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주의자당
Partido Justicialista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정당 연합체. 1983년 민주화 이래로 2002년까지는 페론당이 하나의 정당으로써 1989년에 카를로스 메넴이 당선된 직후로 10년간 집권당이었다. 좌파성향의 정당이라는 애기도 있지만 사실 후안 페론 본인이 좌파성향의 정책을 다수 시행한것은 사실이지만 소싯적에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도 같이 받았던데다가 집권 초기에 공산당을 탄압하였으며 쿠데타로 실각 당한 이후로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체제하의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등 강경우파 인사들과도 연줄이 있었기 때문에 창당 당시부터 좌우를 오락가락하는 경향이 있었다 평가되며, 특히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이어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속에서 페론당이 여려개의 정당으로 분당되었고 이후로 페론당 내에서 좌파성향의 당원과 우파성향의 당원이 따로 당을 차렸기 때문에 사실상 페론주의 정당을 총괄해서 좌파이니 우파이니 하는것은 무의미한 얘기나 다름없다. 단지 좌파성향의 정당이 세가 세다보니까 좌파로 분류될 뿐이다. 사실 이때 페론당은 페론당내에서도 좌파성향의 당원과 우파성향의 당원이 공존해있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의 대대적인 도입으로 인해 카를로스 메넴 통치하의 페론당은 우파정당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는데 2001년 디폴트 선언 직후에 페론당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지만 어차피 페론당도 급진시민연합이나 페론당이나 각 계파별로 분열이 되어버렸으며 이후로 여러번 이합집산이 있어왔고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좌파정책을 내걸면서 높은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좌파 페론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는 성향이 있지만 이에 중도파와 우파 페론주의자들은 따로 정당을 차려서 출마하는 것은 여전했기 때문에 2019년 선거에서도 두개의 정파로 따로 출마했다. 흔히 '''페론당'''이라고도 한다.
흔히 아르헨티나를 망친게 페론주의라면서 까이기는 하지만 아르헨티나 현대사를 볼때 묘하게 페론주의자들이 경기침체나 인플레이션 등의 이유로 실각하고 비/반페론주의 정권이 집권했을때 페론주의를 청산한답시고 외채를 더욱 크게 불리면서 아르헨티나 경제가 더욱 망해버리는 바람에 페론주의 정당이 재집권 하고, 후임 페론주의 정권이 어쨌든 미봉책이라도 내서 경제위기를 수습을 하는것이 주 패턴이다. 외신에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기사를 낼때마다 반 페론주의 성향인 클라린이나 라 나시온의 기사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다음은 페론주의를 표방하는 페론주의 계열의 정당들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페론주의를 표방한다는점만 같지 각 정당들의 성향은 천차만별이라는 점에서 유의.
본래 후안 페론은 1945년에 노동당을 창당하였지만 당내에서 의견대립이 일자 1947년에 노동당을 해산하고 페론당을 새로 창당하였고 곧 집권당이 되었다. 이 시기에 압도적인 집권당이 되면서 페론주의의 틀을 이루는 정책들을 시행했지만 언론탄압이나 나치 인사를 받아들이는 문제때문에 욕을 먹기도 하였다.
