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파사레야

 

'''다니엘 파사레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아르헨티나'''}}}
{{{-2 32대
'''우루과이'''}}}
{{{-2 51대


'''클럽'''





'''다니엘 파사레야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78'''
'''1986'''

''' 아르헨티나의 축구감독 '''
''' 이름 '''
'''다니엘 파사레야'''
'''Daniel Passarella'''
''' 본명 '''
다니엘 알베르토 파사레야[1]
Daniel Alberto Passarella
''' 출생 '''
1953년 3월 25일 (71세)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자치시 차카푸코
''' 국적 '''
아르헨티나
''' 신체 '''
173cm
''' 직업 '''
축구선수 (수비수[2]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아르헨티노스 주니오스 (1968~1971 / 유스)
CA 사르미엔토 (1971~1973)
리버 플레이트 (1974~1982)
ACF 피오렌티나 (1982~1986)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86~1988)
리버 플레이트 (1988~1989)
''' 감독 '''
리버 플레이트 (1989~1994)
아르헨티나 대표팀 (1994~1998)
우루과이 대표팀 (2000~2001)
파르마 칼초 1913 (2006)
CF 몬테레이 (2002~2004)
SC 코린치안스 (2005)
리버 플레이트 (2006~2007)
''' 국가대표 '''
70경기 22골 (아르헨티나 / 1976~1986)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별명'''
위대한 주장 (El Gran Capitán)

1. 개요
2. 축구인 생활
2.1. 선수
2.1.1. 클럽
2.1.3. 플레이 스타일
2.2. 감독
3.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축구선수 출신 감독. 2006년부터 2007년까지 CA 리버 플레이트 감독을 맡았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생후 25년 31일만에 월드컵 타이틀을 얻은 주장이 되었다. 이것으로 바비 무어의 25세 109일 기록을 경신했으며, 현재까지도 역대 최연소 월드컵 우승팀 주장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2. 축구인 생활



2.1. 선수



2.1.1. 클럽


파사레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위치한 축구클럽인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에 같은 곳에 위치한 클럽인 CA 사르미엔토에서 프로 데뷔전을 가졌다. 처음 두 시즌동안 유망주 대접을 받으며 1군의 부름을 받지 못하다가 3번째 시즌부터 주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36경기에서 9골을 터뜨리는 맹활약을 한다. 그후 파사레야는 1974년에는 CA 리버 플레이트에 입단하고 첫 시즌에는 첫 시즌은 22경기 5골로 무난한 성적을 보낸다. 1975년에는 35경기 24골을 넣으며 미친 득점력으로 주목을 받았고,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에서 모두 우승해 아르헨티나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우뚝선다. 파사레야는 1982년까지 팀에서 1975, 1977, 1979, 1981년에 걸쳐 통산 4회의 리그 우승을 했고 리버 플레이트에서 통산 226경기 90골을 기록하였다. 이후 파사레야는 세리에 A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하는데, 당연히 파사레야는 주전이었고 맹활약을 하지만, 아무래도 당시 피오렌티나는 강팀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리그는 겨우 5위에 UEFA컵에 나가서 광탈당한다. 다음 시즌은 무려 3위까지 올라가지만 또 무관에 그친다. 그 다음 시즌인 1984-85시즌에는 당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하나인 소크라치스가 피오렌티나로 이적하는데, 그 시즌에 9위를 하고 만다. 그 당시 세리에 AAC 밀란부터 시작해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토리노 FC, SSC 나폴리, 우디네세 칼초 등 각 스타들이 이끄는 강팀 천지였다. 그래서 그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파사레야는 세리에 A와는 맞지 않았나 보다. 1986-87시즌에는 인테르가 디에고 마라도나SSC 나폴리에게 밀려 3위를 하고, 다음 시즌에는 AC 밀란에게 우승을 또 뺏긴다. 파사레야는 결국 자국으로 돌아가 리버 플레이트에서 1년 더 뛰다가 1989년 현역은퇴를 선언한다.

