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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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남아공의 집권 여당이며, 압도적인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공산당이나 남아공 노총과 삼각동맹을 이룩하고 있지만, 경제정책은 그보단 우클릭해서 중도적이라는 평도 있다.
2. 역사
원래는 1912년에 정당이 아니라 일종의 시민단체와 유사한 형식의 단체로 창립되었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는 당시 가장 큰 흑인 저항 운동 단체였다. 1940년대 남아공 연합당 정부에 대항하여 인도계 단체와 연합하여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하여 대대적인 파업을 벌이기도 했었고, 인도계 단체와 연합하는 과정에서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었기 때문에 1950년대까지는 평화투쟁을 지향했으나 1950년대 들어서 상황이 나빠져 대도시 지역의 흑인들이 오지로 내몰리고, 많은 부부들이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혼당했으며 기존에 투표권을 가지고 있던 컬러드(흑백혼혈)마저도 투표권을 박탈당하자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희망을 버리고 내부 조직인 '국민의 창'을 창설하여 무장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화력이 안되었기 때문에 조직력도 그리 뛰어나지는 못하여서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어도 백인 국민당 정부를 제압하지는 못했다.[2] 더군다나 남아공 백인정부는 탄압정책을 완화하지는 않고 아프리카 국민회의라는 조직 자체를 테러 단체로 매도하여 더더욱 잔인하게 탄압하였다.[3] 그러나 흑인 국가들이 하나하나 독립해나가면서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강력한 우군을 얻게 되었고, 1970년대 들어와서 백인정권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펼쳐나갔다. 1980년대 들어 남아공 백인정부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조금 완화하는 듯싶었지만 여전히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않는 등 핵심 차별정책을 지속하기로 하면서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이에 적극적으로 반발하며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1989년에 남아공의 대통령이 바뀌고, 넬슨 만델라가 석방된 이후에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노선은 평화주의적으로 바뀌었고 당시 백인 정권과 협상에 나서면서 인종차별 철폐 주장을 관철시켜나갔으며 1992년에 아파르트헤이트가 전면적으로 폐지된 이후 당시 홈랜드 지역내의 흑인정권들이나 잉카타 자유당[4] , 백인 극우주의자들과 내전이 터질 듯했지만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 그 동안 탄압받았던 흑인들의 지지에 힘입어 압도적인 원내 1당이 되었고, 백인 극우주의자들이 백인들 내에서도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잉카타 자유당과 국민당과의 연정에 나서면서 유야무야되었고,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시절에 잔혹한 짓을 저질렀던 것에 비해, 대체로 관용적으로 포용하는 등의 화합정책을 펼치며 백인들의 불안감을 누그려뜨렸다. 그렇지만 만델라 퇴임 이후 타보 음베키 시절 들어서면서 부정부패 사건이 터지고 경제는 상당부분 성장했기는 했지만 그 과실이 일부 계층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흑인들 사이에서 아프리카 국민회의 소속 정치인에 대한 평판은 급속히 나빠졌다.
