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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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윤세복(尹世復)
본명
윤세린(尹世麟)

상원(庠元) / 무송(茂松)
단호
단애(檀涯)
생몰
1881년 3월 29일 ~ 1960년 2월 13일
출생지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연포동
(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1]
본관
무송 윤씨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대종교 입교 및 교육 사업
2.3. 대종교 교주
2.4. 해방 이후 경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종교 교주.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운동가 윤세주는 6촌 동생이다.

2. 생애



2.1. 초년기


윤세복은 1881년 3월 29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연포동(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에서 가선대부를 지낸 윤희진(尹熺震)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6살 때인 1886년 봄 고향 마을에 있는 응천재(凝川齋)에 입학하여 21세까지 한학을 공부했으며, 10대에 혼례를 치러 1남 1녀를 두었다. 1903년, 윤세복은 15년간의 한학 수학을 중단하고 밀양 신창소학교에서 교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06년에는 대구로 가서 5월부터 대구부 토지조사국 측량과에 입학해 3년간 측량기술을 습득했다.
윤세복은 1907년 5월 14일 탁지부 기수에 임명되었고, 1908년에 임시재원조사국 양지과 대구출장소 기수로 임명되었다. 또한 1907년에 개교한 대구 협성학교(協成學校) 교사로 1년간 활동했다. 한편, 성리학적 전통을 고수하는 집안에서 자라면서 충군 정신이 몸에 배인 그는 일제가 황제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것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이에 1909년 10월 결성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국내외의 독립운동세력을 은밀히 지원했다.

2.2. 대종교 입교 및 교육 사업


1910년 대구 달성친목회 청년체육구락부 설립에 발기인으로 나서는 등 민중의 계몽운동을 지원하던 그는 일제가 한일병합을 단행하자 이에 맞서기 위해 국권회복운동에 필요한 동지를 규합하려 했다. 그러던 1910년 음력 12월, 그는 홀로 서울 간동에 있는 대종교 본부를 찾아가서 나철에게 훈도를 받고 대종교에 입교했다. 나철은 그에게 '단애(檀涯)'라는 호를 줬고, 이때까지 '윤세린(尹世麟)'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그를 '윤세복(尹世復)'으로 개명시켰다.
1911년 음력 1월 21일, 윤세복은 참교(參敎)의 교질을 지수(祗受)받고 음력 2월 29일 시교사(施敎師)에 임명되었다. 그는 서간도 시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가산 수만 석을 정리하고 자식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즉시 떠났다. 당시 서간도에 이주한 한인 동포들은 주로 기독교를 신봉했고, 대종교를 믿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집안현(輯安縣)[2]과 통화현(通化縣)[3]은 기독교의 위세가 강했기 때문에 포교 효과가 높지 않다고 본 대종교 측은 새로 개척하는 북간도와 서간도 일대에 포교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이러한 본부의 뜻에 따라 서간도로 향한 윤세복은 회인현(懷仁縣) 향도촌[4]에서 자리를 잡은 뒤 1911년 음력 5월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했다. 일제는 동창학교 설립 직후부터 학교 동향에 관한 첩보를 입수해 예의 주시했다. 압록강 연안의 위생 시찰 임무를 맡았던 야마네 마사쓰구(山根正次)는 관전현(寬甸縣)[5]·회인현·집안현 등지에서 보고 들은 사실을 기록해 1911년 7월 13일 <야마네촉탁시찰보고서(山根囑託視察報告書)>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는 "회인현 횡도천에 단군 연호를 사용하는 배일(排日)학교가 설립되어 있다"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또한 1912년 5월 24일자 조선주답헌병대사령부 발송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수신 기밀문서는 동창학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윤세복(회인 동문 밖 거주, 32세)은 조선인 수괴로서 알려지기에 앞서 횡도천에 학교를 설립해 아동을 교육하고 또 작년 12월 중 상기 땅에 이전, 학교를 설립해 휘하에 4,50명의 학생이 있다. 늘 조선인 사이에서 기맥을 통해 이주 조선인 권유에 대한 충당을 하며, 동인은 자산 14,5만원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 이주 조선인에 대한 자금을 융통하는데 그 세력이 경시될 가능의 여지가 있다.

