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연
公孫淵
(? ~ 238)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요동 공손씨 정권의 넷째이자 마지막 수장이며 랴오둥 연나라의 왕. 자는 문의(文懿). 공손도의 손자, 공손강의 차남.
2. 정사
공손씨는 공손연의 할아버지 공손도 때부터 대대로 요동 일대를 점거하고 있었다. 공손연의 아버지 공손강은 조조가 원소의 잔존세력을 소탕할 때 원희와 원상을 참수해 화평을 청했다.
221년에 아버지 공손강이 사망하자 나이가 어린 까닭으로 숙부 공손공이 뒤를 이었지만 228년에 공손공을 내쫓고 스스로 요동 지방의 군주로 군림했다. 이때 조예는 그에게 거기장군 자리를 내렸다.
232년 오의 손권이 연(燕)왕의 작위와 구석의 지위를 내려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장미와 허안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은 사신이 가지고 온 보물을 탐내었고 무엇보다 애초에 손권과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어서 두 사신들을 목베고 보물을 빼앗았다. 이렇게 손권의 뒤통수를 후려갈겼고 이 때 참수한 오나라 사신들의 목을 위나라에 진상해 낙랑공이란 작위를 수여받았다.[1] 그러나 위나라는 공손연에게 계속 의심을 품었고 결국 237년 관구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했다.
위나라를 격퇴해 낸 공손연은 스스로 연호를 소한(素漢)으로 하고 연왕을 자칭해 자립까지 선언하게 된다. 이때 말리는 가범과 윤직을 처형했는데, 공손연의 반란 소식이 위나라 조정에 알려지자 위나라의 수도인 낙양에 인질로 가 있던 그의 형 공손황은 목숨을 잃고 만다. 사실 공손황은 공손연의 반란 이전부터 계속 모반의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볼모의 특성 상[2]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위나라 입장에서는 공손황의 의도가 후계구도를 염두에 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확실치도 않은 상황이라 살려주지 못할 이유가 많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공손연은 238년 사마의가 이끄는 위나라의 군대[3] 와 고구려 동천왕이 파견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공손연은 크게 두려워하여 살기 위해서 상국 왕건(王建)과 어사대부 유보(柳甫)를 보내 포위를 풀어줄 것과 면박(面縛)[4] 하여 항복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왕건과 유보의 목숨을 빼앗고는 곧바로 공손연에게 격문을 보냈다.
이에 공손연은 시중 위연(衛演)을 보내 날짜를 정해 인질을 보낼 것이라고 청했다. 이때 사마의는 그 유명한 명언을 위연에게 말하며 거절한다.옛날 초나라(楚)와 정나라(鄭)는 열국이었으나, 정백[5]
은 웃통을 벗고 양(羊)을 끌고 나와 초왕을 영접했다.[6] 나는 왕의 신하로 상공(上公)인데 왕건 등이 내게 포위를 풀고 물러나라고 하니 어찌 초나라와 정나라의 전례에 비기겠는가! 두 사람은 늙고 혼미하여 필시 말을 전하는데 실수가 있었을 터이므로 이미 죽였다. 만약 더 할 말이 있다면 젊고 명쾌하게 결단할 수 있는 자를 보내도록 하라.
이에 절망한 공손연은 남쪽의 포위를 공격하여 돌파하니 사마의는 추격하여 공손연과 그 아들 공손수를 잡아 참수했다. 그리고 사마의는 수도 양평성(襄平城)[7] 에 들어간 후 두 개의 표식을 세워 젊은이와 늙은이를 구분했는데, 15세 이상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이고 경관(京觀)[8] 을 만들었다. 그리고 공경(公卿) 이하 관원을 모두 주살하고 장군 필성(畢盛) 등 2천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이때 공손씨는 멸족되는 비운을 맞는다.'''군사로 맞설 때는 중요한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싸울 수 있을 때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싸울 수 없을 때는 마땅히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마땅히 달아나야 한다. 나머지 두 가지는 항복 아니면 죽음뿐이다'''. 너희들은 스스로 면박하려 하지 않으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일 터, 인질을 보낼 필요는 없다('''軍事大要有五, 能戰當戰, 不能戰當守, 不能守當走, 餘二事惟有降與死耳.''' 汝不肯面縛, 此為決就死也, 不須送任).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전개 과정이 비슷하지만 사마의가 인질 받기를 거절할 때 말한 대사가, "군사로 맞설 때는 중요한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싸울 수 있을 때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싸울 수 없을 때는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달아나야 하고, '''달아날 수 없을 때는 항복해야 되고, 항복할 수 없을 때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軍事大要有五, 能戰當戰, 不能戰當守, 不能守當走, '''不能走當降, 不能降當死耳''')로 약간 달라졌다.
