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데지레 랑드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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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4월 12일 ~ 1922년 2월 25일 (52세)
20세기 초반의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자. 살던 지역과 범죄 수법, 외모에 빗대어 '강베의 푸른 수염(Le barbe-bleue de Gambais)'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공소 노동자, 어머니는 재단사라는 평범한 노동 계급 출신이었다. 가톨릭계 미션 스쿨에 다녔지만, 학업 욕구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한다. 졸업 후 기술 교육 과정에 참가해 제도 등을 배우고 건축 회사에 취직해 근무하다가 1887년 프랑스군에 입대해 부사관으로 복무했고, 1891년에 명예 제대했다. 제대 후에는 이렇다 할 고정 직업 없이 가구 판매업과 부동산 중개업 등을 하면서 사촌과 동거하며 딸 하나를 뒀고, 이후 정식 결혼해 아이 셋을 더 뒀다.
부양 가족이 늘었지만 벌어들이는 수입은 여전히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랑드뤼는 주로 과부들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내는 식으로 밥벌이를 했다. 하지만 이것도 곧 덜미를 잡혔고, 랑드뤼는 숱하게 경찰서를 들락거리다가 1900년에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 때문에 아내와도 별거했고, 출소 후에는 중고 가구 매매상으로 일하며 근근이 살았다.
이전에 저지른 어설픈 사기 행각 대신, 랑드뤼는 본격적으로 돈을 뜯어낼 계획을 세웠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남성들이 군에 입대해 전선에 투입되고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기 시작하자, 그가 과거에 사기 대상으로 삼은 과부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들 중에는 재혼을 원하는 이들도 많아서, 신문 광고란에 인적 사항을 적고 배우자를 구하는 것에 착안해 역으로 과부들을 유인하는 계획을 세웠다.
랑드뤼는 여러 가지 가명을 사용해 광고란에 자신을 '좋은 수입과 형편을 갖고 있지만 아내를 최근에 잃고 두 아이들과 살고 있는 40대의 홀아비'로 소개하고, 재혼을 강하게 바라고 있다고 하며 주로 전사자들의 과부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로 경제 사정이 좋은 과부들만 골라서 위장 결혼한 뒤, 그들을 몰래 독살해 시신을 태워 없애고 과부들 몫의 유산을 자신이 남편 신분으로 상속받는 형태로 가로채는 잔혹하고 비열한 방법이었다.
1915년 1월부터 파리 경찰서에는 과부들이 주기적으로 행방 불명 혹은 사망 신고가 접수되는 것을 수상하게 여겼는데, 다만 당시 전쟁 상황이었고 열악한 식량과 연료 배급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수사 단계까지 가지는 않았다. 설령 수사까지 갔다고 해도, 누구나 가명으로 낼 수 있던 당시 신문 광고의 특성 상, 가해자가 누구인 지 특정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큰 성과는 없었다.
1916년 8월 실종된 셀레스틴 뷔송의 여동생이 사라진 언니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도중, 이전에 한 번 만난 적 있던 언니의 새 남편이 뭔가 수상해 보였음을 기억하고 경찰서에 수사를 요청해 랑드뤼는 1921년 4월에 일단 횡령 혐의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뷔송의 여동생은 랑드뤼가 단순 사기범이 아니라 살인범일 거라며 살인에 대해서도 수사해 달라고 탄원했지만, 랑드뤼가 묵비권을 행사했고 랑드뤼의 자택 압수 수색 과정에서도 실종자들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살인 혐의에 대한 수사는 답보 상태였다.
하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실종 처리된 다른 과부들의 친족들이나 지인들이 계속 제보하고 신고하면서 몇 가지 유력한 단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경찰이 랑드뤼의 자택을 압수 수색하다가 신문에 내기 위해 쓴 가명 목록이 기입된 종이 조각을 발견했는데, 한 번 사용한 가명의 중복 사용을 피하기 위해 사용 순서와 대상을 적어놓았기 때문에 랑드뤼가 살해한 피해자들의 인적 사항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 랑드뤼가 입을 열지 않자, 경찰은 랑드뤼의 주변인이나 거래한 적 있는 상인들을 상대로 탐문 수사를 벌여 랑드뤼가 소유하고 있던 파리 북부 클리시의 창고를 발견해 압수 수색했고, 여기서 피해자들의 의류와 가구를 비롯한 소지품을 찾아냈다.
