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페르난데스
1. 개요
아르헨티나의 법조인, 정치인. 아르헨티나 제54대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다.
키르치네르 부부 밑에서 총리[1] 직을 맡았으며, 정의주의자당의 대선 후보로 당선되었다.
2. 생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대학에서 형법 교수로도 활동했는데, 이렇게 법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판사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보인다. 집안은 전형적인 스페인계 이주민의 후손이다.
3. 정치 활동
현재 정의주의자당 소속이며 언론에서도 그를 좌파 포퓰리스트로 묘사하고 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정의주의자당이 과거 1990년대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다는 점을 철저히 무시한 왜곡이고, 단순히 포퓰리스트라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아니다. 고등학생도 페론주의 성향의 학생단체에 가맹했지만 정작 우익 성향의 입헌국민당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가 대학 시절인 1982년. 다만 이때 우파정당에서 일했던 것은 아직 아르헨티나가 군사독재이기 때문이었던 탓도 있었기에 아르헨티나가 민주화 되면서 정의주의자당에 입당했다. 이후로 법원에서 판사로 일하다가. 1985년 라울 알폰신 정권 당시에 경제부 법무 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89년에 카를로스 메넴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라틴아메리카 보험관리협회 회장으로 발령이 났고, 국제보험관리자협회의 창립자 중 한명이 되었다. 이후로 메르수코르와 라틴아메리카 통합협회의 자문도 맡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은행의 고문으로 재직하는 등 주로 금융업계에 종사하였다.
이때 메넴 대통령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아르헨티나의 각종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던 인물이었고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본인도 민영화의 수혜를 받은 금융업계에 종사하면서 수혜를 입은 인물이었던지라 적어도 당시에는 좌파라고 볼 이유가 전혀없었다. 다만 1990년대에 중반에 메넴의 후임으로 거론되면서 차기 대권주자로 거명되던 두알데와 가까워졌고 두알데와 메넴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았기에 페르난데스 개인적으로 정의주의자당 내에서 메넴의 3선에 반대하는 모임인 칼라파테 그룹[2] 에 직접 참여할 정도로 집권 후반기의 메넴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생각했던것으로 보인다.
경기침체 및 부패스캔들로 인해 3선 개헌이 무산되고 메넴의 반발을 무마시킨 두알데[3] 의 선거운동을 도왔는데 카를로스 메넴 정권기를 거치면서 정의주의자당이 우경화되었기에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치구도에서 데 라 두아는 좌파성향, 두알데는 우파성향의 후보로 여겨졌다. 또한 200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는 중도우파 성향의 공화국행동당 소속이었는데 이 정당은 메넴 정권기 초중반 당시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인물인 도밍고 카발로가 메넴 말기에 정의주의자당을 탈당한 뒤에 창당한 정당이다.
다만 2000년대 초반 당시에 아르헨티나가 혼란기를 겪을 시기에 그는 공화국행동당을 탈당하고[4] 2003년 아르헨티나 대선 당시에 정의주의자당 좌파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를 지원했으며 키르치네르가 그를 총리로 임명했는데 금융업계에 재직하면서 쌓아올린 경력에다가 칼라페테 그룹에 같이 참여하면서 친분 및 신뢰관계를 쌓았던 것이 총리로 등극하는데 큰 요인이었다. 네스트로 키르치네르가 당선되고 나서 예상을 깨고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되살아났고 4년 내내 별다른 도전요인없이[5] 1994년 헌법개정 이후 최장수 총리라는 타이틀을 따냈고, 2007년 대선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도 총리직에 유임되었지만 이듬해인 2008년에 수출세 인상으로 농축업계가 반발하며 수십 일씩 대치하다가 결국 철회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로 인해 크리스티나의 리더십에 의문이 제기되며 크리스티나의 지지율이 20%대까지 폭락하자 개각차원에서 해임되었다. 그 이후로 크리스티나와의 관계가 급속히 멀어져서 2009년 중간선거에서 공천에서 배제되었으며 2011년 대선때도 별수없이 크리스티나를 뽑았다는 인터뷰를 할 정도였다. 당연히 2010년대 전반기에는 크리스티나 안티인사로 활동했으며 2012년에 승리를 위한 전선을 탈당하고 노동당이라는 정당을 따로 차렸으며 2015년 대선에서 다니엘 시올라가 아닌 세르지오 마사를 지원했다.
