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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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제71대 총리다. 이른바 '''철의 여인(The Iron Lady)'''[7] 으로 이름을 날린 정치인이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대표적인 여성 국가 지도자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3차례나 영국 총선을 승리로 이끈 정치인이자,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다.[8] 역대 보수당 최장수 내각, 전후 최장수 내각의 2관왕이며, 역대로 치면 5번째다. 20세기 이후 영국의 역대 총리 가운데 전시 총리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9]
윈스턴 처칠 이후 영국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구가한 총리이자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하나이며,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1980년대 신자유주의·시장경제 진영을 상징하는 정치 지도자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라지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그녀를 수식하는 대명사가 되다시피 한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부터 '신자유주의의 마녀'라는 별명까지 평가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10] 어쨌든 여러가지 의미에서 역사에 이름을 각인시킨, 영국에서 평민 여성으로 최고의 위치에 도달했다.
좋으나 싫으나, 오늘날 영국의 설계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제3의 길이라는 중도 이념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한 토니 블레어 역시 대처에 대해 "내가 한 거라곤 그녀가 만든 정책을 조금 수정한 것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여전히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아울러 대처는 '''친인척의 후광을 받지 않고도 강대국의 지도자가 된 최초의 여성'''이다. 대처는 중산층 집안 출신으로 부유한 남편과의 결혼을 통해 정치적 후원이나 재력 면에서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결혼이 영국 총리가 되는 데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마가렛 대처 외에 부모나 남편의 정치적 배경 없이 강대국의 지도자가 된 사람은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2번째 여성 영국 총리 테레사 메이 등이 있다.
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보다 먼저 태어난 마지막 영국 총리다.
2. 생애
1925년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중산층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전형적인 미들 잉글랜드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성은 로버츠(Roberts). 아버지가 나중에 시장을 했지만, 이건 정계에 대한 진지한 도전보다는 지역 봉사에 가깝다. 원래 영국식 지방자치 시스템에서 각 지방의 자치권은 굉장히 강하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회 의원을 중앙 정계 진출의 관문으로 여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냥 그 지역에서 평판 좋은 유지들에게 그 지역의 일을 맡긴다는 입장에 가깝다. 따라서 시장이나 시의회 의원 같은 지방 정부의 직책을 정계 진출 도전으로 여기지 않는다.
1943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서머빌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전공은 화학. 서머빌 칼리지는 옥스퍼드 대학교 내의 이공계 중심의 여자대학이라 외롭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공계 여학생답지 않게 정치, 특히 보수당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이며, 보수당 청년위원회의 옥스퍼드 대학 지부를 이끌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력을 살려 졸업 후 24세에 처음으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부유한 집안의 아들인 데니스 대처와 결혼한 후 정치에만 본격적으로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되었고, 1959년 당의 눈에 띄어 결국 보수당 성향이 강한 런던 북부의 핀칠리 지역구에서 당선된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교육 장관을 거쳐 1975년 보수당 당수에 당선되었다. 대처는 2차세계대전 후 복지국가와 정부의 시장개입을 수용한 이전의 보수당 정책들을 비판하며 복지 축소, 작은 정부와 통화주의 정책으로인플레이션을 잡을것을 주장했는데, 전자는 웨츠(wets) 후자는 드라이즈(drys)라 불렸다. 1979년 불만의 겨울로 인하여 노동자들이 노동당 정권 지지를 대거 거두어들인 틈을 타서 선거에서 압승하며 영국 총리가 된다.
재임 초기 1970년대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을 정도로 영국 경제가 영국병으로 붕괴된 상황에서 영국 총리 자리에 오른 뒤 긴축 재정을 실시, 복지 지원을 삭감했다. 또한 영국의 산업 구조를 재편하면서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듣던 석탄산업을 구조조정했고, 이에 반발하는 노조를 분쇄했다. 주로 70년대에 파업을 주도한 탄광 노조가 타겟이었는데, 산업혁명 당시 영국 산업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탄광업이었고, 따라서 탄광업이 가진 사회적 중요성 또한 컸었다. 이에 탄광 노조가 그만큼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어 이들은 대처 이전에 총리를 갈아치울 정도의 영향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12] 그러나 일개 노조가 총리를 갈아치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는 것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극심했으며, 이와 함께 탄광 노조가 파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조직원들에게 보여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면모들은 대처 입장에서 노조를 비판할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구조조정으로 실업률이 전후 최고치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복지정책 중 주로 재취업 등을 통한 빈곤 탈출을 위한 지원은 이전보다 다소 강화되었다.[13]
1982년의 포클랜드 전쟁 직전에는 강력한 산업 구조조정으로 인해 역대 영국 총리 중 최악으로 꼽히기도 하였으며 재선이 불가능해 보였다. 한때 대처 지지율 25%, 보수당 내각 지지율 18%에 이를 정도. 그러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14] 승전 직후 정권 지지도가 56% 정도까지 치솟았다. 이런 여세를 몰아 1983년 실시된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는데 650석 중 무려 397석을 획득했다. 다만 포클랜드 전쟁 승리가 대처가 장기 집권을 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지만, 경쟁 상대인 노동당이 노선 갈등 끝에 분열되면서 지지율이 반토막 난 것이 1983년 선거에 포클랜드 전쟁 승리와 함께 영향을 미쳤다.##
전쟁 승리가 좋은 떡밥인 것은 사실이나 만능은 아니다. 윈스턴 처칠도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후 노동당의 애틀리에게 선거에서 패했고,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도 걸프 전쟁을 이겼지만 빌 클린턴에 패했다. 그러나 대처가 치른 포클랜드 전쟁은 앞에 명시된 두 개의 전쟁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포클랜드 전쟁 승리가 대처의 지지도를 상승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국이 세계적으로 쇠퇴하고 있다는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도 경제였지만, 외교에서도 영국은 수에즈 위기를 기점으로 새로 부흥한 초강대국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대영제국과 제2차 세계 대전의 승리를 통해서 강대국의 맛을 본 영국 국민들에게 이런 '영국병'은 치욕적이었고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안겨줬다. 더불어 계속되던 경제 불황은 영국 국민들에게 영국은 다시는 부흥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주의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15] 하지만 마거릿 대처는 이 모든 걸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서 해결했다. 일단 수에즈 위기 이후로 영국 정부가 계속해서 눈치를 봐야 했던 미국 정부가 처음엔 반대했으나, 대처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미국 정부를 설득하여 영국 편에 서도록 만들었고[16] , 국제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킴으로서 UN을 통해서 정당성도 확보했다.[17]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의 국력이 건재함을 만천하에 보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세계를 무대로 영국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즉, 대처는 포클랜드 전쟁을 성공적으로 해결하여 더 이상 초강대국과 이웃 나라들이 영국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계속되던 경제 불황과 외교 실패로 낙담해 있던 영국 국민들에게 대영제국의 향수를 만끽할 수 있게 도와줬으며, 잃어버렸던 활력을 되찾아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처 본인도 전쟁 전까지는 당내부와 노동당으로부터 무능하다는 공격을 받았으나[18] , 전쟁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이런 비판들을 모두 잠재웠고, 외교와 전쟁의 눈부신 성과를 통하여 영국병을 치료할 적임자는 대처 본인밖에 없음을 유권자들의 뇌리에 박히게 만들었다.[19][20]
이후 대처의 미시 경제 정책들이 결실을 맺어 영국은 로슨 호황기(Lawson Boom)에 접어들었고, 이는 대처가 1987년 총선에서도 승리해 3기를 연임하게 만들어 영국 전후 최장 임기 총리라는 타이틀을 얻게 도왔다.[21]
집권기에는 신자유주의 경제 원리에 입각한 과감한 정책을 펼쳤다. 민영화의 추진과 노동조합에 대한 강경한 자세, 교육·의료와 같은 공공 분야에 대한 대폭적인 국고 지원 삭감 등 이전의 노동당 정권들과는 다른 노선을 추진했다. 외교적으로는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무단 점령에 즉각적으로 대처해 영국의 위상을 지켜냈고,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견지했다. '''철의 여인'''(Iron Lady)이라는 명칭도 사실 소련 언론에서 처음 사용한 수사로, 대처와 참모진들이 크게 만족해 본인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명확한 명암 때문에 긍정론과 부정론이 양립하는 정치인이다. 즉 우호적으로 평하자면 "소신 있고 결단력이 강한", 부정적으로 평하면 "독선적인" 정책의 정치인.
2.1. 대내 정책
신자유주의의 동지이자 정치적 부부라고까지 불렸던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정책들에 레이거노믹스라는 표현이 붙듯이, 대처의 정책도 '''대처리즘'''이라고 불린다. 단순한 -nomics가 아닌 -ism가 어미에 붙은 것에서 나타나다시피, 대처리즘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경제정책뿐 아니라 대처와 당시 영국 보수당이 추진한 정책 전반과 그 기반이 된 이념의 명칭이다. 이는 대처의 정책들이 일반적인 신자유주의와는 여러가지 다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이민 경향과 반동성애, 가족주의적 경향 등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태도 역시 일반적인 신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경제적 정책에 대해선 후술하기로 하고 이 항목에선 일단 사회정책 전반 중 특기할 만한 사항들을 짚어보기로 하겠다.
지방자치정책 역시 대처 내각의 비타협 강경 노선이 여실히 드러난 부분이었다. 1981년 런던 시장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좌익/진보 성향의 케네스 로버트 리빙스턴[22] 이 당선되고, 이어 런던 시의회를 영국 노동당이 장악했다. 신자유주의적인 영국 보수당과는 반대일뿐더러 노동당 주류보다도 더 좌파적인 정책을 펼친 "런던 코뮌"[23] 이 등장했다.
이에 대해 1986년, 보수당이 다수인 의회에서는 지방세 상한제를 도입하여 런던 지방정부를 압박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한국의 광역시청(지방정부)에 해당하는 메트로폴리탄 카운티 의회 제도를 폐지해 버렸다. 이 조치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이 런던 광역의회(Greater London Council)[24] 폐지이다. 영국은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므로 이는 사실상 노동당이 이끌던 런던 지방 정부를 무력화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치는 진보 좌파 진영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일으켰고, 1997년 노동당 토니 블레어 내각이 들어선 뒤 해제된다. 런던 코뮌의 중심에 있었던 켄 리빙스턴은 2000년에 다시 런던 시장으로 당선되어 "14년 전에 아주 무례한 훼방으로 제 말이 끊기기 전에 했던 말을 마저 하자면...."이라고 운을 띄운 뒤 취임 연설을 하여 뒤늦은 역습을 가했고, 이후 보수당의 보리스 존슨에게 밀려나기 전인 2008년까지 시장을 역임한다.