하지만 그래도 불과 30년까지만 해도 흑인들은 남아공 내의 토지를 자유롭게 구매하거나 백인거주구역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도 없었고, 교육도 제대로 받기 힘들었기 때문에 여전히 아프리카 국민회의에게 애정을 가진 흑인들도 많아서 각종 선거에서 득표율 60%는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간다.[5]
그렇지만 2014년 총선이후로부터 주마 대통령이 부정부패로 말썽을 일으키는데다가 재무장관을 함부로 바꿨다가 주가가 추락하는 등의 난맥상을 보였고 경기침체로 거기에 청년실업률이 50%에 달하고 전체 실업률은 30%를 넘기때문에[6] 대학생과 청년실업자들, 중산층들 사이에서 민심이반이 심각해서 2016년 지방선거에서 웨스트 케이프[7] 지역은 물론, 주요 대도시 지역[8] 에서 중산층은 민주동맹(DA) 청년층은 경제자유투사당(EFF)으로 표가 쏠려서 패배할 것이라는 전망이 슬슬나오고 있다.[9] 정치적으로 사회민주주의와 아프리카 민족주의. 인종화합을 내걸고 있으며 남아공 공산당, 남아공 노총과 협렵관계다. 그러나 남아공 공산당이나 코사투측 내부에서 자신들이 내세운 경제정책이 반영되지 않는데다가 빈부격차 또한 심하고 사회인프라 시설 구축같은 것도 아파르트헤이트 시절보다는 다소 나아졌지만 여전히 좋은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코사투 회원이나 남아공 공산당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상당하다 전해지며 남아공 노총 내에서도 ANC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는 세력들이 힘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이고 2014년에 남아공 노총에서 ANC 지지를 철회하자는 세력(금속노조)을 제명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2016년 지방선거에서 득표율이 54%에 그치는 참패를 거뒀다. 그나마 9개 주 의회 가운데 7개 주에서 과반을 달성했지만 하우텡주[10] 에서 득표율 과반에 달성하지 못했으며(45.1%) 케이프 타운을 제외한 7개의 주요 대도시[11] 지자체 가운데 4곳(요하네스버그, 프리토리아, 포트 엘리자베스, 에커훌레니)도 야권에게 과반을 넘기는 참패를 거두웠다. 덕택에 2019년 총선에서 ANC가 과반수에 미달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 와중에도 주마는 지속해서 살아남고 있지만 위낙 주마에 대한 환멸이 위낙 심하고 각종 추문과 빈부격차 문제 해결 실패, 경기침체, 고실업 등의 문제에도 주마를 감싸는 ANC에 대한 실망감이 더더욱 퍼지고 있기 때문에 차기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미지수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2017년 12월에 있던 ANC 전당 대회에서 현 부통령인 시릴 라마포사가 승리, 당수가 되었다. 제이컵 주마가 대통령이었던 2009년 부터 현재까지 비록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해 마무리 했고 당당히 BRICS의 일원이 되었지만 경제 불안정으로 한때 1달러당 18랜드까지 치솟았고[12] 인도 재벌인 굽타 가문과 주마 간의 유착이 명백화 되었고 인종간 갈등이 극심해져 주마를 탄핵하려던 시도가 주마 임기 도중에 무려 '''9회'''나 있었지만[13] 집권당 ANC의 반대로 의회 레벨에서 부결되었고 ANC는 상당한 신망을 잃었다. 집권당이 그만큼 뻘짓을 해댈 동안 리버럴한 관광도시이자 흑인의 영향이 적은 케이프타운과 그 주위인 웨스턴케이프 주를 베이스로 하는 DA 가 약진했고 심지어 최대도시 요하네스버그를 2016년 지방선거에서 ANC를 누르고 승리했을 정도였다. 또 ANC의 청년부 총재였고 극단주의자여서 결국 쫓겨난 줄리어스 말레마가 2013년에 창당한 EFF[14] 는 가난한 흑인 및 유색인종, 특히 청년 계층으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어 ANC vs DA 구도[15][16][17] 를 깨뜨려 천하삼분지계를 구축, 심지어 대권까지 노릴 정도로 곤고한 지지층을 만든 상태이다. 시릴 라마포사는 당수가 된 후 첫번째 기자간담회에서 '''부패척결''' 을 내세웠고 주마가 망쳐놓은 당 내 정리 및 2019년에 예정된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 쉼없이 뛰어야 하는 상황이다.
