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키비아데스

 

Ἀλκιβιάδης / Alkibiades
(BCE 450 ~ BCE 404)
1. 개요
2. 일생
2.1. 초기 일생
2.2.1. 스파르타로의 망명과 시칠리아의 대재앙 (기원전 413)
2.2.2. 아테네로의 귀환 (기원전 411)
2.2.3. 키지코스 해전의 승리와 복귀 (기원전 410)
2.2.4. 노티움 해전의 패배와 몰락 (기원전 406)
2.3. 말년과 죽음
3. 평가
4. 그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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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키비아데스의 조각. 미남이었다는 생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1]

1. 개요


고대 그리스아테네의 정치가 · 웅변가 · 군인.
아테네의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제자로도 유명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는 그리스 전역이 그의 행적에 따라서 승패가 좌우되는, 정치가이자 군인으로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다. '''무려 아테네 → 스파르타 → 페르시아 → 아테네를 지속적으로 오가면서 그가 합류하는 곳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무엇보다도 아테네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인 동시에, 희대의 천재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누구보다 '아테네 사람'다운 아테네 시민이었고, 스파르타에 투항한 이후에는 누구보다 '스파르타 전사'처럼 검소했다. 아테네를 멸망시킬 전술들을 스파르타에 알려준 이후에도, 틈만 나면 돌아가서 아테네 시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을 알려주었다. 최종적으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마지막 순간에도 홀연히 나타나서 조언을 했지만, 아테네의 시민들은 그의 마지막 조언을 믿지 않았고, 패배한다.[2]
알키비아데스는 미청년이었고, 유능할 뿐 아니라, 쾌활하고 재기발랄하여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인기를 누렸다. 그는 아테네에 있던 시절에는 누구보다 많은 승리를 안겨준 천재였고, 스파르타에서도 누구보다 스파르타인 다웠기에 사랑받았다. 하지만, 그 이기적이고 오만한 성격 때문에 항상 불화를 자초했고, 끝없는 배신자의 행보 때문에 아테네가 쇠락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등 엇갈리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아테네는 그가 없을 때도 스스로 쇠락하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알키비아데스가 저지른 배신행위가 아테네를 패배시키긴 하였으나, 아테네라는 국가가 '전쟁'에서의 패배 요인들이었던 '오만함'은 아테네 시민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정들이었다. 인성에 대한 비판만큼이나 능력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기이한 인물이다.[3]

2. 일생



2.1. 초기 일생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스캄니다이 데모스 출신이며,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클레이니아스(Kleinias)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기원전 447년 경에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사망하자, 당시 3살 정도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외삼촌이었던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는 아테네 명문가 출신으로서 모자람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청소년 시기에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동성연인이 되었다. 그는 외모가 아름다워 많은 이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오로지 소크라테스만을 따랐다.[4] 두 사람은 곧잘 어울려 지냈으나,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아름다움을 함부로 탐하지 않았다. 알키비아데스가 자신의 스승을 끊임없이 육체적으로 유혹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끝내 이를 뿌리친 일화는 유명하다.[5]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32년, 소크라테스와 함께 포테이다이아를 상대로 한 전투에 참전하였다. 당시에 10대 후반의 나이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용맹히 싸운 끝에 전공을 세우고 상을 받는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 이때에 그는 부상을 입었으나, 소크라테스가 곁에서 알키비아데스와 그의 무기를 지켜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기원전 424년, 델리온 전투에서도 각기 기병과 보병으로서 참전하였다.[6]
알키비아데스는 명문가의 자제인 데다가, 부유했고, 페리클레스의 조카이자 소크라테스의 애제자였던 만큼 빽도 든든하였다. 더욱이 그는 외모가 수려하였고, 재능도 뛰어났다. 젊은 시절부터 전쟁터에서 용맹히 싸워서 공을 세운 데다가, 말솜씨와 웅변실력도 뛰어났으며, 성격도 재기발랄했으며 사교성이 넘쳤다.이처럼 그는 당시 아테네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릴만한 요소를 모두 갖춘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엄청한 배경과 타고난 능력은 도리어 알키비아데스로 하여금 지나치게 큰 야망과 오만을 품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는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격이 오만방자해지고 방탕해져서 주변에 적들을 수없이 만들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전차 경주에 손수 출전하여 우승을 하기도 했다. 원래는 전차 경주에 출전할 경주마들을 제공하는 마주(馬主)로만 참가할 생각이었는데,[7] 올림픽을 개인 선전으로 쓰려는 것 아니냐는 주위의 비판을 의식해서, 경주 직전에 본인이 직접 기수로 출전한 것이었다.
그는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채 정치가로서 승승장구하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었던 기원전 431년에 아테네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가 사망하자 니키아스와 더불어 아테네 정계에서 극단적 민주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2.2. 펠로폰네소스 전쟁



