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수이

 

'''안나 수이
Anna Sui'''

[image]
'''▲ 브랜드 로고'''
'''출생'''
1955년 8월 4일 (69세)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국적'''
미국 [image]
'''직업'''
패션 디자이너
'''가족'''
아버지 폴 수이, 어머니 그레이스 수이 팡
'''학력'''
파슨스 디자인 스쿨
'''브랜드'''
안나 수이
안나수이 공식 인스타그램
안나수이 일본 공식 인스타그램
안나수이 태국 인스타그램
안나수이 코스메틱 공식 인스타그램
안나수이 코스메틱 코리아
안나수이 코스메틱 일본
안나수이 코스메틱 미국
안나수이 코스메틱 홍콩
안나수이 코스메틱 인도네시아
안나수이 코스메틱 타이완
안나 수이 부띠끄
안나수이 주얼리 코리아
안나수이 미니
안나수이 액티브
1. 개요
2. 상세
3. 생애
3.1. 패션 디자이너로서 시작
3.2. 로큰롤(Rock’n’roll)과 그런지(Grunge)
3.3. 보랏빛 판타지와 절충주의적 경향
3.4. 현재의 안나 수이
4. 기타

[clearfix]

1. 개요


'''최근 디자인 (2019년)'''

'''뉴욕 패션의 여자 마법사. 그녀는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 우먼즈 웨어 데일리(WWD)

중국계 미국인 패션 디자이너.

2. 상세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The New School of Design)을 졸업하고, 뉴욕의 모던한 패션 분위기 속에서 로맨티시즘그런지 룩을 창출해 낸 디자이너이다. 1991년 뉴욕 컬렉션을 통해 데뷔한 이래 20주년을 맞이한 안나 수이는 자신의 패션쇼를 록 콘서트라 부르며 패션쇼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제공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이기적인 소비자를 생각하며 아름답고 현실적인 옷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 1993년 미국 패션 디자이너협회(CFDA)가 수여하는 페리 엘리스 뉴 탤런트 상을 수상하였으며, 2012년 현재 전세계 200여 개가 넘는 매장에서 그녀의 옷과 화장품, 향수, 액세서리와 주얼리가 판매되고 있다. 그녀는 에스닉빈티지, 로맨틱과 판타지의 감성을 복고도 재창조도 아닌, 어느 시대에나 존재할 수 있는 현재적 아름다움으로 풀어내고 있는, 시대적 한계가 없는 예술가로 유명하다.

3. 생애



3.1. 패션 디자이너로서 시작


1955년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출생한 안나 수이는 유년시절부터 인형들을 스타일링하고 자투리 천을 이용해 인형 옷과 소품을 만드는 등 패션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소녀였다. 4살 무렵 이미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선언했던 이 소녀는 학창시절 자신의 옷을 스스로 만들거나 고쳐 입으면서 교내 베스트 드레서로 뽑히기도 하였고, 틈틈이 잡지를 스크랩해 만든 그녀의 자료집 ‘지니어스 파일(genius files)’은 그녀의 소중한 영감의 원천으로 오늘날까지 작업에 사용되고 있다.
고교를 졸업한 안나 수이는, 어느 날 <라이프(Life)>라는 잡지에서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졸업한 두 여성이 파리에 부티크를 내게 되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디자이너를 꿈꾸었지만 그 실현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수이는 기사를 통해 답을 얻었고, 1972년 파슨스에 진학하였다. 학창시절 그녀는 언더그라운드 펑크(punk)에 심취하였으며, 또한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조력자인 스티븐 마이젤(Steven Meisel)을 만나게 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패션 사진가 중 한 사람인 스티븐 마이젤과의 우정은 파슨스 재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파슨스를 졸업한 안나 수이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1년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여러 회사를 거치며 스포츠웨어, 수영복, 니트에 이르는 다양한 디자인을 경험하였다. 수년간의 직장 생활을 통해 여러 디자인 과정을 배운 안나 수이는 1980년, 부티크 쇼를 통해 여섯 벌의 옷을 발표하였다. 발표된 옷들은 곧바로 메이시스(macy’s) 백화점에서 주문을 받기에 이르렀고, 뉴욕 타임즈에 관련 광고가 실리면서 마침내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수이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의 한 코너에서 사업을 시작하였고, 메이시스와 블루밍데일 등을 통해 디자인을 판매하였다. 1981년 시작 이래 10여 년간 사업을 지속하면서, 한편으로 그녀는 스티븐 마이젤의 프리랜서 디자이너이자 스타일리스트 활동 또한 병행하며 꾸준히 디자인 실력을 쌓았다.
'''안나 수이의 베이비 돌 드레스'''
패션계의 친구들이 런웨이 쇼 개최에 대해 계속해서 용기를 북돋아주었지만 망설이고 있던 그녀는, 1990년 가을, 스티븐 마이젤과 함께 패션쇼를 보기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수이는 장 폴 고티에의 쇼를 보러 가던 길에, 마돈나를 픽업하기 위해 호텔에 들르게 된다. 바로 그날 마돈나가 자신에게 전달된 수많은 최상급의 옷들 중에서 자신의 검정색 베이비 돌 드레스를 선택하여 입은 것을 본 수이는 처음으로 자신만의 런웨이 컬렉션을 개최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그녀는 사무실을 7번가로 옮겨 확장하고, 1991년 마침내 뉴욕 컬렉션에 참가하였으며, 그때부터 그녀의 또 다른 성공이 시작되었다.