2.2. 대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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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대처 내각은 강경한 대외정책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83년 총선 직전에 터진 포클랜드 전쟁의 승전도 그렇고, 소련을 상대로도 미국과 발맞춰 대립각을 세웠다. 긴 임기 덕분에 정치적 동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임기 후에 벌어진 여러 역사적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럽 대륙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당시 유럽 공동체 예산 및 재배분 구조가 영국에 불리하자 "우리 돈 내놔"라며 강력히 항의해 영국 특별 배분 기금을 얻어내는가 하면, 독일 통일 당시 강력한 독일의 부활을 우려해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25] 걸프 전쟁 개입 직전 주저하는 조지 부시를 압박한 것 역시 대처. 다만 실제 걸프전 개전은 대처의 후임인 존 메이저 임기 중에 일어났다.
다만 1972년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을 은폐하고, 반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쿠데타로 수립된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을 지지하고[26] 아파르트헤이트를 고수하는 남아공에 대한 제재를 거부한 것이 오점이자 흑역사로 지적된다. 이 경우는 논쟁이 불가능할 정도로 확실한 과오라 별로 이슈가 되지 않는다.
2.3. 실각과 사퇴
집권 말기에 유럽 통합에 관련된 논쟁으로 당내에서 지도력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인두세 도입에 이르러서는 여론이 등을 돌렸다. 인두세는 여론의 가장 큰 반대를 몰고 온 정책이었는데, 이는 대처 내각이 '''소득이 없는 실업자들에게까지 투표권자 등록에 세금을 물리겠다'''고 나선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인두세는 소득의 유무와 상관없이 무조건 개인에게 일정액의 세금을 물리는 것이며,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 치명적인 세제이다. 월급 100만원인 사람과 1,000만원인 사람에게, 10만원의 가치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현대적인 과세 정책의 근본은 더 부유한 계층에 더 많은 부담을 지우는 이른바 누진세제(progressive tax)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인두세 도입은 이에 역행하는 정책이었기에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27]
인두세 문제는 그녀의 총리직 사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에 대한 여론의 반발이 얼마나 컸던지, 폭동에 근접한 수준의 인두세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런던의 반대 시위 도중에는 사람 실물 크기의 대처 인형을 가설 교수대에 매다는 퍼포먼스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인두세에 대한 반발 여론이 컸던 것이다.
결국 1990년에 대처에 반발한 영국 보수당 의원들이 당 대표 선거를 실시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과반수 획득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이지만, 단 4표 차이[28] 로 1차 투표 당선(규정상 65%를 득표)에 실패했다. 이 1차 투표 당시에 대처는 영국을 떠나 있었고, 타 의원을 통해 대리투표를 했다. 대처가 당내 경선에 직접 참가해 얼굴을 비추고 의원들의 군기를 잡았다면 결과가 더 좋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신의 리더십에 확신이 있었다고 생각했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1차 투표에서 당선에 실패한 대처에게 1922 위원회(영국 보수당 운영위원회)의 중진들이 몰려와서 더이상 버티면 재미 없을 거라고 협박조로 통고했으며,[29] 이에 따라 그녀는 2차 투표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대표직과 총리직에서 사퇴한다. 그리고 1991년 5월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녀의 사퇴를 촉발한 인두세는 대처 퇴진 후 존 메이저 총리가 폐지했다.
대처의 보수당 당대표직 사퇴를 전하는 1990년 11월 22일 BBC 9시 뉴스.
1992년 남작 작위(케스티븐의 대처 '''여남작''')를 받고 귀족 회의인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재개[30] 하였다. 대처가 받은 작위는 종신 작위(life peer)로, 세습이 불가능하다.[31] 이후 한동안 막후에서 영향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고령에 접어들자 치매와 싸우며 투병하였으며,[32] 본인이 전기 집필을 원하지 않은 관계로 그녀 생전에 공식적인 전기는 쓰이지 않았다.
2.4. 사망
2013년 4월 8일 오전, 뇌졸중으로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그녀의 부고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여성 정치인의 본보기"라고 평가했으며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총리,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긴축 재정을 밀어붙힌 사람답게 자신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러지길 원치 않으며 행사 비용으로 '''"돈을 낭비하지 말라"'''고 한 고인의 뜻에 따라 '국장에 준하는 장례 의식(Ceremonial Funeral)'으로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4월 17일 거행되었다. 이러한 의전은 다이애나 스펜서 전 왕세자비의 장례 때와 같은 것이었으며, 조의의 뜻을 표한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 공을 비롯해 170개국 2,300명의 조문단도 참석했다.
장례 행렬이 영국 국회의사당과 세인트 클레멘트 데인스 성당을 거쳐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르는 동안 육해공 3군이 관을 호위했고,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한 군인 10명이 대처의 관을 운구했으며 역시 포클랜드 전쟁 때 사용했던 대포 2문으로 조포를 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화장된 유해는, 왕립 첼시 안식원에 묻힌 남편 데니스 대처의 옆에 안장되었다.
3. 경제정책
대처의 경제정책은 통화주의, 소득세와 법인세 감면, 기업 활동 규제 완화, 민영화, 정부 지출 감축 등으로 대표된다. 대처 내각은 영국의 GDP를 2.5%에서 2.7%로 높였으며,[33] 프랑스와 독일보다 계속 뒤처졌던 1인당 GDP도 증가하여 프랑스와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34]# 이외에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도 기여했다. 하지만 동시에 실업률[35][36] 과 빈부 격차를 증가시켰고###, 집권 3기 당시 인플레이션을 방치하여 경제 불황을 유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긍정론과 부정론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자면 아래와 같다.
3.1. 긍정
마거릿 대처는 '''영국병을 극복해 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영국은 2차대전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상실과 정부부채 과다로 점차 침몰하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엄연히 인지해야 한다. 영국은 실제로 전쟁이 끝나고 10년동안 배급제가 운영되는 곳도 있었고 마이너스 성장률까지 기록했다. 마가렛 대처를 평가함에 있어 지금같은 정상궤도 기준에서 볼게 아니라 당시 힘든 상황에서 경제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평가가 되어야 한다. 게다가 당시 정부에 대한 저항에 오일쇼크까지 겹친 상황은 죽어가던 영국에게 치명타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이는 미국도 비슷했다.캘리포니아 프로포지션 13으로 알려진 주민헌법 개정이 당시 상황을 대변하는데 주정부가 세금으로 적자부채를 떼우려하자 캘리포니아 주민입법으로 주정부 과세를 막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은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후대의 비판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당대의 기준에서는 올바른 선택지였다.
자동차 산업과 석탄 산업 같은 경우 이미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국내외적으로 받고 있었다. 특히 롤스로이스 같은 일부 거대한 산업 같은 경우 이미 6, 70년대 들어 경영이 어려워지자 국유화해서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하다시피 했다.
노동자 파업을 강경 진압한 경우는 1984년 NUM(전국탄광노조)의 노조위원장인 아서 스카길이 3번이나 파업 투표에서 졌음에도 무리하게 4000명을 모아 불법적으로 투쟁한 데 있으며, 공공기관 민영화는 필연적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영국 정부가 공기업을 현대화할 자금이 부족했으며 심각한 관료화 상태로 진행되어 가스가 나오는 데 분 단위로 시간이 걸리는 지역도 있었다. 민영화를 통해 현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냈으며 국민들이 고가격으로 피해볼 수 있음을 인식했는지 국민들로 하여금 전부 민영화 당일 주식 매수 기회를 우선적으로 주었다. 이를 통해 국민기업화도 이뤄낸 것이다.
아울러 이미 70년대부터 북해 유전 등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지만[37] , 여전히 영국은 보다 사양산업인 석탄 산업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연명하고 있었고, 이 당시 석탄 광부들은 대처 이전에 이미 영국 총리를 하나 갈아치울 정도로 그 정치적 위세가 막강했다.[38] 이런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석탄 산업을 대거 구조조정한 결과, 이 당시 석탄 산업 근로자들은 상당수 북해 유전과 가스전으로 취업하게 되어 산업 구조 전환이 이루어졌다.
북해 유전 같은 환경적인 측면이 영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맞지만, 대처 이전의 영국은 그러한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해 IMF 금융지원까지 받았다. 적어도 대처가 석탄 산업을 구조조정하고 거기에 소모되는 인력과 물자를 석유, 가스 산업으로 돌리는 등 그런 환경적 혜택를 받고자 노력한 점은 이전 행정부보다는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39]
거기에 북해 유전 같은 대규모 유전들이 마냥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마찬가지로 북해 유전으로 꿀을 빨았던 네덜란드는 이른바 자원의 저주로 말미암아 큰 경제적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이러한 문제가 굳이 유전만 그런 것도 아니고 대표적으로 그 옛날 제국주의 스페인이 중남미 금은광으로 재미를 봤다가 말아먹은 사례도 있다. 결국은 어떻게 써먹느냐에 달린 것이다. 따지고 보면 북해 유전의 존재가 아이러니 하게도 석탄 산업의 구조조정 필요성을 유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스페인 역시 식민지 금은광이 흥해서 국내 제조업을 말아먹은 전례와 비슷하다.
민영화의 경우 역시 철도[40] 나 수도 민영화 같은 개별 사안은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잉글랜드 남부 등지를 중심으로 오히려 대처의 열정적인 지지자들이 가장 많이 생겨나게 한 정책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뭐냐면, 이 당시 대처는 국민주 방식을 통해 공기업 주식을 염가에[41] 대거 국민들에게 팔아치우면서 수많은 국민들이[42] 주식을 사게 되었고 이들이 이를 보유하거나 기관에 팔면서[43] 큰 수익을 보게 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민영화 정책 중 가장 호평받는 것은 공공주택 민영화인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서민들이 자기 집을 보유하게 되었고 뒤이어 불어닥친 부동산 시장 광풍으로 집값이 대거 상승하면서 이들이 대박을 터뜨린 바 있다. 대처의 비판자들은 보통 설문조사 해보면 40%를 찍지만 지지자들 역시 보통 5~60%를 찍는데, 그게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80년대 장기 집권하도록 도운 열정적인 지지 세력은 죄다 여기서 나왔다. 대처의 경제정책 속성 중 하나로 간과되는 것이 이른바 '대중 자본주의'인데, 대처의 정책으로 인해 적지 않은 중산층들이 자본 소유주가 되어 그 혜택을 누린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제조업 구조조정, 금융업 활성화, 감세와 규제 완화, 정부 지출 축소 등의 신자유주의화는 마거릿 대처 자신의 '''개인적 사상과 결합해(Thatcherism)'''[44] 21세기의 그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대처는 영국인들에게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라"는 메시지를 던졌고, 대처의 집권 후기인 1987년도 경에는 실업률 상승이 꺾인 점에서 미루어 대처가 영국 경제에 놓은 극약 처방은 일부 효과가 있었다. 괜히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등 수많은 국내외 각국의 정상들이 그녀를 배운 게 아니다.
스코틀랜드 경제가 박살났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구체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일단 지표만 보자면 마거릿 대처 시기에 특별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 격차가 커진 것은 아니다. # 영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오히려 1인당 GDP 성장률은 두 지역이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스코틀랜드가 더 높은 적도 적지 않았으며, # 이 외에도 이 기사에 따르면 오히려 대처 시기 스코틀랜드의 1인당 GDP 성장률이 더 높았다.
