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중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신현중은 1910년 8월 4일 경상남도 용남군 동면 명량동(현 통영시 정량동)의 양반 가문에서 아버지 신상재(愼詳縡)[4] 와 어머니 김녕 김씨 김우상(金禹相)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학 법과(法科)에 재학중이던 1931년 4월, 그는 조규찬(曺圭讚) 등과 함께 당시 경기도 경성부 관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_에 있던 중화원에서 모임을 갖고 동교 1·2·3학년에 재학중인 독서회 소속 학생들을 포섭하여 반제부(反帝部)를 조직하기로 뜻을 모았다. 동교에서는 1929년경부터 한인학생간에 비밀결사의 성격을 띤 독서회활동이 있었는데, 이러한 독서회를 발전시켜 반제부 활동을 전개하고자 한 것이다.
그후 이들은 내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에 있는 신현중의 집에서 반제부 결성에 따른 구체적 활동방침을 정하고 항일결사 반제부를 조직하였다. 반제부는 사회주의적 방법에 의한 조국독립을 목적한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조직확대에 힘을 쏟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신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황성기독교청년학관 등에 경성제국대학 반제부의 하부조직을 구성하였으며,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반제경성도시학생협의회(反帝京城都市學生協議會)를 결성하였다.
또한 그는 이형원(李亨遠)·안복산(安福山) 등을 주도하여 위의 별동단체의 성격을 갖는 적우회(赤友會)를 조직케 하였다. 그리고 출판노동조합을 지도하면서 성대독서회 뉴스, 반제학생신문 등의 지하출판물의 인쇄를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1년 10월 11일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검거되었고, 1932년 11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같은 해 11월 24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로 근무했는데, 기자로서 임무에 충실하여 1937년 1월 중의 공로로 당시 방응모 사장으로부터 금일봉을 받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진주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시인으로 문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1980년 10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신현중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본래는 통례공파 34세 중(重)자 항렬이나 성명 가운데에 와야 할 항렬자가 뒤에 와있다..[2] 1931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의하면, 경성부 내자동은 본적지 및 주소지이고 출생지는 통영군 통영면 정량리이다.[3] 1932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 읍내로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4] 초명 신복재(愼福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