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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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구조
3.1. 재료
3.2. 뼈대의 형태
3.3. 지붕의 형태
3.3.1. 맞배집
3.3.2. 팔작집
3.3.3. 우진각집
3.4. 주거의 형태
3.5. 지역별 특징
4. 현재
4.1. 한옥에 대한 교조적 이미지
4.2. 조선집
4.4. 한옥 목수
5. 한옥의 종류
6. 둘러보기


1. 개요



한국의 전통 가옥 형태. 한반도의 환경과 한국인의 재래식 의식주 생활 패턴에 맞춰 발전한 여러 특징들을 가지며 흔히 사진 속 목조 구조의 기와집을 떠올리지만, 볏짚과 황토로 지은 초가집도 한옥의 범위에 속한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양옥에 밀려 그 수가 줄어들었지만 사찰 건축 등으로 명맥을 계속 잇고 있다.
한옥이라는 말 자체는 구한말 문호 개방과 해방 후 현대화를 거쳐 '양옥(洋屋)'이 급격히 보급되면서 이에 대비되는 의미로 재래식 가옥들을 '한옥'이라 일컫으면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설이 있는데, 이를 상세히 설명하면 외국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이 살고 있는 주택을 지칭한다. 한반도라는 지형의 특성상 사계절이 분명하여 겨울을 대비한 구들과 여름을 대비한 마루의 결합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고 있다. 별칭으로 '조선옥(朝鮮屋)'[1]이라고도 부르며 원래는 한옥 자체가 곧 주거 형태였으므로 오늘날 그냥 집을 집이라고 하듯이 주가(住家), 제택(第宅) 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형태에 따라 아파트, 주택이라고 나누듯 그냥 기와집, 초가집으로 구분했을 것이다. 전면의 기둥들과 후면의 기둥들을 각각 일자로 연결하는 창방과 평방, 전면과 후면의 기둥을 앞뒤로 연결하는 보, 그리고 서까래와 그를 받치는 도리가 핵심 자재이다.

2. 역사


한옥은 석기 시대 막집, 움집같은 수혈식 구조에서 시작됐으며 역사 시대까지도 마한은 비슷한 형태의 주거가 이뤄졌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가야의 고상 가옥, 만주같은 북부에서는 구들이 사용된 원초적 한옥 구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삼국 시대의 가옥은 여러 토기나 벽화 등 당시 가옥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유물들이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 평민들이 살던 곳은 단칸집이긴 하지만 여러 기둥을 세워 지은 비교적 넓은, 현대인의 기준에서 가옥이라 부를만한 수준으로 발전하게 됐다.고구려같이 추운 북부는 상술한 구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열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창문과 문을 좁게 튼 반면 남쪽에서는 보다 개방적인 형태를 띄었다. 한편 이 시기 중국에서 기와와 단청이 전래되어 왕궁같은 상류층의 가옥들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기와로 된 화려한 가옥 형태에서 주거 생활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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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고려 시대에는 귀족 문화의 융성과 함께 매우 사치스러운 주택을 짓고 살았다. 신라 말에는 황동금속 부착물로 집을 장식하기도 했고[2] 심지어 금입택이라 하여 황금으로 집을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3] 고려시대에는 화려한 귀족문화가 극에 달해서 고려 청자청와(청자 지붕)를 올리는 것이 유행했으며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경복궁 복원 사업을 위해 궁터에서 발굴 작업을 한 결과 다량의 청와가 발견되어 실록의 내용대로 경복궁의 건물 다수가 청와 건물이었음을 입증하였다. 참고로 궁궐들 중에 현대에 남아있는 청와 건물은 창덕궁 선정전이 유일하다.
특히 이 시대에는 입식 생활을 하여 타일을 깔기도 했고, 단청을 칠하거나 복층 구조, 누각에 기단을 쌓고 난간을 설치하는 등 조선 시대와는 매우 다른 형태의 한옥 양상이 나타났다. 또한 풍수지리 사상의 전래와 함께 배산임수와 같은 건축 법칙들을 따르기도 했으며 이 시기 마을 유적에 따르면 온돌이 보편화되기도 했다. 물론 이 시기 하층민은 땅을 파고 지은 수혈식 초가집에서 생활했다.
조선시대에는 사치를 자제하는 유교 문화의 전래와 함께 보다 검소한 주택 형태를 추구하게 되었지만 전기까지는 궁궐에서 청기와를 사용한다든지, 복층 구조를 지닌 집 등 마냥 수수했을거라는 조선 시대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기록들도 상당수 있다. 지방에서는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옥 고택들처럼 공간을 넓직하게 사용한 건물군으로 이뤄진 주택, 초가집 등이 있었으며 한양같은 도시에는 북촌 한옥들처럼 단일 건물이 ㅁ 자나 ㄹ 자로 꺾이고 꺾여서 공간 활용도를 높인 구조가 구한말 사진에서 확인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 경성 사진을 보면 이런 도시형 한옥들이 빼곡하게 가득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한옥이 점점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때는 1910년 한일합방조약 이후이다. 일본과 합병뒤에는 일본식 건축물과 근대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부산,목포,서울,인천,평양 등지에서는 한옥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 한국 전쟁 동안 서울 및 전국이 파괴되고, 또 새마을 운동과 같은 한국인의 주거 형태에 대한 큰 변화를 거치며 재래식 가옥들이 신식 가옥들로 대체되면서 한옥은 과거의 주거 형태로 남게 되었다.
그 외 큰 틀에서의 한국 건축 역사는 해당 문서를 참조.