심지어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자료'''를 보더라도 스코틀랜드의 1인당 GDP는 2012년 기준으로 39,642달러인데, UK의 GDP는 35,671달러로 스코틀랜드가 더 높다. 이 점을 볼 때 대처가 스코틀랜드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UK에서 잉글랜드가 차지하는 GDP나 인구 비중은 통상 80+a%을 오가는 걸 감안하면 UK와 잉글랜드의 1인당 소득 관련 지표는 그다지 차이 안 난다. 스코틀랜드 독립당과 가디언지의 자료에 따르면 파운드화 기준으로 스코틀랜드의 1인당 GDP가 약 2,300파운드가 높다고 했다. # [45]
영국 재무부 지표를 확인하면 대처 내각은 긴축 재정을 실시하되 공공의료 공공복지 지출은 3~4% 단위로 꾸준히 증가함을 볼 수 있다. 적자(Deficit)를 줄인거지 빚(Debt) 그 자체를 줄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의 비율은 감소하는데 이유는 지속적 경제 성장에 있다. 대처 내각은 금리를 올리고 공기업을 구조개혁하면서 생기는 단기적 생산량 감소를 초래하긴 했지만 제조업 붕괴라는 단어는 세계 5위권의 제조업 강대국에게는 맞지 않는 수식어일 것이다. 이전 정권들의 자존심 지키기로밖에 해석될 수 없는 불안정한 환율 정책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황폐화된 제조업 계열 산업들이 있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탄광들이 망한 것은 부족한 수요 때문이지 정부가 석탄을 구매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한국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1989년 10000명 이상이 해고 되었지만 오히려 경제적으로 보면 삶의 질은 올라갔다(먼지 감소, 높은 연료 효율 등등). 자동차 산업은 영국 레일랜드라는 회사를 찾아보면 이유가 명확하다. 출신이 다른 기업들도 하나로 모아두면 규모의 경제가 성립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의해 노동당 정부가 종말의 빌미를 제공한 데 있다. 그리고 롤스로이스, 벤틀리, 재규어, 로버 등이 모두 대처 내각 이후에 해외로 팔려 나갔다(것도 2000년대에). 고실업과 같은 현상은 있었으나 이는 취업시장에서의 베이비 부머 세대의 유입으로 인해 높게 유지되다가 집권 2기부터는 꾸준히 감소했다가 3기부터 다시 올랐다. 저교육 투자는 공공 부문에서 민영 부문으로 투자를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맞다고 볼 수 있다.
3.2. 부정
통화 유통량 조정으로 생긴 '''실업률 증가와 경제 불황, 늘어난 빈부격차, 일부 민영화 정책, 금융업 규제 완화, 그리고 노동자 파업 강경 진압 등이 주요 비판 대상'''이다.
1기 집권 당시에는 무리한 통화주의 정책으로 1981년 경제 불황을 유발했고, 제조업 감소로 실업자 수가 3백만 명까지 증가하여 대공황 이후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게 된다.# 1981년 364명의 경제학자들은 대처의 이러한 정책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대처는 본인에게 유턴(U-Turn)은 없다면서 본인의 경제 정책을 밀어붙였다. 덕분에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잡았으나 6분기에 걸친 GDP 감소가 있었고 높은 실업률은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면서 불필요한 경제 불황을 일으켰다는 비판도 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이 있으나, 임금과 물가 고정은 자치 잘못하면 경제 불황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 추진하지 않는다.[46] 이후 선진국들은 임금과 물가를 직접 조정하기보다는 금리인상, 통화량 통제, 정부예산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보통 정부는 긴축통화정책(contractionary monetary policy)을 통해 과잉된 경제를 진정시켜 인플레이션을 조정한다. 21세기에 주로 사용되는 긴축정책으로는 금리인상과 지급준비제도가 있다.## 그러나 대처의 1기 집권 시절에는 전 세계적으로 통화유통량(monetary aggregates) 조정 정책이 통화주의자들을 필두로 유행하고 있었고,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영향을 받은 대처도 금리인상과 더불어 통화주의 정책을 이용하여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통화유통량 조정은 말 그대로 정부가 나서서 시장에 이미 공급된 통화량을 측정하여 미래에 공급될 통화량을 예측하여 조정하는 제도이다. 문제는 통화유통량 조정이 이론적으로는 분명히 효과적인 정책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실행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영국보다 앞서 통화유통량 조정을 펼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통화량 예측과 그 예측에 따른 통화유통 목표치를 달성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1982년에 인정하고 사실상 통화유통량 조정 정책을 무기한 정지한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이 당시에 얻은 교훈으로 더 이상 통화유통량 조정 정책을 되도록이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며, 미국은 이후 금리와 재정정책을 통해서 인플레이션을 조정하고 있다.#
당시에도 통화유통량 조정과 인플레이션 사이의 상관관계가 기존의 분석과 달리 더 낮다는 연구 결과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통화유통정책을 밀던 미국과 캐나다는 1982년에 일시적으로 중지하고 1987년에 모두 공식적으로 포기한다. 결국 대처 내각도 1982년에 통화유통정책을 대거 수정하고 1985년에는 통화주의 정책을 일시중지했으며 1987년에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 때문에 다수의 경제학자들은 통화주의로 요약되는 대처의 1기 경제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일부 경제학자들은 통화유통량을 조정하지 않고 금리인상과 재정정책 조정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았으면 경제 침체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대공황 이후 최악의 실업률과 경제 불황은 겪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통화주의자들도 대처의 통화주의 정책은 통화주의를 완벽하게 따르지 않고 조기에 포기했기 때문에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경제학자들이 작성한 수많은 추도 연설에도 대처의 통화주의 정책은 비교적 강조되지 않았다.#
1985년 이후 영국은 대처의 정책 덕분에 5% GDP 성장률, 실업률 감소, 집값 상승이라는 매우 이례적인 경제 호황기를 경험한다. 특히 집값이 상승하면서, 대처의 공공주택 민영화 정책으로 집을 소유하게 된 중산층의 가계소득과 자산이 증가했고, 이는 경제 신뢰도 상승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영국 국민들의 자산증식 저당 대출은 기록적인 수준까지 증가했으며, 소비 지출이 증가하는데 기여하여 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이는 영국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의 성장이었고, 인플레이션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인플레이션과 이로 인해 떨어지는 파운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영국은 금리를 인상했으나, 금리가 갑자기 오르면서 대출 이자도 영국 국민들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오르게 됐다. 이는 결국 1991-92년의 경제 불황을 초래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또한 1980년 대에 신규주택 건설 투자가 과거에 비해 줄어들면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주택난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미쳤다.
케인즈주의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저서 <Peddling Prosperity>[47] 에서 대처 정부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으며, 영국가스공사(British Gas)와 영국전력공사(British Electricity), 그리고 잉글랜드, 웨일스 물관리공사(Regional Water Authorities(RWAs))의 민영화는 국가 기간시설(基幹施設)의 민영화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의 하나로도 언급된다.[48] 민영화 문서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민영화는 경제를 회복시키는 마법의 주문이 아니다. 제대로 관리 감독되지 않으면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리스크 또한 가졌기에 무분별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세를 드높이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하에서 민영화의 리스크는 간과되었고, 대처의 민영화는 이후 경제적 측면에서 대표적인 비판거리가 되었다.
실제로 일부 주요 산업 분야의 민영화는 이미 1930~40년 대에 자유 시장을 옹호하던 경제학자들로부터도 기업의 이익과 공익이 상충될 수 있기 때문에 반대를 받았고, 이런 산업 분야는 민주주의 절차를 통해서만 독점을 방지하여 거시적인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또한 대처의 민영화 정책 도입 이후로 민영화된 산업들의 효율성이 증가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이미 1996년에 경제학자들로부터 제기됐으며#, 민영화된 공익산업과 철도산업의 부실한 투자와 과한 요금 인상으로 영국 정부는 2017년에 상한가격제를 다시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2019년에는 대처를 존경한다는 보리스 존슨마저도 철도 국유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방송국 민영화라든가 BBC에 상업광고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무산되었다. 이웃나라 프랑스와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지에선 공영방송에서도 상업광고가 편성된 것과 대조되는 점. 참고로 이웃나라 프랑스에선 대놓고 사회복지정책을 축소하진 않았지만 대신 그 당시 총리였던 자크 시라크가 마거릿 대처도 못한 공영방송의 민영화(TF1)를 실현했다.[49]
마거릿 대처를 비난하는 측에서는 "대처 내각의 결실은 허상이고, 하느님의 축복인 북해 유전 덕분에 영국 경제가 회생했을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북해 유전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매우 과장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영국이 북해 유전을 개발한 덕분에 산유국으로 올라서고 거기에서 상당한 규모의 재정 수입을 얻고 수입 대체 효과와 관련 산업이 발전하는 혜택을 누린 것은 분명하다.[50] 조지 소로스의 수제자로 알려진 짐 로저스는 북해 유전의 낮아지는 생산성과 고갈 위기 등을 언급하면서 파운드화 자산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었다. 영국은 이제 x됐다. 하지만 많은 주식 커뮤니티들에서 약팔이라고 까이기도 하는 로저스의 말이기 때문에[51] 어느 정도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다.
또 일각에서는 "마거릿 대처 치하에 스코틀랜드 경제가 박살났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이것이 심지어 스코틀랜드 독립 의식을 증폭시켰다고 하기도 한다. 이는 당시 스코틀랜드 경제 구조와 큰 연관이 있다. 광산업과 제철업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 특성상 대처의 구조 개혁은 말그대로 직격탄이었고, 그에 따라 대처에 대한 반감 또한 수치상의 발전이나 변화와 무관하게 무지무지하게 올라갔다. 이는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영국 북부 전반의 현상이었으며, 1980년대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이런 경제 구조 개혁으로 인해 벌어진 실업 문제나 도시 슬럼화가 자주 묘사된다. 대표적인 게 폐광으로 실업자가 된 광부들을 다룬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영화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 심지어 맨유 선수들을 다룬 다큐 "Class of '92"에도 스쳐가듯 대처 욕이 많이 나온다(...).[52]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허구한날 대처가 까인다. 배경이 석탄 산업 합리화 조치로 피해를 본 잉글랜드 북부 더럼이기도 하고, 각본가 리 홀과 모티브를 준 실제 인물 필립 마스든도 대처 시대 노동자 계급에서 고통받았던 사람이라서 안 깔래야 안 깔 수가 없다.
구조개혁으로 인한 실업과 그에 따른 수치상의 성장이 민생에 바로 직결되기는 힘들다는 점은,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문제들이다. 한국도 IMF 이후 GDP나 실업률이 원상복귀 되기는 했지만 비정규직 문제들 여러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고, 미국도 90년대 제3의 길과 자유무역으로 인해 많은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진 것처럼. 따라서 아래 옹호란에 나온 듯이 스코틀랜드가 대처한테 대놓고 무시당한 것은 아니지만, 스코틀랜드 몇몇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에 대한 대처의 태도 역시 훌륭하지 못하여 여전히 반감을 가지고 있다.