2.2.1. 스파르타로의 망명과 시칠리아의 대재앙 (기원전 413)


기원전 422년,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측의 대표적인 강경파였던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동시에 전사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듬해인 기원전 421년, 아테네의 니키아스는 아테네 민회를 설득하여 스파르타와의 평화 조약을 채결하였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서른 남짓한 나이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와의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아테네 호전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는 기원전 415년, 아테네 민회에 오늘날의 시칠리아에 위치한 도시국가인 시라쿠스를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시라쿠스는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을 뿐 아니라, 상업의 발달로 부를 누리고 있었으며 우수한 함대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스파르타와 군사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던 아테네에게 있어서 껄끄러운 존재였다.
결국 아테네 민회는 시라쿠스를 공격하기로 결정내렸고, 알키비아데스는 승승장구하여 시칠리아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특유의 오만방자한 성격 때문에 주변에 많은 정적들을 만들었던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알키비아데스의 원정 선단이 출정하기 전날 밤, 누군가에 의하여 헤르메스 신의 흉상을 모신 헤르메 기둥들이 조직적으로 훼손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그 죄를 알키비아데스에게 뒤집어 씌워버렸다. 더욱이 알키비아데스가 평소부터 같은 아테네인들은 물론이요, 신들까지 가볍게 취급하는 등 교만한 언행을 보여준 탓에 여론 또한 알키비아데스에게 적대적으로 변해갔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신성모독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만일 그가 재판을 받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아테네 본토에 발이 묶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그렇게 된다면 재판의 결과가 어찌되든 간에 그가 원정 함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점은 자명했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이때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를 "지금까지 준 피해보다 훨씬 큰 이익을 보게 해주겠다." 라는 식으로 설득했고 스파르타는 알키비아데스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한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는 철저하게 예전 아테네 방식의 삶을 버리고 스파르타인처럼 살아갔다 한다.
스파르타와 시라쿠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아테네의 공격에 대비하며 튼튼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그에 반하여, 아테네의 원정함대는 사령관이 적군에 붙어버리는 초유의 사태 때문에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매파인 알키비아데스를 대신하여 원정 함대를 지휘하게 된 니키아스는 근본이 비둘기파였던지라 전투에서 영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기원전 413년, 아테네의 함대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스를 공격했다가 패배하면서 4~5만에 달하는 병력 및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 등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조리 전멸'''하는 등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는 일명 '''시칠리아의 대재앙'''이라고도 불린다. 이 패배를 계기로 하여 아테네의 패권도 그 근본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였다.[8]

2.2.2. 아테네로의 귀환 (기원전 411)