라마포사 체제가 성립된 후 대통령 주마는 더 이상 안고 갈 필요가 없어졌다. 거대한 버팀목 이었던 ANC는 새로운 당수가 선출된 이후 주마에게 하야를 요구했고 주마는 당연히 거부한 뒤 2018년 6월에 나가겠다고 네고를 쳤지만 ANC는 2018년 2월 12일 주마를 '''리콜'''했고 당장 하야하지 않으면 2월15일에 '''탄핵투표로 우리가 끌어내겠다''' 라고 반응해 결국 2월14일 남아공 시간 밤 10시 주마가 하야를 선언했다. 2018년 2월14일 주마 하야선언 부로 부통령인 라마포사가 바로 대통령 직을 승계해 2019년 4월까지 임기를 채우게 되었다.[18] 라마포사 같은 경우 거대정당 ANC의 당수로서 어차피 2019년 선거에 대통령으로 선출 될 수순이었는데 만약 그렇게 되고 2024년에 있는 재선까지 성공한다면 자그마치 '''11년''' 동안 대통령 직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라마포사는 2019년 총선을 승리 하였지만 총선 에서도 득표율 60% 가 깨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정당의 미래 자체가 만약 라마포사 시기에 쇄신이 있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으로 정권유실 까지 예상될 정도로 암울한 상태이다.
전세계 적인 코로나19 위기로 남아공도 한때 전세계 확진자 순위 5위까지 찍는 등 혼란이 가속되자 2020년 3월 27일 부터 락다운을 발효해 전세계서 가장 엄격한 규정으로 나름 방역을 체계적으로 이끌었지만 동시에 경제 자체가 폭망해버려[19] 가뜩이나 만성적인 불황에 시달렸는데 더더욱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 4월에 편성한 코로나 추경 한화 약 33조원이 7월에 모두 바닥났고 이게 ANC 쪽 정치인과 관료들이 신나게 해먹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20] 반 ANC 감정이 고조되었다. 그러하기에 대통령 이자 당수인 라마포사가 직접 나서 부정부패 척결작업에 돌입했지만 ANC 가 ANC 의 부정부패를 심판하려 한다는 조롱 여론이 있고 상기됐듯 무언가 확실한 쇄신이 없으면 정권유지는 커녕 유실을 걱정해야 하는 상태이다.
3. 역대 선거결과
[1] 1994년 ~ 1997년까지 남아공의 국가이기도 했다.[2] 실제로 평화주의자로 유명한 넬슨 만델라도 당시 무장 투쟁을 하였다. 사실 원래는 평화주의적 노선을 걸었지만 희망이 안보이자 1960년대에 무장노선을 걸으려 했다가 남아공 당국에 붙잡혀서 27년간 옥살이하다가 무죄로 출옥한 이후, 다시 생각을 다잡고 평화주의 노선을 걷게 된 것이다.[3]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도 진영논리로 아프리카 국민회의를 테러단체라 언급했다가 비난을 받았다. (...)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고, 만델라와 만나 화해하였다.[4] 줄루족 정당으로 1970년대에는 아프리카 국민회의와 연대관계였으나 코사족과 줄루족간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있고, 1980년대에 남아공 백인 정부가 이들을 지원하면서 적대관계로 돌아섰다.[5] 예외적으로 웨스턴 케이프나 대도시 지역에서는 민주동맹에 밀리거나 타 지역에 비해 득표율을 적게 가져가는 경향이 있으며, 줄루나탈주에서는 주마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ANC가 다만 흑인이라도 젊은층은 아프리카 국민회의에 대한 지지는 비교적 약한 편이며(남아공의 청년실업률이 높다보니까 그렇다. 빈부격차가 위낙 큰 것도 있고 인프라 확장도 2000년대 중반이후로는 더뎌졌고), 아파르트헤이트가 실행되었을 때 같이 차별받았던 인도계나 컬러드도 아프리카 국민회의에 대한 지지가 약하고 줄루족도 같은 줄루족인 주마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아프리카 국민회의에 대한 지지가 약했다.