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컵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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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 Gedleyihlekisa Zuma
194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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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이자 전 대통령.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전 대표이다.
1942년 3월에 남아프리카 연방 콰줄루나탈 주 인칸들라에서 태어났다. 남아공 흑인 민족 중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줄루 족 출신으로,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은 초등학교 5년 정도밖에 받지 못했다.
1959년에 아프리카 민족회의에 가담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와 흑인 권리 신장을 위해 활동해왔으며, 평화 투쟁을 부르짖었던 넬슨 만델라와는 달리 무장 항쟁을 주도했다. 한때 공산당에 가입한 적도 있었다. 당연히 백인 정권 하에서 탄압받고 감옥을 들락날락했다.
2. 정치인으로서
오랫동안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해온 경력으로 인해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남아공 정계에선 상당한 두각을 나타냈던 정치인이었다. 1990년에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합법화된 이후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정당이 되었는데 제이컵 주마는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주요 인물로 등극했다. 1999년에 타보 음베키와 함께 대통령 선거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화려한 저항 활동과는 달리 정치인으로서 그는 무능하고 탐욕스러웠는데, 부정부패가 많았고 이로 인해 2005년에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2006년에 강간혐의로 한 번 기소가 된 적도 있었고 정계에서 축출당할 뻔했다. 만델라 대통령의 후임이자 코사족의 대표 인물로 줄루족인 주마와 척을 지던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주마를 대통령궁으로 불러 한화 2억 정도의 현금[1] 을 줄테니 정계은퇴를 하고 여생을 편히 보내라고 제안했지만 주마는 단칼에 거절했다. 강간 혐의도 일단 무죄 판결을 받아 정계 축출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사생활도 막장이었는데, 1942년생으로 아내가 셋이며 2번은 이혼했다. 그리고 2012년 4월 21일 6번째 결혼을 했다. 사생활은 개인의 영역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에 대해서 대하여 비난을 받자 "일부다처제는 줄루족의 전통인데 뭐가 문제냐? 멋대로 쳐들어와 남아공에 살던 흑인을 핍박하고 지들의 전통을 강요한 백인들을 따르라는 거냐?"며 비난하던 자들을 역공했다. [2]
제이컵 주마는 넬슨 만델라가 백인들의 경제 지배를 인정하는 멍청한 짓을 해버려서 대다수 흑인들의 삶이 어려워졌다고 비난하면서 백인들의 기득권과 경제권을 흑인이 되찾겠다는 발언을 하는 등 백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주마는 만델라 정권 시절부터 백인들을 추방하고 경제력을 압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심지어 대놓고 'Shoot the boer'라는 노래[3] 를 부르며 젊은 세대들을 호도하던 ANC 청년부 총재 줄리어스 말레마[4] 를 중용하며 백인들과는 척을 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덕에 흑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오고 있었다. 사생활 관련해서 앙케이트를 벌였더니 '능력 좋으면 그럴 수도 있지 뭘', '백인들의 잣대에 좌우하지 말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을 만큼 주마의 지지도가 엄청났었다.
주마의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그가 남아공 흑인 민족 중 가장 인구가 많은 줄루 족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만델라와 그 후임이던 타보 음베키 대통령은 코사 족이었고 줄루 족과 코사 족은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못하여 줄루 족에서 주마를 더더욱 밀어주었다.[5]
