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칸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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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27대 천황. 케이타이 덴노의 아들로 휘는 마가리노 오오에(勾大兄)이다.
2. 행적
일본서기에 따르면, 선왕인 케이타이 덴노가 재위 25년('''531''') 2월 7일에 죽었다.[7]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장남 마가리노 오호에(勾大兄)를 덴노로 삼았는데 이가 바로 안칸 덴노이다. 문제는, 그 뒤로 안칸 덴노 원년('''534''') 1월에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까지 2년 10개월간의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이나 『원흥사가람연기(元興寺伽藍緣起)』 등의 문헌에서는 안칸 덴노의 이복동생 29대 긴메이 덴노의 즉위년이 바로 신해년, 즉 531년이라고 기록했는데,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안칸 덴노와 그 동생 28대 센카 덴노는 덴노였던 적이 없는 셈이 된다.[8] 또 이를 근거로 케이타이 덴노 사후 안칸, 센카 덴노를 지지하는 오와리노 메노코히메(尾張目子媛) 세력과 긴메이 덴노를 지지하는 타시라카 황녀(手白香皇女) 쪽 세력이 대립하여 내란 상태에 빠졌으며, 두 왕조가 병립한 것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어 있다.[출처] 결국에는 안칸 덴노와 센카 덴노의 혈통이 왕실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승리한 긴메이 덴노가 왕실의 중시조로서 그 후손이 현대까지 내려오게 된다.【어떤 책에는 덴노가 28년 갑인(甲寅)년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25년 신해(辛亥)년에 죽었다고 한 것은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취하여 쓴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 신해년(辛亥年) 3월에 군대가 나아가서 안라(安羅)에 이르러 걸탁성(乞乇城)을 쌓았다. 이 달에 고려(高麗)는 그 왕 안(安)을 죽였다. 또한 '''일본의 덴노와 태자(太子), 황자(皇子)가 함께 죽었다고 들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말한다면 신해년(辛亥年)은 25년에 해당한다. 뒤에 교감(校勘)하는 자는 알라】.
《일본서기》 게이타이 덴노 25년(531년) 12월조.
안칸 덴노의 치세는 그리 긴 편이 아니지만, 셋쓰 미시마의 다케무라 둔창(창고)을 비롯하여 서쪽으로는 규슈에서, 동쪽으로는 무사시와 고즈케에 이르기까지 둔창을 다수 설치했다. 둔창의 경비용 개를 사육하는 기관인 이누카이베(犬養部)는 그 중 하나이다. 그의 능은 오사카 부 하비키노 시에 있는 후루치노타카야노오카릉(古市高屋丘陵)으로 추정된다.
3. 가족관계
- 황후: 카스가노야마다 황녀(春日山田 皇女) - 닌켄 덴노와 누카키미노이라츠메(糠君娘)의 딸.
- 비: 사테히메(紗手媛)
- 비: 카카리히메(香香有媛)
- 비: 야카히메(宅媛) - 모노노베노 이타비(物部木蓮子)의 딸.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휘(이름)가 아닌 왕이 죽은 뒤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3] 고사기.[4] 일본서기.[5] 마가리는 지역 이름이며, 오오네 혹은 오이네는 장자라는 뜻이다. 실제 이름은 따로 있을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사례로 덴지 덴노가 나카노오오에 황자로 잘 알려져있지만 실제 이름은 따로 있다.[6] 일본서기에 따르면 70세에 죽었다.[7]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본기에는 일본 덴노와 태자, 황자가 이때 모두 죽었다는 소문(又聞日本天皇及太子皇子俱崩薨)을 기록하였다.[8] 정효운(2009), "6세기 한일관계사의 재구축 : 왜와 임나 관계의 재해석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56, 337-365.[출처] 연민수, 김은숙, 이근우, 정효운, 나행주, 서보경, 박재용 역, 역주 일본서기,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