3.3. 경제 지표 변화와 그 설명
집권 당시 영국의 인플레이션율은 1979년 12.5%까지 치솟았다. 거기에 더해 석탄 및 제조업 분야는 파업으로 들끓었다. 정부부채 역시 심각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1기 당시의 경제정책은 인플레율을 끌어내리고 정부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증세 및 정부지출 삭감, 통화정책에 집중되었다. 이 정책들의 악영향으로 영국은 약 6분기에 걸친 GDP 감소를 경험하며 마이너스 성장이 지속됐다.[53] 그 이후 경제성장률은 다시 플러스로 변했지만 GDP 성장률은 1970년대에 비해서 높다고 볼 수 없었고, 이는 1980년대 중반의 Lawsoon Boom을 포함시켜도 똑같다.# 즉, 1기 당시의 실물지표 악화는 이전 정권들의 실책으로 생긴 결과로 해석될 여지도 있지만, 통화정책을 너무 강경하게 밀어붙인 것 때문에 대공황 이후 최고의 실업률을 달성하고 GDP 감소는 6분기에 걸쳐 지속되어 필요 이상으로 영국 경제에 피해를 끼쳤다고 볼 수 있다.
2기부터는 공기업, 공공주택 부문에서 민영화 등이 이루어진 점, 그리고 국제적으로 이 시기에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팽창한 시점이라 그 궤를 맞춰서인지[54] 자산 가격 상승에 따른 총수요 팽창이 있어 경제성장률이 높았다. 1987년의 경제성장율은 5.3%, 1988년에는 5.9%였는데, 이 경제 팽창기를 이른바 Lawsoon Boom이라고 부른다. 이 과정에서 중산층이나 서민들이 제 집을 가지게 되거나 주식 등 자산 증식에 있어서 재미를 보게 되는데, 대처 내각의 경제 운용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상당 부분 이로 인해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역시 자산 거품이 일어 퇴임 후 그 거품이 꺼짐에 따라 91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대처 내각은 Lawsoon Boom이 거품이 아니라 공급 혁명의 효과로 해석하여 인플레이션을 방치했다.[55]# 덕분에 대처 내각의 평균 GDP 성장률(2.7%)은 1970년대(2.5%)에 비해서 높지 않다.
그 외에 다른 지표를 보자면 일단 실업률은 대체로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이 더딘 관계로 집권 기간 동안 높은 바 이 점은 대처 정부의 어두운 면이라 할 수 있다.[56] 다만, 주택가격은 대체로 상승세를 보였고 말기 들어 크게 상승했으나, 1990년 대 초반에 경제 거품이 빠지면서 주택가격은 다시 하락했다. 또한 80년 대 동안 임대 주택을 팔고 새로운 주택 건설에 미흡한 모습을 보이면서 1990년 대와 2000년 대까지 주택부족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지니계수 등 소득분배 지표는 악화됐으며, 빈곤에 처한 아이들의 숫자도 13%에서 22%로 증가했다.# 그러나 정부부채는 해결됐고 물가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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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살리는 과정에서 지니계수가 악화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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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10%의 생활은 경제 성장이 시작된 80년 대 중반에 근소하게 소득이 증가했으나, 주택 비용 부담을 고려하면 오히려 79년보다 더 못한 상황에 놓였다.[57]#
민영화로 일부 산업은 효율성이 증가했으며, 특히 전자통신, 비행기, 그리고 한동안은 전기세도 가격이 내렸다. 더불어 과거 독점으로 운영되던 산업에 규제완화를 도입하여 경쟁성을 증가시켰고, 경쟁성이 증가하면서 가격은 내려가고 효율성은 증대되는 효과를 봤다. 또한 이전까지 영국 경제를 좌지우지한 노동 조합의 힘도 크게 약화시켜 영국 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켰다. 서비스업과 금융업을 키웠으며, 비효율적인 기업은 더이상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만들어서 장기적으로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처 시절에 공공 지출이 감소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공공 지출에서 감소된 부분은 대부분 파산한 기업에 대한 지원 중단에서 나온 것이다.[58]# 무엇보다 대처의 정책으로 국민들의 주택 보유가 높아지면서 국민들이 경제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유럽 단일시장에 가입하여 영국이 자유롭게 유럽 시장과 교류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무리하게 잡으면서 1930년 대와 맞먹는 실업률을 기록한 적도 있었으며, 집권 1기와 3기 이후에 일어난 경제 불황[59] 모두 대처의 정책으로 인해 생겼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 없으며#, 이 불황으로 실업률 증가와 소득분배 지표의 악화로 빈곤층이 크게 증가했다.# 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낙후된 발전과 높은 실업률을 해결하는 데 느리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택 소유 증가도 주택을 구입할 수 있는 국민들에게는 이득이었으나, 이로 인한 지니계수도 악화됐고, 무엇보다 당시 팔린 임대 주택 때문에 이후 영국은 주택 부족을 경험하게 된다. 80년대 중반에 시작된 Lawson boom도 지속 불가능한 경제 성장률과 인플레이션 증가를 방치하여 1991년 경제 불황을 유발했다. 민영화도 일부 산업의 효율성을 증가시켰으나, 민영화 과정에서 너무 싼 가격에 기업을 팔아서 국고를 늘릴 수 있던 기회를 놓쳤다는 평도 있다. 또한 금융 규제 완화로 금융업을 크게 키운 것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금융사들이 위험부담이 큰 품목을 거래하게 만들어 2008년 금융위기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요약하자면 마가렛 대처는 인플레이션을 잡고 민영화와 규제 완화로 일부 영국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서 영국 경제를 정상 궤도로 올렸으나, 실업률과 빈부격차를 올렸고, 말기에는 본인이 잡았던 인플레이션을 다시 키워서 경제 불황을 유발했다고 평할 수 있다.#
4. 평가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지만, 종합적으로 영국의 정치학자, 역사학자 등 전문가들이 평가하는 다양한 조사에서 20세기 이후 영국 총리 가운데서 항상 최상위권에 꼽힌다. 그녀와 더불어 최상위권에 꼽히는 다른 총리들인 윈스턴 처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클레멘트 애틀리[60] 가 모두 제1,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총리를 지냈다는 점에서, 전시 총리를 제외한 20세기 영국 총리 중에서 마가렛 대처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영문 위키피디아 참조.'''"그녀는 칼리굴라의 눈과 마릴린 먼로의 입을 가진 정치인이다."'''
'영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한 강단 있는 정치인'이라는 평과 '영국의 빈부 격차를 크게 키운 최악의 정치인'이라는 평까지 극과 극의 평가를 전부 듣는 인물이다. 옹호가들로부터는 20세기 들어 내리 쇠해가던 영국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 영웅이며 그녀의 능력과 업적만큼은 전 세계가 인정한다고 극찬을 받는가 하면, 일부 영국의 노동자와 영국 노동당 지지자들은 '노동자의 적'이라고 부르며 매우 싫어하며, 일부 경제학자들도 대처의 경제 정책에 긍정적인 평가만을 내리지 않는다.
2006년 BBC가 역사학자 프랜시스 베케트에 의뢰한 "영국의 변화를 위한 비전을 얼마나 잘 실현했는가"에 대한 평가에서 클레멘트 애틀리와 함께 공동 1위에 올랐고, 2014년 런던대 연구팀이 영국 의회 하원의원 15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단독 1위에 올랐다. 그 밖에 영국의 교수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나 일반인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 등에서 모두 대처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영국 보수당 내에서도 싫어하는 세력들이 있긴 했다. 그 이유는 아래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도 대처의 후임 존 메이저보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대처리즘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 부분이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블레어의 정책 노선은 마찬가지로 영국병 참조. 이처럼 반대 진영인 노동당 쪽에서도 의외로 그녀를 괜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만큼 평가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
- 보수당의 원로들 중에서는 대처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세력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베버리지 보고서를 통한 계급 타협이 정착된 상황에서 노동 계급에 대한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오래된 계급 투쟁의 망령을 다시 불러왔다는 것이 당시 보수당 원로들 중에 대처를 싫어한 세력이 존재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양차 세계대전에서 국가 주도 동원 경제의 막강한 조직력이 전쟁 이후 클레멘트 애틀리 정권에서 보편 복지 정책으로 연결 되어 사회적 안정과 계급적 불만의 해소라는 측면에서 크게 성공한 걸 보았던 전후 영국 보수 엘리트들은 미국과 달리 사회 안정이라는 쥐만 잡을 수 있다면 정부의 시장 개입을 용인했다. 결국 대처를 끌어내린 것도 노동당이 아니라, 보수당 중진들이었다.
- 대처는 전통적인 영국 보수당의 문화에 적응하기보다는, 기존 보수당의 이념 체계를 신보수주의로 완전히 뜯어고치고자 했기 때문에 벼락출세한 정치적 졸부 취급을 당하였었다. 역시 미국과 달리, 이 시점에서도 영국은 적어도 보수당 지지층이란 특정 사회적 집단 내에서 보면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전 종교, 혈통, 작위 같은 전근대적 신분 결정 요인에 큰 무게를 두는 계급적 가치관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고, 이 관점에서는 일단 평범한 중산층 가정 출신의 여자라는 점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61] 이러한 가치관을 조선시대급 꼴통 마인드라고 지적할 수도 있지만, 일본과 비슷하게 근대에 들어와서 큰 내전도, 체제의 급격한 전복도 없었던 영국에서는 근대 이전의 사회, 신분 질서의 유산이 상당히 강력하게, 그리고 오래 유지되었다.
- 반대로 대처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세력도 적지 않다. 이들은 대처 행정부의 개혁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영국이 대처리즘의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1979년 대처가 넘겨받은 영국은 그야말로 막장이었고(영국병 참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극과 재생이 필요한 상태였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당시의 노선 그대로 영국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을 경우, 영국의 현재 모습은 지금보다 심하면 심했지, 더 낫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또 마냥 노동자 계급을 괴롭혔다는 통념과 다르게 최저임금제도를 실질적으로 정착하여 노동자 계급이 경제 불황 속에서도 적은 돈을 가지고서나마 집을 얻을 수 있게 하기도 했고, 영국보험체계의 현대화를 위해 힘쓰기도 했다.
- 대중에게 보여준 이미지도 특기할 만하다. 유머와 부드러운 태도가 미덕으로 여겨졌던 영국 정치계에 여성으로 등장해 치밀하게 준비된 자료와 방대한 지식, 그리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언변으로 토론 상대를 압도하던 스타일 또한 어떤 의미로건 인상적이었다. 결국 그런 면모가 영국 정치사에서 지금과 같은 커다란 존재감을 각인하는 데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관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대처의 옷차림에서 대처가 어떤 자세로 그날의 토론에 임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 강경한 독설로 나갈 땐 독사 모양의 브로치를, 우호적으로 사근사근한 토론 진행을 할 시에는 아기 천사를, 조용히 이도 저도 아닌 결론을 유도하고 싶다면 아무 모양 없는 둥근 형태의 브로치를 차는 기호가 있었단 것이다.