여하튼 여성참정권 도입이나 노동자 권익 확충으로 지지기반은 탄탄했으나 에비타가 사망하고 후안 페론이 이혼 합법화 문제로 가톨릭 교회와 척을 지게 되면서 점차 인기를 잃게 되고 1955년의 쿠데타로 후안 페론이 실각하면서 정의주의자당도 불법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페론당의 지지기반이 위낙에 탄탄했던탓에 페론당의 재합법화 여론이 다시 일기시작하였고 1962년에 페론당원 중 일부가 그러나 페론당의 세가 다시 확장되어나가자 쿠데타가 벌어져서 1966년에 페론당은 다시 해산되었지만 게릴라전이 벌어지는 등 혼란이 이어져서 결국 협상을 통해 1973년에 페론당은 다시 합법화 되었고 1973년 캄포라 대통령이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임시 대통령직에 취임하면서 페론당도 다시 집권당이 되었고, 후안 페론은 그 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화려한 부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안 페론은 얼마 안가 사망하였고, 오일쇼크의 여파로 경제마저 어려워지고 구페론파 내의 계파갈등도 중재자가 사라지면서 극심해지는 등의 혼돈이 빚어졌지만 후안 페론의 세번째 아내였던 이사벨 페론은 이러한 내분과 경제위기에 대해 우유부단하게 대처하며 이 사태를 되려 악화시켰다. 그리고 1976년의 쿠데타로 페론당은 다시 불법정당이 되었고 페론당의 당원들 중 상당수가 군사독재정권이 행한 더러운 전쟁으로 많은 수가 사망하였고, 페론당 당원 중 상당수가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군부정권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배당한 후로 결국 민주화 조치를 받아들이며 다시금 합법정당이 되었고 급진시민연합이란 양당체제를 구축했지만 1983년 대선에서 급진시민연합의 라울 알폰신에 밀려버렸는데 이사벨 페론의 영향이 큰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라울 알폰신 정권이 임기 2기 중반부터 경제위기로 지지율이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하자 1987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기 시작한것을 기점으로 해서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알폰신이 조기 퇴진하자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 시리아 아랍인 출신인 카를로스 메넴이 당선되었다. 카를로스 메넴은 당초에 산업국유화 및 임금인상 조치등으로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약을 내세웠지만 이후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페소를 달러에 페그를 거는 태환화 정책과 대대적인 민영화 정책을 펴오며 우경화되었는데 페론당 내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심각한 문제점인 물가상승이 진정되었고 그에 따라 중산층의 구매력이 커졌기 때문에 1995년 대선에서도 압도적으로 재선하여 10년간 집권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영화 정책으로 실업률이 급속히 상승하는 등의 문제점은 있었고 1997년을 기점으로 아시아발 외환위기에 휘말리고 메넴 본인도 부패스캔들에 휘발리며 지지율은 낮아졌다. 결국 1999년 대선에서 두알데가 패배하고 급진시민연합의 델 라 두아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야당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2001년 경제위기로 델 라 두아 대통령이 조기퇴진하면서 급진시민연합이 몰락하고 대통령이 여러번 바뀌는 혼란이 펼쳐졌고 이 와중에 페론당은 다시 집권당이 되기는 했지만 페론당 역시 어디까지나 어부지리격으로 정권을 탈환한것이었을 뿐 지지율이 낮기는 매한가지인지라 정국의 혼란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두 알데가 들어서 경제는 그때부터 저점을 찍었지만 정치혼란은 극심하여 급진시민연합이든 페론당이든간에 여러명의 후보들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따로 출마하는 따로 국밥정당이 되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여려개의 정당으로 분당되었다. 그리고 200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페론당에서 3명의 후보가 따로 출마하면서 예상을 뒤엎고 카를로스 메넴이 1위를 차지하였지만 결선투표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70%를 넘어서자 그대로 사퇴하였고 키르치네르가 단독출마한 형태로 결선투표에서 찜찜하게 당선되었다. 어쨌든 여러 페론주의 정당들의 지원으로 당선되었지만 이후로 결별을 하여서 승리를 위한 전선 vs 타 정당의 구도가 형성되었는데 이때 대부분의 페론주의 세력들이 승리를 위한 전선에 그러다가 2015년 대선에서 경기침체의 여파로 근소한 표차이로 비 페론주의자 후보(마크리)가 당선되었다.
그렇지만 2017년 말 이후로 승리를 위한 전선과 연방주의 페론당간의 통합논의가 일고있다. 승리를 위한 전선과 연방주의 페론당이 따로 선거를 나갔고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도 따로 정당을 차려 나간결과, 중간선거에서 개혁을 위한 전선의 득표율이 페론당 자체에게 밀렸음에도 개혁을 위한 전선이 과반을 넘긴데다가 이후로 마크리가 연금개혁과 노동규제 완화, 공공요금 인상을 대대적으로 당행하면서 반발을 크게 샀고 선거 승리 이후로도 경기침체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점때문에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음에도 반사이득을 크게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통합이 잘 된다는 보장은 없기는 하다. 그랬다가 IMF 구제금융까지 신청하는 상황이 오면서 말 그대로 상황이 반전되었다. 하지만 각 대권주자에 대한 호불호가 위낙 심하다보니 통합대권후보를 낼수있을지는 미지수인 상황이었는데 어찌어찌 해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를 주측으로 연방페론주의자 일부와 승리를 위한 전선 등이 합쳐서 통합후보를 냈지만 여기서도 연방 페론주의자 일부는 따로 후보를 내기는 마찬가지였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예상을 깨고 예비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2019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당선되었다.