알키비아데스의 배신으로 인하여 시칠리아에서 재앙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한 아테네의 정계는 크게 요동쳤다. 아테네는 남은 저력을 모두 끌어모아서 델로스 동맹이 와해되는 사태는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기원전 413~411년 사이, 페르시아 제국이 전쟁에 개입하여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에게 선박 건조 비용을 지원하기 시작했고,[9] 아테네의 종속국들 또한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하였다. 그로 인하여 해외에서 들어오는 수입원이 끊어지면서 아테네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하였다.
한편 알키비아데스는 제 버릇 개 못준다고 (…) 자신이 망명했던 스파르타에서도 악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초에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그들조차 놀랄 만큼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였으나, 곧 본색을 드러내어 스파르타 왕 아기스의 아내인 티마이아와 간통하였다가 발각당하고 만 것이다. 결국 그는 스파르타에서도 도망쳐서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였던 티사페르네스에게 의탁하고는 아테네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아테네 인들에게 민주정을 폐지하고 과두정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아나톨리아 서부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총독)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내겠다는 제안을 건냈다. 물론 이는 과두정 지지자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아테네로 귀환하려는 수작이었다. 민주정 체제하에서는 조국을 배반했던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411년, 경제적으로 핀치에 몰려있었던 아테네 민회는 어쩔 수 없이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에 따라 400인 회에 모든 권력을 양도하였다. 그에 따라 아테네에는 정변이 일어나 정치체계가 민주정에서 과두정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모스 섬에 주둔하고 있었던 아테네의 함대가 민주정을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과두정 성립은 불발되었다. 그에 따라 민주제-과두제의 절충형에 속하는 준과두정인 "5000인 회"가 성립되었다.
5000인 회는 이미 유능한 지휘관으로서 그 능력을 입증해보였던 알키비아데스 및 그와 함께 추방된 군지도자들을 다시 아테네로 불러들이고자 하였다. 기원전 411년에 키노세마 해전에서 아테네의 함대가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자, 알키비아데스 또한 아비도스 해전에서 함대를 거느리고 아테네를 지원하여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두 차례의 해전에서 아테네는 비록 페르시아군의 훼방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상대로 판정승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2.2.3. 키지코스 해전의 승리와 복귀 (기원전 410)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인들에게 선전했던대로, 페르시아를 아테네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의탁했던 아나톨리아 지역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인 티사페르네스와의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티사페르네스는 오히려 알키비아데스를 체포하여 사르디스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탈출에 성공하였고, 아테네는 어쩔 수 없이 페르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다시 한번 결전을 치러야 했다. 이 싸움이 바로 기원전 410년의 키지코스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아테네의 함대는 셋으로 갈라져 키지코스를 공략하고자 하였다. 이때에 알키비아데스는 과감하게도 20척의 함대를 거느리고 키지코스에 주둔하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유인하였다. 당시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총사령관이었던 민다로스는 이를 다급하게 추격하기 시작하여 만에 들어섰는데, 함선을 숨기고 매복해있던 트라시불로스와 테라메네스가 후방에서 이를 급습했다.
그러나 민다로스가 아테네 함대의 함정에서 빠져나와 지상에 상륙하자, 알키비아데스는 이를 뒤쫓아 지상전을 시도하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이는 그가 아테네로 무사히 복귀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눈부신 전공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트라시불로스와 테라메네스 또한 뒤이어 상륙하여 알키비아데스를 도왔다. 이들은 펠로폰네소스와 페르시아의 연합군을 공격하여 이를 크게 무찌르는 데 성공하였으며, 적군의 총사령관인 민다로스를 죽이는 등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알키비아데스는 키지코스를 점령하고, 펠로폰네소스의 지상군까지 격퇴하여 마르마라 해의 제해권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정박해있던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배들도 노획하였다. 이 화려한 공적 덕분에 알키비아데스는 약 2년 만에 아테네로 돌아갈 수 있었다.

2.2.4. 노티움 해전의 패배와 몰락 (기원전 406)


알키비아데스가 기원전 410년에 키지코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아테네에는 몇 가지의 변화가 일어났다. 아테네의 함대가 민주정으로의 복귀를 강하게 요구하면서 준과두정제였던 5000인 회는 다시 기존의 민주정 체제로 회귀하였다. 또한 그동안 아테네 측에 절망적으로 돌아가던 전세가 차츰 역전되면서, 아테네인들은 다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라고 해서 마냥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스파르타의 명장이었던 리산드로스는 소아시아 지역에 사트라프로 파견되었던 페르시아의 젊은 왕자 키로스를 구워 삶아서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아냈고, 이를 토대로 적극적으로 해군과 함대를 육성하며 아테네에 설욕할 기회만을 노렸다.
기원전 406년, 알키비아데스는 함대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신의 키잡이(부장)에게 함대를 맡기고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그런데 그 사이에 아테네 함대는 리산드로스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말았다. 아테네 인들은 그 패배의 책임을 함대의 책임자였던 알키비아데스에게 전가했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이로 인하여 다시 아테네에서 추방당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2.3. 말년과 죽음


두번째로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알키비아데스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갈리폴리 반도에 위치한 자기 소유의 토지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가 망명지에 머무는 동안, 아테네 함대는 아르기누사이 해전(기원전 406)에서 스파르타와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기원전 405)이 벌어졌고, 아테네 함대는 리산드로스가 지휘하는 스파르타 함대와 다시 맞붙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에 아테네군 진영에 들어가 장군들에게 적의 공격에 취약한 아이고스포타모이 대신에 세스토스로 기지를 옮길 것을 권하였다. 또한 그렇게만 해준다면 자신과 절친한 트라케 지역의 두 왕들로부터 지상군을 지원받아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리산드로스의 함대를 압박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수차례 허당에 가까운 짓을 저질렀던(…) 알키바아데스의 허풍 섞인 말을 아테네의 장군들은 쉽사리 신뢰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이 기회를 발판 삼아 다시 아테네 정계로 복귀하려 할 욕망을 품고 있다는 점 또한 간파하고 있었다. 이들은 속이 뻔히 보이는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 돌아갈 기회를 영영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아테네의 함대는 대패하였으며 아테네는 해상 제국을 유지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결국 아테네의 항복으로 끝을 맺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전쟁이 끝난 직후인 기원전 405년,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서 페르시아의 땅인 프리기아 지방으로 피신하였으나 그 해 살해당한다. 플루타크 영웅전에서는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가 프리기아 지역의 사트라프였던 파르나바조스에게 알키비아데스를 제거할 것을 청탁하였다고 전한다. 파르나바조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머물던 집에 불을 질렀고, 알키비아데스가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때에 단검을 든 암살자들이 그를 공격하였고, 화살이 날아왔다고 전한다. 아니면 전쟁에서 참패한 아테네인들이 배신자 알키비아데스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를 보냈을 수도 있다.