- 대처가 공권력 집행을 통해 강력한 법 집행을 실행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가령 위의 사진처럼 런던 시위 때에 기마경찰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짓밟고 격파한 기동 전술을 도입한 것은 '철의 여인'다운 강경한 대응 방법이었다. 하지만 집회 및 언론의 자유 보장과 사회적 안정 보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어떻게 찾을지는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 중 하나이고, 대처의 대처 방식을 사회적 안정과 법 질서의 유지라는 명목으로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파괴한 반민주적 행태로 보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수백만개의 CCTV가 설치된 런던의 첫삽을 뜬 것도 1980년의 대처로 이 정책은 97년 이후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내각 때도 이어졌지만 위의 대 시위 강경 노선과 더불어 '감시하는 정부'라는 낙인이 되어 많은 반대를 샀다.[62] 그래픽노블 브이 포 벤데타의 배경의 모티브가 대처 총리의 통치기라는 사실은 작가인 앨런 무어 스스로가 서문에서 공인한 바이다.
- 교육 부분에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GCE O와 CSE의 two-tier system을 폐지하여 하나의 시험인 GCSE로 통합하였다. 이로 인하여, 저소득층 가구들이 집중된 지역의 학교에서도 고등학교인 sixth form에 진학하게 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열리게 되었다. 종전의 CSE 시험으로는 고등학교 진학이 불가능했기 때문. 결론적으로 1988- 1989년 사이에만 고교 진학률이 약 20% 증가하는 쾌거를 이뤘다. 다만 지원금은 적어지는데 학생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 이때부터 학생 대 교사 비율이 크게 오르게 된다.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이 심화되어 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가 이뤄지면서, 소위 '대처식 리더십'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다. 대처의 구조조정에 따라 스코틀랜드인들의 마음이 분리 독립으로 크게 돌아선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정적으로 규정하고 문제점이나 극복 대상을 명확히 하고 타협이나 회피없이 그에 맞서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대처식 리더십의 주요한 특징이고 이 과정에서 추진력이 있다는 평판을 얻어 생긴 별명이 '''철의 여인''' 대처였다. 그러나 비타협적이고 강경한 추진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적과, 새로운 문제들이 생기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고, 그 새로운 문제가 심화되어 생긴 것이 2014년의 연합왕국 해체 위기라면... 대처의 리더십이 높은 평가를 받는 만큼 그 반대급부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4.1. 대처 정권과 스코틀랜드 문제
2015년 영국 총선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은 독립당을 밀어 주는 결정을 내렸다. 2015년 영국 총선 스코틀랜드독립당(SNP) 56석을 얻으며 약진. 웨일즈, 스코틀랜드의 자치권 확대와 보수당의 브렉시트 정책으로 인한 국가 해체 위기의 심화. "영국은 해체의 길로 가고있다"
일단 스코틀랜드가 대처와 그 이후의 역대 연합왕국 행정부의 경제정책 하에서 받은 수혜 역시 크며, 특히 최근 들어서 북해 유전을 포함해 스코틀랜드가 다른 UK나 잉글랜드보다 1인당 GDP가 몇 천 달러 가량 많은 현실을 감안하면 이들이 대처 정권의 피해자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대처 총리의 극약처방의 수혜자 중에는 분명 스코틀랜드가 들어간다.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을 경제적 측면에서 찾고자 한다면 스코틀랜드 지역 경제는 전반적으로 대처 시기이래 활성화되었으니 대처는 일단 저기로부터는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독립 열기에는 분명 대처 정부의 경제정책도 그 원인이 있는데 그것이 단순히 일자리를 뺏었네 뭐네 하는 차원은 아니다.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대처리즘의 금융업 중심 정책을 통해 제대로 덕을 받은 건 예나 지금이나 노동인구가 집중된 공업 도시가 아니라, 학생들과 금융업, 그리고 수도로서의 행정 기능으로 도시 자격을 유지한 에든버러인데, 실제로 스코틀랜드 경제 생활의 중심지는 이 에든버러가 아니라 영국 전체에서 굴지의 제3의 도시였던 글래스고이고, 산업혁명 자체를 상징하는 공업 대도시 중 하나였던 글래스고는 대처리즘으로 경제적 직격탄을 맞았다.
경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현지 사회, 정치적인 면에서도 글래스고는 반대처 정서가 크게 성장할 확실한 이유가 있다. 글래스고는 예전부터 아일랜드계 가톨릭 이민자들이 대거 이주하여 장로회를 믿는 현지 스코틀랜드 출신 시민들과 상당한 갈등이 있었고, 이는 주로 셀틱스와 레인저스 사이 축구 경기의 훌리건질로 표출되었다. 대처 정권이 북아일랜드에서 영장도 필요 없고, IRA 소속이라는 추측만 가지고도 바로 쏴서 사살할 수 있는 shoot-to-kill 정책을 도입하는 등 막 나가는 탄압책을 펼치자, 이게 엉뚱하게 글래스고 내에서 저런 주민들 사이의 갈등에 다시 불을 지펴, 80년대 IRA의 반영 무장투쟁이 절정에 달하면서 동달아 글래스고의 폭력 범죄 또한 이때 전성기를 찍었다.
그렇다고 해서 에든버러에서 대처를 좋게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 문제 자체도 대처리즘 정책에서 단물을 빨다가 결국 2010년대 현대 들어와 평균 집값이 런던의 켄싱턴에 맞먹는 엄청난 가격 상승과 물가 상승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빈부격차와는 별개로 잉글랜드와 달리 상류층과 노동계급 양쪽 모두 시내 중심 도로인 하이 스트리트 양쪽으로 난 아파트에서 주거 공간과 문화, 공동체 생활을 공유하며 계급을 초월한 끈끈한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에든버러의 사회적 전통을 파괴하는데 크게 일조를 했다.
산업혁명의 중심지인 글래스고와 달리 에든버러는 옛날부터 대규모 산업 노동계급이 적었고, 그리고 이들도 각종 사업으로 돈을 벌어온 스코틀랜드 출신 부호나 명성을 얻은 학자, 유명인들이 자기 고향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계급간 적대 감정보다 '같은 스코틀랜드 수도의 시민'이란 문화 민족적 수평 동질감이 더 강했다.[65] 이런 측면에서 스코틀랜드 자치 정부 수립에 일관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반대했던 모습은 연합왕국의 2번째 왕국의 수도로서 행정적, 정치적 중심지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에든버러 시민들에게 '''오만하고 고압적이며 스코틀랜드는 스스로 뭔가 할 줄 모른다고 무시하는 잉글랜드인'''이란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를 또 완화한답시고 1988년 당시만 해도 스코틀랜드 사회에 아직 강한 영향력을 끼치던 스코틀랜드 국민교회 장로회 총회에서 성공회와 크나큰 역사적, 신학적, 교회 문화적 차이를 전혀 인식 못하고 연설하다 오히려 더 역풍만 맞았다. 정확한 내용은 녹취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참석했던 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회 자체는 가톨릭의 교구제를 그대로 유지했던 성공회와는 달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보편교회 구조 자체를 와장창 깨부수면서 극단적인 칼뱅주의 성향에 기반해 사도전승 같은 공교회적 교회 문화를 지극히 싫어하는데 이것도 모르고 "캔터버리 대주교에서 부터 내려오는 영국의 영적 일치감" 따위 소리를 했던 모양이다.
굳이 따지면 대처 시기에 피해를 입은 지역은 북잉글랜드지역과 스코틀랜드 중에서도 북잉글랜드와 접한 기존의 스코틀랜드 중에서도 남부 쪽은 피해를 봤다고 볼 수 있으나 대신 애버딘을 위시해서 스코틀랜드 내에서도 북해 유전과 관계가 깊은 지역이 새로이 부상했다.
근데 이 또한 주의 깊게 보면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애버딘은 크게 성장한 지금도 인구가 20만명이 안 되고, 그나마 그 인구 중 다수가 상술한 그대로 그 동네에 눌러 붙어 사는 게 아니라 주중에는 현지서 먹고 자고 일하고, 주말이나 휴가 때는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삶 자체가 유동적인 유전 노동자들이다.
반면 글래스고의 경우 대처리즘 이후 경제가 침체되며 인구가 크게 줄어든 지금도 60만에 가까운 굴지의 스코틀랜드 제1의 도시이고, 이 당시에는 1백만이 훌쩍 넘었던 영국 전체에서 둘째니 셋째니 버밍햄과 경쟁하던, 어디가서든 꿀리지 않는 대도시였다. 스코틀랜드 북부라는 지방 자체가 진짜 상술한 유전업 말고는 하이랜드 빼고 아무것도 없는, 인구 밀도 자체가 황량하게 낮은 동네인데 스코틀랜드 경제, 사회의 중심인 로우랜드가 엿먹은 대신 하이랜드가 컸다고 해서 "스코틀랜드는 대처리즘의 수혜자다"라는 주장이 성립하는 지 의문이다.
이런 식으로 스코틀랜드는 대처 정부 하에서 경제적으로 수혜받은 게 있어도 정치적, 문화적으로는 소외되었다. 대처 정부 시절 군소정당급의 영향력밖에 없었던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이때부터 노선을 본격적으로 좌향좌하며, 1988년 글래스고의 고번(Govan) 선거구에서 승리를 거둔 걸 기점으로 대처리즘에 분노한 스코틀랜드 노동 계급과 지역 정치 엘리트 양쪽의 지지를 끌어 모으며 결국 1990년대에 들어 지금의 유력 정당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정치란 건 단순히 경제적으로 뭔가 던져 주면 그게 곧 지지율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박탈을 하든, 혜택을 주든 그 과정과 방식에서 현지 주민들이 어떤 메시지를 받았냐가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대처는 상술한 그대로 전형적인 '고압적이고 거만하며 스코틀랜드를 불평만 하는 촌구석으로 취급하는 잉글랜드 엘리트'로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의 부상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연합 왕국 내의 상호 불신간에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드라이브를 건게 대처의 스코틀랜드 정책이었다. # 대처리즘이 영국 전역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은 후 비교도 안되게 더 큰 런던을 중심부로 한 남동부의 머릿수를 무기로 도저히 이런 조류에서 벗어날 기미가 안 보이니 아예 대놓고 국가 자체를 해체하겠다는 여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 영향이 살아 있는 여러 가지 커다란 결정과 정책들로 인해 대처 내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공과가 꾸준히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대처 이전의 영국 경제 체제는 이미 지속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이었으며, 대처는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 시스템은 대처 이후의 메이저, 블레어 총리가 물려받아 유용하게 써먹었다는 점, 나아가 전세계가 대처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했다는 점은 특기할만 하다.