4. 미디어 믹스
4.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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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하게나마 마지막 60권에서 등장한다. 반란을 일으켰는데 곧 진압된 잡몹처럼 묘사되었다.
4.2. 삼국지 시리즈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역사대로 의리 바닥에 야망이 최고치다.[9] 그래서 과거 공손씨 세력이 따로 편성되지 않고 위나라 소속으로 양평 태수를 맡았을 경우 툭하면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이벤트가 많은 시리즈에서는 전용 이벤트까지 있다. 삼국지 2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2에서 시나리오 6을 플레이 하면 100% 반기를 들고 독립한다.
삼국지 3에서의 능력치는 무력72/지력65/정치60/매력74, 육전73/해전71로 그나마 좋은 능력치이다. 다만 야망이 최고이라서 양평이나 북평에서 거병을 자주 한다. 그러니 위나라로 플레이할 때는 가능한다면 공손씨 일족들을 전부 낙양으로 소환시키자.
삼국지 5에서는 무력치가 '''84'''이다.
삼국지 5를 제외한 모든 시리즈에서는 공손연의 능력치며 세력이며 모든 게 영 좋지 않지만, 그나마 휘하에 가범, 윤직, 양조, 비연이 있어서 공손도, 공손강, 공손공보다는 할 만하다. 물론 이 넷의 능력치가 딱히 좋진 않지만 말이다.
삼국지 6에서는 경험치 최대일 경우 통솔력74/무력79/지력64/정치22/매력79이다. 237년 1~6월 사이 반란을 일으켜 연왕으로 독립하는 이벤트가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발동 조건은 다음과 같다. 1.낙양과 양평을 동시에 지배하는 군웅이 있으며, 해당 세력의 본부가 양평에 위치하지 않을 것. 2. 공손연이 가범, 비요, 양조, 윤직과 함께 양평에 주둔하고 있을 것. 이벤트가 발동되면 가범과 윤직은 독립에 반대하다 참수된다. 일부러 보려고 들면 어렵지는 않으나 자연적으로는 상당히 보기 힘든 이벤트. 234년 오장원에 지는 별 시나리오로 시작하면 해당 조건이 예쁘게 충족되어 있으니 그대로 3년만 버티면 되지만, AI가 위나라를 조작할 경우 저 다섯명을 양평에 그대로 내버려두는 경우가 드물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64/무력71/지력55/정치력39. 돌파, 기사, 제사, 혼란, 매도 등 1단계 병법만 있어서 좋다고 하긴 좀 그런 장수. 거기다가 숨겨진 의리 수치에서도 아주 독보적인 수치를 기록하는데 '''의리0에 야망15이다.''' 천하의 여포도 야망이 13으로 설정되어있는데 그와중에 완벽하게 0과15로 개막장을 그리는 어떤 의미로는 제일 무서운 장수. 어지간하면 등용하지 않는게 좋다. 충성도 관리가 안되는 상황에서는 백하팔인보다 더 암적인 존재로 재야나 포로상태에서 등용하더라도 오자마자 배신하거나 독립하는 골때리는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 참고로 삼국지9에서 의리0에 야망15로 설정되어 있는 장수는 공손연을 포함해서 딱 4명이다. 나머지 3명은 원술, 동탁, 손침. 나름대로 공손연을 대단한 인재로 평가해준 셈이다. 물론 별로 안 좋은 의미로. PK에서는 그래도 장수발탁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1단계 병법으로라도 고루 적성이 분포된 공손연이 직접 발탁장수를 가르치면 나름 쏠쏠한 성장은 가능하다. 물론 공손연의 의리가 저모양이므로 공손연이 장수발탁하면 잘키워도 이간질 때문에 못쓴다는게 함정.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7/ 무력 69/ 지력 58/ 정치력 50/ 매력 51로 매력이 바닥인 공손도보다 능력치 합은 2 높지만 공손강에게는 많이 밀린다. 특기는 기술, 돌격, 반목, 혼란, 회복. 총 5개다.