그러나 2017년 중간선거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이 두개의 정당으로 분열되며 패배했고, 연방 페론주의당 등 중도파 페론주의자들도 썩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채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정의주의자당 내에서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단일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 과정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와 다시 협력관계를 맺게 된고, 2019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직 복귀를 시도하던 크리스티나의 부통령 후보로 내정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대권주자들이 갖고 있는 국회의원 경력도 없다. 물론 관료나 금융업에서 종사한 짬밥이 있기는 하고 총리로서 5년간 재직하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공헌했다는 평을 듣기는 하지만 그렇다해도 아르헨티나 정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거물급 인사는 절대 아니었고, 크리스티나와 관계가 한 동안 틀어질 당시에도 야당 지지층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던 인물도 아니라서 별 다른 대안이 되지 못했다.[6][7]
그러나 정의주의자당이 2017년 중간선거에서 사오분열되어 패배한 이후로 차기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단일화해야된다는 목소리가 당내에서 높아졌고 알베르토와 크리스티나도 차기를 도모해야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다시금 협력관계를 가진 것이었다.[8] 그러나 크리스티나가 부패혐의로 기소되고, 크리스티나가 기본 지지층은 탄탄했지만 확장성이 약해서 오히려 역공을 당할 여지가 컸기에 상대적으로 만만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를 대통령 후보로 선임하게 되었다.
결국 알베르토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대신에 크리스티나는 부통령 후보로 나서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당초에는 크리스티나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은 탓에 결선에서 마크리에게 밀려 낙선한다는 여론조사가 있었고, 이후로 물가상승률이 지속적으로 오르며 마크리의 지지율이 떨어졌음에도 결선에서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예비선거에서 47.7%를 득표해 32.1%를 득표한 마크리를 약 15% 차로 앞섰는데, 아르헨티나에서 결선투표의 기준치는 50%가 아닌 45%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기적을 일으킨 것. 이후 지지율이 올라 결선 안 가고 본선에서 과반 득표할 것이라는 여론조사가 속속히 나오고 있으며, 각 기관들도 결선 여론조사는 따로 집계하지 않을 정도. 다만 실제 선거에서는 과반득표까지는 아니고 48%의 득표율을 올려서 예상보다는 다소 부진한 성적을 올리기는 했다. 물론 이것도 여론조사와 비교해서 낮게 나온 것이지 역대 아르헨티나 선거 기준으로 볼 때 낮게 나온 득표율은 아니다.
결국 최종 개표 결과 48.24% 득표를 올리며 결선 투표 없이 당선을 확정지었다.# 임기는 12월 10일부터 시작되었다.
3.1. 대통령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정권 교체에 성공해 화려하게 취임하지만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모두의 전선 앞에 놓여있는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다. '''IMF 구제금융 신청'''으로 대변되는 전임 마우리시오 마크리 행정부의 실정에도 마크리가 2019년 대선에서 40% 득표나 올릴 수 있었던 원인은 페론주의 포퓰리스트들의 정치 일선 복귀에 대한 아르헨티나 및 남미 주요 언론 및 유권자들의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결선 투표 없이 당선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엄청난 수준의 국가빈곤율(2018년 기준 32%까지 증가), 감당할 수 없이 우상향하는 소비자 물가, 그리고 상기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IMF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마크리 정권이 남긴 경제 삼중고 때문이었는데 이런 경제난을 빠르게 수습하지 못한다면 변화의 열망으로 태어난 정권이 금방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한편 부통령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카사 로사다[9] 으로 4년 만에 재입성하게 됐는데, 워낙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탓에 정작 국민들의 선택을 받은 알베르토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크리스티나가 실세 부통령 노릇을 하는 게 아닌지하는 의심이 크다.#
한편 공식 취임을 얼마 남기지 않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급작스럽게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철강 제품을 상대로 보호 관세를 책정하면서 졸지에 정치적 성향이 전혀 다른 브라질의 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공동 전선을 만들어야 되는 상황이 됐다.#
경제정책에 있어서 마크리 정부 때처럼 공공요금을 무작정 올리지 않고 [10] 해외여행을 가서 달러화를 쓸 때나 개인이 달러를 구매할 때 세금을 30%를 매기는 안을 추진하고 재산세를 많이 매기는 등 세금을 올리는 방안도 같이 발표하면서 시장으로부터 예상보다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펼 것이라며 환영받고 있는(...) 기묘한 상황이다.
다만 취임 직후 노력에도 불구하고, 9번째 디폴트(채무불이행)은 면할 수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아르헨티나 정부와 채권단이 협상을 이어가면서 경우에 따라 채무가 조정될 가능성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2020년 8월에 650억달러(약 78조원) 규모 채무 재조정 협상에서 채권단과 합의점을 찾았다.#
2020년 10월 코로나 19 백신 보급을 시작하겠다고 공언했다. 러시아의 백신인 스푸트니크 V를 보급하기로 하였다.
