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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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물 소개
야율배는 요태조 야율아보기의 장남이자 요태종 야율덕광의 형이다. 아버지 야율아보기에 의해 태자로 책봉되었고 926년 발해 멸망 당시에도 아버지, 동생과 함께 종군했으며 이후 동란국의 왕으로 책봉되었다. 왕이 되었을 때의 봉호는 인황왕(人皇王)이었다. 이후 동생 야율덕광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리며 황제에 오르지 못했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동란국왕의 직위를 버리고 후당으로 귀순했다. 후당으로 귀순한 이후엔 이찬화라는 중국식 이름을 하사받았는데 936년에 후당에서 정변이 일어나 그에 휘말려 암살되었다.
이후 그의 운구는 요나라로 돌아왔는데 그의 아들 요세종이 직접 변경에서 호위해서 모셔왔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로 추숭되어 의종이라는 묘호를 받고 문헌흠의황제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그 뜻은 "책을 무척 사랑한 황제"라는 뜻이다. 실제로 야율배는 굉장한 다독가였다고 한다. 그의 능은 현릉(顯陵)으로 불리며 현주 봉선군의 의무려산에 그 능이 있다고 한다.
2. 행적
<요사>에 따르면 본래 야율배는 성품이 부드러웠으며 사냥을 싫어하고 독서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의무려산 꼭대기에 집을 한 채 지었는데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 하여 망해당(望海堂)이라고 명명하고 그곳에 무려 수만 권의 책을 비치했다고 한다. 이런 야율배의 성품은 유목민족이었던 거란족과는 맞지 않았지만 한족 문화에 심취해 있던 아버지 야율아보기는 독서를 좋아하는 야율배를 특히 총애하여 태자로 삼았고 발해가 멸망한 이후엔 동란국의 국왕으로 앉혔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야율배가 다음 보위에 오르는데 초석이 되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즉, 한마디로 야율배는 차기 황제 1순위라는 걸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개선하는 길에 갑자기 죽으면서 상황이 급작스럽게 바뀌었다. 어머니 술률평은 야율아보기와 달리 야율배의 동생 야율덕광을 총애하였다. 그 이유는 야율덕광은 유목민족인 거란족 출신답게 성품이 호방했으며 사냥을 좋아하고 전투를 잘 하는 사람이었는데 야율배는 앞서 말했듯이 좀 성품이 유약했으며 사냥을 싫어하고 독서를 좋아하며 한족 문화를 숭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술률평은 야율배가 황제가 되면 거란족의 전통이 흔들린다고 판단하여 야율덕광이 황제가 되도록 힘을 썼고 결국 야율배는 황제가 되지 못했다.
이후 황제의 자리에 오른 야율덕광은 형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인지 928년에 동란국을 상경 용천부에서 동평부로 천도하게 했다. 이에 야율배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결국 930년에 후당으로 귀순하게 된다. 후당의 명종은 야율배의 귀순을 받아들였으며 그에게 국성인 이 씨 성을 하사하고 찬화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이찬화라는 이름으로 후당의 장수가 되어 회화절도사(懷化節度使), 단주관찰사(瑞州), 신주관찰사(慎州觀察使)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당시 중원은 5대 10국이라는 혼란기에 빠져 있었고 결국 936년에 후당에서 정변이 일어나 멸망하게 되는데 그 때 이찬화 즉, 야율배 역시 이종가에게 피살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 야율완(耶律阮)이 수습하여 직접 호위하며 요나라로 모셔왔다고 하며 그가 책 수만 권을 비치했을 정도로 좋아했던 의무려산에 능을 조성하고 장사지냈다고 한다. 이후 야율완이 황제가 되자 의종으로 추숭되었다. 여기서 야율완이 바로 요나라의 제3대 황제가 되는 세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