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백우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신백우
申伯雨'''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1889년[1] 12월 28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 관정리
(現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2]
'''사망'''
1962년 1월 2일[3]
충청북도 청원군
(現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본관'''
고령 신씨[4]
'''자'''
윤장(閏長)
'''호'''
경부(畊夫)
'''부모'''
아버지 신병휴, 어머니 송기주의 딸
'''형제자매'''
2남 1녀중 장남
'''자녀'''
아들 신범식
'''학력'''
보성전문학교 (법학 / 수료)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일어과)[5]
신흥무관학교 (졸업)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년기
2.2. 일제강점기
2.3. 광복 이후 ~ 말년
2.4. 사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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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생애 초년기


1889년 12월 28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 관정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에서 아버지 신병휴(申秉休)와 어머니 여산 송씨 송기주(宋基周)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서당에서 족친인 신채호와 함께 한문을 익혔고, 서울의 측량학교·외국어학교 및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야간부를 1년 수료하였다. 이후 청주 탑동측량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1909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9년 신민회의 외곽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가 설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청년학우회 한성연회(漢城聯會)의 서기(書記)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1909년의 신민회 계열의 비합법적 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이 조직되자, 남형우, 안희제, 박중화 등 80여명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활동을 하였다.

2.2. 일제강점기


1911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안동현에 독립운동 연락기관으로 성신태(誠信泰) 상점을 설립했고, 봉천성 일대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다 1918년 조부가 별세하자 귀국하였고, 1919년 3.1 운동 직후 4월에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했다. 그 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자 신채호와 함께 이를 반대했지만 끝내 막지 못하자 만주로 이동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부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에 귀국했고, 그해 9월 서울청년회 이사가 된 뒤 1922년 1월 무산자동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간부가 되었다. 3월 잡지 <신생활>에 '사회운동(社會運動)의 선구자(先驅者)의 출래(出來)를 촉(促)하노라' 등을 게재했다. 10월 조선노동공제회 해체를 주장하며 조선노동연맹회 결성을 주도했다. 같은 해 서울에서 공산주의단체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이 되었다.
1923년 봄 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국내부 위원이 되었으며, 7월 사회주의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8월에 국내 각 공산주의그룹의 내분에 휘말렸고, 낙양관에서 상대 정파에게 폭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924년 봄 각파 공산주의자그룹의 통일을 위해 개최된 ‘13인회(十三人會)’에 참가했으며, 4월 경성농민회 대표로서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5월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준비위원회 국내 대표로 선정되었으나 참가하지 않았다.
1923년 9월 조선일보 고문 겸 논설위원이 되었으나 10월 공산주의단체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1925년 5월 서대문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귀향했다. 이후 공산주의와 연을 끊은 그는 농촌운동과 고령신씨 문중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36년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여 그 유해가 돌아오자, 이를 고향에 안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2.3. 광복 이후 ~ 말년


8.15 광복 후, 1946년 민주주의독립전선 결성에 참여하고 최고위원이 되었다. 또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비롯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한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국민회 후보로 충청북도 제2선거구인 청원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도영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에는 정치와 연을 끊고 대종교에 입교해 포교 활동에 전력을 기울여 1955년에 원로원 참의에 선임되었다. 또한 1956년 문일민, 김승학, 운허 스님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사>를 발간했다. 1962년 1월 2일 청원군에서 병사했다.

2.4.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신백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여담


신범식 전 문화공보부장관이 그의 아들이다.
[1]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886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인근의 귀래리·추정리·호정리와 함께 고령 신씨 집성촌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신흥우도 이 마을 출신이다.[3]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월 24일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4] 영성군파 24세 우(雨) 항렬.[5] 졸업 여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