브렉시트 선거에서 유럽연합을 탈퇴하기로 결정한 이후 다시 한 번 스코틀랜드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에서 EU 문제를 빌미로 다시 한 번 독립 투표를 시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2017년 발표되는 여론 조사들에서는 독립 반대 여론이 여전히 거센 것이 확인되고 있고, 2017년 영국 총선에서 SNP가 보수당에 밀려 의석 수가 크게 줄어든 상황이라 다소 진정되었다가 브렉시트 직전에 치뤄진 총선에서 다시 어느 정도 지지율이 회복한 상태이다.
역설적이게도 마가렛 대처가 스코틀랜드 독립의 가장 큰 방해물이 됐다는 해석도 있다. 마가렛 대처 시절 스코틀랜드의 산업 기반들을 해체하고 스코틀랜드의 재정과 경제 기반을 황폐화해 경제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연합왕국 중앙 재정과 잉글랜드계 자본에 예속시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독립 열망에 불을 붙인 것도 대처이지만, 동시에 스코틀랜드인들이 현실적으로 독립을 단념하게 만든 것도 대처라는 것이다.
4.2. 영국에서의 인기
계층과 이념에 따라서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긴 하지만 마거릿 대처 사망 이후의 일부 여론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대체적으로 공과에 대한 평가는 뚜렷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에 관한 뉴스
주로 대처의 인기는 잉글랜드(특히 남부)에서 상당히 높은 편이며, 특히 미들 잉글랜드로 불리는 해당 지역의 중산층들 사이에서는 매우 확고한 편이다. 하지만 대처의 조치로 광산이 대거 문을 닫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 등지에선 반감이 매우 높다. 대처 사후 국제적으로 애도의 조전이 쇄도하는 와중에서도 반감이 높은 지역에서는 대놓고 축제판을 벌일 정도.
한편으로는 일부 영국 보수당 의원들이 대처의 동상을 트라팔가 광장에 세우자고 건의했으나 '아서 웰즐리와 윈스턴 처칠도 얻지 못한 영예를 대처에게 줄 수 없다.'는 반발에 부딪친 일도 있었다.
한편 축구 칼럼니스트 존 듀어든 왈 "마거릿 대처는 축구의 적"이라고 비판했다[67] . 훌리건의 행태의 사회구조적인 원인은 제쳐둔 채 개인적 자질만을 문제삼았기 때문이라고.
영국인 60%가 대처의 장례식을 대규모로 치르는 것을 반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테스>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 감독인 켄 로치는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아예 장례식도 민영화해야 한다. 그것이 대처도 원하던 일이었을 것.'라며 비꼬기도 했다. 처음에 추정한 장례비용은 한화로 약 173억이었는데, 실제 들어간 비용은 그 1/3 정도인 61억 원이 소요되었다.관련 기사 이 중 보안경비가 비중이 컸던 이유는 장례기간 중 터진 보스턴 폭탄테러 사건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다만 상술되어 있듯이, 대처 본인도 자신의 장례는 검소하게 치를 것을 생전에 당부했기 때문에, 국장 혹은 민영화까지는 아니지만 영국 정부도 나름의 예를 갖추어 공식적 장례 형식[68] 으로 장례를 거행했다.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 언론인 가디언지에서는 대처가 캐머런을 제치고 영국 최악의 수상으로 꼽혔다는 기사를 올렸다. 역사 작가 협회에서 행한 조사인데 24%의 회원들이 대처를 최악으로 꼽았다고 한다(참고로 캐머런은 22%이며 3위인 체임벌린은 17%).
그러나 영국의 대학생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 일반인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 등에서 대처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6년 BBC가 역사학자 프랜시스 베케트에 의뢰한 "영국의 변화를 위한 비전을 얼마나 잘 실현했는가"에 대한 평가에서 클레멘트 애틀리와 함께 공동 1위에 올랐고, 2014년 런던대 연구팀이 영국 의회 하원의원 15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단독 1위에 올랐다.
5. 기타
- "오존층 보호를 위해 프레온 가스를 제한하자"는 몬트리올 의정서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대학 시절 그녀가 받은 이과 교육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칼 세이건이 그녀를 높게 평가한 이유.
- 하루에 3~4시간만 잠을 잔 것으로 유명하다. 노년에 대처가 앓은 치매의 원인으로 수면 부족을 꼽는 분석이 많다. 그 때문에 이 모습을 본 엘리자베스 여왕이 너무 걱정이 되어서 "이보시오, 대처 총리. 영국의 발전을 위해 온 힘을 쏟는 것은 좋지만,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지 않으면 나중에 큰 화를 입을까 걱정이 크오. 짐도 하루에 8시간 이상은 자는데, 대처 총리도 행복하게 오래 살려면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소이까?" 라고 충고까지 해야했다고.
- 영국 인문학에는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는데, 뛰어난 고대 그리스사 학자이면서 꽤 인기있는 저술가인 로빈 워터필드는 자신이 '대처 행정부가 고전학 같은 "쓸 데 없는" 학과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 결과' 교수직에서 짤려서 외국으로 나가야만 했다고 비꼬기도 했다.
- 지금도 회자되는 실책 중 하나로 70~74년, 그녀가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 중에 7~11세 아동의 우유 무상급식을 폐지한 것이 있다. 이 때문에 온갖 비난[69] 이 끊이지 않았으며 당시 붙은 별명은 '우유 도둑'(Milk snatcher).[70] 오죽했으면 '철의 여인' 본인이 후회하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비슷한 사례로 2010년에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내각도 다시 우유 도둑 논란에 휩쓸렸다.
- 포클랜드 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중남미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 공동 1위이다. 다른 한 명은 로널드 레이건. 제아무리 결과론적으로 포클랜드 전쟁은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을 붕괴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처는 갈티에리보다 더한 욕을 먹고 있다.
- 현대 영국의 노동 계급 및 노조들은, [71] 여전히 그녀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노동 계급 출신이자 working class hero(노동 계급의 영웅)라고 불리는 브릿팝 밴드 오아시스의 前 멤버이자 리더였던 노엘 갤러거는 대처를 "노동 계급을 없애버리려고 시도했고 '어느 정도 없애버린 인물'"이라고 평했다. 당연히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된 영국 대중음악계에서도 평판은 엄청 나쁘다. 이런 앙금은 대처리즘의 폐해를 직접 보고 자란 1990년대 브릿팝 세대부터 강하게 드러나는 편. 갤러거 형제부터 시작해 펄프의 자비스 코커[72] 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중산층 출신인 블러의 데이먼 알반(대처 지지자들이 사는 교외 지역에서 성장했는데, 본인은 자신과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알반은 좌파로 유명하다.)까지 브릿팝 밴드 90%가 대처를 싫어한다.
- 영국 북부의 오래된 탄광 도시 및 오래된 공업 도시들은 대처 시절 기반을 잃고 몰락했기 때문에[73] 현대 잉글랜드의 북부-남부간 지역감정을 이전보다도 강화했다고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빌리 엘리어트(뮤지컬)에서 작곡을 담당한 엘튼 존은 Merry Christmas Maggie Thatcher라는 넘버를 통해서 마가렛 대처를 극딜한다. 해당 가사가 We all celebrate today 'Cause it's one day closer to your death[74] 라는 신랄한 가사는 당시 대처에 대한 해당 지역의 민심을 짐작하게 만들어준다.
-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지만, 페미니즘 계열에서는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은 여권 신장의 가장 큰 요소이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에 있어 가장 큰 장애는 무엇보다 임신과 출산과 육아이다. 영국은 국영 탁아소가 정비되어 있어 여성이 안심하고 직장에 나갈 수 있었지만, 대처가 국영 탁아소 등을 폐지함에 따라 다시 여성은 육아에 대한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대처가 페미니즘을 반대했다는 것은 마가렛 대처의 자서전이나, 여성 보좌관의 글이나, 심지어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영화에서도 꾸준히 나타나는 부분이다. 위의 Section 28 같은 경우만 해도 그렇지만, 대처 본인은 오히려 가부장적 보수주의에 깊이 몸담고 있는 전형적인 보수 우파였고, 페미니즘을 비롯한 이 시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사회적 진보주의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질 리가 만무했다.
- 영국에서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은 민영화해야 한다"는 온라인 청원이 실시되자, 이 청원에 3만여 명 가량 참여했다고 한다. 대처 총리 연간에 있었던 일련의 강력한 민영화 정책들을 패러디한 것. # 심지어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는 '대처 사망'이란 가상 기사 가상의 타블로이드 신문 옆으로 샴페인과 폭죽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도 보인다. 대처 본인도 이미 생전 자신의 장례는 "절대 국장으로 하지 말고 검소하게 치러달라"고 유언까지 남겼다. 그리고 본래 전 총리급 인물은 예우에 따라 영국 공군이 공중 퍼레이드를 하는 것이 관례이나, 대처는 자신의 장례식 때 이런 번잡한 행사를 금해달라고 당부했었다. 이에 따라 실제로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국장 대신 '공식적인 장례식'을 통해 장례를 치렀다.
- 로열 블루(영국 왕실의 관복색)와 진주를 아주 좋아해서 애용했는데, 진주는 '신뢰'와 '경솔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하며 로열 블루는 영국 보수당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얻었다. 패션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편이라고 평가받았다.
- 심리학자들에게 영원히 고통받는 비극적인 운명이기도 하다(…). 지각심리학에서 시각적 착시를 다룰 때 종종 쓰이는데, 사람의 얼굴 사진에서 눈과 입을 상하로 뒤집은 사진을 흔히 "Thatcherized faces" 라고 부른다. 이 사진이 흥미로운 점은, 그냥 뒤집힌 사진을 보고 있으면 두 사진이 뭐가 다른지 그다지 느낌이 오지 않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서 보는 순간 둘 중 한 사진이 갑자기 혐짤로 변하는 착시가 일어난다! 사람의 얼굴을 뒤집어 놓아도 눈과 입 모양만 그대로 보존시켜 놓으면 이상한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착시.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러한 착시는 대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실제로 대처의 얼굴이 가장 만만한 사례로 학생들에게 소개되곤 한다(…).