2.1.2. 국가대표


그의 첫 월드컵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었다.​ 당시 1978년 월드컵 이전의 아르헨티나의 상황은 참담했다. 자국 내에 독재 정부가 들어와 계엄령을 선포하며 아르헨티나의 사회 분위기는 살벌했다. 국민들은 군사정권에 대해 불만감을 품기 시작하고 독재를 했던 비델라 정부는 이를 모면하기 위해 관심을 돌리게 할 기회를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침 그 때 열린 자국에서의 월드컵이다. 비델라는 월드컵이 열리기 무려 3년전부터 자국선수들의 해외진출을 금지시키고 발렌시아 CF에 있던 마리오 켐페스는 임대료까지 쓰며 아르헨티나로 데려와 연습을 시켰고 홈 버프의 효과는 과연 있을지 궁금했다. 참고라 당시 프란츠 베켄바워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 몇몇이 군사정권에 반대하며 참가를 아예 거부했다.[3] 파사레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주장완장을 차고 참가한다.
비델라는 사실 본선에서 승부조작에 까지 관여했다. 아르헨티나는 조별예선에서 헝가리, 프랑스, 이탈리아와 한 조가 되었는데 헝가리와 프랑스를 심판 매수로 아주 얍삽하게 이긴다.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는 2명이나 퇴장당했고 헝가리 감독은 '''"심판이 열 두 번째 선수 같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했고 2라운드에서는 승부조작의 극을 달렸다. 브라질은 2승 1무로 경기를 모두 마치고 아르헨티나는 1승 1무로 아직 한경기를 남겼을때 였다. 남은 한경기는 페루와의 경기였고 이 경기에서 이겨도 승점이 동점이기 때문에 골득실이 좋은 브라질이 올라가게 되었다.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상대로 4:0으로 승리해야 했다. 이 때 비델라는 손을 썼고 경기 상황이 안 좋던 페루 정부에게 3만 5천톤의 곡물과 5천만달러를 무상지원 해준다. 그리고 페루는 테오필로 쿠비야스를 포함한 주전 4명을 빼고 경기했다. 경기는 6:0으로 아르헨티나의 승리였다... 참고로 페루는 당시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1라운드에서는 네덜란드도 꺾고 1위로 올라온 팀이기에 의혹 제기는 계속 됐다. 어쨌든 그렇게 결승에서 네덜란드를 만났다. 결승에서는 마리오 켐페스의 두 골로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자국의 첫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린다. 이렇게 승부조작으로 얼룩진 대회에 파사레야는 올스타팀에 선정된다.[4]
[image]
'''월드컵 우승을 자축하는 파사레야'''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도 주장 완장을 차고 파사레야는 참가했다. 이번엔 진짜 자신들의 힘으로 조별예선 1라운드에서 2승 1패로 올라온다. 파사레야는 온두라스전에서 페널티 킥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공격진은 당시 최고였다. 지난 우승의 주역 마리오 켐페스와 신예 디에고 마라도나가 버티는 최고의 공격듀오, 거기에다 후방의 파사레야까지 그러나 2차 리그에서 브라질, 이탈리아와 한조가 되었고 두 경기에서 모두 패배해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는 허무하게 2차 리그에서 탈락하고 만다.
사실 1982년도 당시 아르헨티나포클랜드 전쟁 중이였다. 때문에 선수들은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가기만 하면 포클랜드 전쟁에 대해서 묻는 기자단에 둘러싸여 하루종일 방에서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래도 1라운드에서 그런 성적을 거둔것은 정말 대단하다. 그래도 파사레야는 이탈리아전에서 프리킥 골을 넣는등 활약했고 수비력 역시 좋았고 파사레야 만큼은 실력이 진짜배기라는것을 확실히 보여줬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예선에서 본선 진출을 이끄는 결승골을 넣는 등의 활약으로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부상으로 인해 벤치를 지키면서 마라도나와 함께 뛰는 일은 없었다.[5] 결국 대회내내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지만, 마지막 월드컵에서 우승을 맛보며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2.1.3. 플레이 스타일


