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장
尋牛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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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유택(遺宅). '''만해 한용운 심우장'''이라고도 한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성북동). 1984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승격지정 되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골목 산(북악산)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사저이며, 1933년에 벽산 스님,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까지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속했다.
한옥 중에서도 특이하게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으로 된 한옥으로 되어있다. 남향이 아닌 이유는 한용운 본인이 '''남향으로 하면 돌건물(조선총독부)이 보인다'''는 이유로 당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있는 산비탈에 있는 북향터를 사저로 잡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한용운은 일제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서 노력을 했으며 한때 최남선이 찾아왔을 때도 '''"내가 아는 육당(최남선의 아호)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러버렸소."'''라며 만나지도 않았고 일제 형사가 찾아왔을 때는[1] 호통을 치며 '''왜놈한테 돈 받을 일 없으니 나가라'''며 보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다가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 이 곳에서 사망하였다.
북향이라는 특성 때문에 남향에 있던 한옥과는 달리 햇볕이 들지도 않았던 음침한 곳이었고 여름이면 남향에 비해서 매우 습하고 더웠으며 겨울이면 남향에 비해서 매우 추운 편이라 사람이 살기에 매우 나쁘다는 평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한용운은 죽을 때까지 이 집을 고집하면서 왜놈과 싸우겠다고 다짐하면서 살았다.
겨울철에는 혹한, 여름철이면 혹서에 시달렸지만 한용운은 이곳에서 태연하게 지냈다. 보통사람이 살아가기에는 정말로 살기가 불편한 곳이라는 평이 있다. 그리고 1944년에 한용운이 이 곳에서 운명하면서 백범 김구의 경교장과 함께 영원한 위인의 안식처로 남게 되었다. 한용운이 사망한 뒤에는 딸인 한영숙 씨가 기거하다가 만해사상연구회에 기증해서 현대까지 내려와 있다. 심우장의 맞은편에 일본 대사관저가 들어서자 이를 보지 않으려고 한영숙 씨가 심우장을 잠시 떠났었다는 야사가 알려져 있으나 이는 한영숙 씨가 부인하였다.
관문은 일반 단독주택과 같은 문이 있으며 개방을 해두고 있고 안에는 북향으로 된 집이 그대로 있다. 그 옆에는 관리인 주택이 있다. 2015년에 잠시 철거했지만 2016년 이후 리모델링 했다. 대신 기존보다는 규모가 줄었다.
한용운에 대한 자료들을 전시한 만해기념관도 한때 이 곳에 있었으나, 부지가 협소하고 심우장 건물 자체의 보존도 필요해서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인근에 새로 건물을 만들고 이전했다.
한성대입구역 하차후 6번 출구로 나와 성북03번으로 환승하여 북정마을 종점에서 내린 후 정류장 위치에서 우측으로 가면 찾을 수 있다. 시내버스로는 2112와 1111번을 타고 다원학교에서 내린 뒤 근처에 있는 심우장 입장로로 가면 찾을 수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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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유택(遺宅). '''만해 한용운 심우장'''이라고도 한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성북동). 1984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승격지정 되었다.
2. 설명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골목 산(북악산)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사저이며, 1933년에 벽산 스님,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까지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속했다.
한옥 중에서도 특이하게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으로 된 한옥으로 되어있다. 남향이 아닌 이유는 한용운 본인이 '''남향으로 하면 돌건물(조선총독부)이 보인다'''는 이유로 당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있는 산비탈에 있는 북향터를 사저로 잡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한용운은 일제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서 노력을 했으며 한때 최남선이 찾아왔을 때도 '''"내가 아는 육당(최남선의 아호)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러버렸소."'''라며 만나지도 않았고 일제 형사가 찾아왔을 때는[1] 호통을 치며 '''왜놈한테 돈 받을 일 없으니 나가라'''며 보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다가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 이 곳에서 사망하였다.
북향이라는 특성 때문에 남향에 있던 한옥과는 달리 햇볕이 들지도 않았던 음침한 곳이었고 여름이면 남향에 비해서 매우 습하고 더웠으며 겨울이면 남향에 비해서 매우 추운 편이라 사람이 살기에 매우 나쁘다는 평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한용운은 죽을 때까지 이 집을 고집하면서 왜놈과 싸우겠다고 다짐하면서 살았다.
겨울철에는 혹한, 여름철이면 혹서에 시달렸지만 한용운은 이곳에서 태연하게 지냈다. 보통사람이 살아가기에는 정말로 살기가 불편한 곳이라는 평이 있다. 그리고 1944년에 한용운이 이 곳에서 운명하면서 백범 김구의 경교장과 함께 영원한 위인의 안식처로 남게 되었다. 한용운이 사망한 뒤에는 딸인 한영숙 씨가 기거하다가 만해사상연구회에 기증해서 현대까지 내려와 있다. 심우장의 맞은편에 일본 대사관저가 들어서자 이를 보지 않으려고 한영숙 씨가 심우장을 잠시 떠났었다는 야사가 알려져 있으나 이는 한영숙 씨가 부인하였다.
관문은 일반 단독주택과 같은 문이 있으며 개방을 해두고 있고 안에는 북향으로 된 집이 그대로 있다. 그 옆에는 관리인 주택이 있다. 2015년에 잠시 철거했지만 2016년 이후 리모델링 했다. 대신 기존보다는 규모가 줄었다.
한용운에 대한 자료들을 전시한 만해기념관도 한때 이 곳에 있었으나, 부지가 협소하고 심우장 건물 자체의 보존도 필요해서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인근에 새로 건물을 만들고 이전했다.
3. 대중교통편
한성대입구역 하차후 6번 출구로 나와 성북03번으로 환승하여 북정마을 종점에서 내린 후 정류장 위치에서 우측으로 가면 찾을 수 있다. 시내버스로는 2112와 1111번을 타고 다원학교에서 내린 뒤 근처에 있는 심우장 입장로로 가면 찾을 수 있다.[2]
4.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심우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만해한용운심우장
- 대한민국 구석구석 : 만해한용운심우장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 만해 한용운 심우장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 심우장
- 두산백과 : 만해한용운심우장
5. 사적 제550호
1933년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건립하여 거주한 곳으로, 독립운동 관련 활동과 애국지사들과의 교류 등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측면에서 사적으로서의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