1. 개요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정당 연합체. 1983년 민주화 이래로 2002년까지는 페론당이 하나의 정당으로써 1989년에 카를로스 메넴이 당선된 직후로 10년간 집권당이었다. 좌파성향의 정당이라는 애기도 있지만 사실 후안 페론 본인이 좌파성향의 정책을 다수 시행한것은 사실이지만 소싯적에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도 같이 받았던데다가 집권 초기에 공산당을 탄압하였으며 쿠데타로 실각 당한 이후로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체제하의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등 강경우파 인사들과도 연줄이 있었기 때문에 창당 당시부터 좌우를 오락가락하는 경향이 있었다 평가되며, 특히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이어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속에서 페론당이 여려개의 정당으로 분당되었고 이후로 페론당 내에서 좌파성향의 당원과 우파성향의 당원이 따로 당을 차렸기 때문에 사실상 페론주의 정당을 총괄해서 좌파이니 우파이니 하는것은 무의미한 얘기나 다름없다. 단지 좌파성향의 정당이 세가 세다보니까 좌파로 분류될 뿐이다. 사실 이때 페론당은 페론당내에서도 좌파성향의 당원과 우파성향의 당원이 공존해있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의 대대적인 도입으로 인해 카를로스 메넴 통치하의 페론당은 우파정당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는데 2001년 디폴트 선언 직후에 페론당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지만 어차피 페론당도 급진시민연합이나 페론당이나 각 계파별로 분열이 되어버렸으며 이후로 여러번 이합집산이 있어왔고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좌파정책을 내걸면서 높은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좌파 페론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는 성향이 있지만 이에 중도파와 우파 페론주의자들은 따로 정당을 차려서 출마하는 것은 여전했기 때문에 2019년 선거에서도 두개의 정파로 따로 출마했다. 흔히 '''페론당'''이라고도 한다.
흔히 아르헨티나를 망친게 페론주의라면서 까이기는 하지만 아르헨티나 현대사를 볼때 묘하게 페론주의자들이 경기침체나 인플레이션 등의 이유로 실각하고 비/반페론주의 정권이 집권했을때 페론주의를 청산한답시고 외채를 더욱 크게 불리면서 아르헨티나 경제가 더욱 망해버리는 바람에 페론주의 정당이 재집권 하고, 후임 페론주의 정권이 어쨌든 미봉책이라도 내서 경제위기를 수습을 하는것이 주 패턴이다. 외신에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기사를 낼때마다 반 페론주의 성향인 클라린이나 라 나시온의 기사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다음은 페론주의를 표방하는 페론주의 계열의 정당들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페론주의를 표방한다는점만 같지 각 정당들의 성향은 천차만별이라는 점에서 유의.
2. 역사
본래 후안 페론은 1945년에 노동당을 창당하였지만 당내에서 의견대립이 일자 1947년에 노동당을 해산하고 페론당을 새로 창당하였고 곧 집권당이 되었다. 이 시기에 압도적인 집권당이 되면서 페론주의의 틀을 이루는 정책들을 시행했지만 언론탄압이나 나치 인사를 받아들이는 문제때문에 욕을 먹기도 하였다.