남아공은 대통령제 국가이지만 대통령이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총리 뽑히듯이 뽑힌다. 즉 대통령은 하원의원이어야 하며, 총선이 치러지면 각 하원의원이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자에게 투표해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대체로 다수당의 당수가 후보로 나오고 대통령이 된다. 1994년 이후 흑인정부가 들어서서 만델라-음베키-모틀란테-주마 의 네 대통령을 맞이하였는데 코사족인 만델라야 워낙 네임드에 남아공 자체보다 만델라가 더 명성이 높아 그렇다 쳐도 음베키 같은 경우는 국민당 정부시절 막장이 된 서구권과의 외교관계 회복을 외교정책의 제일 중점으로 뒀고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원래 있던 백인중심 산업을 키워준 것으로, 그렇기에 흑인들, 특히 줄루족의 불만이 엄청나게 컸다. 주마는 이 점을 잘 이용하여, 2007년 ANC 전당대회에서 승리해 당수가 된 뒤 음베키의 비리를 물고 늘어졌고 결국 음베키를 2008년 9월에 사임시키는데 성공한다. 그 후 당시 부통령이었던 카틀레코 모틀란테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대통령직을 맡았고[6] 2009년 4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제이컵 주마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모틀란테는 다시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3. 대통령으로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아공이 짐바브웨 꼴 나는 거 아닌가 우려도 있긴 했지만, 주마는 부패하기는 했어도 바보는 아니라 빤히 코 앞에서 짐바브웨가 당하는 꼴을 다 보고서 똑같은 일을 남아공에서 저지를 정도는 당연히 아니고 오히려 집권 뒤에 상당히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취했다. 그러면서 별다른 정책 수정 없이 빈부격차 문제에 눈을 감으면서 현지에선 완전히 맛이 갔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2009년에 취임하자마자 원래 '''경찰이 범죄자에게 먼저 무력을 행사 못하는 법을 개정'''해서 경찰특공대를 성장시켜 잠깐이나마 범죄자들을 때려잡아 범죄율을 낮췄다. 원래 이 법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흑인에 대한 경찰폭력이 심각했어서 인권을 이유로 바뀌었지만 역으로 경찰들이 범죄자들에게 당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바로 다음 해에 남아공 월드컵이 있는데 남아공의 범죄가 전혀 해결될 기미가 없어서 개정한 것이다. 어쨌든 일시적으로 치안을 개선하는 데 성공하여 월드컵 자체도 상당히 성공적으로 치렀고 2010년 12월에 당당히 '''BRICS''' 에 가입했고 또 동년 11월 에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G20 회의 참석해 이명박 전 대통령과 만났고 2년 뒤 3월에 열린 핵안전보장 회의때 서울을 재 방문해 이 대통령과 회담하는 등[7] 아프리카의 대표국으로 남아공이 성장했었다.
하지만 2012년 8월 남아공 노스웨스트 주에 있는 광업도시 마리카나 에서 벌어진 광부들의 파업에 대해 '''총을 동반'''한 무력으로 진압하여 상당한 사상자가 났고 그 후 혼란을 염려한 외국 자본들이 투자를 빼 어려움이 있었다. 더군다나 2010년 월드컵을 유치하는데 생긴 빚이 더욱 늘어나 재정에 부담이 됐고 흑인들을 경제요직에 세우는 BEE 정책에 힘을 실어줘도 오히려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전환되었다.[8]
더불어 사회 전반적으로 무능력하고 부패한 낙하산 인사 흑인들이 주도하는 식 으로 돌아가 갈수록 흉흉해졌다. 마리카나 이후 실업률도 30%대로 올라가서 주마의 지지율은 최악으로 떨어졌다. 또 2015년 초반부에 이민자에 대한 폭동이 일어나 타 아프리카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이 남아공 국적의 흑인들에게 공격당했고[9] 후에 대학교 학비 관련해 전국적인 시위가 있었을 정도로 사회가 뒤숭숭해 졌다.
그래도 제1야당인 DA(민주동맹)가 주로 백인이나 컬러드(흑-백 혼혈)층의 지지를 받는 정당인 데다가[10] 다른 야당을 보면 인타카 자유당은 콰줄루나탈주 지역정당인 데다가 한때 원내 3당을 차지했을 때도 있었지만 주마가 줄루족 출신인지라 2000년대 중반부터 세가 급속히 악화된 상황이고, 경제자유투사당은 아예 백인 토지 무상몰수를 주장하는 당인지라 집권하면 흑백갈등이 엄청나게 날 걸로 예상되고(그래도 젊은 흑인 실업자층에서의 지지율은 높았다), 그 이외 정당은 아예 듣보잡 of 듣보잡인지라 다른 대안도 마땅치 않았으며, 거기에다가 30대 이상의 흑인층에서는 ANC에 대해 동질감이 크다는 점도 한 몫 해서 2014년 총선에서도 ANC가 예상보다 조금 높은 득표율로 집권했다. 하지만 역대 총선 사상 최저 득표율로 위상이 다소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2014년 4월 주마는 재선에 성공하지만 야당인 DA와 ANC의 극좌세력인 줄리어스 말레마가 탈당해 만든 EFF가 상당히 위협적인 활약을 보이면서 주마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또 주마의 퇴임 후 사저인 은칸들라에 관련해 여러 비리와 국고를 쓸데없이 낭비한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ANC의 독주에 빨간 불이 켜졌다.
