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스 드 토크빌

 


[image]
알렉시스 드토크빌[1]
Alexis de Tocqueville
1805년 7월 29일 ~ 1859년 4월 16일

[2]

1. 개요
2. 생애


1. 개요


프랑스의 정치철학가이자 역사학자.

2. 생애


1805년 7월 29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진보적인 귀족 정치가이자 프랑스 혁명 당시 희생된 크레티앵 드말제르브의 증손자로 태어났는데 그 때문에 본인도 진보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노르망디 가문의 귀족으로 태어나서 인지 본인의 콧대가 높고 사람들에게도 차갑게 대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태어나서부터 예민한 성격에 우울증까지 겪어서 매일 의회에 참석하기도 귀찮아 했고 신경쇠약에 시달리기도 할 정도로 건강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따라 정치인이 된 그는 1827년 샤를 10세로부터 프랑스 귀족 작위를 받았고 이 덕에 견습 하급관리로 정치의 길에 쉽게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이후 헌법 개정에 대해 보수파와 진보파 사이의 정쟁에서 진보파 쪽을 지지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의 당시 프랑수아 기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1830년 7월 혁명을 겪으면서 "프랑스는 영국식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미국식 민주제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생각했는데 이 때문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정부에 요구해 허락을 받아냈다.
1831년 5월, 프랑스 정부가 미국의 감옥제도를 연구하라고 그의 절친이자 귀족인 귀스타브 드보몽(Gustave de Beaumont)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서 9개월간 체류를 했는데 이때 미국 사회의 면면을 기록했고 1832년 2월 프랑스로 돌아와 형벌제도에 대한 보고서 "미국의 교도행정 체제와 그 체제의 프랑스 내 적용 여부"를 제출함과 동시에 본인이 겪은 일들을 책으로 펴냈는데 현대의 고전 중 하나인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가 바로 그것이다. 행정학정치학에서는 유명한 고전 중의 고전. 내용은 어마무시하게 축약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면, 자유와 평등은 서로 상치되는 면이 있어 평등을 과도하게 주장하다보면 자유가 침해될 수 있고, 자유가 과도하다보면 결과적으로 평등하지 않게 되어 불만이 쌓이게 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부 내지는 국가와 개인 사이에 공적 권위를 가진 중간적 기구 내지는 기관, 즉 '''지방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여기서 예로 든 것이 바로 미국의 마을회의와 같은 자치정부였다.
토크빌은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민주적 전제'를 극복하기 위해 결사의 자유 보장과 언론 다양성의 헌법적 권리 보장을 들었다.
민주주의 제도는 국민의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일단 여론이 한 방향으로 쏠려 그것이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는 경우 그 힘을 상쇄 보완할 방책이 거의 없기 때문에 현실정치에서 많은 문제는 입법부의 폭정이 아니라 여론의 무책임한 압력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압력에 특정 정치세력이 편승할 경우 민주주의 대의제 시스템의 기능이 상실된다고 하였다. 지배자의 억압에 맞서는 것보다 다수 국민의 여론 독재에 맞서게 되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는 것이 민주화된 국가에서 문제로 대두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민주국가는 시민사회의 소수의견도 수렴하여 정치적인 힘으로 전환시키는 장치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결사와 정당이다. 토크빌은 결사의 자유를 다수의 전횡에 맞서는 소수의 권리로 이해했다. 미국이 다수 폭정의 가능성에 노출된 최초의 체제이면서도 그 위험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소수를 위해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언론의 다양성을 헌법적 권리로 보장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덧붙여 기득권 철폐가 아니라 기득권 향유자의 수를 늘리는 것을 지향하는 온건한 개혁문화는 개인에게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사회에서는 타협과 협력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배경이 되었다고 보았다.
다만 이 책에는 당시 도시의 궁핍이나 노예들의 고통등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이는 토크빌 본인이 제국주의를 옹호했던 바에서 기인한다. 다만 흑인인디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기는 했다.
또한 토크빌은 미국과 러시아가 언젠가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1848년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붕괴되자 토크빌은 프랑스 제2공화국의 제헌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어서 제2공화국의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는데 기여한다. 이때 헌법에 보통선거양원제 같은 미국적 민주주의의 요소를 집어넣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다. 제2공화국의 외무장관으로 짧게 복무하기도 했던 토크빌은 1851년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체포된 이후 정계에서는 은퇴하였다. 1856년 무렵부터는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을 저술하다가 1859년 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1] 외래어 표기법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한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말이긴 한데 정작 토크빌은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다. 동시대의 보수정치학자인 조제프 드메스트르 (Joseph de Maistre)의 비슷한 언급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