[6] 경제난으로 아우성인 남유럽 국가들의 전체 실업률보다 높고 청년실업률은 비슷한 수준이다.[7] 이 지역은 원채 컬러드가 많이 살아서 1990년대 당시에는 국민당의 텃밭이었고 국민당이 와해되고나서는 ANC가 잠깐 집권했을때가 있었지만 2000년대 중후반부터 DA(민주동맹)의 텃밭화가 진행되었다.[8] 요하네스버그-프리토리아 도시권, 블룸폰테인 도시권, 더반 도시권, 넬슨만델라 베이(포트 엘리자베스) 도시권 [9]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일당주도 체제가 끝난다는 얘기까지는 잘 안나오는게 사실 지방조직력은 강하고 중장년층에서의 ANC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강하기 때문에 지방에서의 우위는 유지될걸로 예측되기는 하며 그 때문에 득표율 50%대는 유지될걸로 보인다. 대도시 지역에서의 우위가 무너진다는것만으로도 파장은 크겠지만[10] 국토 면적 대비 1.5% 수준으로 가장 작은 주지만 최대 경제도시인 요하네스버그와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 이를 중심으로 한 대형 위성도시들이 위치해있기 때문에 남아공 국내는 물론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도 가장 경제력에서 앞서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남아공 GDP의 33%, 아프리카 전체 GDP의 10%가 이 주 하나에서 나오는 수준.[11] 기존에 ANC가 집권하던 곳이었다.[12] 주마의 전임인 음베키 시절엔 1달러 당 10랜드를 유지했고 한때 8랜드 대 까지 간 적도 있었다.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주마 1기 초반부인 2010년 월드컵 때 만 하더라도 USD1=ZAR10~11 정도로 괜찮았던 시절이었다.[13] 제일 최근은 2017년 8월8일.[14] 극좌 극렬 아프리카 민족주의 정당. 백인 학살과 재산몰수 및 외국자본 추출을 공공연 하게 주장한다. 참고로 여기서 나오는 백인 학살은 주로 농장주들을 뜻하는데 상당수의 흑인들이 1차산업, 농업에 종사하는데 백인은 거기에 비해 극소수의 인구수이지만 전체 농장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 쉽게 말해 백인=지주, 흑인=농노 인 구조라 윗동네처럼 죽창질을 하자는 슬로건.[15] 한국으로 치면 더불어 민주당 vs 바른미래당 으로 보면 된다. [16] 그래봤자 주마 집권 이전에는 ANC 절대다수에 DA가 그나마 케이프타운은 베이스로 하고 유일하게 좀 의미있는 야당처럼 기능했다. 남아공에는 상당히 많은 정당이 있고 심지어 아파르트헤이트의 주동자인 백인 아프리카너 정당도 존재하지만 ANC와 DA를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적어도 2013년 이전까지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17] 그나마 DA가 백인정당 이라는 이미지를 없애려고 흑인인 음무시 마이마네를 원내대표 및 당수로 선정했고 주마가 실정하는 동안 텃밭인 케이프타운과 웨스턴케이프 주 를 잘 가꾸어 좋은 이미지를 생성해 주마 임기 (2009년 4월 당선~2018년 2월 하야) 동안 기존의 서남해안가 지역정당에서 전국 정당으로 성장했다.[18] 남아공의 정치시스템은 대통령직이 공석이 될 경우 부통령이 바로 대통령직을 인계받아 다음 대선까지 수행하게 된다.[19] 20년도 2분기 경제성장률은 전년대비 '''-51%''' 였다.[20] 일례로 개인에 대한 코로나 지원금으로 ANC 소속 지방관료가 한화 4억을 받아가고 그걸로 슈퍼카를 구매했다 한다. 신청하면 인당 R350 (한화 2만5천원 정도지만 시골지역 물가로는 약 2주 정도의 식비는 된다.) 지원금에 그 외 여러 개인과 법인에 주는 지원책이 마련됐었지만 실현된 경우는 거의 없다.[21] 일부주에서 선거가 연기되어 1996년에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