3. 구조



3.1. 재료


지역이나 재산, 지위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나무, 흙, 돌, 짚 등을 이용하여 만든다. 나무와 짚으로 뼈대를 만들고 황토를 발라 벽을 만든뒤 어느정도 굳으면 한지를 붙여 마무리 한다. 돌의 경우엔 밑돌로 쓰며 온돌을 내장시키고 주방과 연결한다. 때문에 주방은 방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여 남는 지붕칸에 다락을 만들어 썼다. 지붕도 위의 재료들중 하나를 선택하여 쌓아놓는다. 부자집의 경우엔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

3.2. 뼈대의 형태



크게 수직으로 하중을 지탱해주는 기둥과, 가로로 하중을 지탱해주는 보로 나뉘는 구조다. 기둥밑에는 주춧돌을 두어 땅속의 수분이 기둥에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고 기둥과 보로 토대를 구성했으면 그위로 서까래를 얹어 지붕의 뼈대를 만들고 널판지와 기와를 얹는 식이다.

한옥의 모든 구조는 지붕의 무게를 버티는 것이 관건이다. 기와 - 흙 - 적심(흙을 받치기 위한 나무 껍데기쪽의 널판자) - 개판(서까래 사이를 덮어주는 판자) - 서까래 - 도리(서까래 받침목 ; 통상 마지막 도리를 얹는 일을 상량이라고 한다.) - 장여(도리 받침: 원형의 도리는 돌아가기에 원형으로 홈을 파서 이 도리를 잡아주는 부재를 말한다.) - 보(제일 큰 보를 대들보, 그 보다 작은 것을 중보라 한다.) - 창방(기둥과 기둥에 놓인 나무 이곳에 보를 올려 보의 무게로 인한 흔들림을 옆의 기둥이 함께 잡아준다.) - 기둥 - 주춧돌 - 흙의 순으로 지붕 전체의 무게가 내려오는 구조이다. 기와까지 올라갔을 때 한옥 지붕의 무게는 톤 단위로 계산될 정도로 무거워진다. 기와 한옥은 이를 버티기 위해 기둥의 크기가 최소 7치(지름 21 cm 가량) 이하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초가한옥은 지붕의 무게가 가벼워 통상 4치(12 cm)가량이면 건축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 가장 큰 지붕을 가진 사찰이나 궁궐의 경우에는 최소 1자(지름 30 cm) 이상의 나무가 기본적인 크기가 된다. 이는 공포와 관련되어 있는데 대들보 위에 장여를 놓고 바로 서까래를 걸면 천장의 크기가 높지 않다. 이는 아래와 위의 크기가 같아야 하는데 예전이라도 지름도 크고 높이도 큰 나무를 구하기 쉽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운반상의 어려움이 있었고, 현재로서는 그런 지름도 크고 길이도 긴 나무 자체를 구하기 쉽지 않다. 불상을 모셔야 하는 절이나 위엄(크기)을 갖추어야 할 입장의 궁궐 건축에서는 낮은 천장은 선호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포를 포개어 쌓아 놓고 도리의 높이를 강제로 높인다. 이것이 공포가 등장한 계기였다.

