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국
1. 개요
比只國
원삼국시대 변한(弁韓) 지역에 있던 소국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이나 고고학적으로 볼 때 신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진한 계열이었다거나, 둘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다는 주장도 있는 등 많은 부분들이 불명확하다.
삼국 시대 경상남도 창녕군 지역에 있었던 정치체가 창녕 척경비(昌寧 拓境碑)에는 비자벌, 삼국사기 본기에는 비지국,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비자화, 일본서기에는 비자발, 삼국유사에는 비화가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불사국(不斯國)으로 나오는데, 모두 비자국을 가리키는 듯하다. 창원에 있었다고 보는 설[1] 과 경주시 안강읍에 있었다는 설도 있으나 대체로 창녕이라고 본다.
삼국유사에서 '6가야'를 소개할 때 가락국기의 6가야와 본조사략[2] 의 6가야를 동시에 소개하는데, 가락국기의 6가야가 교과서에도 있는 잘 알려진 그 6가야고 본조사략 버전에서는 소가야가 빠지고 비화가야가 들어간다. 과거의 교과서적 통설에서는 가락국기의 6가야만 소개하기 때문에 비화가야라는 이름은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 국명 명칭
삼국사기 지리지의 경우는 비지화에서 화(火)는 '불'로 발음되기 때문에 결국은 창녕 척경비에 나타나는 비자벌(比子伐), 일본서기의 비자발과 같은 음가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비자벌, 비사벌, 비자발, 비화(火), 비지 등의 음가를 추정해보면, 고유어 '빛'과 벌판 및 고을, 나라를 나타내는 고어인 '벌', 즉 '빛벌'이 원래 뜻이자 음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순우리말로 따지면 빛의 벌판, 빛의 땅, 빛나는 벌판, 빛의 나라와 같은 의미이다. 고대에는 여러 자연물로서 국명을 삼은 사례가 많은데, 비사벌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외에 구야국(개), 압독국(닭?[3] ), 계림(닭), 비지국(빛), 다벌 · 달구벌(닭), 고자국(자연 지형인 곶 + 성 및 나라를 뜻하는 잣) 거칠산국(거친산, 거친뫼 나라), 안라국(아시량, 아라 = 알), 등이 이러한 당대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이후 경덕왕 대에 이르러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치면서 창녕군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고려 시대를 거쳐 화왕군이 되었다가 지금은 다시 창녕군이 되었다. 이 창녕과 화왕이라는 지명도 고유어 '빛벌'의 중국식 표현이다. 昌寧의 창성할 昌자, 그리고 화왕군의 火는 불빛, 벌판 등을 상징하므로 빛벌이라는 고유어를 반영한 듯한 표현이다.
이렇게 치면 현재 대구, 현풍, 창녕 일대에 있는 화왕산, 비슬산은 모두 이 비자벌과 관련된 이름인 셈으로, 특히 현풍과 창녕, 청도에 걸쳐 있는 비슬산은 '빛벌'이라는 당대의 국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름일 것이다(빛벌, 빛산).
3. 역사
이미 음즙벌국, 실직국, 우시산국 등을 점령해 삼척부터 울산, 부산까지 지금의 경상도 동해안 지역을 장악한 지 6년 만인 신라(사로국) 파사 이사금 29년(108)에 다시 영역 확장에 나섰다.