2016년 11월 3일에는 인도계 재벌인 굽타 가문과의 유착 및 부정부패 논란에 휩쓸렸다. 당시 한국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처럼 예전부터 가까운 사이에서 주마가 정권을 잡자 굽타 가문을 비호해 주고 국정을 상당수 맡긴 국정농단 사태이다. 원래부터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던 이야기였는데 Public Protector[11] 인 툴리 마돈셀라가 언론에 제출한 '''State Capture'''(인질이 된 국가)라는 230페이지 짜리 보고서에 그동안의 국정농단 및 주마-굽타 간의 부정부패가 디테일 하게 기록되어 커다란 파장이 있었다. 이 때 야당을 비롯한 반정부 세력과 국민들이 현 대통령에 대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현 정부는 최루탄, 고무탄, 물대포 등을 이용하여 반정부 시위를 폭력적으로 제압했다. 주마 대통령은 이를 부인했다.#
저런 이유로 인해 임기동안 수많은 탄핵 시도가 있었다. 임기 9년동안 무려 '''9번'''의 탄핵시도가 있었는데, 아프리카 민족 회의가 과반을 점하는 남아공 하원의 특성상 한 번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2017년 12월 집권당 ANC의 전당대회가 열렸고 그 전날 주마는 10년 임기의 당대표직을 마쳤다. 10년 만에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부통령인 시릴 라마포사가 라이벌 들라미니-주마[12] 를 눌러 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만델라 이후의 남아공 정치판을 보면 별 다른 이변이 없는 이상 라마포사가 2019년에 예정된 대선에서 이겨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마가 2009년 이래 무지막지한 삽질을 해서 GDP가 8천불 대 에서 5천불 대로 떨어진 것 부터 시작해 사회경제적으로 남아공이 상당히 불안한 상황에 빠져있다. 더군다나 그 틈을 타 야당인 민주동맹(Democratic Alliances, DA)과 경제자유투사당(Economic Freedom Fighters, EFF)이 약진해 심지어 제1도시인 요하네스버그의 시장직을 2016년 지방선거에서 DA가 차지한 상황이라 여당 ANC의 미래가 예전처럼 순탄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4. 대통령 사임
2017년 12월 ANC의 대표로 라마포사 부통령이 선출되었다. 주마 대통령은 자신을 뒷받침해주던 강력한 여당을 잃게 되어 바로 레임덕이 오는 건 자명했다. 이제 당대표도 바뀌었겠다, 주마를 더 이상 안고 갈 필요도 없고 오히려 ANC의 큰 짐이었기에 주마에게 당장 하야를 요구했고, 하야하지 않으면 2월 15일 탄핵투표를 의회에 부칠 것이라 공표했다. 주마는 당연히 거부했고 당수이자 부통령인 라마포사가 2월 10일부터 12일까지 대통령궁인 유니언 빌딩에서 주마와 면담했지만 얻은 건 없었다. 주마는 2월 14일 남아공 시간 아침 10시에 2018년 6월에 하야하겠다고 대국민 선언을 했지만 ANC는 "'''당장 내려오지 않으면 우리가 끌어내겠다'''"고 반응해 결국 12시간이 지난 밤 10시 주마는 하야를 발표했다. 10년 전 정적 음베키에게 한 것처럼 본인도 하야당하고 말았다.[13]
주마가 하야한 뒤 부통령인 시릴 라마포사가 의회에 의해 2018년 2월15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날 약식으로 취임식을 치룬 뒤 2월 16일에 원래 2월 8일에 예정되어 있던 대통령 담화[14] 를 하는 것 으로 첫 행보를 시작한다. 사임한 대통령 뒤에 선출된 대통령은 전 대통령의 잔여 임기만큼만 수행하기 때문에 라마포사 대통령의 임기는 2019년 5월까지이다. 별다른 이변이 없는 이상 ANC가 2019년 총선에서 이겨 라마포사가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될 것이다. 그리고 2019년에 라마포사가 대통령 으로 선출 된 후 헌법에 의해 2024년 총선도 ANC가 승리하면 라마포사의 ANC 당수 임기는 2027년 까지기에 다시 대통령 으로 지명받을 것 이고 그렇게 된다면 2029년 까지 '''총 11년''' 동안 대통령에 재임 할 수 있다.
현재 남아공은 남아공판 적폐청산이 진행되고 있다. 주마가 하야한 2018년 2월 14일 오전에 주마와 연관된 굽타 가문 친인척 들이 남아공의 정보기관인 호크스'''HAWKS''' 에게 체포됐고. 현재는 주마의 거취문제 및 내각 개혁, 그리고 경제재건이 주 화두이다.[15]
이런 상황 속에서 주마 전 대통령은 2019년 1월에 남아공 전통가요 가수로 데뷔를 시도하여 논란을 빚고 있다.