3.2. 로큰롤(Rock’n’roll)과 그런지(Grunge)


'''마크 제이콥스와 함께한 그런지 룩(grunge look)'''
최신 팝 음악과 스트리트 문화의 열광자였던 안나 수이는 90년대 초 마크 제이콥스와 함께 그런지 룩이 하이 패션으로 흡수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음악에 매우 빠져있었고 음악은 그녀의 가장 중요한 뮤즈였다. 데뷔 초 수이의 모든 컬렉션의 영감은 로큰롤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이는 90년대의 그런지 정신을 압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1990년대 초 그녀가 추구했던 그런지 패션은 본래 시애틀을 중심으로 하는 동명의 음악 장르인 그런지 록(grunge rock)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것은 기타음이 강렬한 시끄러운 록 음악의 한 장르로 크래쉬, 너바나, 스매싱 펌킨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등이 대표적인 밴드들이다. 그런지 패션은 그런지 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음악에 대한 재해석의 일환으로 깔끔하지 못한 헌 옷 같은 옷, 구김이 많은 캐주얼한 옷을 입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1980년대의 여피들과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반문화적 의미가 담겼다. 또한 틴에이저[1] 그룹을 중심으로 시작된 패션 경향이 MTV의 대대적인 록 음악 홍보에 힘입어 패션의 주류로 빠르게 흡수되면서, 1990년대 초의 주요한 패션 유행이 되었다. 그룹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과 그의 아내 코트니 러브는 각각 남성과 여성 그런지 룩의 대표적 아이콘이었다. 안나 수이와 친한 친구 사이였던 스매싱 펌킨스의 기타리스트 제임스 이하는 1995년 그녀의 가을/겨울 컬렉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에 등장하여 그런지 정신을 표현하였고, 코트니 러브 또한 수이의 베이비 돌 드레스를 즐겨 입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지의 포인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손에 잡히는 옷을 막 입은 듯 헝클어지게 입는 것으로, 단정하지 않으며, 서로 어울리지 않는 옷들의 레이어링으로 만들어진다. 안나 수이의 첫 번째 런웨이 컬렉션은 노스탤지어에 대한 동경과 유년시절의 자전적 추억을 반영한 그런지 무드의 히피 시크(Hippie Chic) 룩으로 구성되었다. 이 컬렉션에서는 격자무늬 패턴의 수트, 비닐 소재 코트와 재킷, 점퍼 스커트, 하운스투스 패턴의 마이크로 반바지, 미니 킬트와 미니 박스 플리츠 스커트 등이 반스타킹과 가죽 로퍼, 발목 위로 올라오는 발토시 등과 함께 매치되었다. 수이의 초기 프레젠테이션부터 꾸준히 모델로 서며 사적으로도 막역한 사이를 유지했던 당대의 톱 모델들, 린다 에반젤리스타, 나오미 캠벨, 크리스티 털링턴 등은 안나 수이를 통해 엉뚱하고 기발한 스쿨걸로, 때로는 세련된 그런지 걸로 스타일링 되었다.
그러나 그런지 패션은 25세 이상의 여성 대부분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고 비현실적이라는 혹평과 함께 90년대 초 짧은 유행을 뒤로 하고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음악과 젊은이의 문화가 패션에 미치는 영향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 그런지는 안나 수이의 개인적 취향과도 맞아떨어지며 그녀를 하이 패션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시켰고, 뉴욕 패션계에 안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3.3. 보랏빛 판타지와 절충주의적 경향