3.3. 지붕의 형태


한옥은 조선왕조의 신분제도의 영향을 받아 지붕의 형태가 다르게 보이기도 하였는데 왕족이나 양반 계급의 경우는 장식적이고 호화롭게 보이는 기와 지붕을 사용하였고 일반 평민 계급의 경우는 짚으로 이은 초가 지붕을 사용하였던 것이 특징이다. 기와의 수명은 10년 이상이고 초가의 경우 2~3년에 불과하다. 기나긴 장마철에 비가 조금씩 새는 것이 다반사이기에 초가 한옥와 기와 한옥의 선택은 부의 편중에 의해 선택이 나뉜다.
초가한옥에서는 휘고 짧은 나무를 선택하기에 지붕이 낮다. 기와한옥의 경우 곧고 굵은 나무를 구해 짓기에 지붕이 상대적으로 높아 단열은 초가한옥이 우수한 편이다. 근본적으로 참나무에 비해 열량이 높은 소나무를 장작으로 썼던 한반도에서 구들에 장작으로 난방을 하면 등이 뜨거울 정도로 온도가 상승한다. 그래서 완벽한 단열보다는 뜨거움울 적당히 감해줄 위풍을 허용하고 또 필요하기까지 하다.
정면에서 보면 사다리꼴의 모양에 측면은 삼각형의 모양을 띤 것이 우진각 지붕인데 이는 보통 초가한옥의 근본을 이룬다. 정면에서 보면 사각형에 사다리꼴이 붙어 있는 형태가 팔작지붕이라고 한다. 이러한 팔작지붕은 멋스러움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처마를 길게 내뻗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통 5자 이상을 내미는데 모퉁이 처마는 추녀를 사용하여 10자 이상 내미는 경우도 있다. 모퉁이 기둥이 비에 젖고 강한 햇빛에 노출되면 뒤틀림이 발생하고 이는 집의 근본 축이 돌아가는 경우까지 이어지기에 비와 강한 햇볕으로부터 보호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이런 구조가 나온 듯하다. 이에 반해 초가 한옥에서 기둥은 벽을 만들고 진흙으로 덮기에 처마 길를 길게 할 필요성이 별로 없다.
가장 안정적인 구조는 맞배 지붕인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사각형의 두 면이 만나는 구조이다. 측면은 따로 지붕을 만들지 아니한다. 비로부터 벽 구조를 보호하기 위해 서까래를 따라 한자로 8자 모양으로 크고 넓은 나무를 다는데, 이를 '박공'이라고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박공 밑에 나무 판을 대는데 이를 풍판이라고 한다. 바람으로부터 벽을 보호하기 위함인데, 사람 사는 집은 온기가 있어 이를 수분 제거를 위한 기제로 사용 되어 풍판의 필요성이 감소하나, 맞배 지붕은 주로 사찰이나 장서보관, 창고, 제실 등으로 사용되어 구들을 놓지 않고 마루로만 구성되기에 풍판이 더욱 필요하다.
지붕의 형태는 대략 아래와 같이 구분된다.

3.3.1. 맞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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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구조가 제일 간단한 형태로, 마주보는 두 개의 지붕면이 있고 측면에는 지붕이 없는 대신, 박공이라는 삼각형의 벽이 있다. 보통 행랑, 곳간 등의 간단한 건물 혹은 사당 건물에서 많이 보인다.