3. 평가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의 표본이라 할 만한 인물. 문무를 겸비했으며 군사적인 식견과 능력이 매우 뛰어났지만, 인격적으로는 결함이 너무 큰 것이 문제였다. 특히 고질적인 오만함과 이기심은 그 자신은 물론 자신의 조국까지 통째로 갉아먹었다. 아테네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
그의 유능함은 사실 의심할 만한 여지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파르타아테네 양측에 빛나는 대승을 안겨다주었다는 점을 보더라도 확실한 사실이다. 물론 오만하고 허세가 심하기는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능력을 지닌 뛰어난 지략가라는 점은 분명했으며, 필요할 때에는 놀라운 대담함과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알키비아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인물들 중에서도 특히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고, 덕분에 그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살아있었던 당대뿐 아니라 그 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실 그리스의 정치가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명문가의 자제였고, 다른 사람도 아닌 아테네의 영웅 페리클레스의 혈족이었기에 기본적인 배경이 빵빵하였다. 또한 당대의 기인이자 최고의 철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소크라테스가 가장 아끼던 제자 중 한 사람이었고, 지략과 용기 및 웅변술에서 무엇하나 뒤지지 않았다. 또한 그는 남녀 모두를 매혹시킬 만한 빼어난 외모와 재기발랄하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테네 대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인기를 얻으며, 가장 명예로운 선출직 중 하나였던 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또한 개인의 무력또한 상당히 뛰어났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조국을 배반'''하였다. 그는 성상을 파괴하고 신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하자[10], 그대로 스파르타 측에 붙었다.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게 '''시칠리아의 대재앙'''이라 불리우는 씻을 수 없는 참패를 안겨다 주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한때 해상의 패자로 군림했던 아테네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이전의 위상을 다시는 되찾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알키비아데스가 보여준 이후의 행보도 그야말로 배신과 통수의 연속이었다. 결국 조국을 버리고 선택한 스파르타에서도 사고를 치자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로 망명하였고, 마지막에는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연결을 도모하며 자신이 무참히 짓밟았던 조국 아테네의 정계로 복귀하여 정치적으로 재기하려고 하는 등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테네의 역사가였던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책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어떤 조직이나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이유는 다 사람 때문이다."라는 말을 덧붙이며, 알키비아데스를 아테네 몰락의 원흉이라 비판하였다. 그는 알키비아데스의 재능이 뛰어다나는 점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성심과 양심이 결여된 채, 오로지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그가 조국을 배신하여 결국 파멸로 몰아넣은 점은 아테네인이었던 투키디데스에게 있어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었을 것이다. 당장 시칠리아 원정의 참패만 아니었어도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최소한 지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패배의 주 원인은 알키비아데스의 배신이었다.
그에 반하여, 로마 오현제 시기의 철학자였던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그의 출중한 능력을 좀 더 부각시켰는데 이는 외국인으로써 어차피 알키비아데스의 매국행위에 아테네인만큼 분노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또한 알키비아데스 본인이 매국노로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여기저기 붙었고,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건 제3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흥미로웠을 것이다.