1997년 안나 수이의 봄/여름 컬렉션이 끝난 직후 <우먼즈 웨어 데일리(WWD)>는 “뉴욕 패션의 여자 마법사. 그녀는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평한 바 있다.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또한 “오트쿠뛰르 스타일과 최신 스타일의 절묘한 조화”라고 극찬하였다. 패션계 일부는 그녀의 성공을 ‘보라색’으로 패션 피플들을 유혹한 것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녀는 그녀의 옷과 화장품 패키지, 광고 등에 보라색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패션에는 어떠한 한 가지 색으로만 국한할 수 없는 다양한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안나 수이는 보라색과 더불어 검정색을 사랑했는데, 검정색 레이스와 시폰 소재로 장식한 그녀의 침대나, 검정 라커를 칠한 그녀의 드레스 룸 등은 그녀의 몽환적 성향을 대변한다. 앞서 언급한 수이의 전설 속의 공주, 장미와 나비 모티프, 이국적이며 에스닉한 프린트 패턴 등은 그녀의 패션을 더욱 낭만적이고 환상적으로 만들어주는 오브제들이다. 유럽의 분위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런던 스타일, 특히 웨스트엔드 중심가의 번화한 카나비(carnaby) 스트리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것은 종종 컬러와 패턴, 텍스처와 소재가 복잡하게 뒤섞인 스타일로 표현되었으며 모두 엉뚱하고 기발한 소녀적 상상과 판타지를 반영한 것들이었다.
안나 수이의 특이성은 패션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그녀의 디자인에 잘 조합하고 엮어내는 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나 수이 룩의 비결은 개별적인 의상 그 자체보다 수이가 자신의 의상을 서로 매치시키는 절충적인 방식에 있다는 것이다. 패션지 <아이디(i-D)>의 창간인 테리 존스(Terry Jones)는 그녀의 디자인을 1960년대 포르토벨로[2]로 대표되는 교외풍의 감성과 다운타운의 로커, 비보이들의 음악과 대중문화를 아우르는 하나의 것이라 이야기한 바 있다.

3.4. 현재의 안나 수이


안나 수이는 현재 뉴욕, LA, 타이완, 홍콩, 상하이, 도쿄, 오사카, 서울 등 30여 개의 나라에 50개의 부티크와 69개의 액세서리 단독 매장을 가지고 있으며, 화장품과 향수뿐 아니라 데님과 스포츠웨어, 신발과 액세서리 라인에 이르기까지 200여 개가 넘는 매장을 운영하며 토털 패션 브랜드로의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 기업 이세탄(Isetan)과의 라이선스 체결을 통해 일본에서 안나 수이 컬렉션의 분배와 유통을 보장받은 안나 수이는 액세서리에 대한 서브 라이선스권 또한 획득하였으며, 독일의 기업 Wella(현재는 P&G)는 안나 수이의 뷰티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장미 모티프가 새겨진 검정색 용기에 담겨진 그녀의 키치한 화장품과 꾸준히 인기 있는 13개의 향수들은 수이의 독특한 영혼과 키치한 유머 감각과 함께 그녀를 유명한 디자이너 중 한 명이자 사업가로 만들어주었다.
[image]
'''2005년 삼성 휴대폰과의 콜라보레이션'''
'''2006년 안나 수이 바비'''
'''2009년 대형할인점 타겟과의 콜라보레이션'''
2005년 삼성 휴대폰과의 콜라보레이션, 2006년 안나 수이 바비(Anna Sui Boho Barbie) 한정판 출시, 2009년 미국의 대형할인점 타겟(Target)과의 콜라보레이션 등 그녀는 디자이너로서 계속해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2010년에는 그녀의 패션 철학과 그간의 컬렉션을 담은 20주년 기념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4. 기타


  • 우리나라에서는 거울로 유명하다. 특히 학생들이 많이 쓰는데 대부분 짝퉁이다. 영화 은교에서 김고은이 쓰는 거울이 안나 수이 거울이다.

  • 안나 수이의 명성과 그녀의 디자이너 브랜드와 달리 글로벌한 코스메틱 업체와의 라이센스 사업으로 나오는 향수 및 뷰티 제품은 다른 명품 브랜드들과 달리 가격대가 매우 낮다. 이를테면 세계 최고의 럭셔리로 꼽히는 불가리의 하이 쥬얼리와 동네 향수 전문점에서도 흔하게 팔리는 불가리 향수를 생각하면 될 듯.


[1] 13세에서 19세 사이의 소년과 소녀를 이르는 말.[2] 파나마 동북쪽 카리브해 연안의 아름다운 항구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