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베게너
1. 개요
독일의 기상학자이자 지질학자.
2. 탄생과 기상학자로서의 생애
1880년, 독일 제국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유능한 기상학자였으며, 같은 기상학자 블라디미르 쾨펜(Wladimir Peter Köppen,1846 ~ 1940)[1] 의 사위이기도 하다. 장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유명한 기후학자여서 1906년 26살 때 그의 형과 함께 세계 최초로 기구를 이용해 북극 상공의 대기를 관측했고, 같은 해에 그린란드 탐험대에 합류하여 연과 기구 등을 이용하여 대기를 관측했다. 이후 1913년 쾨펜의 딸과 결혼을 하고,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베게너는 독일 제국군 육군 예비역 보병 장교로 소집되어 전투를 하다가 몇 달 후 군대 기상관측을 하게 되고, 이 동안 대륙이동설에 대한 뒷받침이 되는 자료들을 조사한다.
3. 대륙이동설
1912년에 그는 <대륙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글을 독일지질학회지에 게재하고, <대륙의 기원>이라는 책을 내면서 대륙이동설을 처음 알렸다. 이어 1915년에 낸 <대륙과 해양의 기원>에서 그는 과거에 존재했던 판게아라는 초대륙이 분열되어 현재의 대륙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발견이었지만, 그 당시의 지질학자들의 반응은 "너 바보지?"였다. 당시 지질학계에서는 동물의 화석이 두 대륙간에 같이 발견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설을 제기하였는데,
- 동물들이 나무토막 등으로 이동했다는 표류설
- 과거의 대륙 사이에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져 있었다는 징검다리설
- 그리고 대륙과 대륙 사이에 좁은 길이 육교처럼 나 있어서 동물들이 다른 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는 육교설[2]
1930년 11월 1일, 죽기 바로 하루 전에 찍은 사진. 왼쪽이 베게너, 오른쪽은 덴마크인 라스무스 빌룸센(Rasmus Villumsen). 다음 날, 둘은 조난당했고 6달이 지나서야 시체로 둘 다 발견되었다. 베게너는 만 50번째 생일을 지낸지 하루만에 숨을 거두었고 빌룸센은 겨우 23살이었다.
베게너의 사망 소식에 많은 이들이 그의 기상학자로서의 업적을 찬양했지만, 대륙이동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이 멍청해서 대륙이동설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아니고, 결정적인 이유는 베게너가 "그럼 대륙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서이다. 베게너의 주장은 밀도가 비교적 낮은 대륙층(SIAL-layer)이 밀도가 더 높은 하부층(SIMA-layer) 위를 '미끄러져'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엄청난 에너지가 요구된다. 당시 베게너의 학설로는 이 에너지가 어디서 어떻게 공급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헤스와 다이츠에 의해 맨틀대류를 바탕으로 맨틀물질이 해령을 축으로 옆으로 확장되어서 해양지각을 형성하며 이 지각은 판 경계에 위치한 해구에서 섭입한다는 내용인 해저확장설이 발표된다. 그 후 발전된 고지자기 연구를 통해 해저에서 해령을 축으로 한 자기 역전 방향의 대칭성이 나타난다거나, 거리가 멀수록 두꺼워지는 해저 퇴적물의 두께, 해양지각의 나이를 조사하면서 해령에서 멀어질수록 연령이 높아진다는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은 점점 설득력을 얻게 된다. 지질학자들이 그토록 공격했던 "어떻게 대륙이 움직인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온 것이다. 지각이 맨틀 위에 떠서 움직인다는 판구조론은 지질학의 혁명이었으며, 1960년대 후반에는 모든 학자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일본에서 나온 학습 애니메이션 미미의 컴퓨터 여행(ミームいろいろ夢の旅(원제목은 미무와 여러가지 꿈의 여행)/1983. 한국에서는 1986년에 KBS-1에서 방영했다.)에서도 그를 다룬 바 있는데 마지막에 개썰매를 타고 눈보라를 괴롭게 가다가 조난당해 얼어죽은 시체로 발견하여 묻혀지는 게 나온다. 그리고 미미의 내레이션으로 그가 재평가받고 대륙이동설은 정설로 인정받게 됐다고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