비지국이 위치한 창녕 지역은 북으로는 반로국(후의 대가야), 남으로는 안야국(후의 아라가야) 등이 있는 요충지인데, 이후 삼국사기 기록들을 보면 신라가 가야 계열 국가들과의 본격적인 힘 싸움을 위해 창녕 땅을 교두보로 삼고자 점령한 듯하다.29년(108년) 여름 5월에 홍수가 나서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10도(十道)에 사자를 보내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군사를 파견하여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쳐서 병합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본기, 파사 이사금
나라 자체는 신라의 침공 한 방에 세트로 망한 세 나라 중에 비지국도 있다 하는 정도로 듣보잡이지만, 문헌 기록과 달리 고고학 자료로 본다면 듣보잡 수준은 아니다. 창녕 지역에는 지역군별로 봉분 직경 10 m 이상의 고총 고분이 산재했는데, 창녕 박물관 뒤에 있는 교동 고분군만 보아도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정도 고분이 계성 고분군, 송현동 고분군, 영산 고분군 등 구역별로 있다. 금동관 관모, 금제이식, 환두대도 등의 위세품과 토기류 등도 수백점에서 수천 점 이상이 매납되었다. 현재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로는 신라가 가야를 정복하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려고 창녕 지역에 지원을 많이 했다고 추정한다. 훗날 신라 진흥왕이 정복한 뒤 창녕 척경비를 세워 역사학계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4. 고고학적으로 본 비지국
다른 가야도 마찬가지지만 비지국에 대한 사료는 더더욱 빈약하기 때문에 기존의 문헌사 연구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그렇지만 최근 고고학의 눈부신 발전과 성과로 인해서 여러 가야국의 국가상이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창녕 지역은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위 역사로 보면 그냥저냥 신라에 빨리 복속되어 없어진 소국으로 나온다. 정말 몇 안 되는 사료로 엄청난 사료 비판과 역사상을 도출해내자면, 비지국은 4세기 중후엽에는 존재했다는 것이며(신공 황후기 가라 7국 평정 기사에 비자발로 나오기 때문), 창녕 척경비가 세워지는 6세기 중엽에는 신라화된 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임나의 멸망을 전하는 일본서기의 흠명 23년(562) 1월 기사를 보면 임나를 10개 국가로 소개하는데, 거기에는 창녕 지역을 이르는 비자발이 빠져있다. 즉, 6세기 중엽 이전에 다른 가야보다 먼저 신라화가 된 것은 확실한 셈이다. 문헌사로는 이토록 일본서기의 신공 황후기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도 이 정도로밖에 비지국을 밝혀낼 수 없다.
이를 종합해보면 어쨌거나 비지국은 신라와 그 주변 국가와 대비되는 '가야'의 일원으로 인식되었으며 어느 시점에 이르러 신라화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사실만 건져낼 수 있다.
반면 고고학적으로 일제 강점기때부터 폭넓게 창녕 분지의 고분이 조사되고 있었고, 영남 각지, 그리고 일본 열도에서의 발굴(!)로 고고학 자료로서 비지국의 양상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비지국의 고고학적 양상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비지국이 자리잡은 창녕 지역의 지정학적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창녕 지역의 입지를 보면 알겠지만 낙동강 동안에 길게 자리잡은 중하류 유역의 요충지이면서, 각각 고령의 반파국, 합천의 초팔국 혹은 다라국, 함안의 안라국과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접해있다. 그러면서도 동쪽의 대구, 청도, 밀양과는 비슬산과 화앙산이라는 높은 산으로 단절된 것이 특징이다.
지금은 북쪽의 교동 송현동의 창녕 중심지와 대비되는 남쪽 중심지가 남지읍이지만, 남지읍의 평야 자체는 일제 강점기 때 제방을 쌓으면서 생긴 땅으로, 삼국 시대에는 이곳에 너른 벌판이 형성되지 않았으며 당연히 대형 고분군은 축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북서쪽에 일제강점기까지 존재한 영산군의 읍지인 현 영산면 일대가 당시부터 조선시대, 일제강점기까지 교동 - 송현동과 대비되는 중심지였다.
이하에서는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비지국의 양상에 대해서 서술하도록 한다.
4.1. 4세기 대의 비지국
금관국, 안라국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삼국 시대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들이 국가 체계를 정비한다고 믿어지는 4세기 대의 자료가 부산, 김해 일대를 제외하고는 빈약한 편이다. 이는 다른 정치체들이 정체됐다기 보다는 현재까지 발굴 자료의 편중 현상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녕 지역 또한 확실치 않은데 창녕 곳곳에서 채집되는 토기와 비슬산 건너편의 청도 이서 지역 토기를 통해 4세기 후엽부터 창녕의 독자적인 양식이 존재한다고 알려지고 있다(박천수 1992년, 2010년).