또한 1912년 7월 22일 일본 외무대신 우치다에게 발송된 기밀문서에도 "윤세복, 이석대(李碩大) 2인이 그 두목으로서 회인성 안에서 조선인 학교를 경영하고 있다"고 기술되었으며, 9월 19일자 기밀 문서에도 "윤세복 등이 교장이 되어 교사 3명을 두고, 교과서를 전부 조선에서 압수 처분되어 금지된 것을 사용하며 학동들을 모집해 지나(支那: 중국)로 귀화를 권유하고 있다"고 기술되었다. 이렇듯 동창학교는 배일의식 및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설립된 학교였다. 윤세복은 <대동고대사론>의 논평에서 "우리 대동민족은 신성한 종교를 보유하고 신성한 역사정신을 발휘함을 오직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히며 대동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추구하고 나라를 되찾자고 주장했다.
동창학교 재학생은 망명 지사의 자제들로 구성되었는데, 연령은 6세 이상 15세 이하로 제한되었고, 3개 반으로 운영되었다. 검은색 제복에 교모를 착용했고, 학교에서 학생들의 기숙사비와 피복비, 가족생계비를 보조하는 등 교육을 장려했다. 동창학교의 교과는 단군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삼는 것을 원칙으로, 역사, 국어, 한문, 지리 등을 가르쳤다. 역사와 국어 외에 특별히 체조가 강조되었는데, 이는 민족의식 고취와 더불어 대일군사훈련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동창학교는 대종교가 설립한 학교 특성에 걸맞지 않게 교리서가 전무했다. 교재로 사용한 <초등대한지지>는 <종교> 편에 기자를 중심에 두었는데, 이는 단군을 교조로 순봉하는 대종교와 불일치했다. 이는 핵심 경전인 <삼일신고> 조차 1912년 4월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출간되었기 때문에 미처 교리서로 쓸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윤세복은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박은식 등과 함께 교리서 편찬에 착수했지만, 일본영사관이 1914년 중국관헌과 교섭해 학교 폐지와 교사축출령을 내리면서 동창학교는 끝내 강제 폐교되었다.
1914년 5월 13일, 대종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 포교 활동이 어렵게 되자 총본사를 청파호로 이전했다. 나철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총본사 산하에 동서남북 4도교구와 중국, 일본, 구미의 외도교구를 설치해 교단을 정비했다. 또한 각 교구 주관자로 동도본사에 서일, 서도본사에 신규식이동녕, 북도본사에 이상설, 남도본사에 강우를 임명했다. 윤세복은 서도교구 소속으로 백두산 인근 무송현(撫松縣)[6]으로 이주했다. 1914년, 그는 무송 하북에 소학교인 백산학교(白山學校)를 세웠다. 백산학교의 설립자 겸 교주는 김성규(金星奎)가 맡았으며, 학교의 목표는 독립군 양성과 훈련이었다.
일제는 유기 행상, 포목 행상, 필묵 행상으로 위장한 밀정을 보내 백산학교를 정탐했다. 그러다가 1915년 봄 교장 김성규를 비롯해 윤세복, 윤필한, 이재유, 박상호, 성호, 김남호, 윤창렬 등 23명이 살인 혐의로 무송현 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는 이들이 밀정을 처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서로 끌려간 23명 중 2명은 옥사했고 윤세복과 13인의 동지들은 1915년부터 1916년 가을까지 18개월간 구금되었다가 교포 700명의 연서와 난징, 베이징, 상하이 국민당 의원부 등 중국 정부 측간의 외교 교섭을 통해 석방되었다. 윤세복은 옥중에서 1916년 8월 15일에 사망한 나철의 유서[7]를 울면서 받기도 했다.
윤세복은 석방된 뒤 남은 동지들과 함께 몽강현(濛江縣)[8], 무송현, 안도현(安圖縣)에 20여 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한중 우호증진을 도모하여 서로 간에 교류도 활발히 하였다. 그리하여 개천절, 어천절, 국치기념 등의 행사 때는 중국 경관이 출동하여 그들의 보호 하에 한중 국기를 게양했다. 또한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 서명해 한인들의 정부 수립을 촉구했고,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1919년 7월에는 병,농 겸행의 자치단체인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해 북로군정서의 자매기관으로서 활동하면서 무송의 독립군 양성 및 거점 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러나 일제는 지속적으로 밀정을 보내 독립세력의 활동을 감시했고, 1919년 11월 일본 낭인 나가노 세이스케(中野淸助)가 중국 마적 두목 장강호(長江好)와 협의하고서 지뢰와 독가스 등의 살상무기로 무장하여 무송현 등지의 독립운동가 토벌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김성규가 1920년 6월 흥업단 외교장으로서 동지들과 함께 무기를 운수하던 중 몽강현에서 장강호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동년 8월에 총살당했고, 그가 소지하고 있던 홍범도 및 윤세복 관계 비밀 문서들이 압수되고 말았다. 윤세복은 이로 인해 한동안 도피해야 했다.

