이 청원한다고 하는 것은 실은 청원이 아니고 독립한다는 것을 통지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일본의 쇠사슬을 벗어나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 신석구는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고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소했다. 그는 옥중에서 여러 한시를 지었는데 각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하늘 아래 두 임금이 없는 법

신선도 아니고 유자(儒者)도 아니시다.

그리스도 그 크신 이름 땅끝까지 퍼지리니

스스로 지혜롭다하여 어리석지 말지니라.

달은 지고 구름은 깊고 황혼은 짙어가고

길가는 나그네 방황하며 지칠 때

동천의 샛별이 하늘 빛이 비취니

산야의 한 노래에 마을 문이 열리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 심히 적으며

땅에 묻힌 보화를 아는자 그 누구랴

믿음의 길 따라 이 길로 나아가면

어린아이 그 처음 같아지리라.

어려선 유교의 옛 성현을 배우고

뒤늦게 거룩한 길 따라 진리와 인연 맺었다.

신령한 기운으로 마귀쫓는 검 빼고

감격한 은혜로 자식들 편달하네.

선한 일에 공로 없으나 믿음의 약속 항상 지키니

장생의 길 예 있도다. 신선 구해 마엇하랴

인생살이 백여년 꿈결 같도다

몸과 맘 다 바쳐 하늘에 충성하리.


2.4.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신석구는 출옥 후 원산 상리교회 목사, 강원도 고성 구역장, 춘천읍 교회, 경기도 가평구역장으로 연이어 옮기며 목회 활동에 전념했고, 1928년 9월부터 1928년 8월까지는 서울에서 부흥 사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1930년대엔 강원도 철원구역장 및 황해도 한포, 강원도 이천구역 담임 겸 이안(伊安)지방 감리사, 충남 천안구역 담임 겸 천안지방 감리사로서 활동했다. 그러던 1938년 7월, 그는 천안 지방에서 신사 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일제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어 상용, 신사참배, 황국신민 서사, 창씨개명 등을 강요했다. 특히 신사참배문제는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대표인 선생에게 있어 종교적 양심의 문제였다. 그는 이를 거부했다가 1938년 7월 체포되어 2개월간 갖은 악형을 당했다가 등창이 발병하면서 석방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굴하지 않고 1939년 5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남 용강군 신유리교회로 가서 항일 운동을 지속했고, 1941년 3월에는 조선감리교회를 일본기독교단의 산하에 두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호응하려는 감리교 통리자의 친일 배족행위에 반대하다가 강제 은퇴를 당하기도 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단행한 후에는 일본 경찰의 민족 운동가 예비 검속 조치에 의해 번번히 구금되는 고초를 겪었지만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했다. 당시 한국 감리교회는 1936년 4월 10일 양주삼 총리사가 감리회보를 통해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 의무이기 때문에 참여하여도 좋다."는 통첩을 한 후 신사참배를 수행했기에, 신석구의 이러한 거부는 돋보였다. 게다가 그는 '대동아전쟁 전승기원예배' 및 일장기 계약 역시 단호히 거부했다가 평안남도 용강 경찰서에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이 찾아오면서 마침내 모든 시련이 끝나는 듯 했으나....

2.5. 공산정권에 맞서다


광복 후, 신석구는 진남포 유사리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46년 3.1절 기념방송을 할 때 "3.1 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공산당이 이 운동을 영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을 원고에 넣으라는 북한 당국의 요구를 거부하고 이는 3.1 운동 당시의 민족적 단결을 여실히 증명한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악질적인 비방이며 3.1 운동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반민족적 소행이라고 비난했고, 3.1 운동 당시 우리 한국 내에는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와 같은 주장은 주객전도라고 비판했다. 결국 방송 개시 10분 만에 방송이 강제 중단되었고, 신석구는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몇달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그는 반동적인 인물로서 북한 정권의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46년 말, 신석구는 광량만 교회로 전임되어 시무할 때 북한 정권이 주는 공로표창장을 거부하고 김성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냉소적 감상문을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가 쓴 감상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로부터 북조선 인민 위원회 성립에 대한 감상문

기독교가 북조선에 있어서 전국에 비협력자이니 선거에 반대자이니 친미파이니 하는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차시를 제하여 감상문을 쓰려함에 만일 찬성의 언어를 쓰면 진정한 호의로 보지 않고 아유구용(亞誘求容)하는 것으로 보아서 도리어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불찬성의 언사를 쓰면 정직한 충언으로 보지 않고 도리어 반동분자라는 각인을 받을 것이다.

그런고로 진정한 감성을 채심하기는 극히 곤란하다. 즉, 개개인의 감상을 채탐하는 이보다 대중의 추세를 통찰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줄로 알 것이다. 현재 정세로 말하면 식량이 결핍하므로 인민의 새오할이 극도로 곤궁하고 남북이 댕립됨으로 장래에 무슨 불측의 시가 유할까하야 인심이 동되는 것은 형재 정세에 사실이다. 이는 깊이 우려할 바이니 이에 대하여 조속히 선한 방침을 강구조처하시기를 요망하는 바입니다.

용강군 금곡면 우동리 기독교조선감리회 목사 신석구

또한 1947년 3월에는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에 가담했다는 혐의가 적용되어 며칠간 투옥되었으며, 1949년 4월 19일 진남포에서 남한 정부의 지시에 의해 5월 1일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려고 계획했다는 이유로 장로교 송영길 목사, 김덕기 목사 등 48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하면서 공산당의 정치를 비판했다.

1.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는 정치가 일본제국주의 시대보다 더 비참한 생활을 한다.

2. 당신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말하고 있으나 인민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우며 입을 봉하는 암흑정치가 무슨 민주주의인가?

3. 천하보다 소중한 인민의 생명을 초개같이 알고 숙청, 학살하여 조상 때부터 피땀 흘려 모은 농토와 재산을 강제로 몰수하고 추방하며, 당신들의 제정한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엄연히 있다고 해놓고 어찌하여 종교를 박해하는가?

4. 소련을 조국이라 하니 배달 민족이 어찌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가?

5. 모란봉을 모로토포봉이라고 하고 대동강을 레닌강이라 하며, 평양의 중앙통을 스탈린 거리라고 불러야 소련의 충복이 되리라 생각하는가?

6. 너희들은 조선의 피와 살을 이어받은 인간이다. 그런데 양심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생각하여 보라. 너희들의 비위에 조금만 거슬리면 무죄한 백성을 소위 반동분자라는 죄명을 씌워 학살하기를 다반사로 하니 너희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줄 아는가?

7. 김일성을 비롯한 그를 추종하는 공산당 정치인들은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민중을 죄악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을 아낄 줄 모르는 공산당원들은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사단법인 북한 연구소, <해방 후 북한 교회사>

북조선 인민 최고재판소의 재판장 김두봉은 신석구에게 "죄는 사형이 마땅하나 일본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특별히 감등하여 10년의 형을 언도한다."고 판결했다. 그 후 그는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10일 후퇴하던 인민군이 옥중에 있던 우익 진영의 인사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 신석구 역시 총살되었다. 향년 75세.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다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그의 가묘가 조성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신석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