특히 이 시기의 고배는 이단 일렬 투창 고배로 흔히 범영 남양식 또는 함안 양식으로 분류되는 것이지만, 세밀하게 관찰하면 뚜껑받이 턱의 모양이 다르고 투창의 비율과 소성도가 다르다는 점을 들어 박천수는 4세기 후엽 대의 창녕 양식 토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학설은 만만치 않은 비판을 받고 있으며, 과연 범영 남양식, 즉 함안 양식으로 분류되는 토기군과 엄밀한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전자의 학설에 따르면 4세기 중엽 시점에 김해와 함안과 구분되는 창녕 지역만의 독자적인 토기 양식이 성립한 셈이된다. 즉 김해와 함안이라는 양대축과 함께 독자적인 축을 이루는 가야가 바로 비지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학설에 따르면 범영 남양식 토기권의 하나의 권역에 불과하게 되며 진, 변한 출신의 소국 가운데서는 여전히 금관국의 우위 속에 존재한 소국으로 해석된다. 또 이를 함안 양식 토기로 볼 경우 금관국과 경쟁하던 안라국의 관계망에 소속된 소국으로 보게 된다.
이와는 별개로 경북대 이희준 교수는 모두가 인정하는 창녕 양식의 토기, 즉 대부분의 연구자가 5세기 대로 편년하는 토기들이 실은 4세기 후엽으로 소급되며[4] 이미 4세기 후엽에 빠르게 신라화된다고 보고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금관국의 주요 관계망 속에 속해 있던 낙동강 중하류역을 강하게 압박했고, 나아가 금관국의 유력 배후지인 동래 복천동 고분군에도 신라의 압박, 또는 신라화가 이루어졌다. 심지어 4세기 말에는 낙동강 하류의 서안인 김해 가달 지역에도 계통 불명의 이동양식 토기가 출토되며[5] . 이 정도로 금관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기 때문에 금관국이 왜국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한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6]
또 최근 청도 이서 지역의 성곡리 고분군이 대량으로 조사되면서 비슬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창녕과 청도 이서 지역이 200년에 걸쳐서 토기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청도 지역 답사를 통해서 토기를 채집하고, 청도 지역 기관이 소장한 토기를 실견한 연구자들(대표적으로 박천수 1992년)에 의해서 어느 정도 예견된 사실이었는데, 성곡리 고분군의 대량 발굴로 양 지역이 아주 밀접한 사이에 있다는게 증명된 셈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창녕 군립 도서관 예정 부지인 창녕 동리 유적에서 4세기 ~ 5세기 대 전엽의 목곽묘와 창녕 양식 토기가 다량으로 조사 되었다 따라서 4세기 대 비자국과 청도 이서 지역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을 뒷 받침하게 된다. 따라서 4세기 전중엽에 김해의 금관국과 부산의 독로국이 동맹이나 연맹을 형성했듯이 , 4세기 후엽에는 청도 이서 지역의 이서국과 창녕 지역의 비지국이 일종의 연맹을 형성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른다면 삼국사기 신라 본기 초기 기록에 나오는 이서국의 침략에는 사실 비지국의 게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4세기 전중엽 : 기존 함안 양식, 혹은 범영 남양식의 토기가 출토됨. 즉 이때는 비지국이 돌출된 정치체로 등장하지는 않음.
4세기 후엽 : 함안 양식에서 분화된 지역 양식 토기의 탄생[7] , 즉 비지국의 출현. 비슬산 너머 이서국과 정치적 동맹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임.
4.2. 5세기 대의 비지국 : 신라화? 혹은 독자 노선?