랑드뤼에게 살해당한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과부들이었지만, 재혼하며 데려온 아들과 미혼 여성도 한 명씩 포함되어 있다.
1921년 11월, 랑드뤼는 검찰에 살인죄 11건과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초반에는 일부 물증만 있고 가장 중요한 희생자들의 유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랑드뤼 측은 횡령 혐의는 일부 인정했지만 살인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인했다. 클리시의 창고에서 발견된 희생자들의 옷가지나 가구에 대해서도 중고 가구업자로 출처 불명의 장물을 습득해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강변하며 완강히 저항했지만, 재판부는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사형 판결을 내렸다.
재판 후반에 랑드뤼는 자신의 변호인에게 자택의 부엌을 정교하게 그린 그림을 건넸는데, 시체 유기에 대해 직접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림에 '소각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븐을 설치했다'는 내용의 문장을 기입했다. 변호인은 이것이 랑드뤼가 자신의 범행을 간접적으로 자백한 것으로 여겼고, 이 그림은 1967년 12월에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랑드뤼의 처형은 1922년 2월 25일에 베르사유에서 단두대로 집행되었다. 랑드뤼의 머리는 이후 방부 처리되어 보존되다가 미국 할리우드의 죽음의 박물관(Museum of Death)에서 사들여 전시하고 있다. 찰리 채플린의 살인광시대는 오슨 웰스가 이 사건을 소재로 집필한 시나리오를 매입해 제작한 영화로, 채플린이 연기한 연쇄살인범 주인공의 이름은 앙리 베르두라는 가상 인물로 바뀌었다.
'''Henri Désiré Landru'''"소각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븐을 설치했다."
1869년 4월 12일 ~ 1922년 2월 25일 (52세)
1. 개요
20세기 초반의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자. 살던 지역과 범죄 수법, 외모에 빗대어 '강베의 푸른 수염(Le barbe-bleue de Gambais)'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생애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공소 노동자, 어머니는 재단사라는 평범한 노동 계급 출신이었다. 가톨릭계 미션 스쿨에 다녔지만, 학업 욕구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한다. 졸업 후 기술 교육 과정에 참가해 제도 등을 배우고 건축 회사에 취직해 근무하다가 1887년 프랑스군에 입대해 부사관으로 복무했고, 1891년에 명예 제대했다. 제대 후에는 이렇다 할 고정 직업 없이 가구 판매업과 부동산 중개업 등을 하면서 사촌과 동거하며 딸 하나를 뒀고, 이후 정식 결혼해 아이 셋을 더 뒀다.
부양 가족이 늘었지만 벌어들이는 수입은 여전히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랑드뤼는 주로 과부들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내는 식으로 밥벌이를 했다. 하지만 이것도 곧 덜미를 잡혔고, 랑드뤼는 숱하게 경찰서를 들락거리다가 1900년에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 때문에 아내와도 별거했고, 출소 후에는 중고 가구 매매상으로 일하며 근근이 살았다.
3. 연쇄살인
이전에 저지른 어설픈 사기 행각 대신, 랑드뤼는 본격적으로 돈을 뜯어낼 계획을 세웠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남성들이 군에 입대해 전선에 투입되고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기 시작하자, 그가 과거에 사기 대상으로 삼은 과부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들 중에는 재혼을 원하는 이들도 많아서, 신문 광고란에 인적 사항을 적고 배우자를 구하는 것에 착안해 역으로 과부들을 유인하는 계획을 세웠다.
랑드뤼는 여러 가지 가명을 사용해 광고란에 자신을 '좋은 수입과 형편을 갖고 있지만 아내를 최근에 잃고 두 아이들과 살고 있는 40대의 홀아비'로 소개하고, 재혼을 강하게 바라고 있다고 하며 주로 전사자들의 과부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로 경제 사정이 좋은 과부들만 골라서 위장 결혼한 뒤, 그들을 몰래 독살해 시신을 태워 없애고 과부들 몫의 유산을 자신이 남편 신분으로 상속받는 형태로 가로채는 잔혹하고 비열한 방법이었다.