3.3.2. 팔작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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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작이란 우진각집의 양쪽 측면 지붕 윗부분을 수직으로 잘라낸 모양의 지붕을 말한다. 이 경우, 수직처리 된 부분의 삼각형 모양을 합각이라고 한다. 맞배지붕의 특징이 엄숙하고 경건한 느낌이라면 팔작지붕은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렇듯이 가장 화려하고 장식적이기 때문에 궁궐과 불교건축의 중요한 건물에서, 살림집에서는 안채,사랑채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3.3.3. 우진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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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보는 지붕 전후와 좌우, 네 면 모두가 경사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는 집이다. 지붕 앞뒤에서 보면 사다리꼴 형태이고, 측면에서는 삼각형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격식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민가나 초가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3.4. 주거의 형태


한옥은 신분제도가 짙었던 조선왕조 때 이르러서 계급마다 주택 선호방식이나 건축방식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왕족(王族)이나 상류층 양반의 경우 신분과 남녀 그리고 장유(長幼)를 구분하여 공간을 만들고 주거 공간을 상중하로 나뉘었는데 상(上)의 공간은 안채와 사랑채가 속하여 남녀 양반이 주로 사용하였고 중(中)의 공간은 중문간 행랑채로 양반을 보좌하는 청지기나 서기(書記) 그리고 집사 등이 사용했으며 하(下)의 공간은 대문 주변에 위치해 있는 행랑채로 주로 양반댁 머슴이나 노비들이 사용하던 점을 보아 사람 뿐만 아니라 한옥의 구조에 있어서도 신분제도가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 평민의 경우에는 양반과 달리 장식적인 면보다 기능성과 안전성을 중시하여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나무를 사용하고 벽에 짚과 흙을 발라서 적은 비용으로 방수와 보온의 역할을 할 수 있게 짓는 점이 특징이었다.

3.5. 지역별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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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지역별 가옥의 평면도
한옥은 한반도 지방의 기후나 성향에 따라 위치나 건축방식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추위가 잦은 북부 지방의 경우 외부에 불어오는 한기(寒氣)를 막아내고 보온(保溫)을 유지하기 위해 방을 두 줄로 배열하는 겹집 구조와 지붕이 낮아보이는 것이 특징이었지만, 반대로 더위가 잦은 남부 지방의 경우는 자연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방을 한 줄로 배열하는 홑집 구조와 지붕이 높아보이는 것이 특징으로 지방마다 건축방식이 다른 편이다.

4.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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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개원한 서울 흥천어린이집. 사진출처:불교신문 2015년 10월 국토교통부 올해의 한옥상을 수상했으며, 서울시 최초의 한옥 어린이집이다.
불편하다는 이미지로 현대 한국인들에 의해 멀리되었지만 최근 들어 그 가치가 상당히 재평가되고 있다. 6, 70년대에만 하더라도 그저 헐어버릴 대상이었지만 2000년대 중반 웰빙 바람과 함께 아토피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아파트에 대비되며 건강할거란 이미지로 주목받더니 2010년대에는 사람들이 보다 더 개성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특유의 고풍스런 멋과 전통이 있는 한옥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져가고 있다. 기존의 고택들이 개량되어 TV나 인터넷 블로그 등에 소개되기도 하며 전국의 여러 지자체들도 거주 목적으로 신식 한옥 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서울시 또한 북촌, 서촌의 한옥 보존 계획을 넘어서 성북동 재개발 지구에 시범적으로 현대화 된 한옥 주택 지구를 만들었다.
공주시, 경주시, 부여군 등 과거 수도였던 지자체들을 중심으로 한옥 신축시 지원금을 주는 등 한옥 신축을 장려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 도시들은 2010년대에 건립된 신축한옥이 여럿 있으며, 주거용 이외에도 카페게스트하우스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북촌 한옥 마을이나 전주 한옥 마을같은 관광지가 늘어났다.
건축 공법적으로도 수입목재의 등장으로 길이가 긴 나무를 구하기 쉬워지다보니, 조선 후기 건축에서 비교적 짧은 나무를 이어 긴 부재를 만드는 방식이 다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수입목재외에도 공학목재를 이용하였고 최근에는 국산 낙엽송을 이용한 대형 부재도 생산되어, 이와 함께 복층 구조같은 대형 한옥 구조가 쉬워졌다. 또 현대식 시설을 도입하여 기존의 불편하다는 편견에서도 탈피하고 있다.
전통적인 한옥에 대한 지진에 대한 저항성인 내진설계에 대한 자료 미비로 인해, 전통한옥의 건축물 허가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서양 중목이나 경목구조의 목조주택은 바닥을 고정하는 형태이나, 주춧돌에 기둥을 올려놓는 한옥의 특성상, 내진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자료를 얻지 못한 것 그러나 신한옥으로 인증을 받으면 무리없이 통과되어 건축할 수 있다.