4. 그 외에


알키비아데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결국 사형을 선고받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알키비아데스가 그의 제자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그가 사형을 선고받을 당시에 제시되었던 죄목 중 하나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었다.[11]
소크라테스의 또다른 제자인 플라톤 또한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저서인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문답을 다루고 있는데, 대체로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통해 알키비아데스에게 질문을 던지고 문제를 자각하게 하는 형식을 띄고 있다.[12] 또한 《향연》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친구들과 함께 연회와 담소를 즐기고 있는 와중에 술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난입하여 소크라테스에게 장난을 걸기도 하고 대화에 참여하여 토론을 나누기도 한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 두각을 나타내기전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수간, 양성애 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 변태 색골로 묘사되며, 게임이 암피폴리스 전투 전후로 메인 스토리가 끝나기 때문에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넘나들며 대활약하는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소크라테스에게 플러팅을 하거나 주인공에게 가지가지 수상한 의뢰를 하며 자신이 출세할 수 있도록 아테네 정치판을 은근하게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 조각 하단에는 "알키비아데스 / 클레이니아스의 아들 / 아테네인"이라고 쓰여 있다. 다만 해당 조각 자체는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클레이니아스의 아들' 부분이 Κλ'''ει'''νιου가 아닌 κλ'''ι'''νιου라고 쓰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대에 이미 ει 음가가 '에이'가 아닌 현대 그리스어와 동일한 '이'로 단순화 되었고, 당대인들도 혼동했다는 증거중 하나다.[2] 알키비아데스가 추방자의 입장이었음에도 거들먹거리며 다시 아테네의 정치인으로 복귀하려는 철면피 태도를 보였고, 그 전투 이전에도 태만했던 경력이 있어서 추방되었으므로 시민들이 그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3] 덤으로, 아테네 시민들이 쫓아낸 걸물들이 스파르타나 페르시아 쪽에 붙어서 아테네를 공격하는 사건은 역사적으로 한두 번이 아닌 흔한 일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서 쫓겨난 수많은 능력자 중에서도, 유독 시대를 좌우할 수 있었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서 화가 되었던 인물로서 보는 관점도 존재한다. 물론, 인성에 대한 비판은 빠지지 않지만.[4] 『항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에 대한 알키비아데스의 집착은 상당했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질투가 워낙 심해서, 그와 만난 이후로 잘생긴 청년과 대화를 나누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당시에 두 사람은 거의 20년이나 되는 나이차이가 있었음에도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의심하여 때리기까지 했다.[5] 이처럼 청소년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지혜로운 이에게 육체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대신에, 지혜와 지식을 전수받는 동성애적 교육방식은 고대 아테네 문화에서 일상적인 것이었다.[6] 알키비아데스는 포테이다이아 전투에서 상을 받을 당시, 장군들에게 소크라테스에게도 상을 내려 줄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또한 델리온 전투 당시에는 아테네 군이 후퇴할 당시에 소크라테스가 침착하게 행동한 덕분에 후방이 안전해졌고 회고하며 이를 칭송하기도 하였다.[7] 고대 올림픽의 전차 경주는 우승마의 기수뿐만 아니라 마주에게도 월계관을 수상하도록 되어 있었다.[8] 알키비아데스의 배신도 대재앙의 이유 중 하나였지만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트롤링에 가까운 니키아스의 행동이었다'''. 당초 알키비아데스가 기획한 시칠리아 원정군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니키아스는 원정을 철회시키기 위해 시칠리아의 국력을 과장하고 필요한 원정군의 규모를 부풀린 것을 아테네 민회가 모조리 받아들이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시칠리아 원정은 아테네의 모든 국력을 쏟아부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확장됐다. 이 때 니키아스는 시칠리아 기병의 강함을 강조했지만 막상 원정군의 지휘를 맡게되자 기병 확충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도 소극적인 전술로 일관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양군이 대치할 때 지원군으로 도착한 데모스테네스는 과감하고 유능한 지휘관으로, 야습을 통해 시칠리아군의 방어진을 돌파하려했지만 지형 미숙으로 실패하자 시칠리아를 점령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군대를 철군시키려 했다. 그러나 니키아스는 자신이 실각할까봐 철군에 반대했고 그 사이 시칠리아군이 아테네 함대를 봉쇄해버렸다. 니키아스는 이후에도 점성술을 믿고 철군을 미적미적 미뤘는데 그 사이 시칠리아군은 봉쇄를 더욱 공고히 한 반면, 봉쇄당한 아테네군의 사기는 갈수록 땅에 떨어졌다. 마침내 아테네 함대가 시칠리아 함대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면서, 시칠리아 원정군이 전멸하는 대참패를 맞게된 것이다.[9] 이는 아테네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로 강력한 해상 제국을 건설하여 아나톨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한 아테네는 페르시아에게 있어서는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10] 그런데 실제로 이런 혐의를 날조해 정적을 숙청한 사례가 그리스에 꽤나 많은데다 알키비아데스 자체가 정적이 많은 사람이라 죽을 게 확실하다고 여겨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11]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하고 패권을 상실한 책임을 돌릴 희생양으로서 죽었던 까닭도 없지 않다.[12] 다만 알키비아데스는 위작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플라톤이 직접 저술한 작품으로 간주되었을 만큼 뛰어난, 그랬을법한 위작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이 알키비아데스에 대해 가질법한 생각이 반영되었다고 보면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