다른 지역도 그렇지만 5세기 대에는 고고학적 양상과 변화가 비교적 선명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여러 학설이 중구난방으로 제기되고 있어 비지국의 역사상, 나아가 신라, 가야의 전체적인 역사상을 복원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이 시기가 되면 직선화된 삼단대각에 이단 교호 투창이 뚦린 토기, 그리고 그 뚜껑에는 유충문이 시문되고 꼭지는 마치 고배 대각을 축소시켜 달아놓은 듯한 대각도치형 꼭지가 달린 고배를 표지로 하는 창녕양식 토기가 출현한다. 그리고 소성은 짙은 회청색이 대부분인 다른 지역 양식 토기와는 달리 흑회색으로 짙고 어둡게 된 것이 특징이다. 이 고배뿐만 아니라 장경호, 영배 등 특징적인 기형을 많이 띄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가 5세기 대에 창녕만의 독특한 양식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특히 이단투창 고배를 보면 경주 양식 토기와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실제로 갖다놓고 보면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이희준 교수는 자신만의 소급되는 편년안과[8] 문헌사와의 접목을 통해 이 시기에 완전한 신라화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특히 본인의 이동 양식 토기(창녕 양식이 아무리 독특해도 결국 이단 교호 투창이라는 이동 양식에 속한다) + 고총(눈으로 식별되는 고대한 봉토) + 신라식 위세품(태환이식, 출자형 금동관, 삼엽 환두 대도 등...)으로 대표되는 신라 마립간기의 지방 고분의 전형적인 사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유충문이나 대각도치형, 그리고 소성색깔의 특이함은 경주에서 지리적으로 먼 창녕 지역의 지역색이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
이희준 교수의 편년안과 역사상은 결국 자신의 황남대총 연대론 및 신라 국가의 3대 요소와 결부시켜 해석된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가 추구하는 문헌사와의 접목도 무시할 수 없는데[9] , 비지국은 다벌국, 초팔국과 함께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문헌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서기 신공 황후기의 가라 7국 평정 기사를 주체 교체론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때 369년쯤 근초고왕의 가라 7국을 나타낸 것으로 보면, 그 당시에 가라 7국의 일원으로서 비자발이 등장하고 있다. 즉, 이희준 교수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비지국 정복 시기는 가라 7국 평정 이후, 즉 4세기 후엽 이후로 보고 있으며 5세기에 이르러서는 고총과 신라식 위세품, 그리고 이동 양식 토기가 체현되고 있으므로 창녕이 신라화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정통적으로 영남 지역 고분의 연대론을 주장해온 부산대 쪽 편년안은 황남대총 남분의 연대를 5세기 중엽에 보는 관점에 서서 창녕 고분들을 편년하고 해석을 하고 있다.
특히 창녕 지역은 북쪽의 현풍과 중부의 교동 - 송현동 고분군, 남쪽의 영산 고분군으로 크게 3등분 할 수 있는데, 고분의 편년상 이 지역 최대 고분은 5세기 전엽 영산 지역에 축조되다가, 그 다음 시기에는 교동 - 송현동 고분군으로 옮겨간다. 즉, 비지국을 이루던 여러 세력 가운데 교동 - 송현동 연합 세력이 5세기 중엽이 되면 완전한 우위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 편년안에 따르면 5세기 중엽에는 완전한 창녕 양식 고배로 볼 수 있는 대각도치형 뚜껑이 출현하며, 각종 토기에 신라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출자형 금동관, 은제 삼엽과판 허리띠 등 신라식 위세품이 출토된다. 즉, 신라화가 진행되면서 교동 - 송현동 세력이 영산 세력에 비해 우위를 점한 것으로 이는 신라화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즉, 신라가 창녕 지역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강력한 세력인 영산 세력보다는 교동 - 송현동 세력을 후원하면서 이러한 사례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듯 창녕 지역의 중심지 이동에는 신라의 지방 지배와 관련되어 있다.
5세기 후엽이 되면 교동 - 송현동 고분군 세력의 지속되는 우위속에 각종 토기 양식들에게서 경주 양식이라 할 수 있는 요소들이 강하게 나타난다. 신라식 위세품과 무기류, 마구류 등도 계속해서 출토된다. 따라서 아무리 늦게봐도 이 시기가 되면 신라의 지방으로 편제되었다고 좋을 정도이다.