4. 기타
- 2016년 축구 선수 카를로스 테베스의 결혼식에 참석한 이후 돈독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 브라질의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했고 이 때문에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비판했으며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대선에서 우위를 차지하자 아예 메르수코르에서 탈퇴한다든지하는 협박도 강행했을 정도였으며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이후로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를 상대로 인사도 하지 않을것이고 막나가는 발언을 할 정도이다. 반대로 룰라와 지우마 호세프는 환영성명을 냈다. 따라서 대통령 취임식에 불참한다.#
- 아들인 에스타니슬라오 페르난데스가 평소에 여장을 취미삼고있으며 Dyhzy라는 예명의 드랙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알베르토가 대통령에 출마한다고 발표했을 때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하며, 이걸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지만 알베르토나 에스타니슬라오나 별 상관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런 것을 보면 게이나 트랜스젠더로 오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여친을 두고있는 이성애자다. 그와 별개로 보우소나루가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를 비난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해서 보우소나루의 아들이 에스타니슬라오를 조롱하는 트윗을 남기면서 치졸함(?)을 보였다.
- 1985년부터 모교인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에서 조교로 교육자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범죄학개론 주임교수로 재임 중이며 정치활동 와중에도 강의는 포기하지 않고 지속해왔다.#
[1] 스페인어로 Jefe de Gabinete라고 하며, 정확히는 "내각수반"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총리"는 Primer Ministro라고 하기 때문. 다만 대한민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총리가 곧 내각수반을 의미하며, 아르헨티나의 Jefe de Gabinete 또한 총리직과 유사하다. 참고로 해당 직책은 1994년 헌법개정에 따라 신설되었다. 대한민국의 언론사들도 "총리"로 번역한다.[2] 이 모임에는 두알데와 도밍고 카발로, 네스트로 키르치네르가 참여했다.[3]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다. 왜 이리 임기가 짧냐 하면 전임자 델라루아가 경제 붕괴로 대규모 폭력 시위가 일어나자 군부에 진압해 달랬다가 군부가 생까서 쫓겨났다. 이때 아르헨티나 경제가 바닥을 찍었기 때문에 2010년대 후반에와서는 과장 좀 해서 아르헨티나 경제를 바닥에서 구원해낸 대통령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두알데가 대통령이 된 것은 대중의 지지를 얻어서가 아닌 그저 어부지리격이었던 데다가(델라루아가 쫓겨날 때 부통령과 장관들도 다 사퇴해 버리는 바람에 대통령 승계권자가 없어서 의회에서 두알데를 임시 대통령으로 뽑았다.) 대통령 재임 당시에는 실업률은 20%대, 빈곤율은 50%대에 달하는 경제난과 그로 인한 정치혼란으로 급진시민연합이든 정의주의자당이든 간에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던지라 두알데는 인기가 없었고 당시 아르헨티나 국민들 사이에서는 조롱의 대상이었다. 두알데 본인도 이를 감안해서 2003년 대선에서 네스트로 키르치네르를 지원했지만 네스트로 키르치네르의 입지가 굳어지자 이에 반발하다가 역으로 축출당하는 형편이 되었다.[4] 도밍고 카발로가 2001년 아르헨티나의 경제상태가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을 때 재무부 장관직에 다시 올랐는데 예금동결 정책 시행으로 10년 넘게 진행된 민영화와 긴축정책에 지친 국민들의 반발을 사며 데 라 두아 정권이 끝장내고 디폴트 선언을 하는 데 공헌(?)했고, 그로 인해서 도밍고 카발로의 정치생명은 끝장났기 때문에 공화국행동당 당원으로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기는 했다.[5] 심지어 이때 두알데 대통령이나 로베르토 라바냐같은 정의주의자당 내 유력인사들도 네스트로와 대결했다가 지지율이 높은 네스트로에게 줄줄히 패배하면서 정계주류에서 밀려나거나 듣보잡이 되었다.[6] 국회의원 경력은 대통령 되기 전에 일단 능력을 검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꼽히기도 한다. 물론 국회의원 경력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못 되는 것은 아니나, 알다시피 흔히 말하는 "여야 간 대립"을 정면으로 맞는 이들이 바로 국회의원이다. 단순 지역구 관리는 둘째치더라도, 여야 간 공방을 직접 오고 받을 줄 알아야, 향후 대통령으로서 성향이 다른 국민들을 대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지는 것. 때문에 국회의원 경력이 없는 사람은 그가 대통령으로서 적합한 지 검증하기 어렵다.[7] 물론 당 내에서도 총선 출마 제의를 받았지만, 본인이 거절했다(...).[8] 이외에도 정의주의자당 내에 인물이 없었던 것도 한 몫을 한다. 키르치네르 부부에만 너무 기댄 결과 마땅한 대안을 찾기가 어려워졌고, 2015년에 출마한 다니엘 시올리 전 부통령도 결국 마우리시오 마크리에게 밀려 낙선했다. 당연히 크리스티나는 이때 3선 연임이 불가능했고, 본인도 이를 감지했는지 3선 개헌을 시도했지만 무산되었다. 그 후 2019년에는 출마가 가능해졌고, 인물이 영 없었는지 크리스티나가 복귀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9] 아르헨티나 대통령궁[10] 달러 대비 임금이 너무 깎여져 내려가서 임금 상승이 절실하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