삼국지 12에서의 능력치는 전작들과 비슷해 여전히 잉여하나 절도지책을 보유한 채 시작한다. 군사가 없어 군사 아이템을 달아줘야 하나, 절도지책을 보유한 장수가 몇 안된다는 사실[10] 을 기억하자. 사실 절도지책이라도 없으면 공손연 세력으로 플레이하기에는 너무나도 하드코어해서 준 듯. 일러스트는 말을 탄 채 음흉한 얼굴로 웃어대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5/ 무력 70/ 지력 60/ 정치력 35. 특기는 순찰 1, 신속 2에 전수특기는 신속으로 전법은 창병공격진이다. 특이한 점은 PK판에서 고유위명인 '연왕'을 가지고 있다. 엄백호의 동오덕왕과 같은 천하명장을 바탕으로 한 위명이고, 군령은 '면종복배'로 외교초기교섭률↑・순찰성과↑↑・도시내구↑↑의 효과를 갖고 있다. 특기가 너무 잉여이므로 PK로 한다면 훈련, 위풍, 분전, 연전, 견수, 호걸 특기 정도를 추가해주고 전수특기는 호걸로, 전법도 돌격지휘로 변경해주자.
다만 후반기 시나리오인 오로침공과 출사표에서 공손연은 둘 다 공손공의 휘하장수로 있는 상태라 시작부터 군주로 플레이할 기회는 없지만, 연왕 위명은 공손씨 일족 모두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왕 위명을 써보고 싶다면 공손도나 공손강으로 하면 된다.
삼국지 14에서는 일러스트가 오른손으로 턱을 잡고 있으면서 음흉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으로 변경되었는데 아마도 연왕이 될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한 이미지로 보인다. 능력치는 통솔 67, 무력 70, 지력 60, 정치 42, 매력 50으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2, 정치력이 7 상승했다. 개성은 사역, 징세, 낭비, 오만, 탐욕, 주의는 아도, 정책은 묵수연구 Lv 4, 진형은 방원, 학익, 장사, 전법은 업화, 도발, 매성, 시람,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이 시리즈부터 형 공손황과 부하 장수인 한기#s-5가 추가되어서 쓸만해졌다.
4.3. 반삼국지
아버지 공손강이 원희와 원상에게 했던 것처럼 요동으로 쫓겨온 조비 일가가 자살하자 그 목을 베어 한군에게 보내고 요동 영유권을 인정받는다. 제갈각과 더불어 양대 마개조 사례이다.
4.4.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6부터 클론 무장으로 등장. 첫 스테이지부터 사마의에게 털린다. 이후 꾸준히 진나라 시나리오에서 공손연의 난을 주도하고 신나게 박살나는걸로 찬조 출연중. 전술한 5가지 원칙은 빠지지 않고 나와 사마의가 공손연을 깔 때 쓴다. 거기다가 목소리도 어째 멍청하게 연기해서 더더욱 바보같아 보인다.
4.5. 삼국전투기
영화 아포칼립스 나우(지옥의 묵시록)의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 역)으로 패러디되었다. 아마 이민족들 사이에서 군주로 지냈다는 점에서 채택된 듯. 작중에서 '공포…공포'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갈량 사후 이야기의 시초를 여는 인물인데, 사마의는 공손연의 상책은 도망가는 것이지만 공손연은 요수에서 막다 양평으로 들어가는 최악의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물론 공손연은 대판 깨졌다. 여기서 작가는 '''클래스의 차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4.6. 삵의 발톱
공손공이 실력도 없이 요동을 다스리게 되었다면서 그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는데, 고구려 출신의 주율이 위나라의 사신을 사칭하고 요동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에 속아서 성을 빠져 나갔다가 응암성을 빼앗겼으며, 이로 인해 요동군과 주율의 용병단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외길로 응암성을 공격하려고 했다가 주율이 부하들을 시켜 전면과 후면에서 돌을 떨어뜨려 길이 막히게 된다.
