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독립운동가)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다. 상록회를 주도했으며, 신옥철은 그의 맏형, 신기철은 그의 친동생이다. 평산 신씨다. 아호는 위정(爲正).
2. 내용
강원도 춘천군 신북면 용산리 5통 1호에서 아버지 신구현과 어머니 이승자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났다. 춘천공립보통학교(춘천초등학교)를 마친 뒤, 1930년 4월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이하 춘천고보)에 입학해 1935년 4월 10일에 졸업하였다.
그는 춘천고보 재학시절 민족주의가 농후한 셋째 형 신유철의 감화를 받아 민족의식이 싹텄다. 신유철이 조선어 연구운동으로 잡혀 춘천경찰서에서 물고문을 당해 귀에 물이 들어가 치료되지 않은 채 귓병이 생겼고, 중이염과 뇌막염으로 번져 1937년 12월 고문 후유증 때문에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신영철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많은 서적을 탐독하여 강렬한 민족주의 사상을 품기에 이르렀다. 1932년에 나온 <한글>지의 구독을 통해 민족의식을 확립하였다. 춘천고보 재학시절인 1934년에 <「鮮語」를 「조선어」로>, <언어의 독립>등을 기고하여 일제가 조선어를 '선어'로, 조선의 글자를 '언문'으로 즐겨 부르는 것을 비꼬며, 일본어는 '본어'인가라고 비판하였다. 여기서 그는 일제가 우리글을 비하하여 사용하는 '언문'이라는 말을 자전에서 뽑아내버리고, '한글'로 일제히 고치자고 주장했다.
1933년 한글날에 발표된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하여 우리글의 철자법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인 <축사>를 발표했다. 우리말사전 편찬에 관심을 촉구하는 글인 <우리의 문화를 빛내자-사전 편찬에 협조하라->, <조선어사전 촉진론>을 발표하였다. 문맹 타파를 역설하고자 <글장님을 없애자>는 글을 게재했다.
춘천고보 졸업 후엔 고향 근처에서 면서기로 잠시 근무했다. 1936년 8월부터 그는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동창생들인 이홍채, 박우홍, 이종식과 회합을 갖기 시작했고, 이 무렵 조선어학회에서 일하겠다고 혈서까지 보냈다.
1936년 9월 경성으로 상경한 그는 조선어학회 <한글> 주필인 이윤재 선생의 신당동 집에 기거하기 시작했고 1937년 6월까지 머물렀다. 이윤재도 자택에 그를 유숙시켜 조선어학회에 붙들어 두려고 하였다. 조선어학회의 간사장인 이극로 박사도 그를 신문사의 주필감이라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윤재로부터 우리말과 글의 중요성을 체험적으로 익혔다. 그러나 조선어학회에 계속 머물 형편이 못되자, 1937년 6월에 고향 춘천으로 돌아갔다. 이후 사법서사인 아버지의 조수로 근무하면서 민족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36년 8월부터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신영철은 이홍채, 박우홍, 이종식과 회합을 지속하였고, 이들 4인이 1938년 9월 24일에는 춘천군 신북면 우두산에서 회합하여 춘천고보 후배 생도 7명(독서회원)에게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연설을 했다. 특히 신영철은 참석자들에게 조선의 독립 달성은 민족문화의 재건에 있는데, 그 방법은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들 4인은 같은 해 10월 중순까지 활동했다.
이러한 활동을 파악한 춘천경찰서의 형사들은 신영철의 집을 수색하였다. 경찰은 집에서 신영철과 조선어학회에서 사무를 보던 이석린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도 발견하고는 이석린도 연루지어 체포했다. 이석린은 3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1938년 10월 19일에 신영철 등 4인을 춘천고등학교 맹휴의 배후로 판단하여 '비밀결사 무명그룹사건'으로 규정, 이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했다. 이들은 1939년 4월 19일 일제의 검찰에 송치되었고, 5월 1일 기소됐다.
1940년 1월 17일 신영철은 징역 1년 6개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가 1940년 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고 그 뒤 3년간의 집행 유예를 치렀다. 이후 춘천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모교 국어교사로 있다가, 1946년 4월부터 조선어학회의 <한글> 잡지 편집과 사전 편찬 업무를 담당했다. 같은 해 7월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입회했다. 1947년 조선어학회가 지은 <조선말큰사전>1권이 나오는데 기여했다.
1948년 3월부로 조선어학회의 <한글> 편집과 사전 편찬 위원 활동을 마무리하고 중앙대학교의 국문학과 주임 교수로 부임하였다. 1949년 4월 조선어학회의 자매단체인 한글문화보급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명예위원장으로 안재홍, 설의식이 맡았다.
6.25 전쟁 이전까지 그는 수많은 글을 신문과 잡지에 투고하여 한글 전용 정책이 정착되기를 주장했다. "인류에게 평화와 행복 발전과 향상을 줄 수 있는 위대한 사상이 한글로 적혀져야 할 것이다. 민족문화 수립의 의의 여기에 있고 한글 발전의 길이 여기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애국선열의 사상과 정신이 계승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1943년 일제의 고문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한 국어학자 환산 이윤재(1888-1943)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평가하였다.
저서로 <고시조신석>(연학사, 1946.), <고문신석>(동방문화사, 1947), <신문장강화>(동방문화사, 1950.) 등을 남겼다."조선이 영원한 암흑의 길로 굴러 들어갈제, 조선 인민이 나날이 쇠망의 구렁으로 기울어 갈제, 오직 조국을 근심하고 민생을 걱정하여 전전반측 오매불망하시던 선생! 동분서주 남선북마하시며, 민족 혁명의 기본공작으로 한글 통일운동을 역설 실천하시어 사생활을 희생시키신 선생! "오직 혈(血)과 성(誠)이 있을 뿐이다!" 하신 선생은 정말 혈성을 조국 광복의 터에 뿌리시고 가셨다. (중략) 오늘날에 "애국지사" 많거니와 조국 오천년사 중 국어를 위하여 순도(殉道)한 이 환산 선생으로 첫손을 꼽나니, 기릴진져 평생을 임리한 신고(辛苦) 속 일편 사심 없는 순결숭고한 지조로 위로 오천년의 국혼(國魂)을 체현하고 아래로 만겁의 정로(正路)를 개척하신 무관의 제왕! 무의의 진인!"
-「영릉봉심기」, <한글>98, 1946, 11, 35쪽.
6·25전쟁기간 중앙대학교 국문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가 북한군에 납치되었다(여동생 신제철의 증언). 그가 6·25전쟁 전에 경찰 전문학교에서 국어 강의를 담당하였기에 화근이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신영철의 동생인 신기철이 생전에 북측의 인사에게 형의 안부를 묻자 "북에 오지 않았다"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아울러 인터넷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납북자 명단에 한글문화보급회 위원장이고 대학교수인 신영철이 1950년 8월 16일에 북측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신영철은 6·25전쟁기간 중에 명백히 납북되었고, 그 기간에 사망하였다고 판단되고 있다.
근래에는 6·25전쟁 이후에 행방불명되거나 북쪽에 납치된 인사들에 대해 연구를 기피하고 외면에 벗어나, 일제시기 독립운동가이면서 국어학자였던 신영철 역시 제대로 조명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