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1세
Henry I
프랑스 왕국의 국왕. 카페 왕조의 3대 왕.
로베르 2세와 아를의 콘스탄스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다. 형 위그는 공동 왕이었으나, 1025년 사망하여 왕이 되지 못했다. 그의 치세 내에서 중요한 일은 어린 나이에 서자로써 작위를 상속받았던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귀족들을 정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욤 2세가 강성해지자 프랑스의 왕위를 노릴까봐 경계했던 그는 1054년과 1056년에 전투를 펼쳤으나 패하고 말았다. 거기다 그 기욤 2세는 나날이 승승장구하고 엄청난 행운들로 1066년 브리튼 섬으로 건너가서 노르만 왕조를 건국하는 윌리엄 1세가 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를 성립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밖에도 교황과 대립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 압박을 가해 로렌 지방 탈환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왕령은 고작 수도 파리 주변과 오를레앙에 그쳤다. 1060년 비트리오로그에서 사망했다.
또, 지금에 와서 보면 잘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이 당시 '''프랑스는 우크라이나에게 문화적으로 무시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앙리와 결혼하여 프랑스로 시집 온 우크라이나의 전신인 키예프 공국의 공녀 안나(А́нна Яросла́вна, Anne de Kiev; 1024~1075)가 자기 아버지 야로슬라프 1세한테 '''프랑스는 주택들이 음침하고, 성당은 초라하며, 풍습은 혐오스러운 야만국'''(...)이라는 문구가 적힌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1] 사실 이것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으로, 당시 키예프는 동로마 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화려한 문화적 전성기를 꽃피우고 있었다. 파리를 비롯한 서유럽의 본격적인 전성기는 약간 더 후대인 12세기쯤부터 시작되는데, 반대로 키예프 공국은 그 때부터 쇠퇴하다가 13세기에 몽골의 침공을 맞아 멸망해버린다.
[1] 게다가 남편인 앙리 1세는 아내와는 달리 글을 몰랐으며 더 가관인 건 저렇게 무시한 프랑스가 그나마 서유럽에선 가장 문화가 발달한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