그래도 주율이 있는 곳까지 성공했지만 공손연이 병사들을 종처럼 대했기에 병사들은 모두 공손연을 따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주율이 요동의 수장 자리를 주는 대신에 응암성을 넘겨줄 것을 제안하자 이를 받아들여 주율이 응암성을 가지는 대신 공손연은 공손공을 죽이고 요동의 수장이 된다.
주율이 고구려에서 공작을 펼친 끝에 고구려에서 근위대장이 되었는데, 중원에 진출하기 위해 밀우, 유유 등이 사신으로 파견되어 요동 세력에 지원을 받으려고 할 때 등장하는데, 이 때 유유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주율이 한 것에 대해 의심을 품고 밀서를 불태웠다. 이로 인해 밀서 없이 도움을 요청하자 그들을 투옥하면서 밀우, 유유와 함께 온 주율의 부하인 우치에게 고구려의 옥새가 찍힌 밀서를 가져온다면 고구려의 편이 되겠다고 한다.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이 벌어지려고 할 때 둘 사이에서 제안이 오자 양 측 모두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면서 양평성에서 고구려군을 없애고 위나라를 도우려고 했는데, 동천왕이 찾아오자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도리어 발각되어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붙잡히고 참수되었다.
5. 관련 항목
[1] 이때 오의 사절로서 파견되었던 주하는 살아서 배를 타고 돌아가려 했지만, 풍랑을 만나 좌초되어 청주의 해안까지 떠내려온다. 이를 예측한 전예가 산둥 반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주하를 사로잡는다. 그나마 살아돌아온 일행이 위에 붙잡혔으니 오가 공손연에 파견한 사절들은 모두 좋은 꼴을 보지 못한 셈이다.[2] 본보기로 보여야 하는 측면도 있다. 안 죽이면 볼모를 잡아봐야 씨알도 안 먹히니까.[3] 연의에서 사마의는 '''가는 데 4개월, 공략하는 데 4개월, 오는 데 4개월로 총 1년이 걸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했고, 실제로 이루어졌다.[4] 양손을 등 뒤로 돌려 결박하고 얼굴을 들게 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5] 당시 정나라 군주였던 정나라 양공을 말한다. 정나라 군주는 오등작 중에 백작이었다.[6] 초나라 장왕이 침공해오자 정나라 양공은 웃통을 벗고 양을 끌고 나와 항복했다. 웃통을 벗는 것은 항복, 양을 끌고 나오는 것은 하인이 되어 주인을 섬기겠다는 뜻으로 결국 항복 의식이었다. 훗날 서진 민제 사마업도 전조의 유총에게 항복하면서 이 의식을 행하는데, 이 두 의식을 행한 것은 물론이고 구슬(시신을 염할 때 입에 물리던 옥구슬)을 입에 물기까지 했다.[7] 후에 고구려의 요동성, 현재의 중국 랴오닝 성 랴오양 시.[8] 사람을 죽이고 해골을 쌓아 흙으로 덮어 산을 이룬 것으로, 고대의 전승기념비이다. 훗날 이 기록을 접한 동진의 명제는 '저런 짓을 했으니 서진이 금방 망했지.'라고 디스한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에 '저런 짓'을 서진만 한게 아니어서.. 고구려도 경관을 만든적이 있다.[9] 다만 실제 행적으로 봤을 때 공손연은 야심가라기보다는 어설픈 기회주의자라는 주장도 있다. 의리가 바닥인 건 몰라도 야망이 최고인 건 고증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10] 고대무장을 제외하면 법정, 사마의, 가후, 여몽, 그리고 잠재로 가진 공손연, 단 5명이 보유한다. 고대무장은 악의와 여상이 보유한다.