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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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폴리스 건립 이전의 현풍 분지의 전경[출처] 초곡산성이 있는 능선에 위치한다.
1. 개요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양리를 중심으로 위치하는 신라의 고분군. '양동 고분군'이라고도 하지만 통상 '양리 고분군'이라고 불린다.
2. 조사내용
비슬산에서 뻗어나온 서쪽 능선의 척릉(脊稜)을 따라서 분포한다. 해발고도 300~500 m에 걸쳐서 군집을 형성하는데, 신라 고분군 중에서는 굉장히 높은 곳에 조성되어 이례적이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2005년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현황을 파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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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녕 양식 토기[1] 과 지금 달성군의 화원유원지가 있는 성산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토기양식과는 달리 달성군의 유가읍, 현풍읍 일대에서 다소 양상이 다른 토기 양식이 나타난다. 00지역 양식 신라토기의 존재는 역시 별도의 토기 생산과 유통망을 지니고 의례적으로도 같은 범주에 있다고 판단되므로 현풍지역에 별도의 정치체, 내지는 구분되는 집단으로 존재하였다고 상정했다.
참고로 고분이 형성된 분지에는 유가읍과 현풍읍이 있지만, 학계에서 이 지역을 부를 때는 관용적으로 '현풍 지역'이라고 표현한다.
통상 양리 고분군의 토기 양식은 '현풍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양식의 가장 특징은 돌출된 톱니 모양 장식이다. 기형상으로는 신라토기, 논자에 따라서는 창녕 양식 신라토기의 기형을 닮았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톱니모양의 돌출된 장식은 정말 딱 현풍 지역에서만 나오는 것이라서 유물의 수량적으로나 정식 발굴조사상[2] 으로나 양식을 설정함에 무리가 다소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풍 양식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고배뿐만 아니라 기종적으로도 영배(鈴杯)라고 불리는 토기와 특유의 뚜껑 장식 등을 지역적으로 공유하는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위의 맥락에서 문헌에 등장하는 비지국의 존재를 양리 고분군과 결부하기도 한다. 한편 각주에 있듯이 창녕 지역 즉, 비자벌 세력과의 관련성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비지국, 비자벌 참조.
양리 고분군에는 신라 고분 약 6백여 기가 있지만, 정식 발굴된 것은 없고 대부분 도굴로 이미 털린 상태다. 그래도 나름 고총 고분군답게 지름 20 m를 넘는 대형분들이 일부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지역에서 '팔장군묘'라고 부르는 고분도 있다. 큰 무덤 8기가 있다고 팔장군묘... 뜬금없겠지만 고구려 장군총의 네이밍이 이런 식이라고 보면 된다.
정식 발굴조사가 없는 상황에서 지역양식을 설정하고 집단을 상정하다보니 학계에서도 다소 관심이 없지만, 엄연히 고총고분군이며 지표조사상으로도 밝혀진 내용이기 때문에, 추가로 정식 발굴조사를 하면 가치가 재조명될지도 모른다.
3. 초곡산성
양리 고분군의 뒤로는 배후산성으로 초곡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통용되는 명칭이 꽤나 많아서 양리산성ㆍ양동산성ㆍ초곡산성ㆍ와우산성 등으로도 불린다. 여기서는 지표조사 내용을 참고로 초곡산성이라고 지칭한다.
통상 삼국시대의 고분군들은 산성 같은 성곽과 같이 형성됨이 특징이다. 초곡산성 또한 통상 그런 맥락에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3] 엄연히 따져보면 산성 내부에 고분군이 형성된 점은 보통의 삼국시대 산성+고분군 조합과는 맞지 않다. 산성은 삶의 공간이고 고분군은 죽음의 공간으로 구분되는데, 그 고분군이 성곽 안에 있음은 지금의 초곡산성이 삼국시대 것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전형적인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테뫼식 산성형태와 초곡산성은 차이가 있다. 신라의 산성은 보통 평탄면을 포함하면서 그 바운더리를 따라서 성벽이 진행하는 것이 특징인데, 초곡산성은 성 중앙에 산의 정상부 즉, 툭 튀어나온 지형을 포함하여 형성되어, 일반적인 삼국시대 테뫼식 산성과는 다르다.
이는 비슬산, 유가읍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조선시대 의병장 곽재우와 관련된 활동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성벽의 축조 양태 또한 전형적인 삼국시대의 산성의 성벽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오히려 그다지 가공되지 않은 석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성벽 축조양상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