- 대처 시대에 스코틀랜드 게일어 사용 인구가 감소했다는 지적도 있다.#[75]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마거릿 대처의 잘못인지 어떤지는 추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굳이 따지자면 게일어 사용자가 저렇게 줄어들 동안 대처는 뭐했냐는 식의 비난은 가능하겠지만. 대처 시대에는 UK 행정부 소속 스코틀랜드 주 장관 조지 영거[76] 의 게일어에 대한 개인적 선호 등에 힘입어 게일어 방송에 대한 자금 지원이 증가했다. 반면 오히려 블레어 시기에는 그에 대한 자금 지원이 감소했다고 나와있다. 게일어 사용인구 감소가 대처시기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1755년 이래 게일어 사용 인구는 줄곧 감소추세였다. 오히려 대처 시기보다 더 감소율이 높았던 시절이 훨씬 더 많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 아들인 마크 대처(1953~)가 1996년에 적도 기니의 쿠데타를 도와준 혐의로 인터폴에 현상수배되었다. 마크가 적도 기니의 쿠데타를 도와준 이유는 대의나 명분 이딴 건 없고 그냥 쿠데타에 성공하면 적도 기니에서 나오는 석유를 얻어 먹으려고 도와줬다. 물론 쿠데타는 실패하고 본인은 2004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잡혔는데 마가렛 대처는 아들 보석금을 마련하려고 제대로 똥줄탔다. 어찌어찌해서 아들 보석금을 물어주는데 성공하고 마크 대처는 집행유예를 받고 영국으로 추방되었다. 이외에도 마크 대처는 행보가 엄청 지저분한 인물로 자기 어머니가 총리라는 것을 이용해서 영국군 제식 무기들을 몰래 외부로 빼돌린 뒤 그걸 중동에 갖고 가서 밀판매를 일삼고 용병단을 결성해서 반정부 집단에게 돈받고 대신 전투를 치뤄주는 짓을 했다. 적도 기니의 쿠데타도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 대처는 잉글랜드 동부의 링컨셔에서 태어났으나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용인발음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특유의 내리까는 목소리 톤[77] 때문에 당대에도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대처의 임기 중 대처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비웃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 재임중이던 1986년 5월 방한했는데, 김포국제공항에 마중 나온 노신영 당시 국무총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심지어 꽃다발을 전달하러 온 소년에게도 똑같이 대했는데, 통상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인사 예절이 서양에선 사실상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극히 이례적인데다, 애초에 노신영 총리는 대처보다 5살이나 어렸다. 당시 영상
5.1. 사후 시위
장례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보스턴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해 영국 경찰이 보안 문제로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300여 명의 시위대가 대처의 운구 행렬이 지나갈 때 등을 돌리고 피켓을 든 채 시위한 것을 제외하면 큰 충돌 없이 차분하게 마무리되었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 북부 지방 및 노동자 계급 중심으로는 대처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북아일랜드 사람들의 분노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일랜드 단식투쟁 문서를 참고할 것) 잉글랜드 북부 뉴캐슬에서는 대처가 죽었다고 거리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행진을 했고, 리버풀에서는 마녀가 죽었다고 환호를 했다.
대처의 사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SNS 등지에서는 오즈의 마법사 영화판 삽입곡이었던 '''"Ding-Dong! The Witch Is Dead!"'''(딩동! 마녀가 죽었다!)라는 노래를 차트에 올리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실제로 1주일만에 52,605장을 판매하며 UK 차트 2위까지 올라갔으며[78] 아일랜드 차트에서는 1위를 기록. 영국 내부에서는 "BBC의 주간 음반 차트 프로그램에서 이 곡을 진짜로 틀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꽤 큰 설왕설래가 있었다. 결국 노래는 하이라이트 한 소절만 틀고, 보도국 기자를 호출해 왜 이 곡이 2위에 올랐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전세계적으로 대처의 죽음에 있어서 잘 죽었다고 반응한 지역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게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를 비롯한 잉글랜드 이외의 평소 잉글랜드와 감정이 좋지 않았던 영국의 지방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페루, 볼리비아 등 남미 국가들이다. 아일랜드는 대처 정권기에 북아일랜드 분쟁이 극도로 치달은 상태였고, 스코틀랜드는 대처가 추진한 석탄산업 구조조정에 따른 피해가 상당히 큰 지역이었으니 당연한 것. 글래스고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지역에서는 대처 장례식 날에 일부러 대놓고 잔치까지 벌였다.[79]
그리고 사실 영국 내에서도 잉글랜드가 남북 갈등이 워낙 심하다 보니, 그녀의 노조 탄압, 금융 산업 육성 정책 등에서 큰 피해를 봤던 잉글랜드 북부의 유수의 공업지대 출신 사람들은 풍악 행렬에 앞장서서 동참했다. 특히 리버풀 사람들은 항만 노동자 파업 강경 진압 건 및 힐스보로 참사 당시 대처가 경찰을 싸고 돌았던 점,[80] 때문에 대처를 싫어한다. 평소에도 대처는 축구를 사회의 악으로 표현하는 등 축구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자주 드러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강경 진압 때문에 영국 국민이 느끼는 경찰의 이미지도 크게 나빠져서 영국 경찰은 시민에게 친근한 경찰의 이미지를 회복하느라 많은 노력을 했는데, 대처로 인해 생겨난 경찰의 권위주의, 악감정이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대처로 인해 몰락한 하류층들의 분노가 쌓여가다가 결국 2011년 영국 폭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5.2. 이름의 발음
'Th'는 소위 말하는 번데기 발음(/θ/)으로, 음성학적으로는 무성 치마찰음이라고 한다. 1986년부터 시행된 외래어 표기법의 발음 표기 원칙을 그대로 따르면 ''''마거릿''' 힐다 로버츠 '''새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당시 외래어 표기법(정식 명칭 '로마자의 한글화 표기법')이 /θ/ 발음도 ㄷ으로 적도록 규정했기에 당시에는 '대처'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였고, 이 표기가 굳어져 현재까지도 '대처'가 표준 표기로 인정되고 있다. 다만 영국 영어상에서는 '마그릿 사처[ˈmɑːɡɹɪt ˈθatʃə(ɹ)\]'에 가깝다.
일본어에서는 'Th'를 ㅅ 계열로 인식, 'サッチャー(삿차-)'라고 표기한다.
6. 선거 이력
7. 대중매체에서
- 영국 소설가 수 타운젠트가 쓴 비밀일기 1, 2권을 보면 80년대 대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극심한 애증이 교차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대처 때문에 실직자가 됐다며 엄청나게 싫어한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는 마거릿 대처가 템플 기사단의 일원이었다는 설정을 지녔다.
> 잘 자라, 영국. 잘 자라, 홈 서비스. 그리고 승리의 브이 사인. 반갑다, <운명의 목소리>. 그리고 브이 포 벤데타."
- 대물 2부에서 등장하여 주인공 서혜림을 매우 상스러운 대사로 밀어주면서 당선하는데 돕게 한다.
- 007 유어 아이즈 온리 마지막 부분에서 본드가 임무를 완수한 뒤 수상관저로 무전이 연결되는데 여기서 싱크대 안에 있던 수화기를 집어들어 전화를 받는 여성이 아무리봐도 대처 판박이이다. 특히 “데니스와 저는 당신을 빨리 만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데 데니스는 실제 대처의 남편 이름이다. 그런데 이때 본드는 무전기 시계를 앵무새 앞에 걸어주고 멜리나와 검열삭제를 위해 자리를 떴는데 앵무새는 “키스해줘요”라고 반복하는 바람에 부끄러워한다
- 2012년에 마거릿 대처 전기 영화가 <철의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 대처 역을 맡은 배우는 현존 최고의 여배우라 불리는 메릴 스트립. 내면보다는 피상적인 겉모습만 부각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스트립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한편 스트립은 대처 사망 직후 낸 성명에서 "마거릿 대처는 정치에서 여성의 역할에 있어 선구자였다, 온갖 증오와 멸시를 견뎌내고, 부정부패 없이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유지했다. 대처는 전세계 여성들에게 공주님이 되는 것과는 또 다른 꿈, 즉 국가를 이끌 수 있다는 선택권을 줬다. 그러기에 그녀는 존경받을 만하다."고 칭찬한 후, "대처의 냉철한 재정 조치를 통해 영국의 가난한 자는 큰 피해를 입었고, 정부 개입 배제 정책에 의해 부자들만 배를 불렸다. 오직 파운드 스털링에 대한 집착으로 영국을 유럽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줬다는 견해가 있다."며 쓴소리 또한 잊지 않았다.#
- 워게임: 레드 드래곤에서는 포클랜드 전쟁 승리 후 중국에게 홍콩 조차 연장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고 덩샤오핑이 "우리가 홍콩에 걸어들어가 반나절 만에 접수할 수 있다"라는 협박을 보내자 이를 전면적인 무력 도발로 간주해 미온적이었던 영연방 국가들을 설득하여 홍콩에 커먼웰스 군을 대규모 증강했고, 이를 눈뜨고 당하지 않으려던 중국과 전쟁을 벌인다.[83] 참고로 덩샤오핑의 저 발언은 대처와의 홍콩 반환 협상 중 실제로 있었던 발언이다.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에서 여성 영국 총리가 캠페인 컷신에서 등장하는데, 1972년이 배경인 시대상 마거릿 대처가 모티브인 듯하다. 별 비중은 없고 폴란드에 소련군 핵미사일 사일로가 있다고 알려주는 정도. 한국어판 성우는 양정화.
-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킹스맨 요원인 해리 파트가 에그시에게 자신의 과거 임무 수행에 관한 이야기를 알려주는 장면에서 마가렛 대처 수상의 암살을 막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에그시는 "모든 사람이 고마워 하진 않았겠네요."라고 비꼬듯이 답변. 그리고 해리는 '정확히는 그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킹스맨의 활동이 모두 비밀로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 때문.
- 세인츠 로우 4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클론 공장을 보고는 무슨 장소냐고 묻자 아샤 오데카가 '타인에 대한 공감이 떨어지는 소시오패스 성향을 보이는 인물'을 복제하는 장소라고 하자 주인공은 '누구? 대처?'(...)라는 반응을 보인다.
- 레인보우 식스 시즈에서 SAS 소속 최고참 대원 마이크 베이커의 코드네임으로 쓰인다. 보수인 대처와 비슷하게 구식을 좋아하며 최신식 장비들을 싫어한다는 설정으로 사용하는 방독면과 방탄복, 소총도 모두 구식이다.
- 라이프 온 마스에서는 애니가 "여성들이 총리하는게 더 낫지 않겠냐"는 말을 하자 샘 타일러가 "언젠가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요"라고 대답한다(...)
- 셜록에서 몇 번 언급된다. 시즌 2 2화 '바스커빌의 사냥개들'에서는 바스커빌 연구소의 소장이 대처를 존경한다는 것을 추리해낸 셜록이 그것을 통해 연구소 기록 시스템의 비밀번호를 알아낸다. 시즌 4 1화 '6개의 대처'에서는 흉상으로 등장해 6개 모두 박살나고, 같은 에피소드에서 마이크로프트가 생전에 만나봤는데 거만한 인상이었다고 평한다. (거만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형한테도 거만해 보일 정도였냐는 셜록의 반응은 덤.