4.1. 한옥에 대한 교조적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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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주 서봉총 발굴 당시 찍힌 2층한옥의 모습
일제강점기 평양 시가지 속 2층한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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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평양시내 2층 한옥 상점가의 모습
하지만 이런 2층 한옥이나, 화장실, 세면대가 설치된 한옥을 보고 "이건 한옥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이건 한마디로 '''편견에 의해 범하게 되는 오류이다.'''
당장 상술한 한옥의 역사 문단과 위 사진속 한옥들처럼 한국의 전통 가옥은 수천년의 긴 세월 동안 당연히 특정한 형태를 늘 유지해오지 않고 1층, 2층, 3층 등의 형식으로 층수와 모습이 변하여 왔다. 그랬다면 진정한 한옥은 땅파서 풀떼기를 얹은 집이 되어야 한다. 시대적 발전과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계속해서 변형되고 계승되어 온, 유동적인 이미지로서 이해하는 것이 한옥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며, 당연히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려온 전통 가옥 양식의 특정 요소들을 가져와 현대인의 요구와 기술과 접목시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것도 당연히 전통에 반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한옥의 역사의 연장 선상에 서서 전통을 계승하고 유지해나가는 일인 것이다.
여담으로 요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수한 단층 한옥이 조선 후기에 절대적으로 보편화된 것에 대해서는 17세기 조선 소빙하기설과 연결지어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당시 추위를 이기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를 다 땔감으로 베어가 자재로 쓸 목재가 없어지고,[4] 구들장을 까는 것이 필수가 되면서 복층 구조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져서 전국적으로 그러한 형태로 나아가게 됐다고 한다. 이것 관련해서는 경신대기근 참조

4.2. 조선집


일제강점기에 많이 지어진 일종의 퓨전 한옥. 전통 한옥을 상당 부분 변형하여 수도, 전기가 들어오게했다. 그리고 행랑방과 장독대, 창고 위치를 실용적으로 재배치하고 대청에는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으로 된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한 한옥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사업가인 정세권 등에 의해 많이 지어져 주로 조선인 서민들이 들어가 살 수 있도록 전통 한옥에 비해 작은 규모로 지어졌다. 오늘날 남아있는 한옥들의 대부분은 조선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은 실상 없다시피하며 대부분은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집이다. 현재의 북촌한옥마을이 있는 가회동, 삼청동과 익선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행당동, 휘경동, 서대문 및 왕십리 일대 등 곳곳에서 발견되며 현재도 남아있어 관광코스가 된 곳도 있고 때론 낙후된 주택으로 지정되어 허물어 새 집으로 바뀌고 있다.

4.3. 한옥 장·단점



현재 한옥이 현대 한국인 주거 형태의 한 축으로 다시 일어서자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아직 남아있다. 과거 한옥과 양옥 교체기를 경험한 세대들의 화장실이나 냉난방 같은 문제들은 많이 해결되고 있고, 또 최근 들어 정부 차원에서도 자재 규격을 설정하는 등 신축 한옥의 비용 절감과 용이함을 늘리려는 시도가 있긴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단계다. 자세한 것은 한국 전통건축의 장단점 항목을 참고하길 바란다.

4.4. 한옥 목수




4.5. 한옥마을




4.6. 한옥호텔




5. 한옥의 종류



6. 둘러보기



[1] 현재는 주로 북한에서 쓰임.[2] 안압지에서 이러한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는데, 정작 안압지 전각 복원시에는 이런 장식을 복원하지 않고 조선시대 건물처럼 만들어버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3] 일본의 금각사나, 혹은 현대의 건축물 중에 이런 건물을 볼 수 있다.[4] 구한 말 기록과 사진을 봐도 한양 주변의 산들이 전부 민둥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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