2.3. 대종교 교주


윤세복은 1922년 6월 5일 서간도를 관할하는 대종교 서1도본사 전리(典理)에 임명되었고 6월 8일에 서1도본사를 설치했다. 당시 그가 5년간 포교한 결과 무송현, 안도현, 화전현(樺甸縣)[9], 반석현(磐石縣)[10] 네 현에 5곳의 교당이 신설되었고 교인은 7천여 명이었다. 이후 1922년 8월 17일에 전리직을 사임했고, 후임자로 흥업단원 이억(李億)이 임명되었다. 그러던 1923년 말, 윤세복은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이 사망했으며 자신이 3대 교주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놀랐다. 사실 그는 김교헌을 만나본 적은 있었지만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에 김교헌이 자신을 후임자로 지명할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급히 대종교 총본사가 있는 영안현 남관으로 향했고 1924년 1월 22일 제3대 교주로 취임했다.
교주로 취임한 윤세복은 곧바로 대종교 교정 쇄신 작업을 추진했고, 이를 토대로 항일투쟁 역량의 강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1925년 6월 11일 재만 한국인 취체와 항일세력 축출 목적으로 중국 동삼성 장쭤린 정권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 간에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면서 상황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1926년 12월, 길림독군 겸 성장인 장작상은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발포했다. 이에 윤세복은 1928년 1월 16일 영안현(寧安縣) 해림역(海林驛)[11] 장일 시교당에서 제6회 교의회를 소집해 포교금지령 해제 때까지 총본사를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12]으로 이전하기로 결의했다.
윤세복은 당벽진에 도착한 뒤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세웠다. 하지만 그는 6년 간 고행수도에 임하면서 교황은 현황 유지, 의식은 경배식을 폐지한 채 경절의식만을 거행하고 외부와 접촉을 끊고 은거했다. 이 시기 대종교의 활동과 대흥학교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한편 윤세복은 1928년에 베이징의 박찬익을 대종교 포교 금지령 해제운동의 중임으로 위촉하고 윤복영, 조성환과 함께 동북정권에 해금청원서를 제출하게 했다. 박찬익은 첫번째 교섭에선 실패했지만 1929년 난징 중앙정부와 교섭을 벌여 마침내 포교금지령 해제에 성공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일제가 만주를 석권한 뒤 만주국을 건국하면서 이 성과는 무위로 돌아갔다. 일제는 만주를 장악한 직후인 1932년 9월 잠행징치도죄법(暫行懲治盜罪)을 제정해 대종교를 탄압했다. 이로 인해 교세가 약화되자, 윤세복은 1933년 3월 15일 어천절에 대종교 포교의 재기와 교세 확장을 위해 총본사를 밀산현 평양진(平陽鎭) 신안촌(新安村)에 임시 이전시켰다. 그는 발해의 고도인 만주 동경성 일대에 토지를 구입하고 1933년 발해농장(渤海農場)을 설치했다. 그는 이 발해농장에 한인 농민들을 정착시키고 자작농으로 육성시키고자 했고, 한인 농민 3백여 호가 이곳에 이주해 5년 연부(年賦) 상환의 조건으로 토지를 분배받고 자작농으로 육성되었다. 또한 그는 농민들과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농장 지역에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한 뒤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발해농장이 어느정도 자리잡을 무렵인 1934년 3월 2일, 윤세복은 하얼빈시 안평가에 경남 함안 출신의 김서종(金書鍾)을 총무원장으로 하는 하얼빈 대종교선도회를 설치했다. 이후 동년 6월 중순에 총본사를 영안현 동경성으로 이전했고, 그해 9월에 일본총영사로부터 배일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포교 허가를 받았다. 이에 대해 광복 이후 대종교단에서 공식 간행된 <임오십현순교일록>에서는 "단애종사의 판단이 일대 착오"라고 평하며 차라리 일시 화북으로 피난하여 십수년만 고행을 더 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윤세복은 포교 활동에 전념했고, 대종교 교인들의 숫자는 날로 늘어나 1937년 6월 무렵 16,164명에 이르렀다. 윤세복은 또 1936년 3월 10일 대종교 총본사 내에 대종학원(大倧學園)을 창설했다. 설립 목적은 대종교 종문학원인 동창, 백산, 대흥학교의 후신으로서 청년 남녀에게 민족혼을 환기하고 시대적 지식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교육과정으로 초, 중등부와 여자야학부가 병설되었는데, 초등부는 6개월 진급제로 하여 정규 과정 외에 시문과 종경을 교육하여 지원자가 매우 많아 20평 교실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고, 1938년 3월에 설치된 중등부는 특별과로서 속성 1년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헌병과 특무경찰을 동원해 대종학원을 철저하게 감시하면서 1939년부터 운영에 차질을 빛던 대종학원은 1941년에 공립 발해국민우급학교에 병합되었고, 중등부는 1942년 봄 4회 졸업생 16명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이후 일제는 1942년 11월 19일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20여 명의 국내외 대종교 지도자들을 모조리 검거했다. 이를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한다. 임오교변은 1942년 9월 조선어학회 사건의 핵심 인물인 이극로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편지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는 <널리 펴는 말>이라는 제목의 글이 동봉되어 있었다.

