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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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앙조제프 라리보
Adrien-Joseph Larribeau(1883년 ~ 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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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제9대 교구장이며 천주교 대전교구의 초대 교구장이다. 한국식 이름은 '''원형근'''(元亨根).
프랑스의 라로뮤(La Romieu)에서 태어났으며 1904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907년 3월 10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곧 임지인 한국 파견을 향해 고국을 떠났다. 1907년 5월 21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1908년에 만주 간도로 파견되어 삼원봉(三元峰)에서 첫 전교 활동을 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젊은 선교사들이 군복무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자, 한국 천주교는 일손이 달려 더욱 바빠지게 되었는데, 라리보 신부는 이때 충청도 지방을 맡아 40여개의 공소를 돌아다녀야 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
1916년에는 서울대교구의 당가신부가 되어 교구살림을 맡아 보았고, 1926년에 보좌주교인 드브레 주교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계승권을 가진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1일 성성식을 갖고는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위임으로 실질적으로 서울대교구를 다스렸다. 1933년에 뮈텔 주교가 선종하자 자동적으로 그의 뒤를 이어받아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 1942년 1월 5일 사임할 때까지 일제하의 어려운 시기에 서울대교구를 무사히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소위 일본이 더욱 교회를 탄압하여 외국인 성직자를 구금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자, 라리보 주교는 사임할 것을 결심하는 동시에, 한국 천주교의 보존을 위해 한국인 성직자를 주교로 임명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노기남 바오로 신부가 방인사제로서는 처음으로 주교로 서품되어 서울대교구를 다스리게 되었다. 서울대교구장직을 노 주교에게 넘긴 뒤 용산예수성심신학교에 은거한 라리보 주교는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한국인 수녀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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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충남 지역이 독립된 포교지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됨에 따라 이 지역의 책임자가 되었고, 1958년 이 지역이 대목구로 설정됨으로써 초대 교구장이 되었으며, 1962년 교계제도의 설정과 더불어 정식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대전교구장이 되었다. 그 후 주교좌 성당을 신축하는 등 대전교구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그러나 고령으로 점차 격무를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자 1965년 3월 현직에서 은퇴하고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1974년 8월 12일에 선종하였다. 그의 58년간에 걸친 한국 천주교를 위한 봉사와 공로로, 196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온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962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문화훈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