-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된다. 명확하게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아니고, 6권 시점에서 등장하는 영국 총리의 회상을 통해 취임 당시 코넬리우스 퍼지를 처음 만나면서 퍼지가 "당신 전임자는 반대파가 꾸민 속셈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창 밖으로 던져버리려고 했다"고 언급한다. 소설에서는 이 전임자나 작중 현재 총리나 둘 다 실명을 언급하지 않고 '영국 총리'라고만 하지만, 혼혈왕자의 배경인 1996년 당시 영국 총리는 마가렛 대처의 후임 총리인 존 메이저이기에 대처임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
- 더 크라운 시즌 4에서 등장하며, 배우는 질리언 앤더슨이 맡았다. 더 크라운에서 그려진 주요 수상들(윈스턴 처칠,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 해럴드 윌슨, 마거릿 대처) 중 가장 독특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첫 에피소드인 발모럴 테스트에서는 중산층 출신이라 왕실의 예법에 난색을 표하고 실수를 연발하지만[84] 이내 영국이 처한 현실에 대해 위기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태연자약하게 헤실거리기만 하며 여가와 유흥, 행사장에서 시간만 낭비하는 여왕과 왕실에 대한 경멸감을 느낀다. 어릴적부터 근면함과 성실한 노력의 가치를 중시하는 영국 중산층 노동윤리를 뼛속 깊이 체화한 대처로서는 왕실의 귀족적 생활이 나태와 안이함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것[85] . 그리고 런던으로 돌아와 왕실 인물들처럼 늙고 구태의연하며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귀족적 내각 인사들을 과감하게 내쳐버리면서 '철의 여인'임을 과시한다. 이후 대처의 강경한 행보에 대해 적을 많이 만들게 될거라며 에둘러 비판하는 여왕에게 찰스 맥케이의 시를 인용하며 "무언가를 해내려면 적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적이 없다면 투쟁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룬 것이 없는 겁쟁이에 불과하다."는 뉘앙스의 발언으로 응수하여 여왕을 침묵 시킨다. 초반에 어딘가 어설프고 헤매는 듯한 모습을 보여 왕실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던 것에 대해 자신이야말로 영국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인물임을 확인시키며 완벽하게 되갚아준 셈.
- 빌리 엘리어트는 마거릿 대처를 죽어라 까려고 만든 작품이다. 배경도 영국 북부 더럼이고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이다. 그렇지만 주 내용은 발레리노가 되고 싶은 소년의 이야기로 대처 시대의 혼란상이 담겨있다. 뮤지컬판에서는 위에서도 나왔듯이 아예 "메리 크리스마스 매기 대처, 당신 죽을 날이 하루 더 가까워졌단 걸 축하하네!"하고 부르는 노래가 있을 정도인데, 나중에 정말로 대처가 사망했을 때 이 노래를 부르며 파티를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 GTA 산 안드레아스에선 켄트 폴의 친구인 매커가 오디오 녹음 중에 자위행위를 하며, 이름을 외쳐댄다.[88] 매커가 또라이인데다 매드체스터 붐을 이끌었던 해피 먼데이즈의 숀 라이더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라는걸 생각하면, 인물의 똘끼를 강화하는 요소라 보는게 정확하다. 매드체스터의 중심지인 맨체스터는 대처 쇼크의 직격탄을 받은 동네기 때문.
8. 어록
정확히는 최영 장군의 예처럼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하니 본인의 말은 아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한 말이란 의견도 있지만 이 자료에 따르면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진 문장인 것 같다. 다만 청와대에서 대처의 죽음을 거론하며 추모한 글에서도 올라온 것이니 많은 사람들이 대처의 어록으로 여기는 것 같다."생각을 조심하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하라.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
You know, if you just set out to be liked, you would be prepared to compromise on anything, wouldn't you, at any time? And you would achieve nothing!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언제나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에서 따온 말이다. 그러나 대처는 공과를 떠나서 영국에 화합을 가져오지는 못했다.Where there is discord, may we bring harmony. Where there is error, may we bring truth. Where there is doubt, may we bring faith. And where there is despair, may we bring hope.
분열이 있는 곳엔 화합을, 오류가 있는 곳엔 진실을, 의심이 있는 곳엔 믿음을. 그리고 절망이 있는 곳엔 희망을.
이 부분은 사회 명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큰정부주의가 형성한 "사회보장제도"로서의 사회를 말한다. 대처가 수상이 되기 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모토를 걸고 최고의 사회보장제도를 시행한 영국이 낳은 문제적인 사회를 지칭한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 There are individual men and women, and there are families. And no government can do anything except through people, and people must look to themselves first. It's our duty to look after ourselves and then, also to look after our neighbour. People have got the entitlements too much in mind, without the obligations. There's no such thing as entitlement, unless someone has first met an obligation.
"사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남성과 여성, 개개인이 존재할 뿐이고 개별적인 가족 공동체가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정부란 국민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국민들은 먼저 스스로를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보고, 더 나아가 우리 이웃을 돌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의무는 생각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합니다. 의무를 먼저 다하지 않는다면, 권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패는 단지 더 현명하게 시작할 기회일 뿐이다"
'''"나는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 누구도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
I don't mind how much my ministers talk, as long as they do what I say.
"나는 장관들이 내가 말한 것을 수행하는 한 그들이 어떤 말을 쏟아내도 신경 쓰지 않는다."
We had to fight the enemy without in the Falklands and now we have to fight the enemy within, which is much more difficult but just as dangerous to liberty.
"우리는 포클랜드에서 외부의 적과 싸워야만 했다.(그러나) 우리는 항상 내부의 적을 알고 있어야 한다. 내부의 적은 더 싸우기 어렵고 자유에 더 큰 위험이 된다."
In politics, if you want anything said, ask a man; if you want anything done, ask a woman.
"정치에서 뭔가 말해야 한다면 남성에게 요구하라. 뭔가 이뤄져야 한다면 여성에게 요구하라."
1965년 6월 20일 National Union of Townswomen’s Guilds의 회원들에게 한 연설
그런데 다름 아닌 대처 스스로가 이 예상을 뒤집었다. 외무장관도 2007년 대처 생전에 토니 블레어 내각에서 마가렛 베켓(Margaret Beckett)이 외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예상이 뒤집혔다. 하지만 대처 생전은 물론 현재까지도 영국에서 여성 재무장관은 배출되지 않았다.No woman in my time will be Prime Minister or Chancellor or Foreign Secretary—not the top jobs. Anyway I wouldn't want to be Prime Minister. You have to give yourself 100%.
"내 생전에 여성 총리나 여성 재무장관, 여성 외무장관같은 고위직이 나올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총리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스스로에 100% 열중해야 한다."
1969년 10월 26일 그림자 교육부 대변인에 임명되었을 때의 Sunday Telegraph와의 인터뷰에서출처
"비전이 없는 사회의 인간은 틀림없이 망한다."
일반적으로 "I want my money back"(이제 내 돈을 돌려받길 원한다)로 알려져 있다.We are not asking for a penny piece of Community money for Britain. What we are asking is for a very large amount of our own money back, over and above what we contribute to the Community, which is covered by our receipts from the Community.
우리는 영국을 위해 유럽 공동체에 약간의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불하여 유럽 공동체에 기여한 아주 많은 돈을 돌려받기를 요구합니다.
1980년 더블린 정상회담에서 다른 유럽 정상들에게.
"오른손의 장바구니에[89]
가득 찬 것은 1974년 보수당 시절에 1파운드로 살 수 있었던 식료품입니다. 왼쪽은[90] 현재 노동당 정권에서 1파운드로 살 수 있는 식료품입니다. 만일 노동당이 다시 5년간 집권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1파운드로 쇼핑을 하려면 장바구니가 필요 없고 그저 작은 종이봉투 한 장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당신에게 식료품 가격에 대해 간섭하지 못하도록 합시다."
실제로 영어권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설득시켜 정치를 주도하는 것을 이르는 Conviction politics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에서 유래했다.영어 위키백과I am not a consensus politician. I'm a conviction politician.
"나는 여론 수렴형 정치인이 아닌 확신형 정치인이다."
I love argument, I love debate. I don’t expect anyone just to sit there and agree with me, that’s not their job.
"나는 논쟁도, 토론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냥 앉아서 나에게 동의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직업이 아니다."
1980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To those waiting with bated breath for that favourite media catchphrase, the U-turn, I have only one thing to say: You turn if you want to. The lady's not for turning.
"숨죽인 채로 그 좋아하는 언론 유행어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유턴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원한다면 여러분이 유턴하세요. 여인(나)은 유턴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대처는 마크의 구출 비용을 모두 자비로 부담했다.I must pay the £1,191. We can therefore say that no extra cost has fallen on the British taxpayer.
"1191파운드는 내가 내겠다. 그래야 납세자들에게 추가로 한 푼의 세금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 2월에 대처의 아들 마크가 파리-다카르 랠리에 참가했다가 아프리카 사막에서 실종되었을 때 구출 비용을 비서(private secretary)에게 듣자.
포클랜드 전쟁은 6월 11일에 아르헨티나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We fought to show that aggression does not pay and that the robber cannot be allowed to get away with his swag. We fought with the support of so many throughout the world: the Security Council, the Commonwealth, the European Community, and the United States. Yet we also fought alone – for we fought for our own sovereign territory.
"침략은 반드시 응징당하고 도둑은 훔친 물건을 가지고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싸워서 보여줬다. 우리는 전 세계 많은 이들 -안보리, 영연방, 유럽공동체, 미국- 의 지원을 얻어 싸웠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홀로 싸웠다."
Just supposing Alaska was invaded, now you've put all your people up there to retake it and someone suggested that a contact could come in ... you wouldn't do it.
"알래스카가 침략당해 전쟁을 벌인다면 당신은 모든 사람들을 그곳에 투입해 되찾으려 할텐데 누군가가 연락을 해서... 당신도 그렇게 하지는(협상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덩샤오핑과 대처의 발언은 2007년에야 공개되었다."There is nothing I could do to stop you, but the eyes of the world would now know what China is like."
"우리가 당신을 막지는 못하지만, 전 세계의 눈은 이제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1982년 영국과 중국의 홍콩 반환 협상에서 덩샤오핑이 '''"지금 당장이라도 중국 인민해방군이 홍콩에 상륙할 수 있다."'''라는 위협을 가하자.
There is no week, nor day, nor hour when tyranny may not enter upon this country if the people lose their supreme confidence in themselves and lose their roughness and spirit of defiance. Tyranny may always enter — there is no charm or bar against it. The only bar against it is a large resolute breed of men.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최고의 신념을 잃고 용기와 반항심을 잃으면 언제라도 전제 정치가 시작될 수 있다. 전제 정치는 거기에 반대할 매력이 없으면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확고함뿐이다."
"웅변일랑 남들이 하도록 떠넘기고 나는 행동만을 해 나가겠다."
그러나 대처는 이 발언 바로 다음 날 2차 투표 출마를 포기하고 총리직을 사퇴했다.I fight on, I fight to win
"나는 계속 싸울 것이다. 싸워서 이길 것이다."
Home is where you come to when you've got nothing better to do.
"가정은 더 이상 잘할 것이 없을 때 오는 곳이다."
Remember minister, even in diplomacy there is something called 'loyalty'.
"차관님, 외교에도 의리라는 것이 있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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