그러나 경북대 박천수 교수는 5세기 중엽, 후엽에 거쳐서 신라식 위세품과 토기의 신라 양식화가 나타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창녕 세력, 즉 비지국이 독자적으로 활약했다고 보고 있다. 그의 근거는 이러하다. 4세기 후엽과 5세기 전엽에 거쳐서 주변 지역에서 나타나는 신라 토기화가 나타나기보다는 오히려 창녕 양식 특유의 독자적인 스타일이 창안된다. 앞서 설명한 4세기 후엽 함안 아라가야 양식과 구분되는 독특한 이단 일렬 투창 고배라든지, 5세기 전엽의 유충문의 등장, 그리고 5세기 중엽의 대각도치형 꼭지라는 독특한 지역 요소가 계속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김해 가달이라든지 낙동강 하류역과 건너편의 합천 옥전 고분군, 함안 도항리 고분군에 이 독특한 창녕 양식 고배가 이입되고 있으며, 심지어 낙동강 하류역을 지나 거제, 남해, 마산, 심지어는 전라남도 해남(!)까지도 창녕 양식 토기들이 출토됨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그리고 후속된 연구를 통해서 창녕 양식 토기들이 일본 열도(!!!)에 광범위하게 출토됨을 자료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는 창녕 세력이 낙동강 중하류역, 당시에는 고 김해만에서 조금만 들어오는 기수역, 즉 해상 교통로의 이점을 살려서 남해안의 여러 정치체와 그리고 바다 건너 왜까지 직접 교역한 증거로 보고 있다. 비록 5세기 중후엽이 되면 신라식 위세품이나 신라 토기의 요소들이 도입되는 점 등 신라색이 강해지고 있지만 게속해서 독자적인 대외 교류의 흔적이 관찰된다는 점과 독특한 스타일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와 구분되는 비지국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아마 이 비지국은 독립된 정치체와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신라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아 대 가야 교섭, 일본 교섭 창구[10] 를 담당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6세기 초까지 일본에 창녕 양식 고배들이 출현하고, 창녕에는 녹나무제 목관 등 일본계 문물이 보인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교역 행위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박천수의 견해에 따른다면 4세기 후엽 안라국, 금관국, 사로국과 구분되는 토기 양식을 가진 비지국은 신라의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6세기 초까지 독자적인 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신라는 비지국을 아주 중시 여겼는데, 대 가야 진출 창구일 뿐만 아니라 비지국 자체가 남해안, 대일본 교섭에 직접 행할 정도로 해상 교역 집단이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 대체로 백제와 가야, 특히 금관국 그 이후로는 반파국과 친했기 때문에 신라로서는 일본과의 교섭과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일본은 물론 건너편의 다라국, 안라국, 그리고 남해안 일대의 정치에와 폭넓게 교섭하던 비지국을 중시 여겼을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비지국에 대한 박천수 교수의 학설은 비지국 고고 자료에 대한 폭넓은 관찰(청도 이서 지역, 창녕 지역의 채집품뿐만 아니라, 남해안, 심지어 일본 열도 자료까지)한 것에 기반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사로국에서 신라로 나아가는 주요 고고학적 표징인 신라식 위세품과 이동 양식 토기화, 고총화라는 단단한 큰 그림을 깨지 못하고 있다. 즉, 이희준 교수나 경남 지역 연구자들은 창녕 지역의 신라화를, 신라화가 나타나는 가운데 관찰되는 광역적인 현상에 주목해서 설명하고 있고, 박천수 교수는 창녕 문화의 특징을 강조하면서 이를 반박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여기서 여러 논자들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은 무리지만, 절충해서 받아들이자면 비지국이 가진 위상은 해상 교역 집단으로써 만만치 않았으면서, 특히 낙동강 동서 지역을 컨트롤할 수 있는 교두보라는 점에서 신라에 중요하게 인식된 지방이었다. 이것이 4세기 후엽에 일찍 신라화가 되었던, 아니면 5세기 중엽에 거쳐서 신라화가 되었던, 6세기 이후에 신라화가 되었든 간에 이 위상은 변하지 않는다.
4.3. 6세기 : 비지국의 신라화
다른 가야는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는 표현이 옳지만, 비지국에 대해서는 조금 애매하기 때문에 신라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6세기 전엽을 지나면 거의 모든 연구자가 고고학적 지표로 볼 때 비지국이 완전히 신라화되었다고 본다[11] 그러나 앞선 시기에 비지국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해상 교역 집단으로서의 기능 덕분에 신라로서는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 위상이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6세기 중엽 신라 척경비에서는 이 지역의 지도자가 신라 외위의 5위 중 무려 2위에 해당하는 '술간'으로써, 그것도 두 명씩이나(!!)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창녕의 지정학적 중요성(대 가야 교두보, 낙동강 교역망의 교두보, 그리고 박천수 교수의 말에 의하면 해상 교역지)로 인해서 당시 신라에 있어서 비지국, 창녕 지역이 얼마나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척경비의 이러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진흥왕 대에 주, 군현제를 받아들이면서 새로 진출한 서울 지역에는 신주(新州), 그리고 고신라 지역인 영남 지역과 새로 진출한 신주를 연결하는 교두보인 현재의 상주(尙州)에는 상주(上州)를, 그리고 비지국이 있던 영토에는 하주(下州)로 편재하여 창녕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과도 연결시켜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다.