여하튼 여성참정권 도입이나 노동자 권익 확충으로 지지기반은 탄탄했으나 에비타가 사망하고 후안 페론이 이혼 합법화 문제로 가톨릭 교회와 척을 지게 되면서 점차 인기를 잃게 되고 1955년의 쿠데타로 후안 페론이 실각하면서 정의주의자당도 불법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페론당의 지지기반이 위낙에 탄탄했던탓에 페론당의 재합법화 여론이 다시 일기시작하였고 1962년에 페론당원 중 일부가 그러나 페론당의 세가 다시 확장되어나가자 쿠데타가 벌어져서 1966년에 페론당은 다시 해산되었지만 게릴라전이 벌어지는 등 혼란이 이어져서 결국 협상을 통해 1973년에 페론당은 다시 합법화 되었고 1973년 캄포라 대통령이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임시 대통령직에 취임하면서 페론당도 다시 집권당이 되었고, 후안 페론은 그 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화려한 부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안 페론은 얼마 안가 사망하였고, 오일쇼크의 여파로 경제마저 어려워지고 구페론파 내의 계파갈등도 중재자가 사라지면서 극심해지는 등의 혼돈이 빚어졌지만 후안 페론의 세번째 아내였던 이사벨 페론은 이러한 내분과 경제위기에 대해 우유부단하게 대처하며 이 사태를 되려 악화시켰다. 그리고 1976년의 쿠데타로 페론당은 다시 불법정당이 되었고 페론당의 당원들 중 상당수가 군사독재정권이 행한 더러운 전쟁으로 많은 수가 사망하였고, 페론당 당원 중 상당수가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군부정권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배당한 후로 결국 민주화 조치를 받아들이며 다시금 합법정당이 되었고 급진시민연합이란 양당체제를 구축했지만 1983년 대선에서 급진시민연합의 라울 알폰신에 밀려버렸는데 이사벨 페론의 영향이 큰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라울 알폰신 정권이 임기 2기 중반부터 경제위기로 지지율이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하자 1987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기 시작한것을 기점으로 해서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알폰신이 조기 퇴진하자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 시리아 아랍인 출신인 카를로스 메넴이 당선되었다. 카를로스 메넴은 당초에 산업국유화 및 임금인상 조치등으로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약을 내세웠지만 이후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페소를 달러에 페그를 거는 태환화 정책과 대대적인 민영화 정책을 펴오며 우경화되었는데 페론당 내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심각한 문제점인 물가상승이 진정되었고 그에 따라 중산층의 구매력이 커졌기 때문에 1995년 대선에서도 압도적으로 재선하여 10년간 집권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영화 정책으로 실업률이 급속히 상승하는 등의 문제점은 있었고 1997년을 기점으로 아시아발 외환위기에 휘말리고 메넴 본인도 부패스캔들에 휘발리며 지지율은 낮아졌다. 결국 1999년 대선에서 두알데가 패배하고 급진시민연합의 델 라 두아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야당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2001년 경제위기로 델 라 두아 대통령이 조기퇴진하면서 급진시민연합이 몰락하고 대통령이 여러번 바뀌는 혼란이 펼쳐졌고 이 와중에 페론당은 다시 집권당이 되기는 했지만 페론당 역시 어디까지나 어부지리격으로 정권을 탈환한것이었을 뿐 지지율이 낮기는 매한가지인지라 정국의 혼란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두 알데가 들어서 경제는 그때부터 저점을 찍었지만 정치혼란은 극심하여 급진시민연합이든 페론당이든간에 여러명의 후보들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따로 출마하는 따로 국밥정당이 되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여려개의 정당으로 분당되었다. 그리고 200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페론당에서 3명의 후보가 따로 출마하면서 예상을 뒤엎고 카를로스 메넴이 1위를 차지하였지만 결선투표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70%를 넘어서자 그대로 사퇴하였고 키르치네르가 단독출마한 형태로 결선투표에서 찜찜하게 당선되었다. 어쨌든 여러 페론주의 정당들의 지원으로 당선되었지만 이후로 결별을 하여서 승리를 위한 전선 vs 타 정당의 구도가 형성되었는데 이때 대부분의 페론주의 세력들이 승리를 위한 전선에 그러다가 2015년 대선에서 경기침체의 여파로 근소한 표차이로 비 페론주의자 후보(마크리)가 당선되었다.
그렇지만 2017년 말 이후로 승리를 위한 전선과 연방주의 페론당간의 통합논의가 일고있다. 승리를 위한 전선과 연방주의 페론당이 따로 선거를 나갔고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도 따로 정당을 차려 나간결과, 중간선거에서 개혁을 위한 전선의 득표율이 페론당 자체에게 밀렸음에도 개혁을 위한 전선이 과반을 넘긴데다가 이후로 마크리가 연금개혁과 노동규제 완화, 공공요금 인상을 대대적으로 당행하면서 반발을 크게 샀고 선거 승리 이후로도 경기침체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점때문에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음에도 반사이득을 크게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통합이 잘 된다는 보장은 없기는 하다. 그랬다가 IMF 구제금융까지 신청하는 상황이 오면서 말 그대로 상황이 반전되었다. 하지만 각 대권주자에 대한 호불호가 위낙 심하다보니 통합대권후보를 낼수있을지는 미지수인 상황이었는데 어찌어찌 해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를 주측으로 연방페론주의자 일부와 승리를 위한 전선 등이 합쳐서 통합후보를 냈지만 여기서도 연방 페론주의자 일부는 따로 후보를 내기는 마찬가지였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예상을 깨고 예비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2019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