1915년 1월부터 파리 경찰서에는 과부들이 주기적으로 행방 불명 혹은 사망 신고가 접수되는 것을 수상하게 여겼는데, 다만 당시 전쟁 상황이었고 열악한 식량과 연료 배급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수사 단계까지 가지는 않았다. 설령 수사까지 갔다고 해도, 누구나 가명으로 낼 수 있던 당시 신문 광고의 특성 상, 가해자가 누구인 지 특정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큰 성과는 없었다.
1916년 8월 실종된 셀레스틴 뷔송의 여동생이 사라진 언니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도중, 이전에 한 번 만난 적 있던 언니의 새 남편이 뭔가 수상해 보였음을 기억하고 경찰서에 수사를 요청해 랑드뤼는 1921년 4월에 일단 횡령 혐의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뷔송의 여동생은 랑드뤼가 단순 사기범이 아니라 살인범일 거라며 살인에 대해서도 수사해 달라고 탄원했지만, 랑드뤼가 묵비권을 행사했고 랑드뤼의 자택 압수 수색 과정에서도 실종자들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살인 혐의에 대한 수사는 답보 상태였다.
하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실종 처리된 다른 과부들의 친족들이나 지인들이 계속 제보하고 신고하면서 몇 가지 유력한 단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경찰이 랑드뤼의 자택을 압수 수색하다가 신문에 내기 위해 쓴 가명 목록이 기입된 종이 조각을 발견했는데, 한 번 사용한 가명의 중복 사용을 피하기 위해 사용 순서와 대상을 적어놓았기 때문에 랑드뤼가 살해한 피해자들의 인적 사항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 랑드뤼가 입을 열지 않자, 경찰은 랑드뤼의 주변인이나 거래한 적 있는 상인들을 상대로 탐문 수사를 벌여 랑드뤼가 소유하고 있던 파리 북부 클리시의 창고를 발견해 압수 수색했고, 여기서 피해자들의 의류와 가구를 비롯한 소지품을 찾아냈다.
4. 희생자들
랑드뤼에게 살해당한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과부들이었지만, 재혼하며 데려온 아들과 미혼 여성도 한 명씩 포함되어 있다.
- 잔마리 퀴셰 (1915년 2월 피살)
- 앙드레 퀴셰 (잔마리 퀴셰의 아들. 1915년 2월 피살)
- 테레제 라보르드린 (1915년 6월 피살)
- 마리앙젤리크 귀앵 (1915년 8월 피살)
- 베르트안나 에옹 (1915년 12월 피살)
- 안 콜롱 (1915년 12월 피살)
- 앙드레안 바블레 (유일한 미혼 여성. 1916년 4월 피살)
- 셀레스틴 뷔송 (1916년 8월 피살)
- 루이조제핀 좀 (1917년 11월 피살)
- 안마리 파스칼 (1918년 4월 피살)
- 마리테레즈 마르샤디에르 (1919년 1월 피살)
5. 재판과 처형
1921년 11월, 랑드뤼는 검찰에 살인죄 11건과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초반에는 일부 물증만 있고 가장 중요한 희생자들의 유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랑드뤼 측은 횡령 혐의는 일부 인정했지만 살인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인했다. 클리시의 창고에서 발견된 희생자들의 옷가지나 가구에 대해서도 중고 가구업자로 출처 불명의 장물을 습득해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강변하며 완강히 저항했지만, 재판부는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사형 판결을 내렸다.
재판 후반에 랑드뤼는 자신의 변호인에게 자택의 부엌을 정교하게 그린 그림을 건넸는데, 시체 유기에 대해 직접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림에 '소각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븐을 설치했다'는 내용의 문장을 기입했다. 변호인은 이것이 랑드뤼가 자신의 범행을 간접적으로 자백한 것으로 여겼고, 이 그림은 1967년 12월에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랑드뤼의 처형은 1922년 2월 25일에 베르사유에서 단두대로 집행되었다. 랑드뤼의 머리는 이후 방부 처리되어 보존되다가 미국 할리우드의 죽음의 박물관(Museum of Death)에서 사들여 전시하고 있다. 찰리 채플린의 살인광시대는 오슨 웰스가 이 사건을 소재로 집필한 시나리오를 매입해 제작한 영화로, 채플린이 연기한 연쇄살인범 주인공의 이름은 앙리 베르두라는 가상 인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