키는 173cm로 중앙 수비수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신장이었으나 그것을 커버할 만큼 뛰어난 도약력과 지능적인 수비 지휘 능력, 그리고 전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상대에게 쫄지 않고 과감히 덤벼드는 투지를 지녔다. 사실상 신체조건만 뺀다면 당대 수비수들 중에서 여러 방면으로 고루 우수한 모습을 보여주던 수비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남미베켄바워'''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으니...
격렬하고 과감한 대인 방어는 물론이고, 지능적인 위치 선점 및 공간 장악, 그리고 캡틴이라는 직에 걸맞게 수비진을 진두지휘하는 능력 등 수비수로서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수비는 물론이고 공격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특히 왼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킥력은 그야말로 일품. 프리킥은 물론이고 페널티 킥 등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파사레야의 왼발에서 시작되는 오버래핑 및 세트 피스 시의 공격 가담은 당시 아르헨티나 공격의 핵심 루트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 정교함과 강력한 위력을 자랑했다. 그만큼 공수 양면에 걸쳐서 전반적으로 우수함을 보여주었고, 골 넣는 수비수로서의 면모까지 부각되었다.[6]
게다가 주장직에 걸맞게 정신력과 팀워크 또한 강인해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진두지휘하는 데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당대 그의 카리스마는 마라도나의 등장 이전까지 대표팀 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사실상 당시 감독인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가 파사레야를 중심축으로 하여 아르헨티나의 전술과 팀워크를 구상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2.2. 감독


1989년 은퇴 후에 리버 플레이트의 감독으로 부임, 1989-90, 1991-92, 1993-94 시즌 우승을 했다. 미국 월드컵이 끝난 이후부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 감독이 되었고, 1996년 하계 올림픽에서 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나이지리아와의 결승전에서 2-2로 비기고 있다가 90분에 골을 내줘 패배했다.
1998년 FIFA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8강전에서 네덜란드에게 2-1로 패했다. 당시 너무나 엄격하고 규율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었기에 많은 선수들과의 반발 및 불화가 있었고, 그로 인해 팀 케미가 어수선한 적이 있었기에 논란이 일었다.[7] 결국 월드컵이 끝나고 그는 감독직에서 사임하였다가, 이후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선수 차출 문제로 2002년 FIFA 월드컵 지역예선 때 감독직을 사임했다. 2001년엔 파르마 FC의 감독이 되었으나 좋은 성적을 내는데 실패했다. 2003년에 CF 몬테레이의 감독이 되어 리그 컵을 우승했다. SC 코린치안스 파울리스타의 감독이 되었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해임당했다. 2006년 1월 9일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돌아왔으나 2007년 10월 15일 사임했다.

3. 이야깃거리


[1] 아르헨티나에서 쓰는 스페인어로는 다니엘 파사레샤에 가깝다.[2] 센터백, 스위퍼.[3] 크루이프는 가족 납치때문에 충격을 받아 불참했다.[4] 하지만 대회 때 아르헨티나가 우승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일등공신이다. 파사레야가 있었기에 당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은 든든한 수비와 더불어 뛰어난 파사레야의 후방 공격 전개로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만일 파사레야가 없었더라면 아르헨티나의 우승도 없었을 것이다.[5] 당시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이후 새로 부임한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은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전술을 짰는데, 나이가 거의 많이 든 파사레야에서 이제는 마라도나에게로 서서히 주축이 기울어지는 터라... 게다가 오스카 루게리 등의 활약으로 파사레야의 공백을 메우게 되면서 결승까지 무난히 진출했기에 파사레야는 조명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안습.[6] 당시 A매치 70경기에 22골, 수비수로서는 흔히 내기 어려운 득점 기록이다. 게다가 그가 선수 생활 내내 뛴 기록은 통산 451경기 175골... ㅎㄷㄷ 수비수로서는 가장 많은 골을 넣은 것이다. 다만 후에 이 기록을 깰 또 다른 네덜란드산 수비 본좌가 새로 나타내는데...[7] 당시 반발한 주축 멤버는 페르난도 레돈도, 클라우디오 카니자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등. 이유는 선수들의 두발을 짧게 깎으라는 감독의 지시를 불이행했기 때문에(...)... 이후에 바티스투타가 감독의 뜻에 굽혀 머리를 짧게 깎는 단발령#s-1까지 불사하여 국대 승선에는 성공했으나, 레돈도와 카니자는 끝까지 지시를 불이행하여 결국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