참고로 창녕 분지의 북부인 현풍 지역은 UFO 형태의 개꼭지와 구슬 방울이 들어가 소리를 내는 영배, 핑킹 가위로 오린듯한 문양이 덧붙여진 독특한 토기 문화와 양리 고분군이라는 나름대로의 거대한 고총 문화가 관찰되기 때문에 독립적인 정치체, 즉 가야 소국으로 보기도 하며(박천수 교수), 그렇지 않더라도 창녕 정치체에는 속하면서도 어느 정도 구분되는 소별읍 정도로 보기도 한다(이희준 교수, 김용성 원장).
4.3.1. 관련 문서
[1]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옛날에 창원이라고 표기된 적 있었는데 현재는 창녕군에 있었다고 쓰여져 있다. 위키백과에서 오타로 창원이라고 쓰여졌고,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못 알려지기도 했었다.[2]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옛 역사서로, 현존하지 않는다. 고려시대 초중기에 나온 역사서로 가야에 대한 기록도 어느 정도 있었던 듯하지만, 삼국유사 이외에는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3] 압량으로 된 기록도 있는데, 들보 량(梁) 자가 닭을 상징하는 고유어 '독'의 음가를 가진 이두이기 때문이다. 울돌목이 울 명(鳴) 자에 들보 량 자를 써서 명량이 된 것을 생각하면 쉽다. 울돌목의 돌은 문(門)을 뜻한다.[4] 이희준 교수는 범 신라 양식이라 볼 수 있는 낙동강 이동 양식 토기의 개시 시점을 약 50년 정도 올려보는 입장이다. 창녕 양식 토기를 4세기 후엽으로 보는 것도 실은 이와 관련되어 있다[5] 박천수는 이를 구체적으로 창녕 양식 토기로 분류하였다, 물론 시기는 5세기 전엽이다[6] 이처럼 고고학에서는 고분의 편년과 한 지역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역사상에 판이하게 달라진다. 지금 영남 지역의 고분 편년안이 해결되어야 할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7] 이에 대한 반론이 많음[8] 애초에 황남대총 남분을 5세기 초의 내물왕릉으로 보고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가 5세기 중엽의 눌지왕릉으로 보고있는 것과 비교된다. 이희준 교수의 각 지역 편년안과 해석을 볼 때는 이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9] 역사 고고학은 문헌사와 유리시킬 수 없기 때문. 실제로 고고학의 성과가 아무리 뛰어나도 문헌사를 무시할 수 없고 대부분의 연구자는 문헌사의 연구 성과를 구체화시키거나 비판하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10] 김해 죽곡리 유적 출토 왜계 갑주의 경우 비자국 세력의 영향에 의해 유입 된 것으로 보고 있다.[11] 중요한 것은 고고학적 표징으로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지, 실제로 역사상에서도 비지국 집단이 해체되어 신라의 지방관이 파견되고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흔히 착각하기 쉬운데, 바꾸어 말하면 고고학적으로 완벽하게 신라의 간접 지배화가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어도 비지국이라는 명패는 그대로 남아있고, 그 수장들이 신라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활동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지국의 소멸에 대한 명확한 역사학적 자료가 없기 때문에 실제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는 이상 이를 완벽하게 증명할 방법이 없다. 물론 고고학의 이론과 체계라는 것은 엄격한 역사학적, 인류학적, 사회학적 연구 위에 엄격하게 논의되고 통계학적과 형식학적으로 논증된 물질 자료 패턴을 올려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비지국이라는 국명이 남아있더라도 사실상 반속국화된 형태로 형태만 남아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