(전략) 그런데 이제는 때가 왔다. 우리는 모두 힘을 발휘하여 대교의 만년 대계를 세우고 나아가야 된다. 이 어찌 우연이랴. 오는 복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도 큰 죄가 되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된다. 만나기 어려운 광명의 세계는 왔다. 반석 위에 천진과 교당을 짓자! 기름진 만주벌판에 대종학원을 세워서 억센 일꾼을 길러내자! 우리에게는 오직 희망과 광명이 있을 뿐이다. 일어나라, 움직이라! 한배검이 도우신다.

일제는 <널리 펴는 말>을 조선독립선언서로 지칭했고,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구절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를 구실로 국내외 대종교 지도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대종교를 말살하려 했다. 윤세복을 비롯한 20여 명의 대종교 지도자들은 영안현 경무과에 설치된 특별 취조본부로 이송되어 1년 6개월간 모진 고문과 취조를 받았고, 이로 인해 안희제 등 10명이 옥사했다. 이후 윤세복 등은 1944년 4월 27일부터 6월 26일까지 목단강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윤세복은 '치안유지법' 위반이 적용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목단강 액하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윤세복은 형무소에서도 <삼일신고>에 있는 3법수행(三法修行)의 묘법을 체득하여 <삼법회통(三法會通)>으로 체계화했다.

2.4. 해방 이후 경력


1945년 8월 12일 만주를 전격 침공한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윤세복은 8월 14일 대종교 총본사의 부활을 선언했고 9월에 동경성으로 귀환했다. 그는 동경성에서 한글강습회를 개최해 학생들을 교육했고 연극공연 등을 통해 대종교 포교에 진력했다. 이후 1946년 1월 한국에 귀국했고 2월 서울 저동에 총본사를 이전했다. 그는 교당 설치, 교단조직 정비와 강화, 단군전 봉안, 교적 수집과 간행, 홍익대학국학대학 설립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1948년에는 교리강습회를 개최하고 <삼일신고>. <신리대전>. <신사기>. <회삼경> 등을 국역 주해하였고, 이듬해에는 <역해종경사부회편>. <한검바른길 첫걸음> 등을 간행했다. 또한 대종교 교인이자 임시정부 인사인 이시영과 함께 단군전 봉안운동을 일으켜 전국에 단군전을 건립했다.
1950년 4월, 윤세복은 교의회를 개최하고 지금까지 시행해왔던 교통전수제(敎統傳授制)를 선거에 의한 총전교선임제(總典敎選任制)로 바꾸고 초대 총전교에 취임했다. 1952년에는 <대종교규범>, <대종교개관>, <대종교소원록>, <삼법회통>, <우리 스승님들 모습>, <홍암신형조천기>, <신단민사>, <신단실기>, <단조사고> 등을 탈고했으며, 1954년 11월부터 7개월간 도본사 3곳, 지사 5곳, 시교당 33곳을 재건 또는 신설했다. 1955년에는 총전교직을 정관(鄭寬)에게 넘겼고, 자신은 1957년에 종사(倧史) 편집주간을 담당하면서 <종사취재고(倧史取材稿)> 15권을 편집 정리했다.
1958년 윤세복은 총전교에 재임했지만 1960년 2월 13일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79세. 그는 자신이 죽거든 화장하고 뼈를 한강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고 교인들은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한강에 뿌렸다. 그의 유해 일부와 유품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윤세복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무연리 318번지에 윤세복의 생가터가 있다.#[2]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通化)시 지안(集安)시.[3]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通化)시.[4]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번시시 환런(桓仁)만주족자치현 헝따오촨(橫道川)촌.[5]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寬甸)만주족자치현.[6]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白山)시 푸쑹(撫松)현.[7] 죽고 삶은 몸뚱이 껍데기에 있지 않고 믿음과 의리는 오직 신명으로써 증거되느니라.[8]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白山)시 징위(靖宇)현.[9]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吉林)시 화뎬(樺甸)시.[10]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吉林)시 판스(磐石)시.[11]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海林)시 하이린진에 위치해 있다.[12]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지시시 미산(密山)시 당비(當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