게다가 2020년 2월에 비리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이다.#
[1] 2000년대 초중반 남아공 물가에서는 '''골프 에스테이트 안의 초호화 맨션 두 채를 사고 남을 돈'''이다.[2] 넬슨 만델라도 일부다처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제이컵의 항변대로 일부다처제는 남아프리카 부족의 전통인 것은 사실이다.[3] 해석하면 ''보어인들과 백인 농장주를 쏴죽이자''는 뜻인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흑인 급진세력에서 많이 불린 노래이다. 유튜브에서 들어보면 가사가 꽤나 살벌하다.[4] ANC 청년부 총재직을 맡았고 극단적인 좌파 및 아프리카 민족주의 성향을 띄던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백인에 대한 테러 모의와 예전의 막장언행 및 부정부패 혐의로 ANC에서 무기한 활동정지를 먹어 탈당한 뒤 EFF라는 극좌 아프리카 민족주의 성향의 정당을 2013년에 창당해 세를 키우고 있다.[5] 2014년 총선에서 ANC가 60%대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타 지역에서 ANC 지지율이 상당폭 하락한 데 반해, 콰줄루나탈주에서 지지가 굳건했기 때문이다.[6] 남아공에서는 대통령의 사임으로 선거가 치러져 선출된 대통령은 전 대통령의 잔여 임기만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7] 이명박 대통령 과는 총 '''3번''' 만났다. 2010년 G20, 2011년 남아공 더반 에서 열린 IOC 총회 (이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이 유치되었다.), 2012년 핵안전보장회의.[8] 이 BEE는 상당한 논란거리인데 일단 BEE '''(Black Economic Empowerment)''' 는 사회경제 인프라 에서 '''흑인, 특히 여자들을 우대''' 하고 백인, 그중에 남자들을 '''선천적 부유층''' 으로 봐 제일 나중으로 둔 정책으로 주마 이전 음베키 시절 시작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인종과 성별로 차별''' 두는 건 방향만 달랐지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았고''' 인종때문에 능력있는 사람이 다른 인종에게 치여 못나오는 것도 같은데다 일단 '''극소수의 흑인만 이득을 보게되고 나머지 흑인들은 영향없어''' 효율성에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되는 정책이다.[9] '''일자리 뺏어간다''' 는 '''제노포비아''' 폭동이었다. 경제가 개판에 젊은층 5명중 2명이 실업자고 나머지도 저임금 직종에 있는 경우가 절대다수라 국민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10] 물론 당 내 주류는 국민당 정부 시절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주장했던 민주당계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국민당계는 민주동맹 창당 이후 얼마 가지 못하고 갈라섰다가 결국 ANC로 통합되었다) 원래 민주동맹자체가 신국민당과 민주당과의 빅딜로 탄생한 정당이기도 하고 민주동맹 지지자들의 상당수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시행한 시절에 국민당을 지지했었었던지라 흑인들 사이에서 민주동맹의 지지율은 극히 낮다. 그나마 2010년대부터는 흑인 당대표가 선출되고 지지세를 넓혀서 대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흑인 중산층들의 지지를 얻는 편. 이러다 보니 남아공 선거 결과를 보면 같은 도시 안에서 어느 동네는 ANC가 85%를 득표하고 어느 동네에서는 DA가 85%를 득표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11] 남아공에 있는 특유의 직책이자 헌법 민주주의 수호 및 관련 사건을 조사하고 기소하는 역할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헌법재판소 검사'''.[12] 여성 정치인이고 제이컵 주마 대통령의 '''전처'''. 이혼했지만 흑인 사회와 정계에서 주마의 차지하는 위상이 커서 유지했는데 주마가 집권하면서 벌인 병크로 인해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13] 94년 이후 남아공의 대통령 중 정해진 임기를 다 채우고 나간 인물은 '''넬슨 만델라''' 밖에 없다. 만델라는 이미 고령이었어서 딱 첫 임기인 5년만 했다가 재선에 나가지 않고 정계은퇴를 했다. 후계자인 타보 음베키는 2008년 9월 다음 대선을 7개월 앞둔 상황에서 하야당했고 뒤를 이은 카틀레코 모틀란테는 대통령 권한대행과 다름없어 딱 7개월만 하다 간데다 주마도 역시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하야했다.[14] 주마가 할 예정이었지만 정치적 불안정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15] 주마가 지탄받은 이유 중 하나가 개각을 마치 옷 바꿔입듯 했던 것도 있다. 특히 재무부 장관을 자기 입맛대로 바꿔 주마-굽타 비리에 힘을 실었고 아예 국민들의 존경을 받던 프라빈 고단 (Pravin Ghodan) 장관을 해임한 뒤 주마와 굽타가문에 순종적인 말루시 기가바 (Malusi Gigaba) 를 앉혔고 전국적인 원성이 있었는데다 심지어 환율도 '''1달러당 15랜드 이상'''으로 치솟는등 안팎으로 난리가 났었다. 일단 기가바 장관은 모두 입을 모아 말하는 라마포사 체제에서 제일 처음으로 교체될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